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조금씩, 그러나 끊임없이, 눈에 띄지 않고 야금야금 저항에 부딪치지 않을 속도로 민주주의는 부식되어 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의 정치적 정체성을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이것은 인간 보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편으로 이념화한 것이며, 지난 20C에 이르는 시민들의 피로 얼룩진 역사 위에 가까스로 획득한 모든 인간의 차별없는 존엄을 지키기위한 요소들 - 국민주권에 따른 보통, 평등 , 직접선거를 비롯해 기본적 인권의 보장, 평등을 근간으로 하는 법치주의 등 - 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 시민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 요소들의 실질적 내용에 왜곡, 변질, 훼손이 점증하며, 인간적 삶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적 환경을 이해하는 것은 자기 삶의 주체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인간인 이상 외면할 수도 없는 '삶의 행위 자체'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삶의 환경에 변질이 오기 시작하면 동시에 우리네 삶 또한 변화를 강요 받게된다. 마침인 듯 코로나19의 충격은 사람들에게 세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하는, 즉 불평등 양상의 첨예화로 대변되는 사회적 양태를 초래한 근인(根因)들을 사유할 수 있는 전환의 시기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경고처럼 바로 지금이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힘들에 제동을 걸고, 훼손되고 있는 사람다운 삶의 환경을 복원하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영국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이러한 상황에 - 민주주의 요소들의 훼손 - 이른 오늘의 민주주의를 '포스트(Post)민주주의'라 명명하고 있다. 비민주주의가 아니라 포스트민주주의라 한 것은 그 질적(실질적 내용) 손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통선거의 투표와 같은 외형적 민주주의의 형식적 요소들은 잔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정점을 찍은 후 하강하면서 최대민주주의에서 멀어질수록 민주주의 요소들이 파괴되는 포물선에 비유하며, 이 하강을 저지할 방안을 모색한다. 다만 되돌려 다시 '정점'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은닉되어 있다고 여겨지는데, 자본주의라는 완고한 체제를 수정 불능이라는 넘어서지 못할 장벽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파괴의 힘을 저지하고 질적 손상을 회복 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의 이해로 견인한다.
Ⅰ. 민주주의를 퇴락시키는 주요 원인들(1) - 경제적 세계화, 공기업 민영화, 미디어 공공지배
민주주의를 추락시키는 원인이 어느 하나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복합적임은 물론이다. 콜린 크라우치는 이들 원인으로 경제적 세계화, 공기업의 민영화, 시민계급 대표의 상실, 미디어의 공공지배, 정치의 스펙터클화를 지적하며, 이들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개별 국가의 통치능력 넘어서까지 성장한 초국적 기업의 출현, '경제적 세계화'로 호명한다. 이들 거대 자본이 '제도 설립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직접적인 법률 제정자는 아니지만 규제, 세금, 노동환경이 싫으면 떠나겠다고 국가정부를 위협하고 자기 이익을 실현한다. 시민 삶을 담보로 잡힌 정부는 노동 유연성의 강화 , 재정 지원, 각종 규제의 완화로 끌려간다. 정작 해당 공동체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않는 다국적 자본이 공동체의 구성원인 시민적 삶의 요구에 반하는 권력 주체가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일례로 구글의 한국 매출액도 알지 못하는 현상처럼 세금 징수의 왜곡을 낳고 이는 다시금 분배를 비정상화시킨다. 불평등을 출산하는 출발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버금가는 민주주의 파괴라는 긴장을 야기하는 사태가 공기업의 민영화다. 공공사업과 복지국가의 실현은 민주주의 달성의 근본적인 부분이다. 공공사업은 누구나 접근 가능한 보편적 권리로서 '사회적 시민권'을 이루는 중대한 축이다. 즉 시장의 경쟁과 이윤 추구로부터 거리를 둬야하는, 해당 서비스가 시장을 통해 제공되면 시민권(시민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분배의 정의를 왜곡시키기에 효율성의 차원을 초월하여 실행하여야 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이 크고 수요도 널리 존재하는 공공 서비스들에 시장화 또는 상업화의 그림자가 덮치고 있다.
