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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하는 아버지는 무던한 교육자가 아니라 고집 센 스승이어야 한다. 해방하는 명령은 협정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명령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주체에게만 절대적으로 명령한다. 참고 : 아래 글은 정돈되지 못한 글이지만 상세한 각주와 옮긴이의 말이 너무 자세히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그걸 읽어본 사람이라면 굳이 아래 글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자크 랑시에르 그동안은 그리 알려지지 않던 자크 랑시에르가 갑작스럽게 국내에서 많이 언급되고 논의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흔하디흔한 유행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를 찾게 된 충분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소상히 알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그럴 능력이나 생각도 없기 때문에 그저 그의 저작들이 제대로 번역되어서 소개될 수 있으면 그걸로 그만인 것 같다. 랑시에르의 여러 저작들 중에서 ‘무지한 스승’이 유달리 눈에 띈 것은 아니다. 특별히 관심을 두지도 않았고 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들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궁금하게 만들었고 관심이 가게 되어서 찾아 읽게 되었다. 그렇게 어쩌다보니 읽게 된 ‘무지한...’이지만 읽다보니 어쩐지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 자주 떠올려지며 읽게 되었다. 그건 오로지 나만이 생각할 수 있겠지만 두 책 모두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얼핏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말에 조금은 납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랑시에르가 사사키 아타루를 알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사사키 아타루가 랑시에르를 알고 있어 자신의 논의와 유사한 부분을 언급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건 하나의 가정이고 추측일 뿐이지만. 과연 사실일까? 라는 궁금함이 당장 들게 되는, 혹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라는 생각만 들게 되는 ‘무지한...’에서의 조제프 자코토의 지적 모험은 한편으로는 믿겨지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능했어도 그건 순전히 자코토만이 가능했고 그만이 해낼 수 있는 지적 모험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그 시대만이 가능했을 지적 모험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패배적인 생각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자코토의 지적 모험을 알게 된다면 지금 현실에서 그런 식이 가능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에 동의를 하지 않기가 어려울 것 같다. 또한 자코토만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뜻은 그 지적 모험이 (쉽게는) 이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랑시에르의 말대로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명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게 된다. 지적 모험? 점잖게 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파격적으로 말한다면 지적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우연 때문에 시작되었기는 하지만 ‘무지한...’에서는 일련의 관계에 대해서, 가르치고 배우고,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서 파생하고 하나의 연장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여러 관계들, 권력과 정치에 대해서까지 확장시켜서 생각해보게 만들고 일상에서의 앎과 생각에 대해서, 온갖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고 확장-확대시켜보게 되어버린다. 우연이었고 조금은 특별한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이보다 더 전복적인 순간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코토의 방식이 그리고 랑시에르의 접근이 한편으로는 별 것 아니고 무척 알기 쉬운,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과연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지를, 어떤 방식으로 실천하고 행동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그것이 갖고 있는 이상한 어려움을 충분히 알고 있기에(혹은 정확히 모르거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우리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앎은 항상 어렵기만 하다. 자코토와 랑시에르가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그건 쉽지 않게만 느껴진다. 가르치고 전달하는 것 설명하고 명령하는 것에 대해서 배우고 이해하고 익히고 복종하는 것에 대해서 자코토는 랑시에르는 그 당연함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고 전혀 다른 접근을 시도하지만 그 접근은 전혀 색다른 것도 아니고 생각지도 못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 파격적으로 느껴지고 생소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닌 스스로 배우고 이해해내는 것을 자코토와 랑시에르는 말하려고 한다. 당연하고 누구나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금 생각해보도록 만들고 있다. 그렇게 자코토와 랑시에르는 해방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고 있고 평등과 의지를 알려주려고 한다. 전혀 접해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식으로 알려주고 있다. 우연이 필연이게 되어버리게 만든다. 