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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의 소설은 스토리보다는 순간순간의 상념들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이 소설 "옛우물"은 마흔다섯의 생일날 아침 눈을 뜨면서 "나는 태어났을 때 사십오 년 후의 이러한 내 모습을 결코 상상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시작한다. 그 생각은 막내동생이 태어나던 날까지 이어져 생명의 탄생에 대한 신비감과 슬픔 등을 생각하게 되고, 사십오년이란 세월은 많은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게 되는 기간이란 생각에 미치게 된다.
화자인 그녀는 지금 '작은 지방도시에서, 만성적인 편두통과 임신중의 변비로 인한 치질에 시달리는 중년의 주부로 살아가고 있다. 유행하는 시와 에세이를 읽고 티브이의 뉴스를 보고 보수적인 것과 진보적인 것으로 알려진 두 가지의 일간지를 동시에 구독해 읽는 것으로 세상을 보는 창구로 삼고 잇다. 한달에 한번씩 아들의 학교 자모회에 참석하고 일주일에 두 번 장을 보고 똑같은 거리와 골목을 지나 일주일에 한 번 쑥탕에 가고 매주 목요일 재활센터에서 지체 부자유자들의 물리치료를 돕는 자원봉사의 일을 하고 있'을 만큼 상당한 문화생활을 누리는 가정주부이다. 평범한 직장인인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을 둔, 교양있는 가정주부이다.
무언가 다른게 있다면 가슴 속에 항상 '그'를 품고 살고 있다는 것 뿐. 그녀는 습관적으로 과거 '그'가 소유했던 전화번호를 누르고, 과거 '그'와 함께 앉아 있던 찻집에서 홀로 커피를 마시며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하고, '그'와 함께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서 '그'를 느끼고, 그리고 '그'가 죽고 난 후에는 모든 사람을 시체처럼 느끼게 될만큼 그녀는 '그' 속에서 산다.
'그'에 대한 집착은, 과거의 연인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지만, 희망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고, 과거 그 자체에 대한 것일 수도 있으며, 자신의 내부에 있는 어떤 믿음에 대한 것이나, 일상생활에서의 탈피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가질 수 없는 것이고, 항상 함께 한다거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그'는 저녁이면 져버리는 해일 수도 있고, 힘겹게 끌어당기다가 우물 속으로 놓쳐버린 두레박일 수도 있으며, 과거 증조할머니에게서 들은 옛우물속의 금잉어와 같은 추억의 하나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죽고난 뒤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존재의 흔적'으로 그녀는 '그'를 더욱더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그가 죽고 난 후 그녀는 더욱더 마음 속에 그를 품고 사는 것 같다.
그러나, 결국 그는 죽어버렸고, 덩달아 그녀 안의 무언가도 죽어버렸다. 옛우물의 금빛 잉어처럼 완전히 땅에 묻혀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음으로써 오히려 그녀 안에 들어온다. 그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금빛잉어의 이야기가 영원히 가슴에 남는 것처럼.
오정희라는 작가를 이해하려면 나이 오십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글을 열심히 읽고,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을 되짚어보고, 그 속마음을 헤아려 본다 하더라도 나는 오십의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사십오세의 아줌마가 주인공인 "옛우물"을 그 주인공의 마음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것조것 따져보고, 분석을 해 본다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글에 대한 이해일 뿐, 그 작가의 내면까지 이해하지는 못한 것이다. 오정희의 소설은 그 나이대에서만 가질 수 있는 깊이가 있다. 작가가 살아온 삶을 겨우 반나마 살아온 내가 그 소설의 깊이를 들먹거린다는 것이 모순이긴 하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있을 만큼의 깊이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인상깊은구절] 그가 죽고 내 안의 무엇인가가 죽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 저녁쌀을 씻다가 문득 눈을 들어 어두워지는 숲이나 낙조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물에 떨어진 한 방울 피의 사소한 풀림처럼 습관 속에 은은히 녹아 있는 그의 존재와 부재, 원근법이 모범적으로 구사된 그림의, 점점 멀어져가는 풍경의 끝, 시야 밖으로 사라진 까마득한 소실점으로 그는 존재한다. 지금의 나는 지나간 나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가끔 행복하고 가끔 불행감을 느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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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하는 동안 마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질의 깊이와 높이가 있다는 말이다. 요즘 스토리 위주로 글을 쓰는 젊은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완성도 높은 소설이다. 문장 표현과 구성이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다. 작가에 대한 존경심에, 나는 절대로 이런 소설가는 될 수 없을 거라는 이른 단념을 하게 한다. 이런 좋은 작품을 접할 수 있는 독자로서의 즐거움과 삶에서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에 만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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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지방 도시에 살고 있는, 만성 편두통과 임신 중의 변비로 인한 치질에 시달리는 '나'는 마흔다섯 살의 생일 아침에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생경함을 느낀다.
