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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작가 임레 케르테스는 1944년 폴란드 아우슈비츠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1945년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소설 <운명>은 작가의 열다섯 소년시절 세 군데의 강제 수용소를 옮겨다니며 참혹한 현실을 견뎌내야 했던 암담한 이야기를 담담한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부다페스트에서 살고 있던 주인공 "나"는 다음 날 노동수용소로 근로 봉사를 떠나야 하는 아버지와의 기약없는 생이별에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열 다섯살 소년이다. 친척들과의 오붓한 저녁식사 장면은 영화 "지붕위의 바이올린"을 연상케 하는데 유대인 가정의 엄격하고 암묵적인 분위기가 대체적으로 무거운 시절을 대신하는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로 집안을 꾸려가야 하는 "나"는 노동 허가증을 제공받고 부다페스트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쉘 정유공장"에서 밥벌이를 시작하게 된다. 어느 날 공장으로 향하는 버스가 검문소를 지나면서 독일군의 저지를 받게 되고 순식간에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어딘론가 끌려가는 신세가 된다. 집에서 멀어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서술이나 묘사가 아주 침착하게 전개되는 방식에 대해서 시대의 비참함이나 앞으로 닥치게 될 끔찍한 운명을 반어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인간군상들의 안이한 심리상태나 가벼운 마음으로 피크닉가는 기분에 들뜬 듯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행 기차를 타고 마는 유대인이 섞인 무리들의 대화가 실로 순진하고 단순하기까지 하다. 이는 그들의 비유를 제대로 맞출 줄 알았던 독일군들의 이중적인 예의가 한 몫을 담당한다. 폴란드의 오시비엥침, 독일식 발음으로는 아우슈비츠라고 하는데 그 곳의 실상은 현재 박물관으로 만들어져 그 곳을 찾는 이들에게 그 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각 나라별 수용소 건물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건물안에 당시의 수용자들의 물건들, 구두, 가방, 심지어 머리카락 무더기까지도 볼 수가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한 곳에 몰려 있는 굴뚝이 보이는데 그 내부의 모습은 화장장의 적나라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수용소에 들어오면 먼저 일정한 건강 검진을 통하여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그 곳에 수용될 사람과 가스실을 거쳐 화장장으로 갈 부류! 주인공 "나"는 언젠가부터 맡게 되는 냄새가 일명 "가죽공장"이라는 곳의 굴뚝에서나는 연기때문이라고 여겼는데 실제로는 부적격 건강 판정을 받은 사람들을 모조리 살육하는 가스실을 통과한 시신들의 화장터인 것을 알고 경악하게 된다. 그 때부터는 절대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하거나 지독한 굶주림과 설사에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주인공 "나"는 아우슈비츠를 거쳐 짜이츠 수용소로의 이동하게 되고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에서의 고통과 모욕의 삶은 1945년 4월 해방을 맞이하면서 끝이 나는데 고향 부다페스트로 돌아간다는 해방감 이전에 운명에 맞선 삶의 이질감에 스스로 침잠하게 된다. 수용소밖의 변함없는 삶. 노동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에 대한 소식. 힘든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일찌기 개가한 계모. "나"를 억압하고 짓누르는 질문들 존재감의 실체를 느끼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대담한 속내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사람들이 완전히 자연스럽게 살아가지 못하는 부조리는 없다. 이제 내가 가게 될 길 위에 피할 수 없는 덫처럼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악과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내게는 이런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면. <본문 중>
