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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현종 대 1670년과 1670년 조선을 완전히 뒤덮었던 이른바 ‘경신대기근’을 깊게 파헤친 역사서다.
길게 봐서는 15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좁게 봐서는 16세기에서 18세기 중반까지를 소빙하기라고 한다. 지구 전체의 평균 기온이 떨어졌으며 이상 기후가 잇따랐던 시기다. 이상 기후로 인해 농작물이 작황이 좋지 못해 기근이 일상화되었고, 이에 따라서 왕조의 교체가 여러 지역에서 이뤄졌다. 조선에서는 왕조 교체 같은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대기근을 면할 수는 없었다. 특히 가장 극심했던 것이 바로 경신대기근이었다.
주기적으로 생기던 가뭄이 1670년이 들어서는 유래업이 수 개월에 걸쳐서 이어졌고, 가뭄이 끝나면서도 홍수가 닥쳤다. 과거에는 이런 상황이 어느 한 지역에 일어나고 다른 지역은 그래도 좀 나아 서로 상쇄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때는 그렇지 않았다. 전국이 가뭄과 홍수로 몸살을 앓았다. 거기에 전염병까지 창궐하면서 피해가 극심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5백만 명이 좀 더 되었다는데, 아마도 기아와 돌림병으로 백 만 명 가량이 죽었다고 하니 그 참상은 미뤄짐작할 만하다. 김덕진이 당시의 상황을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기본 자료로 삼아 현장을 중개하듯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참상과 더불어 조선 조정의 대응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여기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국왕이었던 현종이 고심하면서 주로 남인의 손을 들어주는 상황이 자주 연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송시열과 송준길을 중심으로 한 서인이 사사건건 현종과 허적을 중심으로 한 남인의 대책에 발목을 잡고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으로 보인다(”특히 송시열은 평소에 왕권을 억누르고 신권을 강화하려 했고, 기근 극복 때에는 힘을 실어주기는커녕 지방에 머물며 비판만 일삼고 이경성, 김우명 등 임금 측근과 틈만 나면 물의를 일으켰다. 더군다나 이 무렵부터 현종은 건강이 날로 쇠약해져 자신을 적극 지원하는 세력이 필요했는데 그 세력이 바로 실무형 관료 허적, 남인, 척족이었다.“, 304쪽). ![]()
주로는 전염병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 읽었지만, 전염병에 관한 장에서도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가 중심이고, 그 전염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양상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서술되고 있지 않아서 조금은 실망스럽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이상 기후가 우리나라에도 닥쳐 그런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 자체는 달리 그에 대해서 언급은 하고 있지 않지만, 현재의 시점에서도 충분히 교훈을 삼을 일이다.
몇 가지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것 중에 하나는, 숙종 때 발행된 상평통보가 상업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현종 때 대기근에 대응하여 국고를 메우기 위한 방도로서 제기되었던 것이 무산되었다가 이후 숙종 때에 와서 발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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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근(大饑饉), 조선을 뒤덮다‘는 소빙기, 현종(顯宗), 미수 허목 등에 대한 관심에 따라 고른 책이다. 책이 다룬 시기는 경신 대기근 시기로 경신년이란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의 머리 글자를 딴 이름이다. 소빙기란 16세기에서 17세기 또는 17세기에 해당하는, 빙하기는 아니지만 비교적 추운 기온이 지속되었던 때를 말한다. 유럽인들의 아메리카인 대학살이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세계 인구의 10%가량인 6000만명에 이르던 아메리카 원주민 수는 유럽인들로 인해 큰 변화를 맞았다. 유럽인들의 학살이 의도적 결과였다면 그들이 신대륙으로 천연두와 홍역 등의 바이러스를 가져온 것은 비의도적 결과였다. 침략의 충격으로 인한 사회적 스트레스도 한 몫을 차지했다. 이런 여러 요인이 겹쳐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는 100년 만에 500만~600만명으로 줄었다. 줄어든 인구가 부른 것은 경작의 감소였다. 이는 초목의 자연적 재생(재산림화)을 유발했다. 이에 따라 이산화탄소가 줄어들어 온실효과가 사라졌다. 이런 연쇄가 초래한 것이 소빙하기였다.(2019년 10월 19일 한겨레신문 기사 '유럽인들의 아메리카인 대학살이 기후변화 초래' 참고) 컬럼버스가 신대륙에 진출한 1492년에서 1650년 사이 아메리카 인구가 5천 만에서 5백 만으로 감소했다는 보고도 있다.(2019년 1월 3일 오마이뉴스 기사 ’8천만 명→1천만 명... 인류 최대 인종학살‘ 참고) 당시 이산화탄소가 줄어든 사실은 남극 얼음 속에 갇혀있는 당시 공기를 분석해 알아낸 바이다. 나무 나이테로 몇 백년전, 몇 천 년전의 날씨를 알아볼 수 있고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의 지구 온도는 얼음을 통해 알아낸다. 