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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김탁환의 여타 다른 작품들처럼 역사소설로 읽힌다. 이 소설의 경우 소설을 통해 복원해내는 건 서포 김만중과 그의 작품인 『구운몽』, 『사씨남정기』이다. 물론 김만중의 이야기를 되살려내는 만큼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도 등장하고 그 시대의 인물들도 다시 생명을 부여 받아 부활한다. 독자들에 따라서는 이 소설을 통해 김탁환이 주장하고자 한 핵심이 김만중의『사씨남정기』에 대한 해석이라고도 볼 수도 있겠다. 즉 인현황후를 내치고 장희빈을 총애한 숙종에 대한 김만중의 마지막 충언이라는 작가의 해석은 '잊혀진 것'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유의미하고 소설 한 편을 짓기 위해 관련된 고서와 논문들을 모두 탐독하는 부지런한 연구자인 김탁환만이 소설적 결론으로 내릴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는 김탁환이라는 고문학 전공자의 열심을 통해 우리가 살아보지 못했던 시대, 이미 잊혀졌던 시대를 다시 살아볼 수 있게 된다. 17세기 필사본을 읽던 독자들과 같은 심정을 갖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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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이면 구독하는 신문의 Book Section을 통해서 발간되어 소개되는 책들은 내게 일종의 독서 가이드 역할을 한다. 전공 영역에 관한 것이라면 따로 더 전문적인 서평지를 참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힘겨운 전공과의 투쟁 끝에 얼마간의 휴식을 얻은 때에,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읽는 편안한 대중 독서만큼 색다른 기분 전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없다. 책으로 지친 심신을 책으로 푸는 것이 과연 효율적이냐에 의문을 제기할 만도 하지만,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것은 또한 역사 속의 독서가들의 지혜이기도 했다. "김탁환"이라는 소설가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도 역시 일간지 Book Section을 통해서였다. 2002년 8월의 어느 한 토요일 Section의 프런트 면을 장식한 그의 소설 『나, 황진이』가 한국 미시사 연구의 대변환을 일으키고, 문학의 역사화, 역사의 문학화를 이룰 대작으로 평가받으면서 나는 그의 이름을 내 하드웨어의 어느 한구석에 저장해 놓았다. 3달이 지나고 그의 이름이 11월 섹션의 프런트 면에 다시 올랐다. 편집자들도 독자들의 반론을 의식해서인지, 첫 쪽지를 그의 새로운 소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선정에 대한 해명으로 시작했다. 소개에 따르면, 편집자들은 이 소설을 "현대 소설이 다뤄 온 주제와 소재로부터 자유로운 작품이며, 새로운 형태의 소설을 기다려 온 독서 대중의 기대에 부합하는 읽을거리"라고 판단했음을 밝힌다. "과연 그러한가?"하는 호기심 속에서 나는 이 안식과 같은 대중 독서의 휴식 시기를 김탁환과 함께 보내기로 결정했다.
우선 이 소설이 다루는 시대의 배경은 TV 사극을 통해 잘 알려진 17세기 조선 중기의 숙종 대이며, 주요 역사적 인물은 서포 김만중과 장희빈, 그의 오라비 장희재, 매설가(賣說家) 조성기 등이다. 여기까지 만으로는 시대적 배경이나 인물에 대한 신선함을 찾을 수 없다. 정희빈과 그의 시대만큼 여러 영역에서 쉼없이 다뤄져 온 소재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김탁환은 그의 시선의 초점을 이 정형화된 인물 속에 맞추지 않고, 매설가 모독(冒瀆)이라는 새로운 한 인물을 창조해 내어 그로부터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중요한 것은 그의 직업이 매설가(賣說家-소설가)라는 점이다. 그는 매설가 모독을 내세워 17세기를 "필사본 소설의 전성 시대"로 규정지을 수 있는 시대적 사건들과 배경을 부각시킨다. 그의 작품 후기에 기록된 것처럼, "시집가는 딸에게 소설을 필사해 주던 아버지, 사랑하는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 밤을 세워 소설을 베끼던 남편, 유언 대신 젊은 시절 옮겨 두었던 소설을 남긴 할머니"가 흔하게 존재했던 낭만적이고 따뜻한 17세기 문학의 세계를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단돈 몇 천원에 사고팔수 있는 대중 상품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온 정(精)과 성(誠)을 기울인 진정한 애독자층이 존재했던 이상적인 소설의 시대였음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그의 관심은 야사와 야담에 의존하지 않고, 신진 고전문학 학자답게 철저한 학문적 고증을 바탕으로 형성된 작업의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신뢰를 준다.