극단적인 나치의 지옥을 생생하면서도 자존감을 잃지 않게 그려놓은 소설 <운명>은 가혹한 시절의 광기를 직접 경험한 작가의 존재감 회복과 숭고한 자유의지가 느껴지는 소설이다. 작가의 철학적 삶의 메시지가 강렬하게 전달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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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2002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니... 난 거의 1년이 넘게 이 책을 읽은 것 같다.. 솔직히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은 도대체 어떨가 싶어서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었다. 책을 읽으며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독일의 유태인 학살..강제수용소를 다룬 내용이기에.. 마음이 무너지기도 했고.. 충격적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정말 이 책의 번역가의 말처럼.. 그 모든 참담한 현실들을 너무 담담하게 써내려간 책이 이 책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정말 그래서 내가 이 책에 몰입하기 더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말한다.. 운명이 있다면 자유가 사라지게 되고 자유가 있다면 운명은 없는것이라고.. 그래서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고... 마지막에 이 글귀를 읽으며 정말 한참 동안이나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지었다.. 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련다. 그리고 내게주신 자유의지를 하나님 뜻에 맞춰 행하기 위해 더 많이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해 질것이다..라고.. 그 길이 때로는 힘들지라도 그 길이 나를 살리는 길임을 알기에.. 난 어째..항상.. 책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느끼고 결론내리는 것 같다..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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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상한 일들이 참 많이도 일어난다. 전쟁이나 암살 같은 건 과거에나 가능했던 일인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최근에도 벌어졌고 앞으로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악하고 세상은 필연적으로 부도덕한가. 이런 생각이 들 때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1944년의 아우슈비츠일 것이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는 세상이 비인간적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이 절망적인 세상 앞에 문학은 무얼 할 수 있을까. 문학이 희망을 줄 수도 있을까. 임레 케르테스라는 헝가리의 한 청년이 1년 만에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것은 기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첫 장편 소설인 『운명』은 그 기적적인 생이 낳은 또 다른 기적이 되었다. 그는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글은 무사히 쓰여졌다. 이 두 가지 사실 사이에는 모종의 인과관계가 숨어 있는 것만 같다. 아마 그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썼거나, 쓰기 위해서 살아남았을 것이다. 전자라면 고백하기 위함에, 후자라면 고발하기 위함에 가까울 텐데, 아무리 봐도 이 글은 둘 다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운명』은 왜 쓰였고 무엇을 말하는가. 한 마디로 말해 이 소설은 절망의 기록이다. 절망 위에 또 다른 절망이 쌓여서 원래 있던 절망은 더 깊은 절망이 되고 그 사이로 또 다른 절망이 겹치면서 지독하게, 아득하게, 온 힘을 다해 절망하는 소설이다. 그가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 짜이츠 등의 강제 수용소 여러 곳을 전전하며 견뎌낸 시간이 절망이 아니고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그의 문장에는 한이 서려 있다. “어느샌가 그의 주먹이 내 얼굴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나를 때려눕힌 후 장화로 갈빗대를 짓밟았고 손으로 목덜미를 조르면서, 내 얼굴을 다시 시멘트 바닥에 대고 눌렀다. 내게 시멘트를 긁어모으고 핥으라고 했다.”(187면) 그가 수용소에서의 일을 ‘묘사’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기술(記述)’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소설이 어떤 자아의 내밀한 고백일 수도, 부정한 세계에 대한 고발일 수도 없게 만드는 대목이 있다. 우리의 주인공은 극심한 강도의 강제 노역과 불충분한 영양 공급으로 인해 돌이키기 힘든 신체적 결함을 안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나치들은 일할 능력을 잃은 그를 당연히 죽일 것이고, 가스실이라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이라던가 총살이라던가… 그들이 택할 살해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주인공. 그의 눈에 비친 수용소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인용 부분의 저 충격적인 마지막 문장은 과연 나치 강제 수용소에 대한 미화(美化) 인가? 