폭설로 인한 전력 공급의 차단으로 시민 삶에 막대한 고통을 안긴 근간의 미국 텍사스주 사례처럼 전력사업을 민영화했을 때 고액의 전기료는 물론 서비스 질의 하락, 공공 질서에 대한 무책임성 등 그 손실을 시민이 모두 부담해야 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민간자본은 이익만 향유하고 손실은 전가되는, 그 불평등의 심화는 직접적이다. 민영화에 따른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사업이 정부에서 민간자본으로 이전 됨에따라 정부에 당해 전문가가 사라져 정부의 전문성이 상실되고, 이는 다시금 정부가 민간에 의존해야하는 역설을 낳는다. 특히 민영화는 특권적인 정치적 접근성을 가진 특별한 기업가계급을 만들어낸다. 결국 민영화하면 사업이 효율화되고 부패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은 오히려 부패의 증가와 공공의 이익을 자본에게 몰아주는 부정직한 현상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시민의 평등적 접근을 차단하는 악질적인, 가장 질 나쁜 민주주의 요소 파괴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는 기업자본에 정치적 영향력을 몰아 준, 다시 말해 극소수의 수중에 자본축적의 우월한 기회와 권력을 가진 미디어(신문, 방송 등 매체)권력의 행태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읽을 수 있다. 미디어를 소유한 기업자본이 공공을 지배하는 것인데, 특정한 정치적 관점을 공유하는 소수의 거대자본이 자기 이익이라는 관점 관철을 위해 매우 강력한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극단적 단순화, 감각적 선정성과 같은 상업적 기법을 통해 "정치적 의사소통의 기초를 파괴하고 시민 능력을 저하시켜 민주주의를 병약화 시킨다"는 점이다. 일례로 조중동 세 황색신문은 일제히 존재하지도 않는 대통령의 레임덕 기사로 헤드라인을 꾸며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고 시민 여론을 왜곡 유인하는 행태는 민주주의 훼손의 그 전형이라 할 것이다.
이들 황색신문은 언론의 자유를 말하며,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여기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분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정치적 결과에 영향을 받고 미치는 데 대체로 평등한 능력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요구한다. 이와달리 자유주의는 정치적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일에 자유롭고 광범위한 기회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일례로 불평등을 감소시키기 위해 기업자본에 각종 규제와 규칙을 통해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고 정치적 평등 기준을 높이려는 민주주의에 대해 자유주의는 규제를 풀어 자본의 자유로운 축적 행위를 방해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상호 긴장관계에 있는 서로 다른 두 개념이지 단지 수식상 붙어다닌다고 해서 동일 개념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릇된 이해이다. 자유주의는 수시로 민주주의를 손상시킨다. 이 둘의 적절한 균형은 사실 딜레마에 가까운 것이기에 시민의 감시가 떠나는 순간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망령에 의해 파괴되기 시작한다.
Ⅱ. 민주주의를 퇴락시키는 주요 원인들(2) - 정치 스펙터클화, 시민 계급 대표의 상실
한국의 정치사회가 광범위한 시민참여나 기업자본 바깥의 조직들에 대해서는 적의를 뿜어대던 오랜 수구집단의 지배를 벗어난지 이제 4년 되었다. 능란한 조작(공작)정치 기술에 전문가가 된 수구 집단의 오랜 정치는 환멸에 가까운 것이었고, 시민 대중은 수동적이고 심지어 냉담한 역할을 할 뿐이었다. 이 러한 상황에서 형식적 민주주의 유지를 위해 이 집단이 구사한 것이 이른바 ‘정치의 스텍터클화’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고작 대중 참여의 주된 양식으로서 치러지는 선거에 불과했기에 이는 민주주의를 선전하는 요긴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화려하고 대규모적인 쇼비즈니스를 모방한 선거 조차 통제된 스펙터클, 즉 선거의 공적 논쟁이 치밀한 흑색선전(matador)으로 도배되어 정책 대결이 아닌 중상모략과 교란으로 민주주의를 조롱하고, 호화로운 구경거리로 호도시켜 이들이 만들어 놓은 게임의 신호에 반응하는 것이 선거 결과인 양상을 초래했다. 이것을 비로소 뒤집은 것이 2016년 거대한 시민이 물결을 이룬 개방된 스펙터클로서 촛불시위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도 적지않다. 미국의 사회학자 '필립 슈미터'는 "광장의 시민이 권력을 쫓아내기는 커녕 권력을 잡은 건 또 다른 정치세력일 뿐이며, 소수의 권력자가 통치하는 체제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진정한 정치혁명은 아니라는 관점을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이 대변하는 계층이 자본 소득계급이 아닌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민 노동계급으로 부분적으로 변화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오늘, 마치 기업자본과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하던 정치배들이 언제그랬더냐는 듯이 다시금 포퓰리즘에 의탁해 전체주의적 야망을 은폐한 채 정치인의 일상을 감시하고, 불평을 확산시키며, 남 탓만 하는 것이 정치인 듯 무의미한 탐색전으로 추락시켜 시민의 삶을 위한 본연의 정치를 실종시키고 있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4년 내내 여당 정치인들의 정직성만이 이 사회의 주요 정치 현안인 것처럼 왜곡시켜 정치를 군사정권 시절의 저열하고 폭력적인 수준으로 되돌려 놓으려 하고 있다. 시민이 각성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터이다.