남극, 그린란드 등에는 몇 만년전부터 온 눈들이 얼음이 되어 쌓여 있다. 이 얼음을 분석하면 눈이 내린 당시의 연평균 온도, 계절별 온도까지 추정할 수 있다.(최성락 지음 ’말하지 않은 세계사‘ 17 페이지) 최성락은 조선 영정조,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프랑스 루이 14, 15세 등이 모두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칭송받지만 이는 왕이 잘해서 국민들의 소득이 늘어났다기보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국민들의 소득이 늘어난 때에 우연히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라 말한다. 18세기 말은 지구 평균 온도가 하강했고 온도 하강 추세가 몇 백년 정도 지속되었다.(최성락 지음 ’말하지 않은 세계사‘ 19 페이지) 17세기 조선에 연이은 대기근이 닥쳤다. 소빙기가 초래한 사건이다. 전술한 경술년, 신해년은 모두 현종 재위기였다. 1659년에 즉위해 1674년에 타계한 현종의 치세는 내내 참혹한 기근의 고난을 겪은 시기였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었으니 현종 재위기는 기해예송(1659년)과 갑인예송(1674년)이라는 정치적 격변이 몰아친 시기이기도 했다. 저자 김덕진이 기본으로 삼은 자료는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승정원일기 등이다. 덧붙여 이해 당사자들의 취사선택에 의해 작성된 실록 및 승정원일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문집, 기타 고문서 들을 참고했다. 현종실록이 남인 집권기에 편찬된 책이라면 현종개수실록은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을 추방하고 집권한 서인이 재편찬한 책이다. 현종개수실록에는 현종실록보다 재해 건수와 내용이 풍부하게 수록되었다. 하늘의 뜻에 부합하지 못한 남인 집권층의 실정을 부각하려는 의도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기후적 관점에서 소빙기란 약 100만년전에 시작해 10만년전에 끝났다는 빙하기에 비해 정도가 작다는 의미다.(22 페이지) 저자는 소빙기의 원인을 나열한다. 1) 태양 흑점 활동이 쇠퇴하거나 중지에 가까운 상태에 접어든 결과라는 설, 2) 거대 운석 등의 외계발(發) 충격으로 인해 대량의 먼지가 태양을 가려 급랭 현상이 일어난 결과라는 설, 3) 유별난 화산 활동의 결과라는 설 등... 17세기 위기론 또는 17세기 소빙기 설은 학계 전반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뒤 전 세계적 문제(글로벌 히스토리)로 발전했다. 조선시대에 기근은 마치 연례행사처럼 겨우 숨을 돌릴 만하면 어김없이 찾아왔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대기근이 전국을 휩쓸었다.(36 페이지) 저자는 조선의 대기근 극복을 천혜의 자연조건, 상부상조 정신, 극복 시스템에서 찾는다.(39 페이지) 천혜의 자연 조건이란 말은 한 지역 안에 재해를 경미하게 입은 곳이 존재함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순창의 재력가 양운거는 몇 백 석의 미곡을 관아에 납부한 데 이어 1661년(현종 2년) 흉년이 들자 기아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조선 영조 대의 무관(武官) 류이주가 세운 99칸 고택 운조루(雲鳥樓)의 일화도 예시할 만하다. 굴뚝을 낮게 만들어 밥 짓는 연기가 멀리 퍼지지 않게 함으로써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했다. 이뿐 아니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 누구나 먹을 만큼 곡식을 꺼내 가라는 뜻으로 뒤주를 놓아 두었는데 그곳은 가져가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게 주인과 쉽게 마주치지 않는 곳이다. 조선은 지역 차원의 기근 구제 제도를 두었다. 소현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왕세자가 된 효종의 아들로 병사한 아버지를 이어 임금이 된 현종은 재위 내내 정통성 시비에 휘말렸다. 볼 사람은 미수 허목이다. 미수 허목은 기해예송(1659년)이 서인의 1년상 채택으로 종결되자 삼척에 부사로 좌천되었다가 2년이 채 되지 않아 경기도 연천으로 낙향했다. 윤휴와 허목은 10년 이상 야인 생활을 하다가 현종 말년에 정계 복귀했지만 윤선도는 복귀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서인과 남인의 대결은 신권 강화 vs 왕권 강화의 구도이지만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현종은 서인에 염증을 느끼고 1666년 이후 부쩍 남인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현종은 즉위 2년만에 아들(숙종)을 낳았다. 이에 송시열은 상중에 해서는 안 되는 부부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왕을 비난했다. 현종은 누이들의 집을 신축하는 일에 강경 입장을 보이다가 대신들의 말에 한 발짝 물러섰다. 대기근 때문이었다. 1670년의 자연재해는 냉해로 시작되었다.(106 페이지) 놀라운 사실은 7월에 우박, 서리 눈이 전국에 내렸다는 점이다. 찬바람이 불고 된서리와 찬비, 눈이 잇따라 내리는 겨울 추위가 1671년 봄까지 이어졌다. 가장 두려운 자연재해는 가뭄이다.(111 페이지) 전국 각도에서 기우제를 올렸으나 속수무책의 상황이 이어졌다. 봄 밭농사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모내기를 할 5월이 되어도 해갈 기미는 없었다. 오랜 가뭄 끝 비가 왔으나 폭우로 이어져 수해(水害)가 발생했다. 수해는 가뭄 못지않은 자연재해다. 76세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상소문을 올려 기청제(祈晴祭)를 행할 것을 건의했다. 영제(?祭)란 말이 있다. 오래도록 장마가 이어질 때 서울 사대문 다락 위에서 비가 그치기를 비는 제사다. 