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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해보는 작가였다. 문체도 굉장히 독특하고, '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끌어가는 전개방식도 굉장히 신선했다. 정말 이 책에서는 '철'을 만드는 마을 이야기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온통 '철'에 집중하고, '철'을 숭배하고, '철'을 만드는 조선소 노동자를 존경하고 그렇게 되고 싶어한다. 그러던 도중 세상은 온통 녹 덩어리로 변해가고, 사람들은 '철'을 숭배하며 점점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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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라는 제목에서 단호함이 느껴진다. 김숨은 짧은 단편으로만 만났고 장편은 처음이다. 단편에서 좋은 느낌을 받았기에 기대가 컸다. 사실, 단편집 <투견>, <침대>에 대해 쉬이 읽혀지지 않는다는 평을 접했기에 살짝 긴장을 했지만, 소설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라고 할까.
소설은 시골 마을에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용하고 면밀하게 관찰하여 기록한다. 거대한 조선소는 작은 마을을 변화시킨다. 누군가는 발전이라고 할 것이다. 일자리가 생겼고, 경제적으로 안정을 주었다. 조선소에 다니는 아들, 남편을 둔 사람들은 모두에게 부러운 존재였다. 아이들이 자라 조선소에서 일하는 것을 꿈꿨다. 하여, 너도 나도 철선을 만드는 조선소에 취직을 하고 싶어했다.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 중에 ‘꼽추’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소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마을을 조선소에 다니는 푸른 작업복을 입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구분되었다.
조선소의 주인과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철선에 대해서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매일 같이 출근을 하는 사람들 조차 알지 못했다. 출근하여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생겼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었기에 무시했다. 마을엔 철로 가득했다. 철문, 무쇠 식칼, 무쇠 솥, 무쇠 가위, 쇠로 만든 관, 틀니까지 무쇠로 만들었고, 심지어 철을 약처럼 복용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모두가 조선소를 신봉했으나, 단 한 사람 ‘꼽추’는 예외였다. 그는 자신을 무시한 조선소와 마을 사람들을 증오했고, 틀니를 팔아 돈을 모았다.
시간이 지나고, 철옹성과 같았던 조선소는 어느 순간 사람들을 쫓아냈고, 마을에서 쇠를 빼앗아간다. 조선소에서 폐병으로 병원에 감금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조선소는 더이상 꿈이 아니었다.마을은 농사를 지을 수도 동물을 키울 수도 없게 되었다.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파괴되는 지난날 우리 사회의 모습이었다.
김숨은 조선소라는 거대한 자본에 지배되는 삶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노동에서 소외된 인물 ‘꼽추’가 그들을 상대로 돈을 모으고 집착하는, 조선소에 속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을 대조적으로 그렸다. 조선소에서 쫓겨난 아버지들을 통해 신성하다고 여겨졌던 노동이 한낱 소모품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절대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조선소와 철선에 의해 마모되어 철저하게 버려지고 소외되는 삶.
아침부터 까끌까끌하고 불그스름한 먼지가 북쪽에서 불어와 마을을 휩쓸었다. 그 먼지는 공기 중으로 번져나갔다. 대낮에도 마을은 급작스럽게 불어 닥치니 먼지로 인해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시큼하고 비릿한 쇠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녹(綠)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침저녁으로 녹을 한 숟가락씩 복용하는 늙은이들도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것이 녹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p 49
김숨의 소설은 우리 이웃의 모습이자 나의 모습이었다. 우리의 삶은 여전하게 자본의 지배 속에 있다. 소설속 조선조는 또 다른 이름의 수많은 조선소로 여전하게 존재한다. 삶이 지속되는 한 노동도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철선을 보는 이 누구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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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이벤트를 통해 받은 다섯 작품 중 두 번재로 읽은 작품이다. 작가의 이름이며 소설의 제목까지, 모두 인상적이었던 작품이다.
