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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관해 아들이 남긴 기록이라고 하면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는다. 미화되거나 과대 포장되거나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지만 그 아버지가 열하일기를 남긴 '박지원'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아들 박종채가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남긴 박지원의 일거수 일투족은 그 사료적 가치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박지원의 진면모를 알리는 소중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먼저 ‘나의 아버지 박지원’을 쓴 박종채가 누구인가? 박지원의 차남이라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개화사상가 박규수의 아버지라는 점에서, 박지원 가계의 사상적 특징이 한눈에 드러났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박지원에 대한 모습이 총망라돼 있었다. 학자로서, 문인으로, 행정가로서, 아버지로서의 모습까지. 기록한 이가 아들이라는 점을 십분 감안하고서도, 이 책을 통해 비춰진 박지원의 모습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근대적 인간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지원은 잠이 적고 자정 지나 닭이 우는 때 취침해서 동트기 전에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이었고, 부지런했다. 목민관으로서는 합리적인 행정가라 할 수 있었다. 관아의 재정에 부정이 발견되면 문제 일으킨 담당자가 변상하게 하고, 천주교 신자는 설득하고, 교육을 통해 종교를 포기하게 했다. 지방에 부임하면 제일 괴로운 것이 고문을 통해 죄인을 심문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해듯이, 박지원은 천주교 신자에게 고문이 아닌 교화를 선택했고, 당시 관행이라 할 수 있는 공금 부정에 대해서도 원칙으로 대응했다. 이것은 법치에 한발자국 가까와진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박지원에게서 근대성의 징후라 하면 단연 문장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또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자신의 문장이 한유와 구양수의 글을 모방하고 반고와 사마천의 글을 본떴다고 우쭐대고 으스대면서 지금 사람을 하찮게 볼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에 따라 그 형상과 소리를 곡진히 표현하고 그 정경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다면, 문장의 도(道)는 그것으로 지극하다.’(179쪽) 이러한 문장에 대한 그의 견해는 정조가 문제 삼은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빌미를 제공하지만, 좋은 문장이란 결국 개개인의 눈과 귀를 통해 경험한 개별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주장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에 문장의 전범이 된 것은 고전이라는 틀에 맞춰진, 전형적인 글이었지만 그는 고전적인 글쓰기를 배격하고, 남과 다른 글쓴이만의 글, 개성을 드러낸 글을 장려하고 있다. 물론 박지원은 유학의 영향권에서 완전하게 벗어난 인물은 아니었다. 제사에 대한 그의 생각이나 그 역시 노론에 속한 당파적 입장을 미약하게나마 유지했다는 점에서 이는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주지하다시피 청나라 문물에 대한 개방적 자세나, 합리성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자세 등을 보면 분명히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감지한 인물이었다. 그런 박지원의 사상이 아들 박종채를 통해, 손자인 박규수의 실용적인 개화사상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에서는 시대 순이 아닌, 수백 개의 짧은 내용의 글이 병렬식으로 구성돼 있다. 박지원의 사상에서 지방관으로 재직 시 이야기나, 학문관, 홍대용, 이덕무, 백동수 등 당대 인물과의 교유나 일화 등도 소개돼 있다. 어떻게 보면 내용이 큰 이야기나 흐름보다는 조각난 느낌도 들지만, 그런 가운데에서 다양한 각도에서 박지원을 만날 수 있고 조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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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박지원은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과연 박지원의 아들이 저자와 우리들 사이의 괴리는 대체 얼마만큼일까. 저자는 시종일관 박지원의 훌륭함과 그로인해 그가 겪어야만 했던 시련에 대해 말한다. 