폭우는 폭풍과 함께 찾아오기도 했다. 아사자가 속출했고 황충(蝗蟲) 피해가 잇따랐다. 황충이란 농작물을 갉아 먹는 해충을 말한다. 1670년 ~ 1671년 재해는 냉해, 가뭄, 수해, 풍해, 충해 등 5대 재해가 겹친 전례 없는 대재해였다. 백성들은 재해, 염병, 우역(牛疫) 등 3대 악재에 시달렸다. 1670~1671년 2년간 우역으로 죽은 소는 4만여 두에 이르렀다. 소의 대량 폐사는 엄청난 재산 손실이었다. 소가 없으면 농사와 교통 수단이 막힌다. 소를 도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우금(牛禁)이라 한다. 우금은 소나무를 베지 몫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송금(松禁), 술을 담그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주금(酒禁)과 함께 조선의 3금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우역이 나날이 번지는 가운데 남아 있는 병들지 않은 소를 도살한 후 쇠고기를 팔아 이익을 챙기는 자가 있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현종 즉위(1659년) 후 해마다 흉년이 들어 기근의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1670년에는 유난히 갖가지 재해가 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거칠게 일어났다.(160 페이지) 경신대기근은 기근, 전염병, 가축병, 혹한이 삼중 사중으로 겹친 대재앙이었다.(161 페이지) 곡물가가 폭등했다. 사재기가 기승을 부렸다.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솔잎 먹기가 여의치 않았다. 정부의 송금령(松禁令)과 민간의 송계(松契)로 입산 및 채취가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뒤늦게 채취 허가 명령이 내려졌다. 시늉만 내거나 전혀 시도하지 않은 수령도 있었으나 함경도 감사 부임 직전 청주 목사를 역임한 남구만은 관아 뜰에 절구를 놓고 솔잎 가루를 만들어 기아자에게 먹여 큰 효과를 보았다.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란 시조를 지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 시조는 전원의 소박한 삶을 그린 노래가 아니라 맹렬한 '권력비판'의 작품이라고 한다.(시인 이상국) 해가 뜨는 창인 동창이 밝았느냐는 의미는 임금의 안목과 총기가 밝아졌느냐는 의미고, 노고지리 우짖는다는 의미는 간신들이 왕에게 거짓을 고한다는 의미고, 소치는 아이가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의미는 충직한 목민관이 등장하지 않았느냐는 의미고,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는 벼슬아치들이 당파 싸움에 매몰되어 벌이는 말꼬리 싸움을 언제 그치고 산적한 현안 해결에 나설 것인가를 묻는 의미다. 남구만의 시조는 숙종이 장희빈을 책봉하는 일에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강릉에 유배된 상황에서 나온 작품이다. 굶주린 엄마가 어린 자녀를 삶아 먹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기아자와 걸인이 넘쳐났다. 아사자와 병사자의 동시 대량 발생이 현실이 되었다. 조선 천지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신 처리가 큰 문제였다. 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인륜 도덕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떠돌며 도둑질을 하는 사태가 잇따랐다. 시신의 옷을 훔치는 일이 빈번했다. 진휼소가 설치되었다. 줄을 잘못 서거나 동작이 느리면 솥을 국자로 빡빡 긁어도 국물 한 방울 없는 '국물도 없는' 사태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억만(億萬)이 진창(賑倉)에 나왔으니 엉망진창이었다.(238 페이지) 진휼곡을 빼돌리거나 진휼에 소극적인 지방 관리들이 많았다. 군포 면제, 토지세 감면, 부채 탕감 등이 건의되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진휼에 쏟아붓고 세금을 탕감하느라 생긴 국고 구멍을 메우기 위해 국가 예산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 군사비와 왕실비를 감축했지만 만족할 만하지 않았다.(283 페이지) 경신대기근은 남인과 척신을 앞세워 자신의 체제를 구축하려던 현종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302 페이지) 저자는 현종은 대기근에도 불구하고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기근 극복 과정을 통해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권위를 과시해왔다. 측근 신료들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과감하게 비축곡을 풀고 세금을 감면해 민심 수습에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서인들이 이상론으로 포장한 간섭을 물리쳤다. 대기근은 현종에게 돌파구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 효종 비 인선 왕후 장씨가 죽자 예송이 다시 발생했다.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다. 1674년의 일이다. 1차 예송인 기해예송은 효종이 죽자 상복을 몇 년을 입어야 할지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한 사건이다. 1차 예송에서 서인은 1년, 남인은 3년을 주장했고 2차 예송에서 서인은 9개월, 남인은 1년을 주장했다. 1차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2차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1674년 재위 15년만인 서른 넷의 젊은 임금 현종이 죽었다. 