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의 이성의 해방을 통해 사회의 광기를 구원한다.자기가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을까? 저자는 가르칠 수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지한 스승이어야 가르칠 수 있다고 한다. 유식한 스승의 가르침은 바보 만들기의 교육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지능은 평등해서 누구의 지능의 것을 다른 사람의 지능으로 옮겨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자의 지능이 있고 각자의 지능을 쓰는 것이지, 지능을 연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지한 스승은 어떻게 해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일까? 의지를 불어넣으주고 학생이 제대로 주의를 가지고 하는지 검증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
구식의 교육 방식인 설명자의 질서는 지적 불평등을
통해 위계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즉, 그것은 바보 만들기의
교육이다. 보편적 가르침의 수단은 모국어와
같이 무언가를 스스로 배우고,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갖는다는 원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과 연결하는
것이다. 즉 지능의 발현을 스스로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교육 방식은 지능과 의지를 분리함으로써 가능하다. 지능은 평등해서 다른 사람에게 불어넣어줄 수 없다. 무지한 스승은 의지를 불어넣어주고, 주의를 기울이도록 검증함으로써
학생 스스로 지적능력을 발현하도록 돕는다. 지능의 발현에 불평등이 있을 뿐, 지적 능력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능과 지능 사이에는 책이라는
전체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본성상의 평등을 의식하는 것이 해방이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한 인간의 지적 능력 전체가 책이라는
전체 안에 있다. 언어(지능)의 모든 역량이 한 권의 책 안에 있다. 역량이 곧 전체다. 그러므로 한 책을 완전히 파악하면 다른 것도 파악할 수 있다. ‘비슷’이나
‘다름’과 같은 여러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것을 이미 알고 있던 것과 연관시킬 수 있는
지능을 가지고 있으면 전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진보의 시대의 지도와 교육은 조화로운 균형은 이중의 바보 만들기의 균형이다. 인간은 자신이 본 것을 검토하는 존재(anthropos)다. 자신의 행위를 헤아리는 가운데 자신을 아는 존재다. 보편적 가르침의
모든 실천은 ‘너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니 ’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이것이
무지한 자의 수업이다. 스승은 지적 해방으로 이끌기 위해 질문을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무지의 발견을 통해 지도하기 위한 것으로 바보 만들기의 발전된 형태이다.
무지한 자는 더 적게 하는 동시에 더 많이 한다. 그는 학생의 지능의 검증은 적게 하고, 학생이 수고와 주의를 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한 검증은 더 많이 한다. 무지한
스승의 실천은 학식이 더 이상 도움을 주지 않는 곳에서 이성의 순수한 힘들을 해방하는 결정적 실험이다. 이
상호성의 실험이 해방하는 방법의 핵심이자 판에카스티크panècastique 즉, 각각의 지적인 발현 속에서 인간 지능의 전체를 찾는 것이다. 해방이란
평등에 대한 의식이자 상호성에 대한 의식이며, 해방은 지능의 입증을 통해 현실화될 수 있다. 즉흥작을 시작하고 끝내는 법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를 만들고, 하나의
고리 안에 언어를 가두어두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비물질인 정신은 물질과 달리 비교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신은 차이가 없다. 인간은 주의 깊은 동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이다. 지능은 관념들의 조합이기에
앞서 주의이자 탐구이다. 의지는 무언가를 선택하는 심급이기에 앞서 스스로를 움직이고자 하는 역량이며, 자신의 고유한 움직임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역량이다. 다시 말해
의지란, 자신을 행동하는 것으로 의식하는 이성적 존재가 자기로 되돌아가는(반성하는) 것이다. 이
합리성의 온상, 즉 자기를 현동(玄同,현실태)적인 이성적 존재로 의식하고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지능의 운동을
키운다. 이성적 존재는 먼저 자신의 역량을 아는 존재이자, 그
역량과 관련하여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존재이다.
인간은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에 생각한다. 생각이
언어활동보다 앞선다. 타인의 말을 들은 이는 다른 이야기로 만든다. 이
다른 번역은 소통하려는 의지에서 이루어진다. 의지는 의지를 짐작한다.
이것이 이야기하기와 짐작하기로 이루어지는 소통이다. 이 노력에서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가
나온다. 생각은 진리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실함으로
표현된다. 이성적 존재인 문외한들의 말의 운동은 진리와의 거리를 인식하고 유지하는 동시에 인간성을 의식한다. 이 인간성에 대한 의식은 타인과 소통하고 그들과 자신의 비슷함을 입증하기를 욕망하는 것이다.