이 지점에서 너무도 중요한 것이 정치 권력에게 영향력을 행사 할 시민의 의지를 대표할 조직이 흐릿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노동단체가 상당한 시민집단의 삶을 대표하여 정치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지만 점차 이들 계층의 수는 중대하고도 역전 불가능할 정도로 감소하고 있다. 반면 아주 이질적인 구성원으로 이뤄진 계층들로 분산되어 기존의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계급 대변의 목소리를 지니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컨시어지( concierge)노동이나 클라우드(cloud)노동과 같은 비임금 노동자의 비상할 정도의 증가와 이도저도 아닌 관리직, 사무직, 판매직, 금융직 등으로 분류되는 뒤죽박죽의 계층들이 혼합되어 그 이해관계가 제각기 달라 일관되고 보편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 부상(浮上)이다.
이러한 정치적 영향력 집단 부재의 빈틈은 정책적 쟁점이 되어야 할 과제의 선택에 있어서 시민적 삶을 위한 과제가 소외된다는 의미이며,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바로 자본 권력의 영향력이다. 자본은 정치인들에게 직간접적인 이해관계를 나누며 소위 시장 또는 상업이라 불리는 것이 인간사 모두를 지배하는 형국으로 이전되어 간다. 마치 시장이 목적이란 듯이, 인간의 복지를 위한, 인간다운 삶을 위한 수단에 불과해야 할 것이 절대적 원리 행세를 하게 된다. 이때 정치와 자본의 친화는 민주주의 파괴의 결정적 요소로 작동한다.
다시 공기업, 공공사업의 민영화가 목소리를 높이고, 각종 제도는 기업자본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대기업 감세와 줄어 든 세원(稅源)은 노동자의 소득세 감면 항목의 삭제, 최저 임금의 억제, 노동의 유연화 등으로 수구 정치 집단이 당위성을 선전할 것이다. 저항하는 사람은 빨갱이로 낙인을 찍고, 민주주의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할 것이다. 2009년 용산철거민에 방망이를 치켜 세우고 집단 살인을 자행한 무참한 폭력 사태는 수구 정치 권력이 시민에게 어떤 일을 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일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제2 기계시대라는 오늘의 시간은 그야말로 거센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 자본주의에 깊게 포섭된 지금, 유휴 노동력의 양산이라는 현실은 사람들의 생존적 미래를 불안정하게 하고 있으며, 거대 자본은 국경을 초월하여 제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본 축적의 동력을 가속화하고 있다. 또한 새로운 노동 계층의 출현과 중간 계층의 계급적 분별이 모호해지는 것과 함께 이들이 단일의 목소리를 내기에는 계층간의 유대가 이뤄질만한 시간이 없었기에 상대할 계급이 형성되지 않아 정치 권력은 기존의 관행적 행위 습관과 새로운 상황에 대한 방향 설정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듯하다. 종(鐘)이 울리고 있다. 시민들이여, 이럴 때가 아니라고!
Ⅲ. 어디로 갈 것인가?