확실히 박지원이 좀 유별난 인물이었다라는것과 재능 하나는 대단했나보다 싶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온갖 미사여구를 곁들여 가며 분량만 늘려놓은 박지원의 전기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 다만,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나쁘게 썼을리는 없을테니 좀 골라 보아야 하는 부분은 있어 보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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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사부곡(思父曲)을 만나다 사부곡, 아버지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기도 하지만 그 절절한 마음을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세월을 두고 시간이 흘러가는 시간만큼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림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유교국가의 이념이 살아남아 부모에 대한 깊은 정이 유독 강한 우리에게 특히 아버지에 대한 마음은 겉으로 표현되기 보다는 깊은 가슴속에 감춘 것이 대부분이지만 차고 넘쳐 토하듯 강한 울림을 전하는 사부곡이 한 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사부곡일지라도 각기 다 다른 감정을 전하는 것은 아버지와 자식이 다 같은 사람이 아니기에 그 감정 또한 다를 수밖에 없는 것 때문이겠지만 그 바탕에 그리움과 후회가 있음은 자식의 마음을 그나마 표현하는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것으로 글로 남긴 것은 묘비명이나 산문, 시 등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엄격한 유교의 이념에 의해 움직였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아버지의 정을 글로 나타내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상황이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문집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오늘 접하는 ‘과정록’도 그런 형태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낸 작품이 아닐까 싶다. 과정록은 아들 박종채가 쓴 박지원의 전기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당대 주목을 받았던 박지원은 박종채에서 박규수로 이어지는 가계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실학자 박지원과 개화사상가 박규수는 박종채를 사이에 두고 그 사상적 측면을 이어가고 있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를 통해 본 박지원은 어떤 사람일까? 그가 4년여 시간을 공을 들여 집필한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과정록’이다. 북학파 실학자로 열하일기의 저자로 무엇보다 대문장가로 특출한 글을 남겨 당대부터 주목받으며 온갖 구설수에 올랐던 박지원은 아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남았을까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이 책 ‘나의 아버지 박지원’은 박종채의 ‘과정록’을 박희병이 대학에서 강독했던 것을 기초로 번역한 책이다.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마다 짧은 글을 순번을 매겨 번역되어 있다. 전기이기에 태어나는 과정에서부터 성장배경과 사람들과의 어울림, 학문과 삶의 태도 및 관직생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아버지 박지원의 성격으로 자신이 남긴 글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던 시기로 이를 직접 수집하고 때론 아버지의 지인들로부터 전해 듣고 해서 모은 글들을 보며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 많다. 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 중 유독 마음에 남는 것은 글을 온전히 수집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부분이다. 문장으로 한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의 글이 유실된 것은 곧 아버지의 본 뜻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안타까움에서 일 것이다.
여기에는 박지원과 교류했던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특히 북학파, 실학자로 그리고 소위 백탑파로 불리었던 홍대용, 박제가, 이서구, 이덕무 등과 유한준 같은 사람들이며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당시 시대상황을 엿볼 수도 있다. 특이한 점은 산송문제에 휘말려 심한 고통을 당했다는 점이다. 산송문제는 조선시대 여려 사람들이 겪었던 문제이기도 하지만 실학자 박지원의 경우는 문장에 대한 평가가 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특색이 있다. 박지원과 유한준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다. 이 둘은 상당한 친분을 가진 사이지만 유한준의 문장에 대해 박지원의 평가로 갈라진 사이다.