주제와 관련해서도, 그는 서포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를 둘러싼 장희빈의 첩자들과 김만중의 두뇌 싸움, 그 가운데서 외길을 찾지 못하는 모독의 갈등, 최고의 소설가의 길을 얻기 위해서 사랑과 도리마저 거침없이 내던지는 여인 백능파의 행적 등을 대비시키면서 권력과 인간의 관계, 한 인간의 양심의 고뇌, 욕망 앞에선 인간의 무력함, 그러나 살아나서 당대와 후세에 전해져야 할 진실의 자생력 등을 짜임새 있게 그려내고 있다. "추리인줄 알고 들어갔다가 인간을 만나 나오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그의 말을 되씹어 본다면 그의 작업은 꽤나 성공적이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관심있게 지켜 볼 한 새로운 작가를 만났다는 조심스런 뿌듯함을 갖고 그의 행로를 지켜보려 한다. 이미 젊은 나이에 많은 것을 이루고 세상에 내놓은 그이지만, 앞으로도 그를 통해 새로운 의의를 부여받게 될 한국 역사와 문학의 여러 새로운 계기들을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인상깊은구절] 추리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인간을 만나 나오는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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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드러진 소설이다. 슬프고 애절한 꿈을 한바탕 꾼 것 같다. 이문열의 <금시조> 이후 격조 있는 역사예술픽션과 만났다. <금시조>가 예술의 본질을 다룬 단편이었다면 이 작품은 소설과 소설가의 본질과 직분에 대해 다룬 장편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 <사씨 남정기>와 모독이라는 가상의 소설가를 등장시켜 메타픽션의 신선함과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무엇보다 백능파라는 여성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한 번으로는 아쉬워 두 번 읽었는데 그 맛이 달랐다. <방각본 살인사건>과 <열녀문의 비밀>의 원형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다.
어떤 영화는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든다. <일 포스티노>, <시네마 천국>, <서편제>가 그랬다. 활자를 뚫고 이 소설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휴가가 주어진다면 남해 노도가 첫번째가 될 것이다. 김탁환이라는 소설가의 치열한 예술혼을 발견한 것도 큰 수확이다. 석사 논문이었던 <사씨남정기계 소설연구>가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장기적인 계획과 나름의 프로세스를 가지고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나 소설에 대한 애정과 천착은 그 포스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믿음직하고 솜씨 좋은 셰프가 만든 성찬을 즐기는 기분이랄까.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자신의 뜻을 전하는 <작가의 글>은 한없이 따뜻하고 울림이 있었다.