눈부시며 “가장 어려운 도약”이지만 그것은 반대로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 방식의 도약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코토와 랑시에르의 주장은 온갖 방식으로 비판받고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차이 우월 열등 이런 구분과 순서, 위계에 관해서 자코토와 랑시에르는 저항하고 진정한 해방을 말하려고 한다. 배우라 되풀이하라 모방하라 번역하라 문장을 뜯어보라 다시 붙여보라 해방을 위한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진리를 자코토와 랑시에르는 알려주려고 한다. 그것이 과연 진정으로 진리이고 해방을 위한 실마리일까 분명한 것은 “여전히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위대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위대한 표현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것”을 말하고 “평등을 입증”하려고 하는 시도에 대해서, “진리는 고독하게 자기를 의식하는 인간에게만 말을 건넨다”는 주장을 쉽게 물리치거나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곱씹고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좀 더 반복하며 생각해보는 것이 더 알맞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잊기만 할 것이고 무슨 말인지 되풀이하며 읽어내진 않고 다른 책들을 뒤적거리기만 하겠지만 자코토와 랑시에르가 말한 것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말하고 전달하고 싶어지게 된다. 혹시 누군가가 이 사라지지 않을 진리를 다시금 말할 것인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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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은 내용에서 흥미를 유발한다. 선구적이고 지적인 스승을 생각하는 상식을 벋어나는 가르쳐야 할 내용에 대한 전혀 알지 못하는 스승이라~ 지적평등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며 평등에 기초해 해방된 인간을 만들어가는 교육에 대한 글이다. 권위적이고 지식주입식 한국교육풍토에서 유익한 이견이 될건데.
번역자의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전혀 국어적 의미를 살리지 않은 원문 단어그대로의 번역은 책읽기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분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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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818년에 네덜란드 치하의 루뱅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된 조제프 자코토 교수의 이야기다. 200년 전의 이야기이고, 원저가 30년전에 출판된 이 이야기를 왜 지금 하고 있는 것일까? 먼저 자코토가 한 일을 알아보자.
그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야 했는데 문제는 그가 네덜란드어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수는 네덜란드어를 모르고 학생은 프랑스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기묘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는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본을 학생들에게 주고, 그 책을 반복해서 읽고 외우도록 시켰다. 놀랍게도 학생들은설명해주는 스승 없이도 거의 완벽하게 프랑스어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쓸 줄 알게 된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자코토는 이 사례를 통해 ‘평등’에 대한 기존의 사고를 전복시킨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교육자가 학생들의 지능에 맞는 효과적인 설명 방법을 개발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기가 가진 ‘앎’과 학생의 ‘무지’를 구분하면서 시작한다. 교육자는 학생의 무지를 앎으로 전환하면서도 무지와 앎의 축소될 수 없는 거리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무지한 스승’은 이러한 교수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선생이 무언가를 학생에게 가르쳐줄 때 학생이 이해한다면, 그것은 이미 말하는 자와 듣고 이해하는 자 사이의 ‘지적 평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지능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은 자기안에 고유하게 내재되어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구의 근대사상이 강하고 우월한 나와 약하고 미개한 타자를 분리하고, 이미 존재하는 불평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자코토의 이러한 생각은 단지 교수방법상의 문제를 넘어서 철학적, 정치적 차원에서 ‘평등’의 문제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요컨대 지적인 평등이란 ‘아무나가 가진 능력’이라고 혁명적인 주장을 한 셈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우리의 동학 사상과의 친연성을 떠올리게 되었다.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나의 몸이 한울님을 모신 거룩한 성소(聖所)라는 인식과 함께, 다른 모든 사람도 한울을 모신 신령하고 거룩한 존재라고 말한다. 이 시천주 사상이 동학사상의 핵심인데 이는 사람 하나하나가 상하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한울을 모신 평등하고 거룩한 존재라는 개념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동학의 사상은 자코토의 방식, 혹은 자크 랑시에르가 힘주어 말하고자 하는 누구나가 평등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동학은 단지 외재적인 한울에게 의존하는 타력적인 신앙이 아니라, 자기의 내면의 신령성을 회복함으로써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길인데, 이는 주체적인 의지를 통해 내면의 고유한 힘을 자각할 것을, 그리하여 지적 해방을 맞이할 것을 추구하는 랑시에르의 주장과 동일한 것이다.