콜린 크라우치는 이같은 민주주의 퇴락을 저지하기 위한 실천 가능 방안을 세 가지수준에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기업자본의 커져가는 지배력을 제어하는 정책의 마련이며, 둘째는 정치 관행 자체를 개혁하는 것이고, 셋째는 현상을 바꾸는 데 관심있는 시민들이 직접 할 수 있는 행동을 들고있다.
우선 기업자본의 지배력을 축소시키는 방안은 현대의 기업들이 끊임없는 변이를 하고 있음에도 바뀌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리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업자산의 소유주는 거의 바뀌지 않거나 동일인이라는 점이며, 바로 불평등 심화의 중심인 이 소유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제도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주권자로서의 시민이 정치에 요구하여야 할 것은 눈 앞의 푼 돈을 위한 악다구니가 아니라, 시민 모두의 삶을 구조적으로 안정화 할 수 있는 거시적 안목인 것이다. 한편 공공부문에 침투하는 민간부문의 차단을 비롯한 신자유주의의 자유시장 규칙이라는 망상적인 신화를 거부해야 한다는 점이다. 공무원이 기업으로 이동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처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충돌에서 우리사회가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도 중대한 시민적 합의를 요구한다. 혼탁과 부패로 이어지고 궁극에는 시민 삶의 질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낳는 요소들에 대한 과감한 개혁이 요구되는 것이다.
필립 슈미터를 다시 소환해야 할 것 같다. 이와 같은 제도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당사자는 결국에는 정당 정치인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오랜 관행, 자본 친화적이며 기득권자들이라는 점이기에 시민 대중의 요구가 순수하게 관철될 것이라는 이해는 순진하고도 낭만적인 발상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거 결과에 비례하여 정부가 정당에 지급하는 정치 자금의 할당을 직접민주주의적인 접근법으로 바꿔야 한다고 제안한다. "모든 시민의 연도별 과세액중 동일한 소정의 금액을 시민이 직접 선택한 정당에 할당"하자는 것이다. 시민이 정당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권자로 행위함으로써 정당 정치 권력의 관심 이탈을 어느 정도는 제약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정치권력이 자신들의 합의로 만든 정치자금 할당 규칙을 시민의 규칙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나아가 무작위로 선출하는 민회를 통해 자기들만의 리그전을 벌이는 기존의 권력을 견제하는 방안도 제시하고 있다. 모두 가능한 것이지만 이것이 입법화되기 위해서는 기존 정치 권력이 이를 실천하도록 하게 만드는 수단이 있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콜린 크라우치는 "일반적이며 광범위하게 사회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새로운 시민 조직이 출현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의 노동단체나 시민단체는 자기 계급이나 계층의 이익을 위한 조직이며, 그나마 이들 기성 조직은 더 이상 오늘의 시민 대중을 위한 입이 되지 못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를 비롯한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사회단체에 대한 보조금 역시 시민들의 직접 선택에 의한 할당이 되어야 하며, 새로운 시민 조직은 변화된 시민 계층의 목소리를 지닐 수 있는 정체성을 형성, 확립하여야 한다. 이제 모든 시민들은 아웃사이더로서 정치 바깥에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삶의 주체로서 소란스럽고 명확한 요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여야 한다. 우리 시민 대중들은 평등주의적 민주주의를 향해 새로운 전복적 창조성이라는 가능성을 위해 연대하여야 한다.
기성 정치 세력은 이러한 창의적 말썽에 반민주적 무리라는 꼬리표를 붙이려 할 것이지만, 이들 "정치 계급이 통제하는 기제 안에서만 움직이는 집단만이 민주적이라는 표현만큼 반민주적인 것"은 없으리라는 것이다. 자본도 끊임없이 정치 권력, 국가와 타협한다. 새로운 시민 조직은 기성의 정치 조직들, 사회단체들을 통해 영향력을 확장하여야 한다. 그리고 기성 정당 정치권력들에게도 직접적인 접근의 기회를 늘려가야 한다. 이 모든 행위의 실천은 무수한 어려움을 겪게 될 터이지만 2021년, 오늘의 지구촌은 그리 많은 시간을 지니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모든 곤란은 함께 몰려온다. 전체주의화, 인간노동 없는 생산의 세계, 자본 지배력의 확장, 더 이상 필요 없는 인간 재료들이 양산되는 세계가. 단지 기본소득이라는 하나의 합의에 있어서도 정치권력은 자기 이해관계에 따른 헤게모니 싸움으로 변질시켜버리기 일쑤이지 않은가? 쇠락하는 민주주의를 되살릴 섬세하고 치열한 사유로 가득한 저술이다.