따사로운 필사본 소설의 시대를 아시는지요? 시집가는 딸에게 소설을 필사해주던 아버지, 사랑하는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 밤을 새워 소설을 베끼던 남편, 유언 대신 절은 시절 옮겨 두었던 소설을 남긴 할머니, 그 시절 소설은 단순히 몇 천원짜리 상품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정의 공간이었지요. 소설이 좋아서 그 소설을 필사하는 독자들은 말 그대로 소설광일 겁니다. 작품 하나하나에 쏟은 17세기 독자들의 정성을 생각하며, 서포 김만중 선생의 문집과 소설 두 편을 거듭 읽었습니다. 그리고 서포 선생께 제가 지금 갖고 있는 고민들을 솔직히 털어놓았지요. 그러니까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은 활자를 넘어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소설가 김탁환이 필사본 시대에 활동한 소설가 김만중과 나눈 대화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필사본 소설의 시대. 김탁환이 숙종 시대를 거쳐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방각본 살인사건>을 낸 것도 우연이 아니구나. 도대체 그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까? 나는 그게 궁금해졌다. 성실하고, 공부하는 자세로 글을 쓰며, 무엇보다 소설에 대한 무한애정이 느껴지는 작가. 이런 작가와 작품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것도 큰 기쁨이리라. 내 일상의 즐거움이 또하나 생겼다. 그의 소설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읽어보리라. 이런 작가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축복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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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김탁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역사물에 현대적 추리 기법을 사용해 많은 이들이 고리타분하게 느끼는 고전문학을 자연스럽고 편하게 접하게 해준 작가!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밑도 끝도 없이 누가 서럽고 누가 누굴 잊는단 말인가? 좌포장 장희재 일당은 매설가 모독을 납치하고 서포의 차기작품을 빼내려 미끼로 이용한다. 서포의 차기작은 아직 미완성이며 이를 토대로 서인을 일망타진하려는 현재의 중전(장희빈) 의 계략이 빛을 발하게 된다. 서포는 남해의 섬 노도에서 유배중이며 사약을 오늘 내일 기다리는 기구한 운명인데... 정승에서 물러나 그가 고문이나 상서문을 멀리한 채 소설에 매진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인현왕후를 억지로 몰아낸 후유증일까 민심은 뒤숭숭하고 악첩이 선처를 몰아낸 내용의 소설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고 급기야 국가에서 금서로 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민심은 속이지 못하는 법, 불안한 마음을 달랠길 없는 중전은 장희재를 닥달하기만 한다. 당시에는 소설이 매설,잡기,패관이라는 이유로 정통 중국 고문에 천대받고 하대시 당하던 시절이었으니 민중은 그 한(恨)을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도 풀지 못하였으리라, 그래서 민중의 유일한 인 "소설읽기"에 탐닉했는지 모른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설에 중독되었는지는 다음 문장에서 알 수 있다. - P 22 금향이라는 기생이 돈을 받고 쉰 명도 넘는 아낙들에게 소설을 읽어주다 벌어진 사건 말이야. 계모가 전처 자식을 구박하는 대목을 듣고 분개한 아닉이 칼로 금향을 찔러 죽였지. 얼마나 순수한 민중들인가? 소설에 얼마나 몰입하였으면, 아니 인현왕후의 억울한 누명을 소설을 통해 보상받고자 했던 민중의 심리를 그대로 나타내는 부분이다. 서포 역시 이들 민중과 다를 바 없었던 것 같다. 정변의 소용돌이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올바른 역사 찾기를 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그 역시 소설을 이용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씨 남정기" 가 그것이다. 추후 인현왕후의 복권을 통해 그의 꿈은 이루어 졌다. |