아울러 개인적인 체험도 랑시에르의 주장에 공감할 수 있게 하였다. 처음으로 글을 쓰는 사람에게 그 작업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다. 별로 글을 쓸 기회를 갖지 못한 나로서도 처음 머릿속의 생각을 글로 옮길때의 두려움은 작지 않았다. 우선 생각을 체계적인 형태로 다듬는 것도 힘든 일이었지만, 그 생각이라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글쓰기의 진도를 더디게 하는 가장 큰 고민이었다. 하지만 잘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그간의 삶을 통해 알게된 작은 지식으로나마 한줄 한줄 글로 옮기면서 글이란 것이 완벽하게 아는 사람만이 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도 최대한의 상상력과 추론, 기존의 앎을 토대로 글을 써 나가는 것이 가능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데 그리 많은 지식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글을 쓰기에 필요한 능력은 우리 내부에 이미 잠재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써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모든 사람의 생각은 비슷할 거라는 것, 따라서 나는 쓸 수 있고, 내가 쓴 글을 다른 사람도 읽고 이해할수 있으리라고 믿는 순간 글을 쓴다는 것이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 책에서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지적 평등을 통해 가능하듯이, 글을 쓴다는 것도 나와 상대에 대한 믿음과 평등의식을 통해 충분히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노바 바베의 <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라는 책에는, 아이들이 스스로 걷기 위해서는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실패와 무수한 좌절을 겪고서야 스스로 일어서게 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믿어야 한다. 아이들의 내면에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이미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믿고 북돋워주고 기다려주면 된다는 것을. 아이들이 태어나서 스스로 서고 걷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듯이, 각자의 내면에 이미 심어져 있는 불성이랄지 한울님이랄지 혹은 어떤 다른 이름일지라도 그것이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평등하게 존재하고 있고 대신할 수 없는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 모두를 진정한 해방으로 이끄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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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주부가 부업을 갖게 되는 주된 이유는 아이들 학원비를 대기 위해서다. 초등학생이 학교 수업과 숙제 외에도 영어학원, 수학학원, 논술학원, 피아노학원을 다녀야 그런대로 상위권을 유지하는 한국의 교육 현실은 개미지옥과 다를 바 없다. 가정교사나 눈높이 선생님이 있어야만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이들로 하여금 노예근성만을 길러 줄 뿐이다.
공교육의 붕괴와 사교육의 범람은 "오늘날 진정한 스승이 없다"는 보편적인 푸념을 반증한다. 그러나 배움의 세계에서 스승이 없다면 정녕 제대로 배울 수 없는 것인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궁리, 2008)에서 사람은 누구나 스승이 없이도 혼자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진정한 스승이란 학생으로 하여금 지적 해방의 길로 나아가게 이끄는 훌륭한 길잡이라고 정의내린다면, 자크 랑시에르는 우리 스스로 지적 해방의 길을 걸어나갈 수 있게 돕는 자신의 스승이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스승은 두 부류가 있다. 소크라테스, 맹자, 주자와 같은 유식한 스승과 자코토, 왕양명과 같은 무지한 스승. 자크 랑시에르는 전통적인 유식한 스승보다 무지한 스승이 진정한 스승이라고 평가한다. 학생에게 질문을 던지고 학생의 앎을 검증하는 이른바 훌륭한 스승들은 랑시에르가 보기에는 그저 '바보 만들기'의 대가들에 불과하다. 유식한 스승은 지능의 불평등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유능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학생들의 앎을 파괴한다. 맹자는 <고자 하>에서 말하기를, "내가 가르치고 싶지 않아서 거절하는 것도 역시 가르치는 방법의 하나이다"라고 했다. 반면에 무지한 스승은 지능의 평등에 대한 의견에 따라 학생들을 이끌어 이들이 가진 이성의 순수한 힘들을 해방시킨다. 그래서 무지한 스승은 학생들에게 스승 자신이 모르는 것까지 가르칠 수 있다. 자, 이제 가난하고 무지한 가장도 자코토의 원리에 따라 아이들을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다. 아이들의 지적 해방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스승이란 구하는 자가 그의 길을 계속 가도록 유지하는 자이다. 그 길에서 구하는 자는 혼자 구해야 하며 구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72쪽)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모든 지능은 평등하다는 원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과 연관시켜야 한다."(193쪽)