'나'는 종종 전에 살던 '작은 집'에 가 창 아래로 보이는 연당집을 말없이 내려다본다. '나'의 남편은 '작은 집'을 팔자고 주장하지만 '나'는 집을 팔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연당집의 바보가 울타리를 허물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일종의 향수를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당집은 헐리고 있다. 옛우물은 메워지고, '나'는 마흔 다섯이라는 나이를 먹었다. '나'도 언젠간 죽어갈 것이다. 인간이란 것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닌가.
헐리는 연당집을 보면서 '나'는 불안감을 느낀다. 그것은 연당집의 울타리를 허물면서 바보가 때때로 느끼는 불안감과 같은 종류의 것이리라. '나'가 한때 사랑했던 '그'의 부재로 인한 혼란과 고통을 느끼는 것도 '나' 자신이지만, '그'와의 여행에서 결국은 돌아서야 했던 것 역시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나'는 추억과 회상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나'로 인해 사라진 것, 다른 것에 의해 사라진 '나'를 끝없이 꺼내어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의 부고란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한 '나'는 가장 먼저 거울에 조각조각 균열된 자신의 얼굴을 본다. 이 행동은 일상생활에서 '그'의 죽음이 그 일상에 어떤 균열을 가져옴을 뜻한다. 이때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오랜 세월 길들여진 관습과 관행이 한순간에 깨진 얼굴이다.
'나'는 그날 이후로 거울이나 물위로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습관을 갖게 된다. 또 이미 죽어버린 '그'의 전화번호를 헛되이 누르곤 한다. 아직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나'가 어릴 적 소문으로 떠돌았던 금빛잉어는 환상의 존재였다. 그 누구보다도 금빛잉어의 존재를 믿었던 정옥은 결국 우물에 빠져죽고 그 옛 우물도 메워진다. 정옥은 현실을 떠나 금빛잉어의 세계로 간 것이다.
옛 우물의 바닥을 아무리 긁어내도 금빛잉어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거기에 있다고 믿을 뿐이었다. 결코 포착되지 않을 삶의 본질을 인간은 끝없이 희구할 수 밖에 없다. '나'가 죽어버린 '그'의 전화번호를 누르는 것처럼.
연당집이 허물어지고 '나'는 지난 과거를 부수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작은 집'에서 나와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나'는 나무를 끌어안는다. 변화를 거부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를 가슴속에서 떠나보내고, 연당집을 잊고, '작은 집'을 팔 것이다. 그저 묵묵히 살아갈 것이다. |
| 옛날 한 옛날 어느 각시가 우물에 빠뜨린 금비녀가 금빛잉어가 되어 깊은 우물 바닥에 살고 있었다. 물맛이 뒤집혀 우물을 쳐내어보니 깊은 바닥엔 누가 버린지 모를 쇠스랑과 장화짝들, 쓰레기들만 가득할 뿐 기다리던 금빛잉어는 나오지 않았다. 금빛잉어는 맑은 물이 솟아오르는 어느 구멍으로 숨어버렸을 것이라고 순하게 마음을 달랠 수 있던, 가난하지만 있는 그대로 나였던 어린 시절. 보이지 않는 존재를 부인하지 않고 금빛잉어를 계속 꿈꿀 수 있던 지나간 순수한 시절. 그 시절 금빛잉어를 꿈꾸던 주인공은 지금은 어느 지방도시에서 만성적인 편두통과 임신중의 변비로 인한 치질에 시달리는 중년의 주부로, 남편이 낚아온 생선들의 배를 가르며 잉어는 고여있는 썪은 물에 산다는 것을 알아버린 여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끔 물내리는 것을 잊어 변기 속에 천진하게 제모양을 지니고 잠겨있는 똥 외에는 어린 날을 떠올리게 할 것 없는 남편과 그대로만 살아간다면 적당한 연금과 적당한 편의를 누리며 평안한 노후를 보낼 미래가 약속되어 있는 그런 삶을 말이다. 