| 역시 김탁환씨의 소설에 또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제목만 보아선 언뜻 남녀의 이별에 대한 연모의 정을 생각할수도 있겠으나 작가 스스로 작품 속에 들어가 작품속 주인공 매설가 '모독'이 되어 자신이 소설가로서 만나게 된 실존인물인 스승 졸수재 조성기와 서포 김만중의 삶과 그들의 소설에 얽힌 생각, 작품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지켜보는 관찰자로서 느낌, 17세기 숙종시절 남인(장희빈의 추종세력)과 서인(송시열, 김만중 추종세력)과의 대립을 자신이 직접 중전이 된 장희빈을 만나 귀향가있는 김만중의 동태를 살피는 첩자가 되어 그 중간을 오가며 묘사한 것은 그 시대의 소설과 시대상,그리고 실존 인물들의 성격까지 굉장히 상세히 설명한 것은 얼마나 작가가 그 시대와 인물에 충실하려 했는지 역력히 알수 있는 작품이다.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소설책 중 매설가 '모독'이 김만중의 구운몽을 읽고 그를 직접 만나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한 '구운몽심고'와 이 책의 제목인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사씨남정기를 읽으며 작가가 서포를 생각하며 그의 작품들을 재 해석한것이라고 보면 되고 결국 이것이 이 소설의 처음을 열어가고 끝을 맺어 나간다. 또 그들의 스승이 남긴 <졸수재집>,<창선감의록>,<구운몽>,<사씨남정기>등은 아직도 우리 국문학상에 빛나는 보물과도 같은 책인데 작품 중간중간 작가의 생각과 더불어 나오는 구절이 그 원본들을 보게 끔 충동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김탁환씨의 작품에서 빠질수 없는, 매설가에게 때로는 힘이 되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적이 되어 주인공의 목숨을 노리는 여인들, 사랑하는 여인과의 줄다리기가 결국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이 되어버리는 결론은 소설이란 이렇게 물거품같은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 아닐까 읽을 때 마다 생각한다. 이 책에서도 스승 졸수재의 부탁으로<모독>의 정혼자가 된 <남채봉>이 그러하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것은 아예 염두에도 없고 오로지 자신이 조선 최고의 매설가가 되기위해 소설속 주인공인 여인들의 이름을 <백능파><남채봉><설경>등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 바꿔가며 스승들을 찾아다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런 거짓 정혼까지 서슴치 않는 여인이다. 당연히 정혼자의 목숨쯤은 우습게 아는, "삶은 점점 줄어들고 소설을 향한 열망은 점전 커가는 순간들 소설이 전부가 되면 영원한 인식이 찾아오겠지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이 한 편의 소설로 바뀌는 걸세 ~ 비록 나는 사라지더라도 나의 모든 삶이 그 삶의 순간에 느꼈던 고통과 슬픔과 환희가 또 다른 이에게 온전히 전해지는 신비로움 말일세." (p264) 김만중 선생이 퇴고를 마치고 쓰러지시기 전 '모독'에게 남긴 말씀이시다. 우리나라의 대 학자이시면서 소설을 남기신 그 분의 뜻이 그대로 남겨진 말인것 같다. 그래서 소설을 남겼다고... 만약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를 접했다면 그 속에 들어간 시대상의 혼란함이나 작가의 그 아픔을 어찌 알수 있었을까, 그냥 고전이기에 읽어야 한다는 그냥 그런 책이라 치부했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그 고전들이 너무나 보고싶은 욕망과 졸수재 '조성기'의 작품들까지 읽고 싶다는 욕망이 되살아 났다. 역사속 실존인물과 소설속 가상 인물을 서로 만나 친구나 혹은 스승과 제자가 되게 하는 김탁환씨의 솜씨는 정말 탁월하며 이 또한 그의 소설책의 매력인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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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설가라... 소설을 보다가 가끔, 과연 이 글을 쓴 의도는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런 글들이 과연 세상을 얼마나 깨우칠 수 있을까 하는 것과, 정말 이런 류에 비용을 지불하며 사서 읽고, 또 보관해 둘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할 때도 있다. 특히나 남편의 핀잔이 거세질 때는 더 고민하게 된다. 무언가 정신에 영양을 공급할 책을 읽어야지 그런 책에 시간과 돈을 쏟는다고 하면서 나의 소비생활까지 지적할 때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소설들이 엄연히 있고, 내 삶의 고민에 해답을 안겨주는 글들도 있고,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주는 글도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문체의 단아함이, 문장의 수려함이, 단어의 깊이가, 구성의 독특함이 나를 끌어들이고, 내게 소설 읽는 기쁨을 안겨주는 글들이 있다. 한마디로 내 마음에 매력있게 다가오는 소설들 말이다. 분명 그런 글들이 있음에야 어찌 소설을 작은 글이라고 소홀히 대할 수 있으랴.