자크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의 사례로 제시하는 이가 바로 1818년 루뱅 대학 프랑스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된 조제프 자코토이다.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르는 프랑스어 선생이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들을 가르친 이야기를 소재로 이제껏 교육제도에서 진지하게 고려되지 못했던 진정한 지적 해방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자코토는 학생들에게 그저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 《텔레마코스의 모험》 을 건네면서 이 책을 통해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라고 주문한다. 자코토는 프랑스어의 가장 기본적인 것도 심지어는 철자법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학생들은 오직 자신들이 아는 단어에 상응하는 프랑스 단어와 그 단어들이 어미변화하는 이치를 혼자서 찾아냈다. 그런데 네덜란드 학생들의 프랑스어 구사 수준은 놀랍게도 거의 프랑스 작가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자코토의 원리는 양명학의 교육철학과 통하는 구석이 있다. 랑시에르는 사회주의자들이나 공화주의자들이나 현실적인 불평등에서 출발해서 평등이라는 목적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그 둘은 똑같이 지적 능력의 불평등을 무한정 축소할 수는 있으되, 결코 평등에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라고도 덧붙인다. 그는 평등에서 출발해야 하며 지적 능력의 평등은 하나의 공리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입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논쟁의 지형을 1980년대 프랑스의 교육 문제에서 1차로 19세기 자코토의 교육 방법으로 옮기고, 2차로 교육의 문제를 지적 능력의 평등이라는 철학적·정치적 문제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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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를 검색해 보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철학자란다. 우리나라에도 내가 몰라서 그렇지 그의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있고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꽤 알려진 인물이다. 하긴 내가 모르면 인기 없는 연예인인 것처럼 내가 모르면 별로 유명하지 않을 거라는 나의 오만함?? 시작부터 왜 이리 쓸데없는 말이 많냐고? 날씨가 더워서 그렇다. 너무 덥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 덥다. 거기에다 책도 어렵다. 무슨 말인지, 도통 감이 안 잡힌다. 번역이 잘못 된 것인지 원래 어려운 책인지...옮긴이의 말을 보니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랑시에르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1981년 사회당 출신 미테랑이 대통령이 된 후 당시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사바리는 -부르디와 파세롱의 사회학적 연구 <상속자들>, <재생산>, <구별 짓기> 에 준거한- 지배계급이 특권적으로 누리는 고급문화의 구별 짓기가 학교에서부터 작동하며, 그로부터 상징폭력이 재생산된다고 보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인교육과 학내에 평등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조성, 낙후된 계급 아이들의 수준에 교육을 맞춤으로써 계급간 학력 격차를 축소해야 한다는 했다. 이것은 진보적인 사회주의 성향의 교육 개혁 방안이었다. 그러나 1984년 교육부 장관이 된 장 피에르 슈벤느망은 프랑스어 기초 수업 강화, 시험 및 선발 제도 강화, 공민 교육 강화를 주장하는 공화주의 성향이 강했다. 이는 장 클로드 밀네르의 <학교에 대하여>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스승과 제자의 불평등한 관계는 학습욕구를 불러일으키며, 학교에서 평등을 실천한다는 명목으로 하향평준화를 해서는 안되고 똑같이 가르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들을 선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공화적 엘리트주의 , 스승과 제자의 불평등 그리고 지식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방안으로 이 두 입장은 맞서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랑시에를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이 책을 읽기 위해 꼭 알아야할 개념이 있다. 이 책에 첫 장에 시작되는 것처럼 왜 1987년인 현재에서 19세기 교육자인 자코트의 이야기로 시작하는가 이다. 이 책은 모두 5장의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다. 그 배경은 과거로 시작되고 다른 배경으로 되어있다. 옮긴이는 이를 ‘동시대성’의 무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265페이지를 잘 보아야 이 책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성이란 무엇인가? ~ 니체 이후 적지 않은 철학자들은 ‘동시대성을 ’반시대성‘으로 바꿔 읽고 있다. 동시대성이란 시류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공간적 거리를 두거나 ’틈을‘을 만들어 내는 것, 그 시대와 시간적 거리를 두고 사태를 바라보는 ’시차‘를 갖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랑시에를 역시 동시대적인 것이란 반시대적인 것,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 랑시에르의 동시대성-반시대성 개념의 도특함은 그의 시간관에 있다. 