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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가 지금보다 사회로부터 비판받고 신용을 잃은 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핍박받는 것은 어제오늘일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존재였던 예수님조차도 세상으로부터의 핍박으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셨으니까요. 교회가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교회가 받는 비판은 지금보다 더욱 심해질 것이고 이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회가 이대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없는 예수교회’는 한국 교회가 현 상황을 직시하고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 조목조목 제시하고 있습니다. 책 전반에 흐르는 주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천 년 전 이 세상에 오셨던 ‘역사적 예수’를 재조명하고 그를 본받는 ‘예수따르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예수는 사랑의 화신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모든 것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본받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마음으로 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논조는 얼핏 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책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던 챕터별로 보던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비판하려고 하는 이유는 저자가 기독교인으로서 이 책을 집필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을 때 기독교에 대해서 잘못 이해할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유일신 하나님만이 진리이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교리는 무엇입니까? 인간들이 수 세기에 걸쳐 성령의 조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 사실들 중 가장 기본이 되며 공통이 되는 것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것은 진리라고 누구나 믿는 사실이 교리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시는 이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판단을 유보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진리에 가까운지는 판단해야 하고 그 내용들을 가르쳐 전파해야 합니다. 그 잣대는 물론 성경이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분별력입니다. ‘예수없는 예수교회’는 분명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동안 저지른 잘못들을 회개해야 하고 역사적 예수, 인간 예수를 본받아야 된다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신격화된 그리스도에 치중하지 말고 실물 예수에 주목하자고 하며 그리스도와 예수를 분리한 한국교회를 꾸짖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교회는 분명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저자는 책 전반을 통해 그리스도와 예수를 분리하고 있습니다. 39페이지를 보면 ‘이같이 스스로를 비우고 종이 되어 남을 섬기셨기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로 높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신격화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책을 잘 보다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친한 스승, 친한 벗으로 묘사되고 ‘~’주의자 등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스승으로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기 위해 오신 사회변혁가가 아닙니다. 단지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서라면 왜 굳이 예수님이어야 합니까? 부처나 공자한테서 배워도 됩니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어머니의 사랑에서 배워도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들의 구원자로서 오셨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멀기에 그 분을 통하여 다시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오셨습니다. 저자는 이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151페이지 참조) 15챕터를 봅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을 해석하고 있는데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고 분명히 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길은 밟히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 실물 예수의 행적이 나와 있지 않다고 반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름 창의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저자가 예수님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발상입니다. 저자는 ‘흑암의 세계에 빛을 던지사 병마를 쫓아내시고, 부당한 차별의 장벽을 허무시며, 꼴찌와 지극히 작은 자들도 주인이 되는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시다가’라는 대목을 끼워넣자고 말합니다. 사도신경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입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에게서부터 성령으로 나신 분입니다. 전능하시고 천지를 만드신 분께서는 저자가 말한 행적들 쯤이야 한 말씀만으로 이루어내실 수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이란 대목에 저자가 말한 부분은 자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기로 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에 의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자의 이 발상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별개의 존재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듯 합니다. 39페이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결코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 책에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른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저자에 의하면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 진노하시는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인간 예수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우리는 사랑이신 바로 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용어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4장 8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둘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품고 있는 마음,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행동들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매를 들고 심판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구약에서 우리가 흔히 느끼는 진노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잘못된 구원관입니다. 