조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우리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이다. 132면을 펼치니 주인공이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나는 아우슈비츠에서도 지루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조차 지옥은 아니다. 그를 포함해 그곳의 수감되었던 이들은 '적응'했고, 가끔은 '지루해'했다. 심지어는 죽음이라는, 한 인간으로서 요구받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경우에는 그곳마저, 그리고 그곳에서의 끔찍한 생활마저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임레 케르테스의 글은 고백도 아니고 고발도 아니다. ‘위로’다. 그런데 그 위로가 진정한 위로일 수 있었던 것은, 충분한 절망 덕분이다. 다시 묻자. 문학이 희망을 줄 수도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운명』의 주인공은 지상의 지옥이라고 불리던 나치 강제 수용소를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라 하지 않았나. 과연 인간은 절망적인 세계에서 끝없이 절망하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언제나 희망은 절망 뒤에 온다는 것. 누군가 사력을 다해 절망하지 않고 손쉽게 희망만을 말한다면, 그 희망을 과연 누가 신뢰할 수 있을까. 오직 끝까지 절망해 본 사람만이 믿을 만할 것이다. 지독하고 아득한 절망. 그런 절망의 한복판에 있어본 사람만이 희망을 말할 자격이 있다. 오직 그렇게 말해진 희망만이 유효한 희망일 테니 말이다. 절망적인 세계에서 문학의 역할은 가장 깊게 절망하는 일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오늘날 시인의 책무가 “가장 먼저 울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일”(「천안함, J 선생님께」, 2010)이라고 썼다. 그의 말대로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자 절망을 가둬 두는 절망의 구조물이어야 할 것이다. 문학은 함부로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희망을 말하려거든 끝없는 절망을 먼저 펼쳐 보여야 한다. 다시 한번 신형철 선생의 말대로, “우리의 나약하고 어설픈 절망을 위해 문학은 있다. 그리고 희망은 그 한없는 절망의 끝에나 겨우 있을 것이다.”(「모국어가 흘리는 눈물」, 2007) 온 힘을 다해 절망하고 난 후에만 겨우 바랄 수 있는 일이야말로 한 줄기의 희망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 『운명』의 마지막 문장은 얼마나 절망적인 끝에 희망적인가.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으로 가득하다. 온갖 '끔찍한 일'을 겪고 절망한 한 인간의 인생사. 그는 아직 희망을 말한 바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은 누구라도 희망을 읽었을 것이다. 문학은 희망을 직접 말하는 대신, 독자들의 마음속에서 그것이 스스로 피어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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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들러리스트>나 <더 피아니스트>등등의 영화를 통해, 유대인학살은 끔찍이도 봐온 터였다. 문화유럽인 독일이 20세기에 자행한 야만적인 행동들에 충분히 소름끼치고, 분노하였고, 근래엔 이런 유태인학살을 고발한 책이나 영화들이 쏟아지면서, 이제 더 이상 가스실도, 임상실험도, 이유없는죽음도 내겐 무뎌지는 지금. 상이내용을 다룬 이 소설은 노벨문학상수상집이 아니었더라면, 관심도 갖지 않았을터.
그냥그냥 좀스레 읽어갔고, 노벨상이라는 큰 상을 거머질만한 가치가 있는지 건방떨며 확인해갔다. 작가가 경험한 수용소생활을 너무도 덤덤히, 냉정하리만큼, 어떤면에선 무한한 긍정으로 표현되어지는 그의 소설은, 까뮈분위기와 얼핏 비슷하기도 하고. 얼핏 작품전체적으로 작가의 정신을 너무 많이 토로하지 않나..하는 염려가 될만큼, 외면적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게, 내가 판단컨대, 흠이지 않나.. 싶은, 수용소의 비참한 생활중에서도 분명 행복한 시간이 있다고 주장하는 그는(예컨대, 키가 큰 독일군이 멋지다라고 표현하고, 수용소의 어스프레한 저녁시같엔 아름답다고, 아침커피시간은 그야말로 행복한 시간이라고 계속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유가 있는 한 운명이란 없다"라며 자기 자신이 운명이라고 말한다.
주인공 죄르지는 자유의 몸이 된 뒤 부다페스트의 길모퉁이에 앉아, 이렇게 중얼거리며 소설을 끝난다.
"나는 살아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모든 관점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 나는 이어질 수 없는 나의 실존을 계속 살게 될 것이다. (....) 사람들이 완전히 자연스럽게 살아가지 못하는 부조리는 없다. 이제 내가 가게 될 길 위에 피할 수 없는 덫처럼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악과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내게는 이런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면."
