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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처럼 다가 오는 것이 사랑만은 아닐게다.모든 것으로 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선배가 파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덕분에 도망갈 곳?(?)이 있었다.무작정 떠났던 그때 오정희의 소설 '새' 를 만났다. 비행기 안에서 읽겠다며 골랐던 것으로 ,작가에 대한 안몫 보다(그때는 거의 책을 읽지 않던 때였다.) 길지 않은 분량이란 것이 크게 작용 했던 것 같다.미뤄 짐작해 보면,자유로이 날 수 있는 새가 무한정 부러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내게는 퍽 고마운 책으로 기억이 되고 있음에도 줄거리에 대한 기억은 흐리하다는 것.어쩌면 그때는 책 속 줄거리 보다,소설 속 인물에 나를 한없이 투영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믿고 싶은대로 느끼고 싶은대로 그렇게 철저하게 오독을 했을 터.해서 시간이 흘러 언제 다시 읽을 기회가 오리라 생각하며 늘 책장 앞자리에 자리 하고 있던 '새'! 그때 만큼 자유를 갈망(?)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자연스럽게 손이 닿았다.이제는 다시 읽어야 할 시간이 온 듯 한 기운이 퍼지면서...^^ 책장을 여는 순간,주마등처럼 지나간 과거의 시간이 다시 내게로 찾아 온 듯한 경험도 잠시. 책장을 넘겨 가며,내가 얻었던 위안은 무엇이였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당시에 나는 말랑말랑한 위로보다 조금은 센 강공(?)의 위로가 필요했던 거였구나 싶다.아픔의 순간 더 슬픈 노래를 찾아 들었던 것처럼.힘겹게 살수 밖에 없었던 남매의 삶이 당시에 내겐 오롯하게 들어오지 못했던 것 같다.이정도로 센 소설인줄 몰랐다.
이렇게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라고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을게다.놀라운 건 소설을 읽을 당시 보다 지금,소설 속 아이들의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였다는 거. 참 아리러니하다. 온갖 풍파로 시달리는 사람들만 소설속에 모아 놓은 것처럼 읽는 내내 힘겨웠다.내가 힘들었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이들의 아픔이 보인다.그런데 제목은 고맙게도 희망의 기운이 전해지는 '새'다. 그런데 힘들다고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삶 보다는 무어라도 부여잡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그것이 또 우리의 인생 아닐까? 남매의 아버지에게 새엄마는 '새'였을 게다.주인 할머니에게도 아픈 딸이긴 하지만 딸이 '새'였을 게다. 정말 힘든 건 내가 부여 잡을 '새'와 같은 존재가 없을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새장을 어디다 놓았지? 새는 어디로 갔지? 사방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해보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한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어둠은 짙어졌다. 이 철길을 따라가면 세상 어느 곳으로라도 갈 수 있다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아버지도 이 길로 떠났을 것이다." /153
처음 읽었던 그때는'새'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 보다 나 만큼 힘든 사람이 세상에는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두 번째로 읽게 된 지금의 느낌도 다르지 않았다.사람들이 파랑새를 찾는 것이 그저 뜬구름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저 뜬구름을 잡기 위함이 아니였음을.
덧붙임.개정판이 출간 되었지만,나는 손떼 묻은 오래전 솔뫼책방에서 구입했던 책으로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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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단에서 꽤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오정희 선생님의 책을 이제야 만났다. 한국문학을 좋아한다는 말도 다 뻥이라고 해도 정말 할 말이 없다. 웃긴 건, 80년대, 90년대에 한국문학 책을 많이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땐 선생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 책방은 물론이고, 도서관도 헌책방도 꽤 많이 돌아다닌 시절이었는데도 어디서도 그 이름을 본 기억이 없다. 이 책도 나온지 십년이 지났는데, 최근에야 이름을 들었으니 말이다.
모두가 못 살고 모두가 힘든 시절, 남매는 엄마가 집을 나가자 아버지 손에 이끌려 외가댁도 전전하고 큰 집도 전전한다. 친척들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구박을 받고 언어폭력에 시달려도, 남매는 굶지 않고 그럭저럭 살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집도 얻어놓았고 아이들을 길러줄 새엄마도 올 거라며 아이들을 데려간다. 여러 집이 세 들어 사는 곳에 방 한 칸에 연탄, 석유곤로를 사용해도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을 수 있고 학교도 다닌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인 새엄마는 어느 날, 아버지가 공사장에 간 사이 사라져버린다. 아버지는 새엄마를 잡아오겠다고 떠나고 아이들만 남게 된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아이들만의 나락으로 떨어져간다. 나름 성숙한 누이라고 허약한 남동생에게 밥도 해먹이며 엄마 노릇도 하지만 역부족이다. 세상이란 아이들만이 헤쳐 나가기엔 너무 힘겨운 곳이고 또 아이들이 짐작하기 어려운 변수들이 부지기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은 안집할머니의 말씀처럼 그런지도 모르지만.