게다가 그저 독자로서가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서 그냥 활자와의 만남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강한 흡인력을 가진 소설도 있다. 그때부터는 소설에서 빠져나와 그 글을 지어낸 소설가에게로 관심이 걷잡을 수 없이 날아간다. 직접 만나서 그 분의 소설관도 들어보고 싶고, 소설이 하나 완성될 때까지 어떤 고뇌의 작업이 거쳐지는가, 어떤 부류와의 사귐을 주로 갖는가, 어떤 글들에서 자신의 작품이 갖는 맥락의 영향을 받는가, 소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진의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등등 소설에서부터 소설가의 작은 습관까지도 알고 싶은 욕심이 생겨날 때가 있다. 그리고, 더 용기를 내어 본다면 소설을 흉내낸 작은 글까지도 써 볼 수 있기를... 내게 있어서는 에코와 베르베르와 바로 이분 김탁환님이다. 시인으로는 곽재구님이고. 아직까지 난 용기가 없어서 그런 소설가를 찾아가보기는 커녕 한 장의 서신조차 띄워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 속의 백능파가 밉지 않고 오히려 가엾다. 그녀의 용기가 가상하고. 꿈꾸는 자만이 그 꿈에 다가갈 수 있는 허락을 받아낼 수 있는 것임을...
황진이를 통해서 알게 된 김탁환님, 폭풍같은 감동이랄까, 요즘에 이런 글을 쓰는 분이 있구나하는 감격. 꼭 한 번 뵙고 싶은 나의 이상적인 소설가가 되었다. 옛 것에서 고스란히 그 나날들을 옮겨다 놓는 탁월한 재구성력도 빼어나거니와, 결코 고집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행간에 드러내는 능력이 고루할 것 같은 과거이야기를 단숨에 읽혀지게 만든다. 역시 이 책에도 그런 매력이 고루 배어있다. 매설가 모독을 통해서 17세기의 소설을 대하는 군상들의 모습을 보여줄 뿐 아니라, 졸수재와 서포의 가르침을 통하여 소설론을 은근히 유포하기도 한다. 이 분의 소설을 보면 소설을 통해서도 교양을 쌓을 수 있구나하는 또다른 소득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소설이 매력있는 장르이며, 소설책을 사둘 가치가 있는 것이며, 소설 중에는 물론 대부분 서럽게 잊혀질 수도 있겠지만 오래도록 살아남아서 회자될 수 있을 수도 있는 것이려니 하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의 행보에 기대를 해본다. 가뭄의 단비같은 소설을 많이 쓰실 수 있기를... [인상깊은구절] 시경의 관저편에 대한 공자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는 것이 좋을 걸세. 즐거우나 음란하지 않고 슬프나 상심하지 않는 글을 쓰도록 하게나. |
| 김만중의 소설 <사씨남정기>의 창작 배경을 그리고 있는 소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은 나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문학도(현재는 임용고사 학도가 되어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참된 한문학도가 되리라.) 로서 나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 한문소설들을 인용해 첫단락을 꾸미고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인 매독은 매설가(소설가)이다. 그의 스승 졸수재 조성기, 그의 연인 백능파. 그리고 당시 시대적 상황을 둘러싼 숙종과 장희빈. 마지막으로 김만중이 이 소설의 핵심인물이다. 매독에게 김만중의 소설 <사씨남정기>를 모래 가져오도록 지시하는 장희빈, 좋은 소설들을 빼앗아 자신의 이름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한없는 욕망을 가진 백능파를 중심으로 모두가 기다리는 것은 바로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이다. 마지막까지 쫓고 쫓기는 접전속에서도 선견지명을 가진 김만중에 의해 매독은 김만중의 최후를 지키고 되고, 그의 소설 <사씨남정기>도 보존하게 된다. 수없이 많은 소설적 장치들과 단락마다 멋들어지게 어우러지는 한문소설의 단락을 소개함으로써 더욱 더 소설의 맛을 한층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인현왕후는 숙종의 곁으로 와 국모의 자리를 지키게 되고, 장희빈은 폐출 되고 마는데... 우리의 삶도 꼭 그와 같다. 너무 많이 가지려고 하다보면 다 잃게 된다. 늘 만족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가지 의문 예전에 정말 그렇게 중상과 모략이 난무하던 시대였을까? 그들에게 권력은 무엇이었길래 모든 것은 내 걸었을까? 보장된 미래보다는 인간의 정을 선택했던 모독. 머리로는 몇 번이나 배신했겠지만 결국은 김만중을 떠나지 못했던 모독을 보면서 나는 버려서는 안되는 무엇, 버려지지 않는 무엇을 생각했다.사씨남정기>사씨남정기>사씨남정기>사씨남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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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김탁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역사물에 현대적 추리 기법을 사용해 많은 이들이 고리타분하게 느끼는 고전문학을 자연스럽고 편하게 접하게 해준 작가!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밑도 끝도 없이 누가 서럽고 누가 누굴 잊는단 말인가?