저자는 착한 행실로서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흔히 천주교에서 말하는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갈릴리 예수를 닮는 길만이 인류가 구원받는 진리의 길임을 믿습니다.(25p) 사마리아인처럼 착하게 살아야 영생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100p)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구원을 받아 영생을 이르는 거룩한 존재입니다.(288p) 이와 같은 구원관을 주장하는 근거로 고린도전서 13장을 들고 있습니다. 바로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한 절 한 절이 모두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문맥 아래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물론 사랑이 으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요. 그런데 저자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무시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취하는 자세는 사랑이고 인간이 취해야 할 자세는 믿음입니다. ‘예수믿으미’가 먼저이고 ‘예수따르미’는 그 다음입니다. 이 시대에 이 둘 사이가 균형을 잃었고 진정한 ‘예수따르미’가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순서가 뒤바뀌면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따르미’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믿으미'가 되었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함이지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건 뭐 서평이 아니라 저자가 말한 ‘종교적 독선주의’로 이 책을 비판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이 기독교 서적으로 나왔기에 용기내어 이 글을 썼음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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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이 책이 쓰여졌다는 사실을 많은 크리스천들이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의 내용에 끌려가게 될 위험성이 다분히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인 관점에서 본다고 하면 한국교회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단체치고 문제가 없는 단체가 어디에 있던가, 만일 교회가 천국에 있다고 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교회는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한완상 씨는 간과하고 있다. 또 한가지 문제는 한완상 씨가 역사적 예수를 인용하면서 존 크로산 도미닉이라는 천주교 신부의 책과 그가 했던 말들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존 크로산 도미닉 신부가 쓴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기독교에서 인정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역사적 예수를 이야기하면서 예수의 인성만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써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인간 예수만을 찾는다고 하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 그저 존경만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인간으로써 이 땅에 찾아온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한 일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심지어 사도 요한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완상 씨는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왜 이땅에 보내셨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을 모르니 이런 글을 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나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면서도 크게 실수한 것이 있다. 그것은 여성이 주동이 되어서 일으킨 기적이라고 말을 하면서 마치 마리아가 무슨 여성해방 운동을 한 사람처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히 성경은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을 일으킨 이유를 언급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2장 11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기적의 목적은 제자들이 예수를 믿게 하는데 있었다. 이 기적이 여성해방운동을 위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한완상 씨는 예수를 사회운동가, 해방운동가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육적 해방 운동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요한복음 14장 6절을 인용하면서 길을 밟혀야 한다고 이상한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길은 밟히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길은 서로 소통하는데 목적이 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길이다. 실크로드를 통해서 동방의 문화와 서방의 문화를 이어주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아는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궤변을 통해서 예수는 밟혀야 할 대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을 소통시키기 위한 길이었지, 밟혀야 할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목사라는 사람이 그런 것조차, 심지어 아주 기본적인 것 조차 모르고, 이런 책을 쓸 수 있는지 의문이다. 목사라는 직함을 떼고 이런 글을 썼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소개를 하면서 목사라고 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성경을 깊게 읽지도 않고,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는지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으며, 심지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이 책에서 수없이 많은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이, 예수를 사회 운동가나 해방운동가 정도로 보고 있는 사람이 과연 무슨 설교, 심지어 부활절 설교를 어떻게 할는지 심히 걱정되고, 염려된다.
참고로 한완상 씨가 이끌어갔던 대한적십자가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 아시죠? 만일 교회의 이런 문제를 지적할 자격이 있다고생각된다면, 자신은 왜 대한 적십자사를 운영하면서 그런 오류와 잘못들을 저질렀는지 한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헌혈했음에도 불구하고, 혈액이 상해서 버리고, 혈액을 가지고 장사했던 그 사람이 어떻게민중해방과 사회개혁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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껌껌한 바탕에 붉은 글씨, 뭔가 저항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표지와 교회를 찌르는 듯한 제목은 참도 잘 어울린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조소가 난무하고 있는 이 시대에 저자는 원인과 그 해결방안을 저자만의 언어로 제시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이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문체는 사회과학적이었다. 아니, 반대로 사회학을 전공하였기에 이런 문체의 글을 썼다는 것을 읽는 이들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교육, 정치, 사회, 종교계에서의 참지식인상을 선보이며 소셜닥터(social doctor)의 소명이라고 치칭받는 그가 이 한국 개신교회를 향해 펜을 들었다. 