‘인생살이가 소꿉놀이 같아. 한바탕 살림 늘어놓고 재미나게 살다 보면 어느새 날이 저물어오지. 그러면 제각각 놀던 것 그대로 그 자리에 놓아두고 제집으로 가버리는 거야. 사람 한평생이 꼭 그래.’
어려웠던 시대상과 불완전한 가정, 또한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 등이 소소한 일상과 함께 삶의 이면을 보여준다. 인생의 쓰디쓴 모습이랄까.
우주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되라고 우미라 하고, 우주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되라고 우일이라 이름 지어진 남매가 다 비워내고 새가 되는 이야기라고 하면 좀 억지일까. 아니, 어쩌면 그때나 지금이나 인생의 비극, 그 이유는 단 하나인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돈을 벌지 못해 가난해지면 여자들을 때리고 아이들을 내던진다.’ 우미의 엄마도 처음에 집을 나간 건 아버지한테 맞아서였다. 아버지가 새 살림 장만을 하느라 장에서 돈을 쓰자, 어린 나이에도 아이들은 ‘아버지가 지갑을 열 때마다 안타깝게 줄어드는 돈을 보며’ 한숨을 쉰다.
‘이 세상에 한 번 생겨난 것은 없어지는 법이 아니라고, 먼 옛날의 별빛을 이제사 우리가 보는 것처럼 모든 있었던 것, 지나간 자취는 아주 훗날에라도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연숙아줌마는 말했었다.’ 우미, 우일이라 이름지어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가 왜 이제사 우미에게 들리는가. 우일이 따라 다 비우고 새가 되려는 찰나에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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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일이다. 뭔가 하나 좋은 책을 발견해서 기분좋게 서평을 쓰고나면 곧이어, 네가 나를 잊었느냐? 면서 나타나주시는.
읽히지 못한 책들은 책꽂이에 꽂히는 영예를 얻지 못한다. 그저 책상과 바닥에 수북이 쌓일 뿐이다. 즉,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읽히지 못하면 영원히 책꽂이에 꽂힐수 없는 만년 2군인 셈이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가끔 내가 자는 새벽동안 책들끼리 투닥거리며 싸우는 소리를 듣곤한다. 그들의 생각은 아무래도 맨 위에 놓이는 것이 하루라도 빨리 1군에 합류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자기들 나름대로 주장하는 바에도 각각의 타당성은 있다. 내 방에 입성한 날을 기준으로 고참임을 주장하는 책이 있는 가 하면, 사회적 명성으로 자신이 맨 위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친구들도 있다. 가격으로 들이미는 친구도 있으며 두께로 위협하는 친구도 있다. 그러나 난, 그들 의견에는 아랑곳없이 손에 집히는 대로 읽는다. 다시말해 항상 위에 것을 집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때로는 중간에서 때로는 맨 밑에서 꺼내 올리기도 한다. 입성한 경력이 좀 된 책들은 이제 그런 나의 특성을 간파했는지 좀 조용한데, 어제 들어 온 책들은 여전히 시끄럽다.