분명, 케르테스는 운명에 갇히지 않았고, 운명 안에서 자신만의 자유를 찾으려 했다.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그 내적 자유를 누가 금지시킬 수 있겠는가, 그런면에서 주인공 죄르지는 충분히 내게 낭만적인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소설은 재미있었고, 수용소생활의 잔일성이나, 시대와 역사의 부조리에 대해 아주 객관적으로 덮어가는 묘사를 함으로, 동일내용을 다룬 기존작품들과 다른 면면을 볼 수 있음에 흥미스럽다. 허나, 앞서 말했다시피, 작가의 목소리가 전체적으로 상당히 많이 드러남으로 작품을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이게 또하나의 사상집같이 느껴지는 무엇을 배제하긴 힘들었다. [인상깊은구절] 사람들이 완전히 자연스럽게 살아가지 못하는 부조리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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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이라는 무거운 표지 밑에는 하루도 채 되지 않아서 읽을 수도 있는 담백한(?)문체가 담겨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리뷰를 보며 예전 생각이 났다. 어려운 시간을 묵묵히 지내오던 내게 친구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담담히 지낼 수 있니?'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남들이 지켜보던 내 묵묵한 시선안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많이 상처받고 또한 성장했는지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마치 한 소년의 성장 소설처럼 느껴지는 이 책은 여러번의 탈고를 거쳐서 출간하는데 20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작가가 말 했듯 어떤 일을 A부터 Z까지 한꺼번에 부딪히는 것과 A부터 Z 까지 순서대로 경험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담담한 시선의 작가와 그 시선을 당황스러워한 독자간의 간격만큼이나 말이다. 운명은 다가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가가기도 한다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이 책의 원제가 '운명 없음' 이었다는 걸,결국 니 자신이 운명이 되어라는 외침을 가슴깊이 새기며 책을 손에서 떼어놓을 수 있었다. [인상깊은구절] 운명은 다가오기만 하는 것이아니라 우리가 다가가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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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홀로코스트는 그냥 책 속에서 보아 온 그러한 허구의, 상상 속의 비극일 뿐이다. 임레 케르케스는 바로 이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자'이다. 하지만 이 '살아남은 자'임레 케르케스는 다른 수용소 출신의 작가들-장 아메리, 파울 첼란 등-과는 달리 수용소의 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도, 그리고 분노에 찬 시선으로도 보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수용소의 생활보다, 그 속에서 살아간 자신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15세의 죄르지는 헝가리인으로 유대인이기도 하다. 그에겐 아버지-그의 아버지도 근로봉사라는 명목으로 수용소에 끌려간다- 그리고 계모가 있다. 이 죄르지는 항상 노란 별을 달고 다니는데, 이는 그가 다른 이들-별을 달지 않는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항상 나타내준다. 그냥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별을 숙명처럼 달고 다녀야 하는 것이다.
체펠에 있는 쉘 정유공장-이 때에도 쉘의 악랄한 착취는 계속되고 있었다-에 취직하게 된 죄르지는 어느 날 출근하기 위해 버스에 오르지만, 중간에 있는 검문소에서 같이 정유공장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유대인 어른들과 함께 내린게 된다. 그냥 체펠로 가는 단순한 요식행위에 불과한 일인지 알고(그들은 체펠로 갈 수 있는 증명서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죄르지와 그의 친구들-은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듯이 즐거워하며, 상부의 지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병영에 끌려가고 거기서 벽돌공장, 다시 독일로 넘어가게 된다. 이제 그들이 도착하게 된 것은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더럽고 치욕스러운 이름. 바로 아우슈비츠였던 것이다. 이 아우슈비츠에서 머리를 박박 깎고 죄수복을 입게 되고, 이 아우슈비츠에서 죄르지는 3일을 보내게 된다. 그 후 부헨발트 수용소로 이동하게 되는데, 죄르지는 이 곳이 아우슈비츠에 비하면 마치 천국같다. 가끔 식사 때에 '덤'이라 부르는 수프에 있는 건더기도 얻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지 않아, 죄르지는 짜이츠 수용소로 다시 이동하게 된다. 이 짜이츠 수용소는 소(小)수용소로 죄르지에게는 모든 것에 무디어지게끔 만든 곳이었다. 그렇게 짜이츠에서 생활하던 중, 죄르지는 무릎과 허리에 고름이 차게 되고, 이리저리 실려다니다, 다시 부헨발트에 돌아오고 거기서 해방을 맞는다. 그 후 집에 다시 돌아오지만, 자신의 계모는 아버지의 재산을 맡아 가지고 있던 쉬퇴라는 작자와 재혼한지-죄르지가 수용소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는 1년이라는 시간이 소비되었다-오래였고, 자신의 이웃들은 그저 죄르지에게 지난 시간을 잊어버리란 말만 되풀이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죄르지는 바로 임레 케르케스 자신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임레 케르케스)은 그 악랄한 수용소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자신의 무릎에서 고름이 철철 흐르게 만든 그 수용소에도 나름대로 행복이 있었다는 것이다. 죄르지가 이러한 시선을 갖게 된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이 운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원제가 "운명 없음"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로 자신이 운명이기 때문이다. 어떤 굴레도 없다. 어떤 정해진 길도 없다. 오직 앞에 놓인 장애를 극복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낼 수 있는 자신의 의지가 바로 운명인 것이다. 만약 자신이 이렇게 수용소에 있는 것이 그냥 누군가가 정해놓은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는 자살을 했을지도 모르고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밧줄에 목을 매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가 운명이라고 굳게 확신한다.