개신교가 교리만 있고, 실천이 없는 것을 질책하며, 사랑이 없음과 전투적인 교회를 비판하고 있으면서 교회에서 예수믿으미만 있고 예수따르미가 없음을 피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 비움을 통해 역사적 예수를 기억하여 새로운 예수 문화를 세워야한다고 강조한다. 이책을 읽는 동안 장로교회 출석자인 나로서는 충격을 많이 받았다. 사도신경에 역사적 예수없음을 말하며 새로운 사도신경을 자신이 한번 만들어보는가하면, 용서와 인내사랑으로 배워왔던,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라','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라' , ' 속옷을 달라거든 겉옷까지 주어라'를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의 예수의 해학적 비판으로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을 '예수의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정작 자신이 만났던 하나님은 어떤하나님이었는지 별로 소개되어있지 않다. 자신이 겪은 대한민국의 정치이데올로기속 험난한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찌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다른 어떤이의 말처럼 저자의 말에 동의를하건 안하건 실천없고 사랑없는 교회와 나 자신에 대해 회개해야할 부분이다. 더욱더 매서워지는 세상의 질채고가 비난앞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실천적 삶이 필요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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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한완상 씨가 목사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았다. 대한적십자가 총재로만 알았지, 목사라는 사실은 이 책을 보면서 처음 알았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목사가 되어서 어떻게 예수를 사회운동가 정도로 끌어내리고 있는지 아이러니컬 하다고 밖에는 도저히 표현할 방법이 없다. 사도행전에서 분명히 제자들이 물어본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때가 이때냐고. 그때 제자들이 말했던 이스라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이땅에 이루어질 다윗 왕국을 지칭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이야기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껏 사회운동가 정도로 끌어내리고 있는지 정말 아이러니컬하다. 그리고 존 크로산 도미닉이라는 천주교 신부의 역사적 예수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존 크로산 도미닉의 책에는 육신적인 예수만 있지, 하나님의 아들로써의 예수는 전혀 없다는 사실을 왜 한완상 씨는 모른단 말인가? 세상에 그러면서 어떻게 교회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지상의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들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 운운하는 것은 목사라고 한다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 곧곧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써 일으킨 기적들을 그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심지어 한완상 씨는 성경도 왜곡되게 해석하고 있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 혼인잔치를 마치 마리아가 주동적으로 일으캔 무슨 여성해방 운동 정도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을 조금만 더 읽어보면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의 목적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또 한가지 사도 신경에 역사적 예수는 없고,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이야기한다고 비판했다. 한완상 씨는 정말 말도 안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누군가의 인생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것들에 촛점을 맞추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다 보면 이야기의 촛점이 중구난방이 된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의 약력을 이야기할 때, 초등학교 1학년 때 무얼 했는지, 2학년, 3학년 이렇게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들만 언급한다. 예수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동정녀 탄생-물론 저자는 믿지 않겠지만-,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재림이다. 이건 크리스천이라면 기본적인 관점이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사도 신경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또 길은 밟히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했다. 길은 밟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했을때의 길의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소통시켜주는 길로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 밟혀야 되는 존재로써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아주 기본적인 사실들 까지 왜곡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책 중간에 책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사진과 내용들이 나오는데, 이건 편집상의 실수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것인지도 궁금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의 기본진리도 모르는 사람이 목사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고, 사람들의 기본적 상식까지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한번 놀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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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드리는 편지로 시작하는 [예수없는 예수교회], 기독교인이고 교회 장로님인 저자는 자신을 비롯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비판받는 이유들과 앞으로 한국 교회가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총 5장-팔이 밖으로 굽으시는 하나님, 아 기독교인임이 부끄럽구나, 예수없는 예수교회, 신앙 그 감동의 역설, 우아한 패배, 참 평화의 길-으로 구성되어 있다. 300여 페이지의 분량이지만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저자는 교회가 사회 정의 구현과 구제, 봉사, 나눔에 앞장서지 않음을 비판 한다. ‘믿습니다’ 만 외치는 예수믿으미들은 많지만 예수따르미들이 없음을 한탄해한다. 한국 정치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많은 대가를 치러야했던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그 때마다 자신이 만난 ‘역사적 예수’를 소개한다. 저자는 사회학 박사이고 미국에서 신학도 공부했다. 그동안 신학 공부한 사람은 다 목사라고 생각했었기에 이 부분에서 놀랐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자를 사회과학자로, 소셜 닥터로 부른신것 같다. 저자는 민중학적 예수에 초점을 맞춘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시다'가 신앙고백인데, 저자는 이 신앙고백을 반박하고,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친히 체험하시고 가난한 자들의 벗이 되신 예수를 부각시킨다.