남편의 똥에 대한 그녀의 표현이 재밌다. "천진하게 제 모양을 지니고 물에 잠겨 있는 똥을 볼때 커다란, 늙어가는 그의 속에 변치 않는 모습으로 씨앗처럼 깊이 잠들어 있는 작은 그를, 똥을 누고 나서 자신이 눈 똥을 신기하고 이상해하는 눈길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어린아이, 유년의 가난한 흔적을 본다." '옛우물'은 그런 주인공의 현재의 삶과 어린 시절, 지나간 사랑이야기, 연당집의 바보 이야기, 혼자만의 공간으로 은밀하게 사용하고 있는 서민아파트 이야기를 축으로 하여 우물처럼 깊숙한 기억의 공간에 저장되어 있던, 이제는 희미해진 익숙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는 지옥까지라도, 빛과 소리와 어둠의 끝까지라도 함께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남자 '그'가 죽은 후 가끔 그가 사용하던 번호로 아무도 받지 않는 수화음을 울려본다. 이제는 시야 밖으로 사라진 까마득한 소실점으로만 존재하는 그를 떠올리며 가끔 자신의 공인된 늙음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가 존재함으로 나도 존재하고 그가 죽음으로써 내 안의 무언가도 죽었다고 느낄 수 있는 지독한 연애의 대상이 없는 삶은 그냥 생활이다. 가끔 행복하다고 느끼고 가끔은 불행하다고 느낄 수 있는. 그리하여 꿈에서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 한없이 깊은 옛우물의 속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 본다. 우물은 무엇이든 다 담아둘 수 있는, 끝을 모르는 깊숙한 기억의 공간이다. 팔지 않고 남겨둔 값싼 서민아파트에서 그녀는 혼자만의 공간을 즐기고 가난했으나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더워지는 기억이 있던 그 때를 누렇게 변색된 벽지에서, 떨어져 내리는 부엌의 타일에서, 뒤퉁맞게 튀어나와 있는 못자욱에서 확인하곤 하는 것이다. 이 아파트 또한 속깊은 우물처럼, 희미해져가는 익숙함이 가득 고여있는 장소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아파트를 팔지 못하고 자꾸만 서성이는 게다. 아파트에서 내려다 보이는, 이백년도 넘었다는 연당집은 흐르는 세월에 재처럼 삭아가고 있는 퇴락한 기와집이다. 곧 깨끗이 헐리고 가든이 들어설 것이라는 그 연당집에 그녀는 이상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연당집의 마지막 자손이라는 바보는 집을 헐기 위해 공사를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오래된 나무울타리들을 뽑아내며 분주하다. 이백년의 세월을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우뚝하게 서 있던 연당집은 그 시간들이 잉태해 낸 지나간 기억들, 시간들, 추억들을 가득 품고 있는 하나의 상징물이다. 그 상징물을 제 손으로 헐고 있는 연당집의 후손이 바보로 묘사된 것은 피로하고 권태로운 지금의 우리가 있기 전, 순수하고 무언가에 온통 빠져들 수 있고, 마음을 줄 수 있고 홀랑 빠져버릴 수 있었던 그 기억들을 제 스스로 헐어내고 잊어가는 지금의 나, 지금의 우리에 대한 씁쓸한 자책이다. 익숙한 것들의 사라짐이 남보다 아쉬운 그녀는 옛우물 속 금빛잉어를 찾는 마음으로 그렇게 연당집의 주위를 맴돌았던 모양이다. 추억은 어쩌면 물 속에서 건져올린 돌같은 것인지 모른다고 그녀는 말한다. 물 속에서 갖가지 빛깔로 아름답던 것들도 물에서 건져지면 평범한 무늬와 결을 내보이며 삭막하게 말라가는 하나의 돌일 뿐. 돌에게 찬란한 무늬를 입히는 것은 물과 시간의 흐름일 뿐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우물과 금빛잉어의 꿈을 꾸는 그녀는 언젠가는 금빛잉어가 되었던 금비녀로, 금비녀를 빠뜨린 그 옛날의 각시로 거슬러 올라가 사라져 가는 익숙함들을 붙들고 너울너울 옛우물 속 맑은 물을 헤치고 다닐지 모르겠다. 아쉬운 기억들과 익숙함들이 휘발되어 희미해져 버리기 전 깊은 옛우물의 뚜껑을 꼬옥 덮어두어야 할지도. |
| 언젠가 작가 오정희님의 글쓰는 습관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인 있다. 워드 작업이 보편화된 요즘에도 촘촘하게 선이 그려진 대학 노트에 일차로 글을 쓴 후 여러 번 읽어보며 하나하나 문장으로 옮기신다는 것이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작가란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고 긴 겨울 밤 눈이 시리도록 촘촘하게 놓는 수처럼 가슴 한 쪽을 피로 땀땀히 꿰매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이 책에 수록된 9편의 소설도 작가 본인의 체험을 위주로 여성 작가 특유의 치밀함과 꼼꼼함으로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옛날 우물이란 말보다 훨씬 더 고아하게 느껴지는 창작집 '옛우물'은 단정하고 치밀한 오정희님의 작품 세계를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 다작을 하지 않는 작가라 한꺼번에 많은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지만 묵직한 부피에 일단 풍족함이 느껴진다. 