요사이 박지원에 대해 주목하는 부분으로 그의 문장에 대한 것이 많아 보인다. 이 책의 역자가 책머리에서 언급한 구한말 문장가 김윤식이 박지원의 문장을 평한 글에서도 나타나듯 조선의 역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것이다. 하지만, 문장 즉 글쓰기가 뛰어난 문장가로만 박지원을 접근한다면 그의 일면에만 주목하는 결과로 이어져 박지원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돌 수도 있음이 염려된다. 박지원 관련 책이 다양하게 출판되고 있으니 우선, 박지원의 생애와 그의 업적에 대한 입문서 형태로 읽으면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부곡,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넘어 아버지가 남긴 업적을 후대 사람들이 올바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글을 남긴다는 것은 단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넘어선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을 찾아보는 것도 현대인이 아버지를 생각할 때 생각해 봐야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
| 박지원이라는 인물처럼 자주 언급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는 실학을 다루면서 꼭 거쳐야 하는 산맥이고, 국어에서도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가 들어있는 그의 글들은 꼭 배워야만 하는 작품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나 작품을 보면서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하는 의문을 가진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인간 박지원을 이해하는 좋은 안내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글이기 때문에 옛글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생생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그 덕에 박지원의 평소 성격이나 언행에 대해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박지원의 초상화였는데 그동안 그의 작품을 보면서 내가 예상한 그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풍채도 좋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호인의 모습이었다. 마치 그를 직접 만난 것 같은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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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이 실생활에 도움이 되어 백성들을 잘 살 수 있기를 꿈꾸었고 서얼들에게 참된 스승이 된 분, 고전 소설에서 빠질수 없는 주요 작가인 박지원에 대해 궁금해서 책을 구입했다. 박종채인 아들이 써서 내용이 더욱 사실적이었고 자세했다. 박지원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손자 박규수까지 이어진 듯하다. 책을 읽는 내내 박지원을 마음으로 따르면서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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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선생은 <열하일기>, <양반전>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신 분이다. 영조 때 태어나셔서 정조 연간에 활동하셨는데, 당시 문장으로써 이름이 매우 높았다. 이 책은 연암 선생의 아드님이신 박종채 선생이 지은 <과정록(過庭錄)>을 박희병 교수께서 번역하신 책으로서 인쇄된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문득 오랜만에 다시 책을 펴보니 전에 읽었을 때의 감상은 오유(烏有)하고 새 책을 읽는 느낌이 든다.
'과정'이란 공자께서 아드님이신 백어가 뜰을 지나가자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있으니, 박종채 선생이 아버지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아버지의 언행으로부터 평생을 가르침을 받아왔음을 나타낸 말이고, 아버지를 결코 잊지 못함을 나타낸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 분이 기세(棄世)하면 아들이나 가까운 지인 가운데 학문이 높은 사람이 그 사람의 평생의 행적을 기록하는데, 이것을 행장(行狀)이라고 한다. 이 책도 행장의 종류라고 할 수 있겠는데, 행장은 대부분 그 분량이 많이 않은 것에 비해 이 '과정록'은 그 분량이 상당하여 보통의 행장으로 분류하기도 어렵다.
연암 선생은 당파로 분류할 때 노론에 속하는, 당시 관점으로는 당당한 가문에서 태어나신 분이지만, 평생 그 파벌에 얽매이지 않고 학문이나 덕행이 뛰어난 사람이면 가리지 않고 사귀었으나, 가식적이고 성격이 비천한 자라면 가차없이 외면했던 성품을 지녔다. 그 까닭에 평생을 부귀공명과 무관하게 청빈하게 살았지만, 많은 모함과 모략을 받았다. 하지만 결코 그 절조를 꺾지 않았으니 가히 걸출(傑出)하다 할 수 있겠다.
연암과 사귄 인물의 면면을 보면, 평생의 지기였던 담헌 홍대용이 있겠고, 제자로서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등이 있다. 모두 실학자로서 이름이 높은 분들이다.
연암 선생은 풍채가 크고 신색이 붉으며 목소리가 우렁찬데 비해 담헌 선생은 체구가 작고 병약하면서 조용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담헌 선생은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어서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루었는데, 연암 선생은 직접 악기를 다루지는 못하지만 음악을 감상하는 귀가 밝았다고 한다. 담헌과 연암을 비롯한 뜻에 맞는 분들이 간혹 모여 주안상을 마련하고 각자 악기를 연주하여 음악회를 열었는데, 눈이 막 그쳐 달빛이 고고하게 비치는 수표교 위에서 악기를 연주한 대목을 읽어보자면, 그 운치 있음에 저절로 감동한다. 이렇듯 풍류를 좋아하던 연암 선생은 담헌 선생이 먼저 하세(下世)하자 음악 듣는 것을 그만 두었다. 마치 백아가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던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연주를 그만둔 것에 비할 수 있으니, 그 아픔이 느껴서 감개가 무량하다.