저자에 의하면 현종은 신하들에게 끌려만 다니고 신하들의 눈치만 본 군주가 아니었다.(309 페이지) 여러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권위와 왕실의 위엄을 세우려 노력했다. 현실주의자로서 민생안정과 부국강병을 도모했다. 그러나 기후 변화가 끼친 영향 속에서 이상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연천 사람인 나에게 대기근 중 미수 허목의 거취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미수의 이름은 오르내리지 않았다. 경신 대기근 시기는 미수가 연천으로 낙향해 세월을 보낸 시기와 겹친다. 대기근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사안은 예송논쟁의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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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과 병자년의 왜란과 호란 그리고 영, 정조 시대는 500년간 지속된 조선이란 나라를 살펴볼 때 꽤 중히 여겨지곤 한다. 그렇지만 양자의 중간 즈음에 해당되는 17세기에 대해 주목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나라를 뒤흔든 전쟁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성군이 등장해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17세기를 임진왜란 이후 견고했던 신분제가 서서히 무너지던 시기로,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치열했던 시기로만 기억할 것이다. 편을 갈라 싸우는 것이 우리네가 지닌 민족성이라고 일본인들은 말하곤 했다. 그런데 치열한 당쟁이 일어났던 원인에 대해 말하지 않은 채 그 현상만을 주목하는 것은 일제의 주장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 저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17세기를 파고 들어 우리가 생각해내지 못한 요소를 기우는 조선의 원인이라 하였으니, 날씨가 바로 그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17세기는 아주 특별한 시기다. 이때 지구 기온이 전반적으로 약간 내려가 추운 날씨가 잦았고, 이에 따라 빙하의 면적과 두께가 넓어지고 두꺼워지는 소빙기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빙기란 지금으로부터 약 100만년 전에 시작해 10만 년 전에 끝났다는 빙하기에 비하여 그 규모가 작다는 뜻이다. –p 22 서양에서는 이미 20세기 초에 ‘17세기 위기론’이 등장했다. 30년 전쟁, 청교도 혁명, 유럽 대륙 곳곳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소요들을 떠올리면 그럴싸하다. 이러한 혼란이 기후 재앙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그렇다면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 오늘날에야 냉난방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날씨라는 변수의 영향력이 많이 약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종종 이상 기후로 인한 고통이 존재하며,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도 있다. 혹독한 무더위로 인해 죽어나간 프랑스의 고령자들, 영상 4도까지 떨어진 기온으로 인해 얼어 죽었다던 태국 사람들. 현대에도 그와 같은 죽음이 발생하는데 17세기에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기후가 떨어졌다면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는 결국 승자의 기록이다.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당쟁 혹은 붕당정치로 인해 엄정한 객관성이 요구되는 실록조차도 완벽한 객관성을 이루지는 못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상대를 깎아 내리기 위해 혹은 제 자신을 치하하기 위해 기록이 윤색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하더라도, 17세기를 들여다 보면 꽤 많은 기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치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지만,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유랑 끝에 죽었다. 농사는 이미 오래 전에 하늘의 진노(메마름과 폭우)로 인해 놓아버린 사람들이 조선 땅에 그득했다. 효종과 현종 그리고 숙종 대에 이르기까지의 집권층은 제 역량을 오로지 이상 기후 탓에 야기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집중해야만 했다. 신분제가 문란해져서 양반의 인구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던 조선 후기에 대해 배우며 나는 개개인의 타락, 한 국가의 역량 고갈 등을 떠올리곤 했었다. 하지만 대기근 때문에 속출하는 사망자와 유랑자들을 보듬기 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공명첩이 발행되었고 노비들이 양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니 우리의 역사에 대해 이제껏 품었던 부정적인 생각이 다소 희석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위기는 피지배층에겐 역설적이게도 기회였다. 