뒷부분의 작가 연보도 재미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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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감
'오정희' 그리고 '옛 우물'. 작가의 이름은 예사로운데 그의 작품은 예사롭지가 않다. '옛 우물'이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의 작품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추억과 향수를 조금씩 끄집어낸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데 탁월한 실력을 가진 작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보면 코를 찌를 듯한 메밀꽃의 향기와 깜깜한 밤에 나그네를 밝게 비추는 달, 그리고 나그네의 물레방앗간에 얽힌 사랑 이야기 등이 우리의 후각과 시각과 정서를 자극하여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오정희는 다르다. 그녀는 향수를 느끼게 하는 데 아무런 감각적 장치를 동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작품은 매우 수월하게 쓴 듯 하다. 마치 붓 가는 대로 써 내려간 듯한 수필같이. 작품에 등장하는 화자가 거의 30-40대의 주부인 것을 보면 이 작품은 얼핏 그녀의 자전적 수필처럼 보인다.
'옛 우물' 이라는 책의 큰 제목 아래엔 '옛 우물', '저 언덕', '비어있는 들'과 같은 짧은 제목들의 단편들이 자리잡고 있다. 크게 '옛'이라는 단어 속에 '언덕'과 '들'이 들어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그녀의 짧은 이야기들은 모두 '회상'형식을 띠거나 '과거에 뿌리를 둔 현재'를 모티브로 하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옛 우물'이 우리에게 아련한 추억,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그 '옛'이라는 단어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꼭 과거의 얘기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들여다보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 작품을 읽다 보니 갑자기 윤대녕의 '하얀 배'가 생각났다. '하얀 배'역시 특이한 제목이다. 그래서 도대체 '하얀 배'가 무엇을 뜻할까하고 궁금해하며 읽다 보면 독자는 이야기의 거의 끝 부분에 가서야 제목의 뜻을 파악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옛 우물'은 제목 전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비록 제목이 '비어있는 들'인데 들이 나오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 제목에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렇게 처음부터 독자는 '옛'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려가며 글을 읽어 굳이 감각적인 묘사를 하지 않아도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살릴 수 있다.
내가 이 작품에서 제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또 있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몰라도 그의 이야기들의 제목의 구조는 <형용사>+<명사>로 되어있다. 예를 들면, '옛 우물', '비어있는 들', '중국인 거리(중국인의 거리라는 뜻이므로)', '저 언덕'등이 그렇다. 이 구조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까?