" 나는 살아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모든 관점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나는 이어질 수 없는 나의 실존을 계속 살게 될 것이다...사람들이 완전히 자연스럽게 살아가지 못하는 부조리는 없다. 이제 내가 가게 될 길 위에 피할 수 없는 덫처럼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악과 '끔직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면"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그것이 자신의 의지며, 그 자신의 의지로 그 수용소에서의 고된 노동을 자신만의 상상-자신이 아주 편안하게 집에서 뒹굴고 있다던지 하는-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임레 케르테스는 매우 극한 상황, 그리고 억압하는 정치, 사회구조에서도 자신의 의지가 곧 운명이라고 믿는 인간을 보여주고 있지만, 또 하나의 경고가 그의 소설 속엔 내재되어 있다. 현대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은 오히려 이 세상 자체가 아우슈비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의 의지나 실존 등을 망각하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과 비슷한 느낌의 한국 소설을 꼽으라면 난 박완서의 '그 산이 거기 있었을까'를 꼽겠다. 지나온 역사의 어두운 그늘을 고발하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갖고 시대에 맞서 살아남는 인간의 의지가 박완서의 소설에서도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운명이라는 자아의 의지에 대한 확고한 믿음. 이러한 믿음에 대한 교훈이 임레 케르테스와 박완서가 주고자 한 교훈은 아니었을까? [인상깊은구절]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바로 이에 대한 죄르지의 생각이다. 임레 케르케스가 수용소의 생활을 담담하게 묘사해, 수용소의 일상이 크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이 부분에서는 정말 섬뜻하리만큼 수용소의 삶이 와 닿았다. 먹을 것에 굶주린 자신과 수용소에 있는 죄수들을 이와 동일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제일 놀라고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던 것은 허리의 염증 부위가 갑자기 근질거릴 때였다. 종이 붕대를 들쳐서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내 살을 갉아먹고 있었다. 나는 약간 참고 기다리면서 이를 털어 내고, 끄집어내고, 추려내고, 밖으로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처럼 승산없는 싸움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얼마 뒤 나는 싸움을 포기하고,이제 이들이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들의 우글거림, 식성, 탐욕, 그리고 저 거칠 것 없는 행복을 가만히 지켜 보고 있었다. 어쩐지 언제부턴가 이런 모습을 약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점에서는 이들의 이런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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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단계가 끝나고, 그것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 다음 단계가 바로 다가온다. 그런 식으로 해서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그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이해하게 된다.
줄거리 。。。。。。。
독일에 의해 강제 병합된 헝가리에 사는 유대계 소년 죄르지. 악명 높은 반 유대 정책에 의해 주거나 이동의 자유가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나름대로는 어렵지만 꿋꿋히 살아가고 있는 그 가정에도 마침내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가 강제 노역장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다가온 위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소년 역시도 강제 노역에 동원되기에 이른 것이다. 어느 날 아침의 버스에서 갑자기 강제로 끌려 내려진 소년은,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빠지게 된다.
소년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고작해야 1, 2초밖에 안 되는 순간 다행히도 가스실이 아닌 노역장으로 배정을 받게 된 소년. 이제부터 힘겨운 수용소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몇 차례의 이동을 통해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소년의 몸에는 상처가 생기고, 정신 세계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채 하루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수용소 생활. 삶과 죽음의 경계선 상에서, 소년은 하루하루를 버텨나간다.
감상평 。。。。。。。
강제 수용소와 가스실이라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지르는 독일의 정신병자 집단들. 그들에 의해 희생을 당한 수 백 만 명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이 과연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로 남아 있다. 혹독한 수용소 생활에서 살아남은 한 명의 소년은, 이제 자신의 남은 일생을 ‘증인’으로서의 삶을 사는데 바치기로 작정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이 바로 ‘운명’이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기록된 책이다.
그 끔찍한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결코 흥분하거나 과격해지지 않는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기록된 이 책은, 마치 저자 자신의 일기장을 넘기는 것처럼, 매우 사실적으로 상황을 묘사하면서도, 결코 감정적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 담담한 설명에 잠시 저자가 경험했다는 그 이야기의 진정성이 의심되기까지 할 정도이다. 무엇이 저자로 하여금 이러한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을까?
