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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빅 브라더(big brother)'의 출현은 필연적인 듯 보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과거 7,80년대의 군부 독재 시절에 우리나라 국민의 인권은 그야말로 개의 밥그릇에 버려진 생선 가시보다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지하철역을 빠져 나올라치면 전경의 검문검색이 수시로 있었고, 어쩌다 조금 따분하고 지루해 하는 전경과 마주친 여대생이라면 어김없이 그들의 놀잇감이 되곤 했습니다. 검문을 한다는 핑계로 핸드백을 열어보는가 하면 그 안에서 혹시 담뱃갑이라도 발견되면 옳다구나 하고는 행인들에게 이것 좀 보라는 식으로 길바닥에 쏟아놓고 히히덕거리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담배를 피우는 여자를 거리에서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기에 그들의 눈에 비친 여대생은 소위 '날라리'로 오인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절이 변하여 인권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도, 법과 정치 제도도 크게 변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들이 지닌 권력과 부를 지키려는 욕심은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약해졌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 국정원의 타겟이 된 유모 씨의 경우도 그런 것이겠지요. 어찌 보면 현실은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더 실제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권력과 부에 대한 욕심을 그린 소설은 많이 있지만 저는 오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양을 쫓는 모험>을 통하여 살펴보려 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나'에게 어느 날 친구 '쥐'(별명)의 편지가 배달됩니다. 발신지도 밝히지 않은 의문의 편지였죠. 광고업을 하는 '나'는 P보험사의 PR광고에 우연히 그 친구의 편지에 동봉된 양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진이 발단이 되어 우익계의 거물로부터 압력을 받습니다. 사진에는 별의 문양이 찍힌 특별한 양이 포착되었던 것입니다. 그 양은 인간을 숙주로 삼아 자신이 의도하는 세계를 만들려는 그야말로 특별한 양이었죠.
사실 우익의 거물은 노쇠하여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었습니다. 후계자를 찾고 있던 중 그 사진이 눈에 띈 것입니다. 그 양은 죽어가는 우익계의 거물 머리 속에 기생하며 살다가 가치를 다한 그의 몸뚱아리로부터 빠져나왔기 때문에 양이 선택한 새로운 인물이 우익계의 거물을 대신할 후계자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우익계 거물의 비서실장은 '나'에게 한 달의 여유를 줄 테니 그 양을 찾으라고 합니다. '나'는 친구 '쥐'의 행방을 찾아 삿포로로 향합니다. '내'가 묵었던 돌핀 호텔에서 한때 양의 숙주였던 양 박사를 우연히 만나 사진 속의 장소를 알아냅니다. 그곳은 '쥐'의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쥐'의 별장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쥐'를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텅 빈 별장에서 무작정 기다리던 '나'는 양으로 변장한 한 사내를 만납니다. 그 사내는 죽은 '쥐'의 분신이었습니다. 언제나 나약하기만 했던 '쥐'는 자신의 몸 속에 양을 받아들임으로써 일본 전체를 지배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몸에 들어온 양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였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는 무기력한 삶을 단호히 거부한 것입니다. 죽은 '쥐'는 자신이 양에게 지배당했던 상태를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걸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 그건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킨 도가니 같지.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악한 거야. 거기에 몸을 묻으면 모든 것이 사라져. 의식도 가치관도 감정도 고통도 모든 게 사라지는 거야. 우주의 한 지점에 모든 생명의 근원이 출현했을 때의 다이너미즘에 가깝지." (p.422)
어쩌면 나에게도 어렵고 힘든 상황,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면 영혼이라도 팔아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힐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나약하고 무기력한 인간에게는 또한 그런 유혹을 과감히 뿌리칠 수 있는 용기도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 책 속의 '쥐'처럼 말입니다. 책에서 주인공인 '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평범한 소시민일 뿐입니다. '나'의 행보는 누군가의 각본에 의해 짜여진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우연의 대지를 정처 없이 방황할 수도 있다. 마치 어떤 식물의 날개 달린 종자가 변덕스런 봄바람에 날려오듯이.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연성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명확하게 일어나 버린 일이며,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명확하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배후의 '모든 것'과 눈앞의 '제로' 사이에 끼인 순간적인 존재고, 거기에는 우연도 없고 가능성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두 가지 견해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것은(대개의 대립되는 견해가 그렇듯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 똑같은 요리 같은 것이다." (p.101)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은 머리 속에 다들 욕심 많은 양을 한 마리씩 품고 있는 숙주와 같은 사람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여지는 사람이 사악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머리를 장악한 양이 나쁜 것이겠지요. 그런 까닭에 한 사람의 인권을 깔아뭉개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테구요. 인간의 감정과 가치관이 남아있다면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양의 탈을 쓴 인간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빅 브라더', 아니 우리나라에서는 '빅 시스터'인 탐욕스러운 양이 사라질 날은 언제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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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쫓는다. 양이란 무엇이지? 소설 내내, 양은 양일 뿐이다. 하지만 양은 단순한 양이 아니다. 양은 말 그대로의 양(羊)이면서도 또한 어떠한 절대적인 권력, 지배를 상징한다.
하루키의 4연작(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댄스댄스댄스)중 세번째에 위치한 이 작품은, 앞서의 두 작품이 가지고 있던 경쾌함과 말끔함을 거지반 지니고 있으면서도 거기다가 그가 그 동안 쌓은 경륜을 충분히 곁들였다. 두 다리 쭉 뻗고 편한 마음으로 보기는 앞서의 두 작품과 다를 바 없으면서도, 댄스 댄스 댄스의 무거움 또는 진지함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무게를 보여 준다.