그의 시대에 일관된 흐름이 있다소 보지 않는다 그는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들‘이 있다고 말한다~ 랑시에르에게 동시대성이란 상관없어 보이는 여러 장면들을 지금 합치는 것, 즉 ’시간들을 함께 놓기‘이다.~ 그로부터 따라나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재연출로부터 결과하는 것은 바로 오늘의 장면/무대 자체의 재편성이다. ~ 사회주의자들이나 공화주의자들이나 현실적인 불평등에서 출발해서 평등이라는 목적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고, 그 둘은 똑같이 (지적능력의) 불평등을 무한정 축소할 수 있으되, 결코 평등에 도달하지는 못 할 것이라고, ~ 그(자코토)는 바대로 평등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지적 능력의 평등은 하나의 공리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입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랑시에르는 이철럼 논쟁의 지형을 1980년대 프랑스이 교육 문제에서 일차로 19세기 자코토의 교육 방법으로 옮기고, 이차로 교육의 문제를 지적능력의 평등이라는 철학적, 정치적 문제로 옮긴다.” 이 글을 읽다보면 우리나라의 노무현 정부와 지금의 MB정부의 교육적 대립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에서 1980년대 말에 벌어졌던 상황이 2000년대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이 문제로 치열란 공방이 벌어졌지만, 우리는 어떠한 논의와 물음도 없이 정치적 방향으로 교육이 쫓아 간다는 것만이 다르다. 이러니 우리나라 교육이 이 모양인가? 교육은 정치적 그늘에서 벗어나 교육이 필요한 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나은가가 먼저 우선되어야 하는데도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랑시에르는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이 이야기 하는 평등한 교육이라는 개념자체를 불평등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피교육자가 무지하다고, 무엇가를 스승이 교육시켜야 한다는 개념자체, 그것이 평등으로 가는 길이라는 개념자체가 불평등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책의 제목 <무지한 스승>이라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270P ) “무지한 스승은 학생에게 가르칠 것을 알지 못하는 스승이다. 그는 어떤 삶도 전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앎의 원인이 되는 스승이다. 그는 불평등을 축소하는 수단들을 조정한다고 자처하는 불평등의 사유를 모르는 스승이다.~이는 첫장의 루뱅대학에서 일과 칼랍소의 책의 섬에 내용을 보면 알수 있다~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스승의 앎이나 학식을 전달하고 설명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지능이 쉼 없이 실행되도록 강제하는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 스스의 의지와 학생의 의지가 관계 맺고, 학생이 지능과 책의 지능이 관계 맺는다. 의지와 지능의 관계의 이러한 분리가 ‘지적해방’의 출발점이라고 자코토- 랑시에르는 말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교육자가 학생들의 지능에 맞는 효과적인 설명 방법을 개발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기가 가진 ‘앎’과 학생의 ‘무지’를 구분하면서 시작한다. 교육자는 학생의 무지를 앎으로 전환하면서도 무지의 앎의 축소될 수 없는 거리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 그러나 무지한 스승은 이러한 불평등의 논리를 알지 못한다. 그가 아는 ‘사실’은 선생이 학생에게 무언가를 알려줄 때 학생이 이해한다면, 이 상활은 이미 말하는 자와 듣고 이해하는 자 사이의 ‘지적 평등’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평등에 대한 사유다. 그는 오늘날 무지한 스승이 누구 혹은 무엇인지 묻거나 또는 개인을 지적으로 해방하는 독학 방법과 제도 교육을 대립시키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고 말하다. 오히려 지능의 평등에서 출발하는 논리와 지능의 불평등을 가정하고 그 불평등을 무한정 축소하겠다고 말하는 진보의 논리를 맞세우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즉 앎의 차이로 인한 불평등은 없으며 배우려고 하는 순간 평등은 시작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하나 이책의 중요한 개념은 “현동적인/현실태로서의 평등”이다. (273p) "현동적인 평등이란 무엇인가? 랑시에르는 지능의 평등이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갖는 ‘의견’이라고 말한다. ~ 무지한 스승이 자신이 모르는 것을 가르쳤다는 사실 주위를 계속해서 맴돌면서 그것을 되풀이하는 작업, 이 현동화 속에서만 평등은 존재 할 수 있다. 현실태로서의 평등이란 무엇인가? ~평등은 실현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에서 상정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다른 이들과 평등하게 말하고 사유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서 어떻게 공통적인 것을 논하고 구성하는 무대/장면을 만들 수 있겠는가? ~지금은 불평등하지만 나중엔 더 불평등해 지거나 더 평등해 진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근본벅인 지적 악은 ‘무지’가 아니라 ‘무시’라고 말한다. 