책 하나를 칭찬하기가 무섭다 이런 경우는. 바로 요전에 조경란의 [식빵굽는 시간]에 매혹당했다고 서평을 썼다. 그리고 난 후 손에 잡힌 책이 오정희의 [새]였다. 앞서 말했듯 의도한 바는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이 책을 읽고 난 느낌은 이랬다. 어때? 초고수라는 게 이제 뭔지 알겠지? 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오정희 작가의 작품은 [불의 강]을 처음 접했다. 현란한 문장과 기괴한 분위기에 날이 선 모양새여서 굉장히 독특한 작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일반 글 잘쓰는 작가와는 사뭇 뭔가가 다른, 일반 작가와는 다른 세계에 속한 작가라는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불의 강]은 그 내용면에 있어 화악!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했었다. 그저, 오우, 뭔가 대단한데 이 아줌마, 정도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 책, [새]는 그 [불의 강]보다 열 배는 흡입력이 뛰어나다. 첫장을 펴고 끝날 때 까지 내려놓지 못했다. 솔직히 너무 감동을 남발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만 없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 아줌마, 뭐랄까 쫌 천재같아. 이제까지 본 한국 소설중에 문장만 보자면 단독 대상이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사람의 손을 거쳐 탄생될수 있는가 하는 장면들이 줄을 이어있다. 책보면서, 히야, 나 원 참, 이라며 감탄을 하면서 보기란 게 쉽지않은데, 이 책은 정말 강력하다. 한 두군데가 좋은 정도라면 프로 작가니까 당연히 이정도는 되어야지, 생각을 할테고, 책의 30%만 넘어가도 역시, 라는 생각을 갖게 하며 50%만 넘어가면 완전 고수로군, 이란 생각을 갖게하는데 이 작품은 거의 80%가 넘는 듯 싶다. 그러니까 뭐랄까 이런 경지의 작가는 타고나야하는 거다, 라는 걸 보여주는 듯 싶다. 조경란[식빵굽는 시간]은 그 분위기가 좋았고, 그런 분위기를 창조해내는 능력면에 있어서 굉장하다고 느꼈었는데, 이 작품은 모든 면에서 그렇다. 이런 정도의 문장은 타고나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갖지 못할 것이라 생각된다. 일단 사물을 보는 눈 자체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뇌 구조를 완전히 바꾸지 않는 이상 이 작품과 같은 표현들은 뽑아 낼 수 없으리라 보여진다. 작가 지망생 분들은 다소 억울할지 모르겠지만, 독자의 눈으로 보기에 이정도는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수려한 문장은 많다. 그러나 수려하면서도 꾸미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움을 지닌 문장은 드물다. 묘사가 강렬한 작가들은 대체로 처음에는 우와, 라는 생각이 들다가 이내 사람을 좀 지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 작품은 태생 자체가 귀족이다. 다시말해, 대부분의 수려한 문체들은 귀족사회에 다가가기 위해 엄청난 수련을 한 것 처럼 보이는 반면, 이 작품의 문체는 타고나기를 귀족으로 타고나서 사람자체가 그런 것처럼 문장 자체가 그렇다. 일상용어처럼 구사하는 자연스러움 속에서 흠칫 흠칫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이유 때문에 유전자 자체가 그렇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문장만 그런가? 오정희 작가 특유한 기묘함 역시 강렬하게 서려있다. 여운이라 부를 수 있는 정도의 것을 넘어서 있다. 사람의 감정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거야. 알아 듣겠어?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럼 결국 나는 네.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솔직히 이 작품에 대해 평론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은 아직까지 대한민국에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접한 한국문학의 범주에서 보자면 말이다. 완. 벽. 하. 다. 소설이 아니라 문학을 보았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작품.
많진 않지만 지금까지 본 한국 문학의 대표를 꼽으라면 이렇다. 이야기 대왕- 천명관의 [고래] 묵직한 감동의 대왕- 김훈의 [칼의 노래]...솔직히 나머지 김훈의 작품들은 다 별로였다. 너무 수려한 문장을 수련해서 사람 지치게 만드는 대표적인 작가다. 김훈작가의 팬들이 많은 걸로 아는데 내가 이런 소리를 했다고 해서 내게 필리핀 암살자 따위를 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그 암살자에게 2,500원 더 얹어서 돌려 보내는 수가 있다. 완벽한 작품- 오정희의 [새] -인간이 노력해서 얻게 될 필력이 분명 아님.
너무 필이 간 거 아냐? 라고 묻는다면, 그럴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또 다른 좋은 책을 발견하면 이렇게 호들갑을 떨 것이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박우미" 12세 이 소녀의 강렬한 포스는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
이 책은 눈으로 쓰윽 보면 안된다. 하나 하나 씹어 삼키듯이. 그럴만한 뭔가가 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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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소설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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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오정희의 소설은 '동경'이라는 딱 한 편의 단편에 불과하지만 그 한 편의 소설은 내 머리 속에 확실히 각인되어 있다. 그 미칠듯한 나른함과 이유 모를 불쾌. 그리고 냄새. 그랬다. 오정희의 소설에서는 뭔가 냄새가 났다.
이 짧은 소설 '새'도 마찬가지. 이 소설에서도 냄새가 났다. 장면장면마다 나를 지배한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냄새였다. 작가가 특별히 냄새에 대한 표현을 많이 사용하지 않음에도,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내 주변의 기류는 묘한 냄새를 형성했다.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끄자 갑자기 방안이 조용해졌다. 문을 막아선 아버지의 땅땅한 몸피와 검게 번들대는 가죽잠바에 묻어온 쇳내 나는 찬 공기는 스산히 저무는 오후, 여느 날과 다름없는, 늦은 점심상의 묵은 김치 냄새와 댓진내 배인 방안 정경을 나루하게 가라앉히며 단번에 방을 가득 채웠다.