<형용사>+<명사>의 구조를 가진 제목은 그 자체가 단순 명료하면서 독자들에게 그 제목을 한 번 더 집중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또한 <형용사>는 단순히 <명사>를 꾸미는 역할도 할 뿐 아니라, 그 어휘 자신이 주는 느낌까지 강하게 전달할 수 있다. 독자에게 '우물'? 어떤 '우물'일까? 라는 궁금증을 갖게 한 후 형용사의 꾸밈을 한 번 더 인식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우물을 찾아보지만 '옛'이라는 추상적인 단어까지도 인식하며 소설을 읽는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옛 우물이 있는 곳으로 가보자.
2. 살핌
오정희의 "옛 우물"은 여러 개의 단편 소설들을 묶어 놓은 모음집이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다.
우리 나라 고대 문학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연예찬'이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 그것도 작품들의 중간 중간에 얼핏 보인다. 그러나 특히 우리 나라의 정서가 깊이 담긴 것은 '옛 우물'이다.
'옛 우물'에서 화자는 30-40대의 평범해 보이는 주부이다. 그녀는 어느 날, 시장에 다녀오는 길에 한 까페에 들린다. 그 곳에는 그녀의 시선을 끄는 남자가 혼자 앉아 있다. 그녀는 그를 계속 힐끗거리고(여기서 이유는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다.)마침내 그녀의 시선을 의식한 그는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뒤를 쫓는다. 그는 길을 가던 도중 발작을 하고 그녀는 그가 간질환자임을 알게 된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문득 전에 살았던 집이 가고 싶어진다. 그래서 언덕을 넘어 가던 도중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있던 바보를 만난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마친 그녀는 갑자기 옛날에 그녀가 살던 동네의 옛 우물이 생각난다.
그녀가 어렸을 적, 그녀가 살던 동네에는 물이 맑고 찬 우물이 하나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그 우물에 생명을 의존했고 그 우물에는 금빛 잉어가 한 마리 산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동네 계집애들은 그 곳에서 물을 길어야 했고 두레박을 그 곳에다가 떨어뜨리면 부모님께 몹시 혼이 났기 때문에 모두들 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동무 정옥이가 밤중에 물을 긷다가 우물에 빠지고 만다. 그 때문에 동네 청년들이 우물을 메우려고 그 속의 것들을 하나씩 건져낸다. 그녀와 동네 사람들은 그 곳에서 금빛 잉어가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나온 것은 고무신과 썩은 나무토막, 사금파리뿐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아마 금빛 잉어는 놀라서 숨어버렸을 거야. 그래서 지금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않은 걸 거야.'하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의 환상, 꿈 그리고 기대감을 나타낸다. 눈앞에 직접 드러난 증거가 있음에도 그 사실을 계속 부인하며 전설을 믿는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같다. 금빛 잉어는 과학 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도 아직도 우리가 믿고 싶어하고, 또 믿고 있는 것들을 암시한다. 비록 우물에 사람이 빠지는 비극적인 일이 있었다 해도 지속되는 전설. 이것은 곧 우리 마음속의 아련한 것들도 계속 살아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앞에서 등장한 간질병을 가진 남자와 바보는 그것이 바로 현실임을 암시한다. 무심코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간질병을 앓고 있는 바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럴 때 우리가 의지하게 되는 곳은 바로 고향이다. '고향'이라는 이미지는 세계 어느 나라든지 비슷하다. 우리가 비록 현실의 욕망을 위해 이 곳에 살지만 결국 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고향이라는 것. 우리는 이 사실을 안다. 또, 우리는 힘들 때마다 황금빛 추수기를 생각하고 먹기 알맞게 익은 먹음직스러운 과일들을 떠올린다. 마당 뒤편엔 빨간 고추가 널려 있고 초가 지붕 위에는 박이 탐스럽게 열린, 우리만의 보편적인 고향의 이미지는 우리가 간질병을 겪으면서 바보처럼 살아갈 때, 든든한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 주 [인상깊은구절] 추억이란 물속에서 건져낸 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물속에서 갖가지 빛깔로 아름답던 것들도 물에서 건져내면 평범한 무늬와 결을 내보이며 삭막하게 말라가는 하나의 돌일뿐. 우리가 종내 무덤속의 흰뼈로 남듯, 돌에게 찬란한 무늬를 입히는 것은 물과 시간의 흐름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종종 이즈음에도 옛날 우물과 금빛 잉어의 꿈을 꾼다. |