좌포장 장희재 일당은 매설가 모독을 납치하고 서포의 차기작품을 빼내려 미끼로 이용한다. 서포의 차기작은 아직 미완성이며 이를 토대로 서인을 일망타진하려는 현재의 중전(장희빈) 의 계략이 빛을 발하게 된다.
서포는 남해의 섬 노도에서 유배중이며 사약을 오늘 내일 기다리는 기구한 운명인데... 정승에서 물러나 그가 고문이나 상서문을 멀리한 채 소설에 매진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인현왕후를 억지로 몰아낸 후유증일까 민심은 뒤숭숭하고 악첩이 선처를 몰아낸 내용의 소설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고 급기야 국가에서 금서로 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민심은 속이지 못하는 법, 불안한 마음을 달랠길 없는 중전은 장희재를 닥달하기만 한다.
당시에는 소설이 매설,잡기,패관이라는 이유로 정통 중국 고문에 천대받고 하대시 당하던 시절이었으니 민중은 그 한(恨)을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도 풀지 못하였으리라,
그래서 민중의 유일한 인 "소설읽기"에 탐닉했는지 모른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설에 중독되었는지는 다음 문장에서 알 수 있다.
- P 22 금향이라는 기생이 돈을 받고 쉰 명도 넘는 아낙들에게 소설을 읽어주다 벌어진 사건 말이야. 계모가 전처 자식을 구박하는 대목을 듣고 분개한 아닉이 칼로 금향을 찔러 죽였지.
얼마나 순수한 민중들인가? 소설에 얼마나 몰입하였으면, 아니 인현왕후의 억울한 누명을 소설을 통해 보상받고자 했던 민중의 심리를 그대로 나타내는 부분이다.
서포 역시 이들 민중과 다를 바 없었던 것 같다. 정변의 소용돌이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올바른 역사 찾기를 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그 역시 소설을 이용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씨 남정기" 가 그것이다. 추후 인현왕후의 복권을 통해 그의 꿈은 이루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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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미스테리물은 아마도 이인화 교수의 <영원한 제국>이 원조이지 싶은데 지금 이 작품도 그와 비슷한 분위기입니다. 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도 뭐 새삼 지적할 것도 없습니다. 김탁환 작가는 소개가 필요없을 우리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메이커이겠고 말입니다.