보편적
가르침이 경이로운 이유는 두 이성적 존재 사이의 모든 소통 상황을 움직이는 동력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두
무지한 자가 책과 맺는 관계는 그것을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시키려는 욕망으로 가능해진다. 이해한다는 것이란, 한 화자를 다른 화자와 직면하게 하는 번역의 역량으로 가능해진다. 시인은 두번 번역한다. 번역과 역번역이다. 타인의 말을 내가 이해하는 말로 번역하고, 나의 생각을 타인이 이해하게끔
다시 번역하여 소통한다. 지능은 타인의 검증을 거쳐 자신을 이해시키는 능력이다. 그리고 오로지 평등한 자만이 평등한 자를 이해한다. 이성과 의지가
동의어이듯, 평등과 지능은 동의어다.
불평등한 사회는 자기를 무시한다. 이것은 곧 타인을 무시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지적 악은 ‘무지’가
아니라 ‘무시’다. 물질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한 곳으로 모이지만, 비물질은
정신의 각자의 포물선을 그리며 진리 주위를 돈다. 진리는 느껴지는 것이지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할수없다고 하며 자기를 무시할 수 없다. 평등은 불평등의 유일한 근거다. 이성적 인간에게는 자신의 이성을 시민의 광기로부터 지키려고 애쓰면서 그 광기에 복종할 일이 남는다. 그는 자신의 이성을 무분별의 명령에 일정 부분 양도함으로써 자신을 극복하는 능력인 합리성의 거처를 유지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성은 항상 무분별내에서도 난공불락의 성채를 지킬 것이다. 그리하여 헛소리하는 이성적인 사람은 사회적 광기의 고리에 갇히더라도 개인의 이성이 그것의 힘을 끊임없이 발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회가 그 자신의 광기 탓에 절단 날지도 모르는 순간에 이성은 자신의 고유한 힘인 지적 존재로 인정받은 평등의 힘을 모조리 발휘함으로써 사회를 구원하는 역할을 한다. |
|
랑시에르에 의하면 설명의 논리는 무한 퇴행의 원리를 내포한다. 가장을 갖지 않은 것, 다시 말해 아이, 책과 함께 트리오를 이루는 데 항상 빠지게 될 것은 설명자가 가진 독특한 기술인 거리의 기술이다. 스승의 비밀은 가르친 교과와 지도해야 하는 주체 사이의 거리를 식별할 줄 아는 데 있다. 그것은 또한 배우는 것과 이해하는 것 사이의 거리를 식별하는 것이기도 하다. 설명자는 거리를 설정하고 없애는 자다. |
|
장대비 연수 첫번째 책으로 만난 <무지한 스승>, 랑시에르 님의 책. 자크 랑시에르님은 정치철학자로 글이 어렵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아하~~ 나만 어려운 것이 아니었어 하는 위로의 파도가 물밀듯이 온다. ? 1장은 학기 말 업무의 폭포와 플리마켓 시작 바로 전 비난의 대 환장 파티에서 만났다. 그랬다. 1장은 읽기 시작한 것은 일하기 싫고, 학교 생각을 하시 싫어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서 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도 교사의 의지와 학생의 의지가 만나면 학생은 스스로 잘 배우고 표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엇??? 설명의 저주에서 나는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무지한 스승 책의 문장은 어려웠고, 내가 알던 말과 책 속 말이 과연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인가? 싶은 마음에 책을 넘기다 보면 금방 잠이 들었다. 1장을 읽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 2장부터는 방학!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월요일이 독서연수, 카톡 대화방에서는 완독인증이 계속 올라오고, 랑시에르 님은 멋지신 분이라는 소감이 여럿 있었다. 누워서 읽다보면 자꾸 잠이 와서 실내 자전거 25분을 하며 소리내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다행이 점점 재미가 있다. 아~~ 지능의 평등, 보편적 가르침, 해방, 현실에서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으나 틈이 생기면서, 혼란 속에서 찾아가는 것이구나. 한 번 다 읽었으나 다음에 또 읽으면 다시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많겠다. 곰곰히 생각하며 읽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아 책장을 넘기는 것에 만족하며 읽었다. ? 나도 나의 길을 가는 사람이 되도록, 나의 지적 평등을 인정하고 믿어야겠다. 어려운 말들이지만 책 속에서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
|
교육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교육이 계급적 특권이 되지 않도록 교육(계몽)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던 시기였으나, 지금의 교육은 오히려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것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은 어쩌면 교육학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기위한 파격적이면서 기본적인 시도일 것이다. 지식의 게토화, 정보격차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이 책은 마치 우리가 무지한 스승을 찾아, 혹은 무지한 스승이 되어 지배계급에 맞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