| 오정희의 작품을 대하면 우선적으로 느끼는 것은 당혹스러움이다. 작가는 두부모처럼 반듯한 소설의 틀 속에 작가가 주목한 세상의 단면을 일체의 군더더기도 없이 담아낸다. 그 과정에서 난잡한 인간사들은 마치 완숙한 백정의 서슬 퍼런 단도에 발려진 듯 정교하게 선택되거나 배제되어 작품의 틀 속에 담겨진다. 독자에게 남은 것은 우선, 앞서 언급했듯 당혹스러움이다. 그 당혹감과 충격의 정체에 다가서야겠다는 것이 이 리뷰가 가장 우선적으로 두고 있는 의도일 것이다. 그녀의 소설 속에, 첨예하게 충돌하는 극적 사건들은 부재한다. 그 속에는 변함없이 진행되어 가는 일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문제는 괴인듯 진부하고 범속하게 소비되어지는 시간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일상의 질서가 은폐하는 생의 불가해성, 절망감, 기괴함 등속의 이성 건너 영역의 품목을 길어올린다. 그것들을 은폐시키는 그 안정되고 범속한 질서에 작가는 격렬한 살의를 느끼고 있다. 그것들이 담아내지 못하는 생의 이면들이 진실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요소임을 작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문장들이 정교해질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인간의 잉여된 내면을 포착하기 위해 작가는 현미경적인 섬세함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이하게 잡히지 않는 그 내밀한 영역들은 작가가 들이대는 대물렌즈와 접안렌즈의 각도에 따라, 일상이 배제했던 삶의 불가해하고 원형적인 힘과 운명을 드러내게 되는데, 독자가 감지하는 그 모호한 섬뜩함은 온전하게 이해된 것으로 치부되던 삶 속에 문득 또 다른 삶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은 데에서 온 전율이다. 정돈하자면 오정희의 소설에서 모든 탐구는 '나란 누구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대한 해답 찾기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정된 질서가 상징화하지 못하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 그것은 혼란되고 그로테스크한 청춘의 에너지를 표현했던 그녀의 초기작부터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 주제의식이다. 그러나 그녀의 초기작부터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나는 '옛 우물'에서 어조가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안정의 논리에 대한 작가의 결벽적 증오감은 중산층의 일상을 서술하는 가운데서 오히려 찾아보기 어렵다. 인물들은 삶의 마디들을 구성하는 의식들의 체계를 알고 있고,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것이 적당한 수준의 재력이라는 것 역시 담담히 인정한다. 여전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존재론적 고독감이 있지만, 그들은 함께 공유했던 세월에 대한 연대감으로 완숙한 화합의 가능성을 마련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중인물은 안정된 생활의 울타리에 모조리 포용되지 않는 내밀한 공허감을 토로하는데, 그것은 작가가 그토록 치열하게 추구했던 '나란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의 모색이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작업임을 환기한다. 인물들을 추동했던 젊은 날의 암울한 열망들은 이제 유전자에 남아 전달되는 끔찍한 복제욕망으로 어린 아들에게 부과된다. 나는 기능을 잃어 멸종된 절설 속의 도도새로 자처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주인공이, 관습과 제도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두려움과 항거를 읽어내는 것은 그런 이유다. 그것은 그러한 두려움이 중년의 나이가 되어버린 그녀의 삶 속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하는데,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그 결빕과 절망의 정서를 터뜨려야 할 무엇으로 팽창시키지는 않는다. 