저자는 인생을 하나의 ‘단계’에 비유한다. 사람은 각 단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단계에서 그 단계의 목표에 도달하게 되면, 또 다른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모든 단계를 한 번에 다 경험하는 일은 없다. 오직 한 번에 하나의 단계를 거칠 뿐이다. 저자는 자신은 매 단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그 단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고백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지옥과 같은 상황이었지만, 저자는 그 안에서 행복(어쩌면 정확히 말하면 ‘성취’)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는 매 순간 자신의 삶의 주인이었고,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수용소 생활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일견 매우 역설적으로 들리는 저자의 이 말은, 극한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면서, 인생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저자는 보통의 사람이 보지 못하는 보다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이 견디기 힘들 것만 같은 어려움을 극복해 낸 저자의 경험은, 오늘날 작은 문제에도 세상이 다 무너지기나 한 것처럼 지나친 감정의 저조기에 빠져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듯싶다. 고압적이거나 설교 투의 문체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체험을 담담하게 써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저자는 어떤 연설보다도 강하고 진한 메시지를 던진다. |
| 기대를 갖고 본 책이였다. 너무 기대를 갖은 탓인지 그리 재밌는 내용은 아니였다. 뭐랄까...재미보다는 진짜 운명에 대해서, 작가의 기구한 운명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나의 현 위치와 생활을 그의 과거와 비교하게 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우리가 보내고 있는 현재의 시간들이, 그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였다. 우리가 먹는 음식들, 우리가 보내는 시간들, 우리가 공부할 수 있고 놀 수 있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유, 그리고 우리가 즐기는 많은 자유들...등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한다. 운명이 정해져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든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생각하는 쪽으로 개척해나가야 한다. 우리의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내용을 쓰고 있는가? 자신이 쓰고 있는 이 페이지가 훌륭한 내용으로 쓰여지길 원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을 소홀히 흘려보내서는 않된다고 생각한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정성들여 최선을다해서 완성해나가야한다. 그래야 비로소 훌륭한 한권의 책, 후회하지 않는 삶을 보낼 수 있다. 작가의 삶은 충격적이였고, 많은 걸 느끼게 해주었다. 책꽂이에 꽂아놨다가 언젠가 다시 한번 꼭 읽어볼 것이다. 내가 나태해질때마다, 내가 삶이 재미없다고 느낄때마다, 힘들때마다...! 과연 내가 이렇게 시간을 보낼 것인가? 과연 내가 느끼는 고통이 그리도 참기 힘든 것인가? 하고 생각하고 반성할 수 있도록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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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작가 임레 케르테스 지음.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소설로 풀어냈다고 해서 이 책이 여느 비슷한 책들과 동급은 아닌 것 같다. 처음에는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었는데, 그게 이 작가의 객관적인 태도 때문이라는 생각이 마지막으로 갈수록 짙어졌다.
비슷한 책들, 비슷한 경험담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경험이 '그렇고 그런' 부류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경험은 조금 다르다.
물론, 주인공(저자 자신이기도 한)도 어느날 아침 강제로 열차에 태워져 아우슈비츠를 거쳐 또 다른 수용소 생활을 겪게 되고(겨우 열 다섯살이었다.) 거의 죽을 뻔한 지경까지 가지만 이걸 괴롭다고, 잊어야만 한다고, 그래야만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데는 반대하고 있다. 아마, 그런 태도가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헝가리를 비롯한 히틀러와 나치의 희생자들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이유이지 싶다.
"사람들이 완전히 자연스럽게 살아가지 못하는 부조리는 없다. 이제 내가 가게 될 길 위에 피할 수 없는 덫처럼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악과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내게는 이런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힘들었다, 끔찍했다, 지옥 같았다.. 등등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해주려고 준비할 수 있는 이야기는 잊어라, 극복해라,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만행을 알려라..정도? 그걸 작가는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피해자를 위로하고 싶은 방관자 혹은 비(非)관계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거 아닐까?
그래서인지, 작가는 그 경험을 잊지 않고 평생을 안고 살아간다. '운명' 이후로 나온 '실패',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송가'에서 작가는 그 이후의 삶을 또 다시 주인공에게 반영하고 있다.
특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송가'에서는(읽어보진 않았지만) 아우슈비츠의 존재를 허락했던 이 세상에 아이를 태어나게 하고싶지 않다는 내용이 담겨 있단다.