랑시에르는 이를 ‘자기무시’라고 말한다. ‘나는 이해못하겠고’란 말은 ‘나에게 그것이 필요없소’라고 ~ 나는 나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자리에 부합하는 것을 알면 충분할 뿐 그 이외의 것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사회에서 배분되 자리들이 우연적이고 자의적이며, 누구든 태어날 때부터 지배자고, 피지재바이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네 자신/자리를 알라’가 아니라 ‘제가 다른 모두와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라’를 쉬지 않고 빈자들에게, 나아가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 요컨대 지적인 평등이란 ‘아무나가 가진 능력’이다. 바로 그 평등한 능력, 능력의 평등에 기초할 때에만 ‘민주주의’로서의 정치는 가능하다“ 나는 옮긴이의 말을 읽고 이 책을 보니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첫 장과 두 번째 장의 상황은 우리나라 옛날의 서당과 같은 개념의 공부가 아니었을까? 스승은 학동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공부할 수 있는 상황 - 책을 다 같이 읽고 한자를 반복에서 강독함으로써 스스로 문리를 터득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동기같은 존재이다. 누구나 서당에 오면 천자문을 읽고 외우면서 스스로 문장을 이해하고 깨달으면 그 다음 단계의 책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칼립소는 못했다”처럼 글자를 모르지만 비슷한 글자를 찾고 반복함으로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장들의 이야기도 이런 상황과 비슷하다. 스승은 지식을 전달할 수 없지만 제자들 스스로 지식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서로 토론하고 질문하고 이해함으로써 그들 사이에는 앎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교육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아자랑의 방법과도 일치한다고 본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이끌어줄 스승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하고 읽는 책들 또한 우리 아줌마들이 읽기에는 벅찬 책일 수 도 있다, 하지만 서로 힘겹게 책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눔으로써 책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되고 생각이 넓어진다. 이런 공부는 어도연의 발제에서도 이루어진다고 볼수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지한 스승인 동시에 제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 책에서 루시에르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기득권층에게는 두려울 것 같다. 기득권층-진보나 보수를 떠나-은 피지배층인 우리에게 교육이라는 그럴싸한 평등이라는 당근을 주고 있지만. 그것 자체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불평등의 당근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신들과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의 몫을 요구할 까봐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교육조차 불평등하게 만든 것이다. “네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네 자신의 분수를 지키고 까불지 말라”가 아니라 “네 자신이 얼마나 평등한 존재인가를 알고 행동하고 사고하라“라는 것일 것이다. - 그런데도 우리는 이 의미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었던가!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읽은 <희망의 인문학>과도 일맥상통한다. 자신이 무능하고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고 자각하는 노숙자나 사회의 패배자들에게 그것이 그들이 잘 못이 아니며 기득권층과 다를게 없다는 존재감을 심어주는 평등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교육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나는 학교에서 단계를 나누어 선생들에게 지식을 전달받는 것이 교육이라 생각했었다. 많은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교수법이나 교육학을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려는 자와 가르치는 자- 이런관계적 위치는 상황에 따라 바뀔수 있다-서로 평등하며 서로에게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많이 알고 있으므로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배우려는 자들에게 학습의 욕구를 줄수 있는 동기만 부여해 주는 존재로, 그들 스스로 알아 갈 수 있게 같이 공부하는 존재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랑시에르가 말하는 무지한 스승의 시스템이 모든 것이 대량화되고, 빠름을 요구하는 현재에 얼마나 적용 가능할 수 있을까? 랑시에르의 말이 맞다면 현재의 교육제도는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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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흥미로운 책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아래 발췌문 정도는 대단히 재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