|
|
시각이 다양한 것은 좋은 일이다. 대체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개념은 다르게 정리하는 경우가 있다. 크라우치는 포스트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썼다. 민주주의를 평등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 시키면서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개념으로. 결국, 포스트 민주주의라는 말은 민주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이 된다. 평등을 넘어선다는 것은 부익부 빈익빈의 극대화를 의미한다. 저자의 말처럼 엘리트 그룹이 모든 것을 차지 하는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귀족과 그 아래 계급이 존재했던 시대를 지나, 모두 평등 하다는 형식적인 민주주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다시 엘리트 그룹의 폴라니 식으로 따지자면, '묻어 들어 있음'으로 연결되는. 민주주의를 단편적으로 이해한다면, 저자의 해석도 굳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평등으로만 연계하는 것은 사실 더 많은 가치를 손상 시키는 것이다. 즉, 국민이 주인이라는 국가의 원리를 단순히 경제적, 정치적인 평등으로 치환 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등이라는 것이 경제적인 평등인지, 아니면 경제적인 평등인지는 조금 더 따져봐야한다. 물론, 초기에 민주주의는 분명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여건들이 강화 되다 보니 경제적인 부분도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이고, 이제는 투표권은 보장 안 받아도, 먹고 사는 것은 보장 받는 것이 낫다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정부의 간섭, 케인즈 주의 등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정치적 평등이 경제적 평등에 비해 과소평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에 있어서 경제는 어떤 것 보다 중요시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그 경제적인 부분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할 필요가 있다. 물론, 물리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정신은 육체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경제적인 논리를 앞세워 민주주의를 따져대는 것은 결론적으로 해결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길고 길게 서술 되어 있듯이 장구한 역사를 통해 만들어 진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정치와 경제는 섞일 수 없다. 구별해야 한다. 이 것이 섞일 것을 기대한다면 정치는 더 힘을 쓸 수 가 없을 것이다. 저자는 포물선을 이야기 했다. 원이 아니라 포물선인 것이다. 즉, 진보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앞으로 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는 미래를 낙관한다. 힘들더라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낙관론은 현재 정치 상황, 시민운동의 상황을 보면 그저 맹목적일 뿐이다. 그렇기때문에 문제는 봐도 해결책은 궁극적이지 못하거나 미봉책인 것이다. 포스트 민주주의를 말할지 아니면 심의 민주주의를 말해야 할지는 조금 더 지켜 봐야 한다. 민주주의를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나, 둘의 의미는 다르다. 그리고 유럽과 한국은 더 다를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담론과 이론이 터져 나오는 유럽과 달리 한국은 형식적인 민주주의 조차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때가 있으니 말이다. |
|
불안감에 휩싸인 좌파 사상가가 정리한 반자본주의 정서를 제고하는 방안에 대한 요약 보고서 본 서적은 민주주의 이후의 정치체제 변화를 논하면서, 기존의 민주주의 기반은 존재하지만 세계적인 기업가 집단에 의한 위협이 심화된다는 개념의 “포스트민주주의” 를 주창하면서, 평등적 민주주의 강화를 위하여 다양한 활로를 모색하자는 재미있는 의견을 담고 있다. 좌파 사상가답게 자본주의의 맹점을 크게 강조하면서 정치적인 문제를 어렵지 않고 시원스럽게 풀어나가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으로 보인다. 특히, 현상적인 측면에서는 언론지상에 나오는 사항들이 다수 섞여 있으니, 현재 또는 미래에 닥치게 될 위험성에 대해 우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듯이 보인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설득력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본 서적 전체를 휘감고 있는 기본적인 논리의 흐름이나 내용은 대부분은 다소간 진부하다는 표현을 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여러분들도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다국적 기업, 군산 복합체, 자본주의의 이중성 등등, 그런 이야기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자본주의 기업가는 천박하다는 이야기, 공무원은 무지하다는 이야기도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매일매일 언론을 포함한 미디어에서 보고 듣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들이니 말이다. 그러면, 과연 왜 이런 진부한 내용을 새삼스럽게 재정리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최근 세계사적 동향을 보고 있노라면, 좌파 사상가인 저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주장이 왜 이리도 절실하게 될 수 밖에 없는지 알게 된다. 구소련 정치체제가 붕괴되고 중국 조차도 경제개방을 넘어 자본주의화 되고 있는 마당이 반자본주의 진영에 서있는 좌파 이론가들에 있어 적정한 대안으로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민주주의를 폄하하는 것은 무리이니, 자본주의를 폄하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일 듯하다. 