제목은 작중에 나오는 소설 제목이며, 제목만 봐서는 이 장편이 역사 배경 미스테리물인지 짐작하기가 어렵고 엉뚱하게도 어느 잊혀지기 직전 여인의 넋두리인가 착각하기나 딱 좋습니다. 우암 송시열이 숙종에 맞서다 유배지에서 처형당하는 장면이 서두에 나오는데 그의 최후를 둘러싸고 전해진 어떤 버전과는 달리 비장미가 흘러넘칩니다. 작의 분위기는 다분히 서인 중심적 우국충정에 충만하며 1987년 MBC판 드라마 <인현왕후> 등과 별 차이가 없이 단색적 비분강개 톤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앞에 언급한 대로, <장미의 이름>에서처럼, 우리 시대에 실전(失傳)된 어느 명작이 있었고 이 명작을 놓고 역시 우리 시대가 모르는 누군가들이 (알고보니) 역사적으로 엄청 중요한 각축을 벌인다는 겁니다. 그러고보니 <장미의 이름>뿐 아니라 오히려 <푸코의 진자>를 더 닮은 듯도 합니다.
웃기는 건 남인의 수괴들은 물론 심지어 장옥정 본인조차 서포의 "신작 출간"을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는 겁니다. 소설 하나가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셈이나 마찬가지인데 아마도 소설 창작에 종사하는 이들의 영원한 로망 혹은 망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중에는 남채봉이란 이름이 나오는데 물론 작중에도 언급되는 <창선감의록>의 한 캐릭터입니다. 또 백능파는 서포의 <구운몽>에 등장하는 8선녀의 세속 환생 중 한 명과 이름이 같습니다. 8선녀 중 다른 한 캐릭터의 이름은 진채봉이죠. 마지막에 눈이 먼 OOO을 통해 서포의 문건을 전달 받는 OO은 무덤덤하게 OOO을 보내고 마는데 원 무슨 사람 사이 최소한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긴 한가 싶기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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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이 넘쳐나고 감당 안 되는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이다. 뭘 손에 쥐고 읽어야 될지, 내가 어떤 정보를 찾아 봐야 될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제목만 보고 손이 가는 책이 있다. 그 책의 작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응축된 책의 사전 정보도 본 적도 없이 제목에 끌려 사는 책이 있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서정적이면서도 그리움을 불러오는 제목이다. 뿐만 아니라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제목이다. 만나고 이야기하는 중에 상대방에게 나를 기억시킴으로서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를 알리기 위해 몸부림치고 그 와중에 좌절하고 나의 존재를 다시 인정받기 위해 일어난다. 권력, 명예, 부 등은 개인적인 욕망이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나를 기억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힘을 휘둘러 나의 강인함을 기억시키며,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나에 대한 존경심을 기억시키고, 올바르거나 부정적으로 돈을 사용해서 나의 금전적인 우수함을 기억시킨다. 결국 인간의 모든 행동은 상대방의 기억에 나를 각인시키는 작업이다. 그러니, 당연히 잊혀지는 것은 서러울 수밖에 없다. 잊혀진다는 것은 그의 기억에서 나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며, 그의 공간에서 나의 공간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며, 그의 존재에서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잊혀진다는 것은 슬프다. 그래도 오늘도 나는 존재하기 위해 기억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꿈 속에서 즐겁게 술을 마시던 자가 아침이 되면 불행한 현실에 슬피 울고 꿈 속에서 울던 자가 아침이 되면 즐겁게 사냥을 떠나오.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을 모르고 꿈속에서 또한 그 꿈을 점치기도 하다가 깨어나서야 꿈이었음을 아오. 참된 깨어남이 있고 나서라야 이 인생이 커다란 한 바탕의 꿈일 줄을 아는 거요.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깨어 있다고 자만하여 아는 체를 하며 군주라고 우러러 받들고 소치는 목도이라고 천대하는 따위 차별을 하오. 옹졸한 짓이오. 공자도 당신도 모두 꿈을 꾸고 있소.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또한 꿈이오. p.203 (장자-제물론)” 인생은 꿈과 같다. 자고 일어나면 사라지는 꿈처럼 기억된 것은 잊혀진다. 이왕에 잊혀지고 사라질 꿈과 같은 기억이라면 아이처럼 순수하고 밝게, 남녀 간의 사랑처럼 뜨겁고 격려하게, 흐르는 강처럼 차분하고 잔잔하게 기억되자. 꿈이 사라지듯 기억도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