작은 시골 마을. 조선소가 생긴다. 노동자를 모집한다. 척박한 땅에서 어렵게 농사짓던 이들이 조선소의 노동자가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커다란, 세계에서 손꼽히게 커다란 철선을 만드는데 투입되었다고 알고 있다. 매일 매일 일하고, 일한다. 월급으로 가정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다. 주변에 상인들이 꼬이고, 조선소 노동자가 되려는 외지인들이 몰려든다.
노인들은 손자 손녀들에게 조선소 노동자가 되라며 가르치고, 조선소 노동자의 아내들은 점점 생활의 안정을 찾으며 무쇠칼로 살림 욕심을 내본다. 누구의 목소린지 모를 확성기 속 외침을 들으며, 하루하루 성실히 일해나간다. 그들의 노동으로 가족이 먹고 산다. 그러니, 결국 노동의 신성화가 이뤄진다. 아래 말처럼.
노동은 그들에게 일종의 구원이자 일종의 축복이었으며 일종의 선이었다. 그리고 노동은 일종의 종교이기도 했다. 그들은 노동을 통하여 회개했고, 노동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 그들이 구하여야 할 것은 노동밖에 없었다. 행하여야 할 것 또한 노동밖에 없었다. 축복과 평안도 노동 안에서만 갈구했다. 그들은 하루 동안 힘써 노동을 구하고, 힘써 노동을 행하였다. 노동을 구하는 한 그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p19)
글쎄. 그게 전부일까. 무엇을 위한 노동인지, 누구를 위한 노동인지, 내가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인지,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고민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를 노동으로 살아내었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작가는 지리하디 지리한 조선소 노동자들의 삶을 통해, 한 마을의 흥망성쇠를 통해 보여준다. 기승전결이란 전개보다는 마치 인류학자가 어느 마을 참여 관찰일지를 쓴듯한 구성으로 보이는 이 작품이 그래서 잘 벼려진 무쇠칼처럼 좀 섬뜩하다. 하지만, 꾸역꾸역 읽어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더라. 아주,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낸 것만은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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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하지만 생소하지 않은.
철선을 만든다는 설정부터 한 마을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책은
철에 대한 신봉부터 철을 한 국자씩 먹으며 사람들의 이목을 잡는 편씨까지
직접적으로 들어난 것 없이 이전 우리나라의 사회상을 잘 들어내는 것 같다.
어찌보면 한 편의 소설을 읽은 느낌보다 은유적 사실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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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산업화가 시작되던 1960년 아님 1970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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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무엇을 의미할까를 일일이 말하는 것은 아주 소모적인 일일 게다. 그만큼 철이 의미하는 것은 많으니까?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한다면 더욱 그 의미는 많아질 것이다. 이런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꼽으라면, 조선소를 중심으로 하는 마을, 즉 모든 것이 철로 친친 휘감기는 마을과 그것이 창조한 소설 속 분위기가 마치 하나의 생명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조선소의 흥망성쇠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의 생멸과정과 같은 느낌이었다. 용광로는 마치 그 생명을 요동치게 하는 심장 같았고, 그것이 내뿜는 연기와 안개는 그 생명이 쉬는 숨 같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노동자가 되지 못한 근로자들의 기식적 삶은 마치 자본과 산업의 기생충 같다는 생각? 그래서 그들은 숙주의 몰락과 함께 여지없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스스로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운명을 탓하며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장치로서의 조선소, 장치로서의 제도 안에서 이들 처럼 기식하며 상멸(相滅)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그렇다면 우리가 상생하는 길은 여기서 벗어나는 일일텐데... 카프카의 돌연한 출발과 바틀비의 ‘I would prefer not to-’의 전략이 필요하단 말인가...... 이 소설은 철과 조선소가 너무나도 뻔한 상징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만, 동시에 그 뻔한 것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의 흥미를 충분히 자극하는 소설이다. 그녀의 다른 소설 물로 넘어가야 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