일반인이 듣기에도 “민주주의는 소중한 이상이고 자본주의는 추악한 현실” 이라는 말은 언제나 듣기에 솔깃하니 금상첨화이다. 더욱이, 자본가는 소수이고 자본가가 아닌 사람이 다수인 것이 엄연한 현실이니,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겠다. 좀더 냉정하게 본 서적을 평가해 보자.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은 이렇다. “조용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다국적 기업가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평등주주의적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자. 다소간 폭력적이라도 어쩔 수 없지 않겠나 ” 그러나, 최근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세상은 저자가 보는 바와 같이 단순하지 않으며, 미래도 저자가 희망하고자 하는 바와 같이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것같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과학기술의 활용, 생산수단 및 구조의 효율화 및 이로 인해 소비 수준의 향상이 진전되었다. 이로 인해 이전보다 많은 사람이 생존의 수준을 넘어 생활의 수준으로, 아쉬움의 수준을 넘어 욕구 강화의 수준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당연히 정치적인 관심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사실상 정치적 자유란, 나와 내가 아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동료 내지 지인이 더 이상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게 된다면, 그리고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인식할 수 있다면, 적어도 생활하는 사회인으로서는 그 요건이 충족된 것이므로 도덕적인 측면에서 더 이상 간여하거나 요구할 바가 사라지게 되는 것처럼, 불안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정치적 불안이나 불만이 사라지면 정치적 관심도 사라진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마냥 정치적인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개인들은 이제 정치적인 관심보다는 자신의 정체성, 개성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며, 개인적인 관심과 가족적인 안녕의 유지가 더욱 중요한 것으로 인식될 개연성도 커지게 될 것이다. 아울러, 세계적인 차원에서 민영화가 진전된 데에는 당연하고도 명백한 이유가 존재한다. 세금을 내는 국민 대다수가 전문지식이 없는 공무원이 공공사업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감사 결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거나,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임기가 보장되는 공무원이 혁신을 위해 인센티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수고를 다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생각인가? 정권이 바뀐다면, 의무감이 강한 정치가 내지 사회운동가 출신 인사가 이를 관리한다면, 제대로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국민 개개인이 노력하여 벌어들인 수입의 일부인 세금을,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공무원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인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운동가라는 이름으로, 아무렇게나 사용하도록 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공무원, 정치인, 사회운동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제과정에 참여하면서 실제로 수입을 번다는 것 자체의 어려움, 효율성을 제고한다는 것 자체의 어려움 등에 대해 체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과정에서 치열하게 싸워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세금의 사용이나 관리를 맡기는 것에 대해 조바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상한 사람은 바로 조바심 내지 말라고 주장을 하는 그 사람이다. 이 시점에서 보다 근본적으로 질문하면, 저자의 논리적 근거가 무엇이며 비약이 어느 수준인지 알 수 있다. 정부와 공무원은 믿을만한가? 정치가와 사회운동가는 믿을만한가? 저자는 마치 이를 전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기업가는 악하고, 공무원, 정치인 그리고 사회운동가가 선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근거를 가지고 하는 것인가? 오히려,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는, 경쟁해본 경험이 없는 공무원, 정치인 그리고 사회운동가가 주장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기업가의 주장하는 것에 비해 유치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저자는 기존의 세계 여러 나라 정부가 민영화 내지 민간위탁을 시행할 수 밖에 없게 된 사유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다. 천박한 자본주의 기업가의 로비 때문이라는 주장은 너무나 현실을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이와 같이 격한 감정적인 표현을 하게 된 것은 계급 중심의 결정론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계급 중심의 결정론적 사고를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면, 그 경직성으로 인해 많은 것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예를 들어, 하위 사무직에 종사하고 있는 젊은이들, 대졸 출신의 실업자인 젊은이들에게 허위의식을 버리고 노동계급임을 인정하라고 한다면 과연 이들이 쉽사리 수긍하고 인정할까? 