대기근을 해결키 위한 방책이 서울에 집중되었고 지배계층이 굶어 죽는 일로부터 약간이나마 더 자유로웠다곤 하나, 살아 남은 피지배계층은 대기근 덕에 신분 상승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주목 받는 시대가 있으면 그렇지 못한 시대도 있다. 헌데 지금까지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했던 시대도 이렇게 파고들면 무언가가 있음을 알고 나니, 주목을 못 받는다는 게 덜 중요함을 의미치는 않음을 깨닫는다. 모든 시대는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다. 다만 인간의 선택에 의해 소란스럽기도 하고 침묵하기도 할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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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8대 임금 현종하면 두차례에 걸친 예송 논쟁당시 왕이라는 사실이 부각돼 있다. 현종대에 2년에 걸친 조선 최대의 기근 경신 대기근이 발생했다는 사건이 예송 논쟁에 묻힐 정도인 것을 보면서 우리 역사책들이 너무 정치사에 치중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왕실의 누가 상복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 예송논쟁이 남긴 정치적 파장보다는 백만명 이상이 굶어죽는 대참사가 빚어진 경신대기근과 그것이 남긴 여파는 17세기 내내 조선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다. 양란을 겪은 뒤, 일어난 경신대기근이나 그 경신대기근으로 조선사회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더 주목할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중세 흑사병의 창궐이나 아일랜드의 대기근이 얼마나 큰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참고한다면, 경신대기근과 그로 인한 여파와 조선사호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또한 이 못지 않게 가치가 있지 않을까.
경신대기근은 1670년( 현종11년)경술년과 1671년(현종 12년) 신해년 이태동안 벌어진 기근을 가리키는데, 조선 5백년 역사상 가장 심각한 기근이었다. 자연재해에 이어 기근 그리고 전염병까지 이어진그야말로 총제적인 난국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난국을 수습하느라 재정 고갈에 유민 발생, 범죄와 인륜이 땅에 떨어지는 등 그 악순환으로 인해 조선사회는 몸살을 앓을 수 밖에 없었다. 기근을 수습하기 위해 조정은 정치력과 자원을 총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재정 조달과 민생을 염두에 둔 제도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으로써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간에 조선사회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현종은 자연재해를 군주의 부덕으로 보는 유교사회에서 몸을 사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재위기간동안에는 혜성이 관측되고, 우박이나 태풍등 자연재해가 잦았다. 그 뒤 유례없는 흉작에 전염병까지 창궐하면서 피해자가 속출하게 되는데, 이 와중에서도 남인과 서인은 기근 대책을 두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현종은 허적을 중심으로 한 남인들을 정치적 동반자로 택하면서 대기근 수습을 시도했고, 그럼으로써 백성들을 규휼하는 한편 정변을 막아야 했던 것이다.
끔찍한 일이었다. 백만명 이상이 굶주림과 전염병에 시달리다 죽어갔다는 것은, 아비규환이라는 말외에는 표현할 말이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사회안전망을 감안해봤을 때 제대로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있는 백성들이 얼마나 됐을지. 살아남은 자도 온전할 리가 없었다. 이 대기간의 후폭풍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인구 격감과 유민의 발생으로 인해, 세수의 근간이 되는 인구와 농작물 생산이 격감할 수 밖에 없었고, 생산없이 이루어지는 대기근 대책에 재정이 고갈될 수 밖에 없었다. 조정은 당연히 세수 확보와 민생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수의 양인들이 유민이 된다는 것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기근으로 생존을 위해 자식을 버리는 등 인륜을 저버리는 일이 횡횅했고, 사회기강은 땅에 떨어져갔다.
이 기회를 틈타,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재야 지식인들은 조정에 대한 반역을 획책하기도 했다.이 당시에 정감록이나 미륵불이 백성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장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남은 것이 숙제였던 백성들에게는 자그만 희망이 되어주었던 것이리라.
조정도 조정대로 남인과 서인이 대기근 수습을 두고 당쟁과 마찰을 일으켰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재정과 민심을 회복하기 위한 제도를 내놓았다.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실시하는가하면, 납속책과 공명책으로 돈을 확보해 다시 백성들의 규휼에 쓰는 등 안간힘을 썼다. 조정은 이런 재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체계적인 구휼체계를 갖춰갔고 효율적인 구급방법도 숙지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18세기 기근때에는 이때보다 쳬계적인 방식으로 백성들을 구조할 수 있었다.