난 교역자도 직분자도 아닌 평신도이다. 모태 신앙이어서 아주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매일매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소망하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전도, 구제를 제대로 하지 못함이 부끄럽고, 우리나라의 사회 문제들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는 평신도이다. 이 책의 예리한 지적과 비판을 읽으면서 흠칫 놀라기도 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고, 공감하는 부분들도 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제일된 목적은 무엇인가? 나의 개인적 의견은 교회의 존재 목적은 '구원'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처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다. 천주교는 모든 사회 문제에 관여한다. 촛불 집회도 주관한다. 구제 활동도 열심이다. 개신교는 눈에 띄게 적극적이지 않다. 이런 행동의 목적이 사회 정의 구현이 된다면 교회는 여느 공동체나 다를 것이 없다. 교회의 교회됨은 바로 모든 행동의 목적이 '구원'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예수 제자도를 따르지 않는 것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책에서처럼 민중의 예수만을 떠받드는 것은 참된 비판이 아니라고 본다. 찰스 쉘돈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란 책이 떠오른다. 예수님의 제자도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는 레이몬드시의 교인들.. 이 책을 읽고 각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예수따르미가 되어, 한국 교회의 희망이 되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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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로 섬기는 분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꼭 먼저 읽어보았으면 하는 책이다. 왜냐면, 한국교회의 특성상 위로부터(위로부터라는 표현은 이상할지 모르겠지만)의 설교나 저자인 한완상 전 총리는 사회학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고 다양한 관직과 여러 기관장 등의 단순히 이론적인 내용으로만 채워진 여러 학자들의 그러한 책이 아니요, 체험에 그 바탕을 둔 한국 교회가 이 책의 주인공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이 책의 주인공이요 이 책을 쓰게 된 누구나 현재 한국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는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중심인 개 교회들은 이러한 그 이유에 대해 저자의 여러 이유들과 매우 공감을 하며, 로마카톨릭이 결국엔 기득권층의 그 저자는 개혁만을 강조하진 않는다. 오직 예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는 결론이다. 이러한 책은 정녕 많이 읽혀야 하며, 필독서뿐 아니라 교과서적인 교재로 채택하여 매우 신중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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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교수는 작가이자, 교수이며, 신학자이고 사회과학자이다. 전직 장관이기도 하셨고 적십자총재를 지내기도 한 분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탁상공론을 일삼으며 머리속으로 예수를 믿는 분이 아니었다. 인터넷 '아고라광장'의 토론방에 들어가 그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에 귀기울이며 왜곡된 기독교의 모습을 보고 가슴아파하며, 그렇게 인식되어질 수 밖에 없는 우리 기독인의 자세를 꾸짖으며 어서 빨리 바로잡아 보자고 이 책을 쓰신 것이다. 어떤 분들은 이 책이 삼위일체를 부정한 듯 하다고, 또 예수의 신성을 비하했지 않느냐고 염려하는 듯하다. 그러나 한교수는 다분히 실천신학의 입장에서 이 글을 이끌어내고 계시다. 단지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를 너무 확연히 분리시켜 이야기하고 계시기에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한 부분이 아닌 전체의 맥락으로 이해할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하면서 단지 입으로만 머리로만 믿는 예수 믿으미가 아닌, 그 분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예수 따르미가 되기를 모든 크리스챤에게 강권하고 계신 것 뿐이다.
처음 이 책을 보면 다소 딱딱한 어투의 표현들이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장, 한 장 읽다보면 정말 솔직하고 자세하게 성경을 해석하고 정리해 놓은 글임을 알게 될 것이다. 너무 강력한 어투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직설적인 표현으로 마음이 불편하고 찔림이 있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성경의 많은 부분을 새롭게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나는 정말로 우아한 예수의 당당함을 닮고 싶다. 왜 크리스챤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손해만 보고 살아야 하느냐고 볼멘 소리로 항의하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이 땅에서 아무에게도 이기려 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야 한다. 늘 이방인들의 편이셨으며 여성들과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의 편에 서셨던 분이 누구를 이기려 드셨을까?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악다구니를 하며 살아가는데 너무 익숙해졌기에 지금의 "개독교"로 불리워지게 되진 않았을까? 자기들도 별거 없으면서 자기들만 깨끗하고 온전한 척 한다고 그들이 크리스챤을 욕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며 유대인들과 로마군인들의 비난과 채찍질, 억울한 고난을 고스란히 감내하시며 마침내 영광스런 부활의 모습으로 그 모든 것을 승리하신 주님을 우리는 과연 따를 수 있을까? 저자는 지금의 기독교가 종교적 근본주의와 냉전 근본주의를 벗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온전히 따르며 사랑의 삶, 관용의 삶의 모습을 회복할 때에만 세상 가운데서 다시금 빛과 소금의 자리를 찾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교만과 아집의 눈으로 비기독교인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에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망과 꿈을 함께 나누자고 이야기한다. 교회전통과 교리에 눈멀고 귀먹어 값싼 종교적 축복에만 급급한 우리에게 예수의 놀라운 지혜를 새롭게 깨닫고 평화를 만들어 가지고 한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패배한 모습으로만 보였던 예수께서 정말 우아한 승리를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 속에서 우아한 패배를 하게 될 때 참 평화와 사랑이 있게 될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제 더이상 단지 예수 믿으미가 아닌, 예수 따르미로 살기를 결단하도록 만드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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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 가고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 하리라 생각한다.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바로 서야할 교회가 그렇지 못한 모습들로 지탄 받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극히 일부의 문제 이지만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일부로 인해서 전체가 그런 것처럼 인식하는 안타까움을 만들게 됐다.
이책은 제대로 알고 제대로 믿어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펼치셨던 나를 비워 남을 채우는 삶을 사는 진정 올바른 예수따르미를 소망 하며 쓰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본다.