우일이와 나는 자주 다락에 올라가 놀았다. 안방의 아랫목 쪽 벽 중간쯤 거의 우일이의 키높이쯤 되는 곳에 두 개의 미닫이로 된 벽장문이 달려 있고 그 문을 열면 다섯 개의 계단, 그 계단의 끝에 어슴푸레 떠 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묵은 잡동사니들이 가득 들어찬 다락의 어둑신함과 그 안에 서린 매캐하고 몽롱한 냄새, 모든 오래된 것들의 안도감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은희경의 '새의 노래'와 비교하게 됐다. 제목도 그렇고 아이의 시점이라는 것도 그럴만 했으니까. 사실 나는 은희경의 그 소설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너무나 영악한 아이,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아이에게서 시점과 시제의 혼란을 느꼈고, 결국 그 혼란이 아이의 시점이라는 보잘 것 없는 면죄부를 무리하게 내세우는 작가의 '비겁함'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오정희의 '새'는 그것이 '아이의 시점'이라는 것을 무리하게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형언하기 어려운 좌절감을 깊이 맛보게 된다.
우일이가 변해가는 것은 개에게 물린 탓이다. 우리는 개를 먹어서 개처럼 되어간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이 가난(물론 이 소설은 '가난하기 때문에 불행하다'라는 단순한 명제와는 거리가 있다.), 삶의 무게가 70년대, 늦어도 80년대의 그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96년에 나왔고, 이 소설의 주인공은 비행기가 추락하여 많은 이들이 죽은 해에 태어난 12살의 여자 아이였음을 소설을 거의 다 읽을 때 쯤에서야 알 수 있었다. 결국 나보다 더 늦게 태어난, 이 소녀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나보다 더 어릴 것이다. 나는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의 이야기를 읽으며 엄습하는 무게가 내가 경험할 수 없었던 과거의 것일 거라고 자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새가 되었을 그 소녀에게, 나의 이 비겁함을 저 하늘 위, 새의 눈으로 마음껏 비웃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그녀가 새가 되지 않았을 경우를 차마 상상하지 못하는 더 큰 비겁함은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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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희의 ''새''를 읽었다. 특별히 예정에 있던 독서는 아니었고 단지 학교 숙제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학생들에게는 읽으라고 하고 선생은 모른다는 것은 터무니없게 생각되었기에 읽었다. 예상 외로 문장이 감칠맛난다.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이 있었을까 부럽고 기대되며 동시에 장인다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역시 소설이란 끊임없는 훈련의 산물임에 분명하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주제는 마음에 들지 않아 불안하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라는 부류에 들어가는 소설인 듯 싶은데, 특별한 ''성장''이 보이지 않는다. 소녀는 오히려 처음부터 너무 늙은 아이로 등장해서 시종일관 늙었다. 늙은 소녀의 자기모멸 또는 인생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소녀의 무기력함 등이 너무 극적으로 전개된다. 더구나 제목은 또 뭔가? ''새''라니? 주인공은 자유롭지 못하다.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나이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너무 일찍 알아버린 세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새장''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렇게 자주 이씨 아저씨의 새가 소재로 출현한 것일까? 우일이는 죽은새처럼 죽고 우미는 새장 속 새처럼 암담한 인생일 뿐이다. 희망도 꿈도 아름다움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소설이 가진 힘은 무엇인가? 현실이 이러하다는 것을 잔혹하게 드러내어 독자들에게 처절한 비극을 전개하고 싶은 것인가? 그러나 이 소설은 완전한 비극도 되지 못한다. 우미는 너무 아는게 많은 늙은 소녀이기 때문에 그렇다. 소설이 가진 힘은 어디에 있을까? 현실인식? 현실비판? 문제제기? 아름다운 문체의 감상? 무엇하나 뜨거운 것을 보여주지 못한 소설에 문장이 아까울 뿐이다. 아쉽다. |