조선 최악의 민생위기였다. 두차례 전쟁에 이어 닥친 경신대기근은. 조선은 모든 역량을 동원해 구제에 나서야했다. 이 시절 당쟁이 부각되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면 더 격화될 수 있었던 당쟁이 대기근으로 인한 민생 위기에 그정도로 그쳤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백성들이 그렇게 굶주림에 시달리고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데에도 오로지 집권하는데 신경 쓰느라 백성들 구제를 도외시했다고는 믿고 싶지 않으니. 대동법이나, 양전, 호패법등 격감한 인구, 재정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세웠다고 받아들이고 싶다. 대기근으로 인한 후유증은 17세기 내내 조선을 괴롭혔지만, 반편 여러 면에서 사회변화를 초래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신분제도에도 변화를 가져왔고, 화폐 유통으로 상품과 유통 등 경제를 활성화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18세기 조선이 지탱하는 동력을 제공해주었다. 경신대기근은 백만명이상이 죽는 대참사였지만, 하늘은 위기와 함께 그것을 극복하는 길 또한 열어주는 모양이다. 극심한 위기에 빠진 민생을 구하기 위한 고육책들이 조선사회의 변화를 반영했고, 그 변화는 또다른 변화를 낳게 됐으니. 이 당시 조선이 조금 더 박차를 가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더불어 한 사회의 변화는 반드시 정치적인 개혁이 동반돼야 하지만, 그 변화의 시작이 정치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 역사가 너무 정치사에 함몰돼있는 것은 아닌지, 이 책을 읽으면서 역사에 대한 좀더 다양한 접근방법을 터 놔야하지 않을지. 과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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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지진, 가뭄 등 크고 작은 자연재해들이 국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일어났고 또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 기후와 우리나라, 특히 조선의 역사를 관련시켜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푸른역사에서 출간된 이 책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는 흥미롭고 새롭게 다가왔다. 그렇게 인상깊은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이 나타나지 않은 17세기의 조선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준 책이 바로 이 책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이다. 이 책의 저자 김덕진님은 전남대 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현재 광주교육대학교에 재직 중인 분으로 조선 후기 경제사 연구에 매진해온 분이시다. 저자는 수년 전부터는 기후의 역사를 탐구해 왔는데, 기후 변화가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서 노력해 오셨고 바로 이 책이 그러한 노력으로 탄생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1, 2차 예송 논쟁 등 정치적인 혼란기와 기후 변화를 연관시켜 풀어나가는 저자의 조선 이야기가 너무나 절묘해서 감탄을 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렇게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조선의 대기근, 특히 '경신대기근'의 처참한 모습은 너무 충격적이였다. 요즘처럼 과학과 의료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조선의 17세기에 일어난 대기근이기에 어느 정도의 피해는 예상했었지만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가축병까지 돌아 남아나는 소가 없고 먹을 것이 없어서 부모가 자녀를 삶아 먹는 사건까지 발생했다는 기록들을 읽으면서 그 끔찍하고 절망스러운 조선의 실제 상황들이 정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들이 맞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큰 위기를 맞은 시점에 백성들은 죽어나가고 있는데 관리들은 이 대기근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밥그릇 싸움만 하고 있으니... 요즘의 정치 상황과 비교하여 보아도 그렇게 달라진 모습을 발견 할 수 없어서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는 현재 큰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한번쯤은 읽어보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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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역사를 배우면서 대기근이나 자연재앙에 대해 배운적은 없다. 조선이라고 하면 주로 정치적 싸움이나 역사적 배경 그리고 주요인물들에 대해서만 배웠고 주요내용이나 그시절 환경이 어땠는지 알기는 무척이나 힘들다. 하지만 신분계급사회에서 평민이 살기는 아주 힘들었고 곡식이 풍요롭지 않았다는것 정도는 누구든 알고 있을것이다. 그중에서도 17세기 현종시기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조선의 왕중 특출나게 들어나고 이야기가 되는 왕이라고 하면 세종대왕을 비롯해 몇명뿐이다. 효종은 즉위기간도 짧았을뿐만 아니라 당파싸움으로 흔들렸던 줏대없는 임금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만난 임금 효종은 생각도 깊었고, 자연재해로 인한 고충도 많았던 임금인듯하다. 사상최대의 기근으로 사람이 죽어나갔고 역병이 돌았으며 가뭄과 물난리가 함께 나는등 한번에 너무나 많은 재앙들이 생겼다. 