대신 그녀에게 그것은 오히려 텅빈 공허함이 유발하는 아련한 슬픔의 감정으로 인물의 삶을 충족시킨다. 어엿한 옷차림과 반백 머리의 중후함을 지닌 신사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드는 간질에 대비하듯, 그녀는 의복과 지위의 질서를 배반하며 찾아드는 발작의 순간을 자신의 삶 속에 마련하고자 한다. 사거리에 담배를 물고 서서 자동차의 흐름을 방해하는 미친 여자. 공공질서를 파괴하다 끌려가면서도 거리에 조소를 남기는 광녀는 몰래 숨어 담배를 피우며 방화의 욕망을 불태우던 젊은 날의 그녀와 많이 닮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분열된 들끓는 에네르기로 충동적 파괴욕망을 기획했던 이전의 인물들과 달리, '옛 우물'의 그녀는 안정되게 버티어 주는 '큰 집'이란 존재를 상정하고, 작은 집에서는 텅빈 공간이 선사하는 역설적 충만감과, 황혼이 살아 있는 자에게 마련하는 성숙한 열패감, 그리고, 그 집의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연당집의 유구한 역사에 대해 성찰한다. 그것은 이미 아이를 낳은 적이 있고, 유전자가 유전자를 복제하는 그 끔찍할만큼 정확한 자연의 질서를 알고 있는, 성숙한 어머니로서의 내면이다. 당돌하고 위악스러운 아이에서부터 다산의 경험을 입증하는 노파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역사를 풍요로운 물 속에 함께 아우르고 있는 목욕탕. 그 안에서 그녀가 성찰하는 인생의 비의와, 중첩 구조의 러시아 민속인형에서 그녀가 감지한 시간의 판상비늘은, 불의 이미지로 뜨겁게 분출하던 오정희의 전작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원숙함이다. 그 원숙함은 죽음과 비밀을 함의했던 자폐의 우물을, 빛나는 금빛 잉어를 포용의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에서 절정을 이룬다.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금빛 잉어는 새색시가 빠뜨렸던 금비녀가 변신한 것이다. 금비녀는 새색시가 소유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보배 중 하나일 것이다. 금빛 잉어 속에서는, 보배를 상실했던 절망감과, 그 절망감을 거친 후에야 얻어질 수 있는 풍요로움의 이미지가 겹쳐져 휘황한 빛을 발한다. 그 휘황함이 삶의 깊이에서 길어올려진 것임은 물론이다. 초기작 '완구점 여인'부터 이 책 '옛 우물'까지. 작가의 이러한 모든 작업들은, 언어라는 비교적 성긴 도구로써는 걸러내기 어려운 삶의 미세한 간극들을 염탐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오정희의 작품을 대할 때 그녀가 그려내는 세계가 용이하게 포착되지 않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일 터이다. 언어가 지닌 그 무딤으로써, 언어를 빗겨나가는 생의 세밀함을 집어 올리고자 했던 그녀의 작품을 또다시, 더 한층 뭉뚝한 언어로 이해하고, 인터넷이라는 휑한 공간에서 풀어내고자 하는 이 리뷰 역시 어리숙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간혹은 오정희의 글이 지닌 미세함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담긴 보다 큰 영역을 간과하는 이유가 된다는 점에서, 비판의 과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미경의 렌즈를 통해, 먼길을 달려가는 사람의 역동성과 그 길의 경로를 통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현미경의 용도는 누군가가 통각하는 환부의 세포를 확대하는 데에 더 유용히 쓰일 것이기 때문이다. |
| 변비로 고생하는 내 친구는 오정희씨의 책만 가지고 화장실에 가면 쾌변을 보게 된다면서 그녀의 글을 칭찬한 적이 있다. 한마디로 그녀의 그로가 자신의 삶이 가지느 궁합이 맞다는 이야기. 이렇게 무엇이든지 자신과 마음이 맞는 궁합이 있다는 건 아니 궁합이 맞는 마음을 만난다는 건 적지 않은 행운임에 틀림이 없다. 오정희씨의 자전적인 소설집 [옛우물]은 내 친구 처럼 딱 맞는 옷처럼 편안한 궁합은 아니어도 소설을 읽는 동안은 기분 푸근하게 하는 맛은 있는 소설이다. 내게 있어서 이 소설은 맛있는 소설인 셈이다. 소설 것것에 묻어나는 정적인 요소도 그렇고 곳곳에서 인간의 냄새를 만을 수도 있다. 그것이 비록 과거의 상처이든 현재의 아픔이든 사람들은 그것들을 들춰내고 아파하기도 하고 모르는 척 외면하면서 잊어버리려고도 한다. 이 소설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주 평범하게 실려있다. 그리고 이 소설집 곳곳에 남아있는 여자들의 삶과 노인들의 삶은 너희도 나이를 먹느냐! 아니 먹고 있지 않느냐라는 외침이 있는 것 같다. 그내 나도 나이를 먹더라...뭐 이러한 삶의 이야기가 옛우물에 가득 담긴 소설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