오히려, 이들은 문화이론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게, 이미지, 정체성, “위험사회” 에 대한 불안 등이 주요 관심사이며 노동계급으로서의 연대는 매우 약할 것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자신을 노동자 계급의 일원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문화적 코드에 따른 개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자 하는 새로운 세대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시대적 변화에 따라 계급적 분류가 아닌 전혀 다른 기준으로 사회를 바라볼 수도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스스로를 개선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학자 내지 전문가는 커녕 제대로 된 비평가 내지 사회운동가라고 하기도 어렵다. 도식화 되고 정형화 된 이론적 구조에 몰입하게 되면, 다른 생각, 새로운 조류 또는 시대적 변화 등을 무시하기 마련이다. 그 결과, 지나치게 도식화된 이론적 구조에서 도출되는 것과 전혀 다른 현상 내지 반응이 나올 때 마다 이를 무시하려 들 것이다. 이는 실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다양한 생각 내지 변화를 무시한다면, 이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조망을 이끌어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고집스럽고도 편합한 아집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저자의 구호가 다소간 우려되는 측면이 존재한다. 더 나아가, 지금 와서 역사와 사회구조를 뒤로 돌릴 수는 없다는 문제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대규모로 도시화된 사회구조를 인위적으로 분산하여 공동체적 민주주의가 개화될 수 있는 수준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아니,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또다른 죄악을 잉태시킬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공동체적 민주주의가 최선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나 기존의 대의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데에 문제가 많이 있듯이, 공동체적 민주주의도 작동하는 데에 문제가 많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보다 구체적으로, 공동체 민주주의가 작동하게 된다고 가정할 경우,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간에 상호 접촉을 통해 서로를 깊이 알게되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관계가 강화됨에 따라 연장자 우선의 원칙, 친족/인정 우선의 원칙 등이 개입되어 기회 평등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즉, 도시화로 인한 피해도 존재하지만, 소규모 공동체로 돌아감에 따른 문제점도 매우 심각하다. 진화생물학의 연구결과가 보고하듯이, 소규모 공동체로 돌아가고자 하는 기대 내지 희망은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현대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아련한 미련 내지 애틋한 환상이라고 해야 할 것같다. 이미, 세상은 익명성을 보장받거나 보장받기를 원하는 다수가 생활하는 복잡다기한 도회적 생활구조로 변모하고 말았다. 이러한 환경을 전제로 하여 논의를 진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한가? 아니면 불합리한 것인가?
개인적인 편견인지 모르겠지만, 좌파 사상가와 환경론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교조적이며 여유가 없다는 단점을 보게 된다. 논리적으로 일부 이해가 되는 부분은 존재하나,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왜 세상은 시끄러워야 하는가? 화끈한 싸움이 그리도 필요한가? 저자의 주장 행간에서, 합리적인 토론 보다 맹목적인 구호가 강조되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이러한 점은 저자의 구호에서 보이는 심각한 우려이다. 물론, 저자와 동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다국적 기업의 위력이 통제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더욱이, 이들이 문화적 코드를 강조하는 이미지 전쟁에서마저 승리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우려되는 대목이다. 사실, 본인 개인적으로는 다국적 기업 이외, 이들과 연계되어 잇는 광고산업, 미디어산업 등에 대해서는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생산적이라는 것과 거리가 있다면 의미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불특정 다수를 현혹시킴으로써 새로운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공정거래 내지 독점규제에 대한 법규, 위반시 규제 강도는 하루 빨리 현재보다 더욱 강화되어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인이 정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간 상이한 데에 있다. 현재 시점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다각적 기업을 통제하는 방안에 대해 앞서 제안하고 노력하는 것보다도, 우리나라에서도 하루빨리 강력한 다국적 기업이 탄생하도록 다함께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갈 길이 먼 개발도상국에 불과하지 않나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실제로 처한 상황이 아니라 세계적인 계급적 차원에서 대응하거나, 우리나라 경제수준에 걸맞지 않는 환경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