자연재해로 인해 백성의원망이 날로 높아가고 그 사이에도 본인들의 세력을 위해 당파싸움을 하는 신하들이 있었다. 아마 그 시기에 날씨가 어땠는지 그리고 상황이 어땠는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듯하다. 저자또한 일반백성의 일기를 찾지 못함에 아쉬워했듯 나도 그 부분이 아쉬웠다. 참고문헌의 부분이 글 중간중간 나와서 시대상을 읽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중간 사진과 그림등으로 이해를 잘 할수 있게 되어 있으며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시대상을 잘 그린책인듯하다. 나에게 역사는 조금은 어렵고 무거운 부분이 있다. TV를 통해서 보거나 책으로 만나도 주로 시대상을 그린 소설이다 드라마가 전부다. 물론 왜곡된부분도 있을것이고 그로 인해 잘못된 역사를 알수도 있겠지만 덕분에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것도 사실이다. 내가 역사서를 많이 만나보지 않았이지만 이 책은 개인적으로 제목에 끌렸었다.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라는 제목이 사람이 손이 가게끔 만드는 제목이었다. 읽으면서 내내 대기근이 정치에 어떤영향을 미쳤으며 어떤변화가 있었는지 잘 나타나고 있다. 난 상평통보는 그냥 조선시대에 발행되었다라는것만 알았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의도에 의해서 만들어 졌는지 그리고 시대상으로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 졌다는것또한 내가 알게된 새로운 사실이었다. 학교다닐때 가장 힘든과목이 국사였다. 무언가 외울것이 많았고 딱딱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책들을 만나면서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재미를 갖게 되었다. 이 책또한 나에게 역사에 대해 또다른 재미를 가르쳐준 책이다. 그냥 딱딱하게 몇년에 무슨왕이 즉위를 했고 무슨일이 있었다로 끝나는 역사를 이렇게 책을 엮어가며 만난다면 더 흥미가 생기고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역사가 없다면 우리 또한 없을것이다. 그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수많은 역사속의 사건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을것이다. 처음 저자의 소개글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가 겪는 환경대재앙과 경제위기가 지금 또다른 형태로 나타나는것뿐이지 조선시대 그 이전에도 분명히 있었으리라는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지구 온난화가 시작되어 수많은 병들이 생겨나고 가축들이 죽어나간다. 그와 약간은 다르겠지만 17세기 그때도 물난리가 있었고 심각한 가뭄이 있었다. 그리고 전염병이 돌았고 당파싸움이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AI니 광우병이니 하는 전혀 새로운 병이 나타나고 있고, 당파싸움이 여전히 남아있다. 지구의 어느나라에서는 심각한 물난리가 나서 사람이 죽고 냉해를 입는곳이 있고 어느곳에서는 빙하가 녹아 바다의 수위가 높아진다고 한다. 그 시대에 하늘이 노해서 경고를 내렸다는것처럼 지금 우리시대도 하늘에서 조금은 아끼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경고를 주는것이 아닐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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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알려주고 시작하는 파티보다는 서프라이즈 파티가 더 즐거운 법이다. 이 책은 내게 서프라이즈 파티 같은 느낌을 주었던 책이다.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17세기를 기후사적 관점에서 접근했다는 게 신기해서 이 책을 선택했었다. 푸른역사? 들어본 적 없네. 김덕진? 누구지? 저자와 출판사 모두 생소했고 무엇보다 '대기근'이라는 사건과 기후사라는 관점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기에 신뢰보다 흥미 위주로 택했던 책이었던 거다. 뒤늦게 알았지만,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미쳐야 미친다를 펴낸 출판사가 푸른역사였다는 걸 알았다. (개인적인 책 선택 기준이 출판사라서..^^) 17세기는 소빙기가 시작되는 시기였다고 한다. 빙하기라고 부르기에는 뭐하고, 기간이 짧기에 소빙기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 시기 조선은 냉해,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모든 자연현상을 다 겪었다. 한마디로, 농자천하지대본이라 하며 농업을 국가의 기반산업으로 삼았던 조선의 '뿌리'가 흔들린 것이다. 나라의 기간산업이 흔들리는 혼란 속에서 무사했던 왕조는 찾아보기 힘들다. 굶주린 백성들의 원망이 향하기 쉬운 존재가 바로 그 시대 집권층이었으니까. 같은 시기 소빙기를 겪었던 중국은 왕조가 교체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를 이겨낸 조선 왕조가 얼마나 대단했는 지 알 수 있다. 17세기 조선은 두 번의 대기근을 겪었다. 가뭄이 끝나면 홍수가 오고, 전염병이 돌았으며, 뒤이어 소가 죽는 우역까지 창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했고 겨울을 나지 못해 동사하는 자도 많았다. 종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염병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퍼졌고, 이 때 인구가 급감했다. 2년 연속 농사를 망치고 나라의 국고는 바닥나기 시작하면서 빈민구제조차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이 때 나중에는 부모가 자식을 죽여 먹는 비참한 상황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왕조는 교체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 시기를 발판으로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의식주 중 '식'이 흔들렸던 시기는 사회 전반적인 변화를 예고했고, 이 때 불거진 문제들을 하나씩 수습하면서 사회의 안정을 꾀했던 것이다. 