아예 잊기를 거부하는 작가의 태도는 위로하고 싶은 자들의 마음을 비록 불편하게 만들지라도 스스로에게는 계속되는 투쟁이고 고뇌였음이 틀림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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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4일
『운명』
-임레 케르테스
난 요즘 독서 슬럼프에 빠졌다. 한 마디로 요즘 책을 잘 읽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그 말은 책이 잘 읽히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책 읽기'를 생각하면, 나는 학부시절이 참 그립다. 학부시절, 도서관을 참 좋아했다.
텁텁한 책냄새, 부드러운 햇살, 진한 자판기 커피 한잔. 그리고... 책장들 틈... 나만의 공간...
책장과 창문 사이에, 일종의 난방기가 있다. 분명 '올라가지 마시오'라고 쓰여있지만, 나는 그 구석에서 책 읽기를 참으로 좋아했다. 우선 그 속에 들어가면, 어느 곳에서도 내가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와보지 않는 이상... 책을 읽다 잠들기도 하고, 이것저것 노트를 들고 끄적거리기도 하고... 독서 삼매경에 빠져 수업에 빠지기도 하던...
학부시절 내 독서량은 꽤 많았다 할 수있다. 뭐... 지금이야 바보가 되서, 읽은 책도 기억을 못하지만...
그 시절에는 "幻"하면, "뭐 읽냐?"라는 말이 나오곤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것저것 핑계로 독서량이 현격하게 줄어버렸다.
그래, 간만에 책 한권을 읽었다. 내가 '책을 읽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책 읽은 감상이 있다'라는 말과 같다.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한 독서는 독서가 아니니까...
어쨌든... 참 오래 묵혀둔 책이다. 사놓고... 오래 읽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꺼내들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전에 '눈먼자들의 도시'를 읽었었다. 그때가 중학교때였는지, 고등학교 때였는지 잘 모르겠다. 상당히 인상적이 었던 책이었다.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탔다는 말을 들었다. 이 작가가, 이 작품으로...
그래서... 샀었다. 이 책을...
독일 나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 어쩌면 이런 말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이다. 독일인들의 이차세계대전 참회를, 우리 일제시대와 비교하기도 하니까...
전에 빅토르 프랑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를 읽었었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는 작가 자신이, 심리학자로서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격었던 일들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놓은 책이다. 아니, 에세이 식으로 써놓았다는 말이 맞을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친구들과 안면도로 향하는 버스안에 있었다.
사람이 극한에 가까워 지면 어떻게 될 수 있을까...
"운명"은 소년의 눈으로 비교적 거리감 있게 강제수용소의 생활을 그렸다. 자신의 감정을 극도로 제한한 소년.
"만일 운명이 존재하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강제수용소는 말 그대로 '강제'로 '수용'된 곳이다. 내 의지가 아닌 타의로 나를 누군가 고의적으로 가두어 둔것이다. 고의적으로 나의 생활을 계획하고 제한하고, 강제적으로 나는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다.
매사를 시간의 흐름에 다라 단계적으로 천천히 깨달아 나간다. 하나의 단계가 끝나고, 그것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 다음 단계가 바로 다가온다. 그런 식으로 해서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그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이해하게 된다.
모든 사건이 한 순간에 그들에게 닥쳤다면, 그들은 도저히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 말에 가장 강한 공감을 느꼈다. 그래서 인간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때때로 사람들이 "너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다 잘 살아가고 있어"라고 말을 한다. 그럴 때,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 사람들 상황이 되면, 나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지몰라" 못되고 매정한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은 그 상황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신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준다면, 공지영의 소설에 나온 말처럼 누구나 자신의 고통은 비교될 수없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래 허울 좋게 나는 나의 힘겨움을 정당화 시킬 수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강제 수용소에 있었을 때처럼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본 적은 없었다고 확신한다. 그건 아주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왜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항상 자유를 갈망하고, 떠들고, 외치는 것일까. 그 어느때보다, 모든 혜택을 누리고, 모든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에서 말이다.
우리는 모두 '자유롭지 못해' '난 속박당하고 있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모른다. 아니 '난 자유롭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지도...
'자유롭고 싶다'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소년은 '운명' 속에서 '즐거움' '행복'을 느꼈다. '운명은 나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영원히 자유란 없을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모두 운명안에 살고 있으니까....
운명이 있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운명은 나 자신이다. 나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입안이 깔깔하다.
목구멍에서 치오르는 말이있다. '자유롭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