연암 선생이 늦은 나이에 음직(蔭職)으로 안의현감에 제수되어 5년 동안 다스렸다. 선생은 번거롭고 불필요한 절차는 모두 없애버리고 필요한 것은 꼭 실행했기 때문에 인습에 젖어 있는 아전이나 고을 사람들이 처음에는 기피했지만, 선생의 정책이 자신들을 편하게 하고 이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을 다해 따랐다.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는 마치 부모를 떠나보내는 자식처럼 슬퍼하였다.
안의에 계실 때 동헌 한 켠 버려진 땅에 벽돌을 구어 담을 쌓고 정자를 짓고 방문하는 문객과 친우들과 함께 풍류를 즐겼다. 후에 서울에 돌아와 벽돌로 집을 짓고 계산초당이라 하였는데, 선생이 돌아가신 후 아들 박종채 선생이 거처하게 되었다. 어느날 거렁뱅이 노파가 집안을 기웃거리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우리 고을에 있는 정자 비슷하다'고 하였다. 박종채 선생이 그 노파를 들어오라고 한 후 '어디에서 왔냐'고 하니 '안의에서 왔다'고 하였다. '그 정자를 누가 지었냐'고 하자, '박사또께서 고을을 다스리실 때 지었다'고 하였다. '아직도 그 어른을 칭송하느냐'고 하자, '별다른 칭송이야 하겠습니까, 하지만 누가 새로 사또로 부임하면 옛날 박사또 같기야 하겠어? 그처럼 좋은 시절은 다시 볼 수 없을 거야! 라고 한다'고 하자, 박종채 선생이 "그건 내 선친 때 일이다."라고 말하자 그 노파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우려는 것을 연암 선생이 반대해서 세우지 못했지만, 고을 사람, 사람마다 가슴에 송덕비를 세웠으니, 참으로 지치(至治)하였다 할 수 있다.
옛부터 선비들은 명리(名利)를 쫓지 않고 의리(義理)에 맞게 살며, 학문에 정진하는 것을 크게 여겼다. 연암 선생이 바로 그 사표(師表)가 될만한 분이다. 명리에서 '명(名)'은 '명예"를 뜻하니 최소한 '체면치레'는 한다는 것이며, 또 최소한의 염치(廉恥)는 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요새는 명예도 저버리고 오로지 이익만 쫓아 마치 먹이로 달려드는 개떼처럼 체면도 없고, 염치도 없으니 참으로 말세라 할 수 있다. 옛사람이 다시 살아와 이 모습을 본다면 땅을 치고 하늘을 우러러 통탄할 일이다.
이 책을 보면 옛사람들의 기품과 풍모, 절조와 의리, 해학과 재치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이며, 말세를 달려가는 현 세태에서 미약하나마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다. 박종채 선생은 이 책을 통해 부모의 이름을 양명어세(揚名於世)하였으니 참으로 지효(至孝)라 할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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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의..아버지이기도하다...박지원은...조선..정조왕때의..실학자였던그는..연암이라는..호를가졌다...서울에서.태어난..그는..20세때까지..공부잘하기로수문났고(?)ㅎㅎㅎㅎ...30세때부터...세상에..이름을..날렸다고한다...1780년에는...청나라에가서..그곳의...풍습과..생활모습...등을..기행문으로..쓴.."열하일기"는...박지원이남긴..가장유명한...저서중하나이다...그리고그는...양반전..허생전..호질..민웅전....광문자전...역학대도전..등을..써서...양반들의...부패과..타락등을...비판하기도..하였다..상대가적이더라도..배울건배워야한다...그의사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