자연재해가 일어나는 이유를 왕에게 돌렸고, 심하면 왕을 죽여야한다고 까지 여겼던 시대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는 하늘이 잘못한 게 아니라 인간에게 잘못이 있다고 여겼던 시대였다. 그런데도 조선은 어떻게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를 예종으로 시작해서 예종으로 생을 마감했고, 재위 기간 내내 대기근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현종의 공이 크다고 본다. 우리에게는 별볼일이 없는, 조선 600년조를 스쳐간 수많은 왕 중 하나였지만,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대기근이라는 대재앙을 극복해낸 그의 뛰어난 정치 능력을 다시 보고 배워야 한다. (어려운 시기에 발휘된 리더십이야 말로 진정한 리더십이라 생각한다.)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의는 무엇일까? 단순히 17세기를 '대기근'이라는 현미경으로 들여보자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저자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음을 알고 이 책의 집필을 서둘렀다고 했다. 환경의 변화가 끼치는 재앙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환경학자들은 지구의 기후변화가 오고 있고, 환경오염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얼마 전 모 방송국에서 방영했던 북극곰 다큐는 환경오염이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환경변화로 인한 재앙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고, 이제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할 때다. 환경오염을 막을 수 없다면 이에 대한 대비책만은 탄탄하게 세워야 한다. 나라를 믿을 수 없다면, 우리들 스스로라도 말이다. 이 책은 환경 변화로 인한 재앙을 보여주고, 우리에게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지혜를 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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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지은이 김덕진/ 푸른역사(2008.12.9) IMF 이후 우리나라는 수많은 난관을 헤쳐 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환율 인상과 유가고 등으로 경제가 말이 아니다. 국가의 재정은 고갈 위기에 있다. 17세기 현종 때도 그랬다. 이른바 소강기였던 그 때, 한반도에도 어김없이 대기근이 왔던 것이다. 기근은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고, 정쟁을 불러일으켰다. 서인과 남인은 대기근을 빌미로 정치적인 역량을 키우려고 했다.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기아자는 늘어났다. 임금은 당황했고, 심지어는 임진왜란 이후로 한 번도 외국에 손을 벌린 적 없던 조선의 자존심을 허물고 청에 원조 요청을 했다. 하나의 대하소설을 읽고 있는 듯 재미도 있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모질고 독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인가, 잠시 공포스러웠다. 17세기 현종의 시대, 그러나 그 시대만의 문제였으랴! 역사는 이어진다. 어떻게든 이어진다. 오히려 현종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 훨씬 이전의 여러 복합적인 문제들이 터진 것이다. 다만 재수 없게도 기후까지 따라주질 않았던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능멸을 당했던가, 광해군의 몸부림은 뼈아픈 슬픔을 남긴 채 소멸되어 버렸고, 뒤를 이은 인조와 효종의 아픔도 커다란 인자가 되었다. 대기근이 조선 팔도를 뒤엎었다. 질병과 혼란으로 들쑤셨다. 그리하여 정말 말로 형용 못할 여러 가지 견디기 힘든 아픔을 낳았다. 지은이는 이 점을 낱낱이 밝혀 가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애를 썼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참으로 감명 깊은 살아 있는 역사였다. 그러면서도 시대를 벗어나지 않고 냉정하게 시대를 한정한 후, 유기적으로 기술해 간 방법은 탁월했다. 아, 우리나라에 이런 적이 있었구나! 한 마디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정말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면서도 오늘 날, 우리는 이 난국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고 보았다. 호라티우스의 ‘당의정’설이 생각났다. 비단 문학 작품은 아니지만 이 책은 하나의 역사서로서의 책무를 지고 가면서도, 문학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주면서 꾸준히 교훈적인 깨달음을 종용하고 있다. 직설적이지 않게. 나는 단지 한 가지만 말하고 싶었다. 정쟁은 안 된다. 민심이 흉흉할수록 정치를 잘 해야 하고, 양반이 늘어서는 안 된다. 노비는 굶어 죽어가면서도 노역에 시달려야 하고, 질병에 시달려야 한다면, 분명 ‘혁명’ 아니면 ‘변화’를 꾸준히 결행하려고 할 것이다. 새로운 ‘정감록’이 나오기 전에, 또 다른 미네르바가 나타나기 전에, 우리는 따뜻해져야 하고, 사회 지도층들은 깊게 반성해야 할 일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보면서도 모르겠는가?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말은 이제 제발 하지 말자. 돈을 가진 자들이여 그대로 결행하라. 뭘 어떻게 하라는 얘긴 안 해도 먼저 알아차렸을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