| 남매를 온전히 보듬어 줄 수 있는 울타리가 조금씩 허물어집니다. 울타리는 엄마였고 아버지였습니다. 새로 온 아버지의 여자도 떠나고 주변 사람들마저 각자의 사정에 떠나갔습니다. 세상에 흔적을 남기려면 살아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생각과 행동은 움츠러들고 때로는 앙칼집니다. 모든 날이 기차가 오는 철길위에 서 있는 동물처럼 위태롭습니다.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은 흐려져 가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원가족 관계에서 생긴 사건들 때문에 고통이 전반적으로 생활을 지배합니다. 외부 세계는 피상적으로 곁가지일 뿐, 의식은 내면의 세계로 침잠합니다. 울타리 밖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저무는 하늘이 더 어두워지겠지만 희망을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미가 사람들의 관심을 무시하는 성격적 장애를 갖지 않기를 바라며 건강한 사람으로서 성장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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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19일> 가정 폭력으로 집을 나간 엄마를 원망할 틈도 없이 박우미와 남동생 박우일은 외할머니 댁에 맡겨진다. 외할머니가 풍으로 쓰러진 뒤 다시 외삼촌 댁, 큰아버지 댁을 전전하던 남매는 공사장에서 큰돈을 벌어온 아버지가 얻은 셋방에서 비로소 안정되게 살게 된다. 새엄마로 들어온 젊고 노란파마머리의 여자도 있고 세간살이도 장만하고 텔레비전과 전화도 사들여 제법 가정 형태를 갖추게 되지만 아버지가 다시 지방에 유리로 만드는 큰 교회 공사장으로 떠난 뒤 노란파마머리 새엄마도 도망가버린다. 주말마다 오던 아버지도 발길이 뜸해지면서 남매는 서로를 의지하고 셋방살이하는 이웃들의 도움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지내게 된다.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우주소년 토토를 동경하는 우일이는 자신이 날 수 있다고 믿게 되고 옆방 총각 이씨 아저씨의 새장 속 새를 보면서 그 꿈을 더욱 키워나간다. 우미는 그런 우일에게 구구단도 외게 하고 숙제도 시키고 밥도 해주며 엄마 노릇, 선생 노릇, 누나 노릇으로 가정을 지켜나가려고 애쓴다.
하지만 열두살 열살의 어린 남매에게마저도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혼자 서는 법도 익히지 못한 남매에게 혼자 나는 법까지 배워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이 세상인 것이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힘겨워지기 시작하고 셋방 사는 이웃들에게도 악재들이 겹쳐 전체적으로 음울한 기운이 감돌게 된다.
우일은 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혼자 나는 법을 연습하려고 하지만 늘 발목을 삐고 다치기가 일쑤다. 결국은 이층에서 뛰어내려 몸도 정신도 이상하게 되어버린 우일은 밤낮없이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자리보전을 하게 되고 우미는 그런 동생을 애써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을 떠났던 사람들처럼 떠나려는 동생을 두고 이제는 자신도 떠나고 싶어서, 이제 그만 두고 싶어서 철길을 따라 어둠속을 걷던 우미는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열두살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그려진 세상이다.
남매는 치고받고 싸울때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스스로 터득한, 세상을 사는 법이다. 그런 만큼 이 책에서는 아프다거나 힘들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픔과 힘겨움 앞에서 입을 다문다. 그냥 세상을 바라보고 그러다 등을 돌린다. 창을 닫고 커튼을 치고 이불을 덮는다.
직접적으로, 대 놓고 말하지 않는 슬픔이 더 크고 더 아프게 다가온다. 치열한 세상에 살고 있다. 삶은 고달프며 우리의 존재는 슬프다. 하지만, 그래도 사는 것은 희망과 행복을 꿈꾸기 때문이다. 발목을 아무리 삐어도 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자꾸 뛰어내리는 우일이 처럼, 그렇게 다치고 깨져도 아프다 소리 하지 않고 계속 살아나가는 것이다.
딱 시집만한 책이지만 작아서 더 큰 책이었다. 이런 글을 쓰시다니요, 다시 한번 오정희 님께 박수를 보내며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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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화자가 어린 아이인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10년 전 즈음인가, '봉순이 언니'를 보고... 그 다음에 '새의 선물'을 보고 나서... 뭔가 나이에 맞지 않게 영악하고 조숙한 척하는 화자의 이야기가 조금 거슬렸다.
'새'도 화자가 12살 먹은 소녀이다.
조금 뻔~하게 진행되는 듯한 소설이 막판에 가서는 섬뜩하다. 노골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인상을 찡그리게 되고, 답답한 마음이...며칠 전의 뉴스에서 봤던 그 사건(?)마저 떠올리게 한다.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고, 팔자가 사나울 수 밖에 없다면...멀쩡한 사람도 미쳐버릴 수 밖에 없는 이세상에 내팽겨쳐버린,우미와 그 동생 우일이가 겪어내야하는 세상은 지옥과 다름 없겠다.
불편한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읽고 나니 불편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마지막 장면은...슬프고 쓸쓸한 어떤 삽화를 보는 것 처럼 여러가지 상상을 하게된다.
150페이지 정도의 짧은 소설. 오정희 작가의 작품 중 처음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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