키가 커지고 덩치가 커졌지만 체력은 약해 졌다는 요즘 아이들처럼 마치 세계적인 크기의 교회와 몇십만을 헤아리는 교인의 수를 자랑하는 교회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아직도 이땅에는 병들고 가난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친구이며 구원의 구주였던 예수님을 우리는 어찌하여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가에 대한 안타까움을 깨달았다.
팔을 밖으로 굽으시는 하나님 아, 기독교인임이 부끄럽구나 예수 없는 예수 교회 신앙, 그 감동의 역설 우아한 패배, 참 평화의 길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 가면서 진정 제대로 바라보고 올바로 믿고 예수십자가의 길을 똑바로 따라가는 것이 진정한 예수따르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길은 많은 사람들이 많이 밟을수록 더욱 길 다워집니다. 밟히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닙니다. 단단한 길 일수록, 안정된 길 일수록, 반듯한 길 일수록 그만큼 많이 밟혔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나는 길이다" 라고 선포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많이 밟도록 초청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밟힘으로써 인간에게 참 희망과 질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값진 은총입니다. 밟히는 아픔은 일종의 용서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이마에 깊이 팬 주름살이 자식들에 의해 오랫동안 밟힌 사랑의 흔적인 것처럼 우리도 나를 내려놓고 스스로 낮추어 밑바닥 길처럼 밟히며 살아 간다는 것은 예수님께 좀더 다가가는 삶이 아닌가 합니다. 산에 오르다 보면 작고 좁은 길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면서 만들어진 길들을 볼 수 있다. 처음 그 길을 지나갔던 사람에게는 제대로된 길이 아니어서 힘들고 위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된 그런 길.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이와 같은 길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공감이 되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예수님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십자가 위에서 보혈을 흘리며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피눈물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진정 독생자 예수를 대속 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가슴저미는 사랑과 아픔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 층더 성숙된 신앙인의 모습으로 이 책을 바라본다면 아마도 깊은 자기 성찰과 함께 앞으로 믿는 우리들의 발걸음을 어떻게 내딛어야 할 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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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 비젤박사가 감금되어 있을 때, 강제수용소의 발전소가 폭파되었고 세 사람의 용의자가 체포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소년도 있었습니다. 슬픈 눈을 가진 천사처럼 아름답고 야윈 소년이었습니다. 두 어른은 교수대에서 곧 숨을 거두었으나 이 야윈 소년은 몸이 가벼웠기에 교수대 줄에 매달린 채 30분 이상 몸부림쳤습니다. 그때 누군가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이 외침은 주전 586년경 눈알이 빠진 채 굴비처럼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외쳤던 정직하고 처절한 바로 그 외침의 메아리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때 비젤 박사는 자기의 내면 깊은 곳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바로 여기에 있지. 하나님은 지금 저 교수대에 매달려 버둥거리고 있지.'
이 시대를 그대로 드러내 놓은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드는 책 제목이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세상 속담에 '앙꼬없는 찐빵'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와같이 요즘 세대는 문명은 많이 발전해서 말씀과 찬양은 접하기가 쉬워졌으나, 주님을 사모하며 주의 길을 가겠노라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없는 예수 교회"를 통해 저자는 처음에는 하나님과 대화하듯 일기를 쓰신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참 진솔하게 주님과 대화하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소 주님께 불평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진실한 마음을 담은 독백과도 같은 표현의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중간쯤 한완상 저자님의 간증을 소개해 주실 때 들었던 생각은, 참 쉽지 않은 길을 걸어 오셨구나 였습니다. 많은 고난과 풍파를 겪으시면서도 주님께 감사를 잊지 않으셨고, 특히 감옥에서 옆방의 L목사님께 성경을 전해주시고자 하는 귀한 마음을 가졌었지만 인간의 마음인지라 나는 어떡하나라는 마음에 성경을 반으로 나누어서 함께 은혜를 받으셨다는 간증은 참 은혜를 받았습니다. 소셜 닥터(social doctor) '사회 의사'가 되어야 겠다는 꿈을 품고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저자의 뜻이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의존하기보다는 일반적인 상식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옳지 않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과격한 표현으로 팔이 밖으로 굽으시는 하나님, 아, 기독교인이 부끄럽구나, 예수 없는 예수 교회라는 제목을 썼지만 이 시대의 모순을 정확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끼리의 예수님이 아닌 믿는자든 안 믿는자든 이 세상 피조물 전체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우리 모두의 아버지임을 믿는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책에서 전체적으로 전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4장, 5장에서는 예수님을 왜곡하여 믿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을 어린아이처럼 올바로 믿고,올바로 전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지 못했던 부분들 또는 왜곡시키고 있던 부분들을 모두 깨달아 회복해서 한국교회와 나아가 세계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