물론, 하루키의 글은 [가볍다]. 하지만 여기서의 가벼움이란 흔히 말하는 비난투의 가벼움이 아니다. 가볍고, 톡톡 튀는 문체 속에, 하루키는 그 문체가 아슬아슬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진지한 성찰을 담아낸다. 이는 하루키가 아니라면 너무나 어설프게 느껴질 수 있는 일이지만, 그는 하루키이다.
가벼운 일상사 서술과 대화 위주의 글 전개.게다가 이 소설은 분명 [공상소설]이다! 원래 소설이라는 것이 비현실성을 지니고 있을망정, 이 [양을 쫓는 모험]은 거의 판타지에 가까울 정도의 비현실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어째서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는가? 이는, 이 비현실성이 철저한 상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가고 나오곤 하는 양. 이 양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초식 동물인 양이며 동시에 어떠한 절대권력이자 절대적 지배이다. 양은 사람들의 몸을 옮겨 다니며 자신의 세계를 이룩할 사람을 키운다. 완전히 무질서하고 혼란스런 관념의 왕국.모든 대립이 일체화되는 곳. 양, 이라는 거대한 힘은 주인공의 친구 [쥐]의 몸에 들어가, 그를 이용해 그러한 왕국을 건설하려 한다. 하지만 쥐가 원했던 것, 사랑했던 것은 관념의 왕국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 그리고 너무나도 나약한 자기 자신이였다. 그래서 쥐는 양이 자신의 몸 속에 들어온 틈을 타 자살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이 세계를 지킨 셈이나, 쥐에게 있어 자신의 자살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잃고 싶지 않다는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었으리라. 모험 도중, 주인공의 여자친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친구 쥐는 자살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 모험으로 인해 [나]는 아주 소중한 것 두 가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글의 마지막에서, [나]는 강의 하구에 쪼그리고 앉아 두시간 동안을 울고 난 후 '일어선다'. '어디로 가야 할 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일어난 것이다. 과거의 자신, 관념, 즉 양과 결별하고 양이 이 세계에서 완전히 제거된 후, 그는 어디론가 걸어가는 것이다. 그가 걸어갈 곳이 어디이든 간에, 그곳에 [양]은 없으리라. [나]는, 스스로를 되찾은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난 나의 나약함이 좋아. 고통이나 쓰라림도 좋고 여름 햇살과 바람 냄새와 매미 소리, 그런 것들이 좋아. 무작정 좋은 거야. 자네와 마시는 맥주라든가......" 쥐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모르겠어." 나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담요를 뒤집어쓴 체로 어둠 속을 응시했다. "우리는 아무래도 같은 재료로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 낸 모양이야."라고 쥐는 말했다. "자네는 세상이 좋아져 간다고 믿고 있나?" "무엇이 좋고 나쁜지 누가 알 수 있겠나?" 쥐는 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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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들어간뒤 적응하기가 조금 힘이 들었다.
정도야 다르지만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더디다. 나 혼자 뚝 떨어진 듯한 느낌이 나를 사로잡는다. 어떤 방식에서도 그렇고 사람에 대해서도 책상과 의자에 대해서도 공간에 대해서도.. 시험기간중에(한달정도이다) 책을 샀다.
하루키의 책이 몹시 읽고 싶어서였다. 그의 책은 ''상실의 시대''만 읽어보았지만 하루키라는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물론 대부분.. 그 한권으로 매료되어 버리지 않는가.. 인터넷도 살피고 사람들 말도 들어보고 해서 ''양을 쫒는 모험''을 선택했다.
그 전에 사고 싶었던 책을을 찜해둔게 꽤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충동구매''로 이 책을 선택했다. 나는 다른것들에 있어서는 다 실패하지만 책만큼은..''충동구매''가 더 성공적일때가 많다. 시험기간 중이어서 아주 조금 조금 시간을 오래 들여 읽었기 때문에 내용이 중간중간 끊기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내용은 머리에 남아있다.
모험을 즐기지 않는 나는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는 않았지만 좋았다.
전체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하루키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 좋은 책을 여러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 [인상깊은구절] "난 나의 나약함이 좋아. 고통이나 쓰라림도 좋고 여름 햇살과 바람 냄새와 매미 소리, 그런 것들이 좋아. 무작정 좋은거야 자네와 마시는 맥주라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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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하루키의 1982년作, 원제는 羊をめぐる冒険 시간은 흘러 1978년. 주인공인 <나>는 번역사무소의 일을 확장해 광고까지도 손을 대고 있는 상태다. 그렇게 평범한 날들이 지속되던 중,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고 집을 나가버린다. 대학시절, 잠시 만났던 그녀의 장례식에 다녀온 다음 날 아침에. 그렇게 <나>는 그녀와 아내를 또다시 잃었다. 아내가 없는 생활에 적응해갈 즈음, <나>는 출판사 교정 아르바이트 겸, 고급 클럽의 콜걸이자, 귀 전문 모델을 하는 <그녀>를 만나 사귀게 된다. 그녀는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귀를 12살 무렵에 닫아 버렸다. 새로 사귄 여자 친구와 행복하고 평범한 나날을 보내던 중, <나>가 광고 카피로 썼던 사진 문제로 어느 우익 거물의 비서가 <나>를 찾아온다. <나>가 사용한 사진은 친구 <쥐>가 보내온 사진으로, 우익 거물이 죽음을 앞두고 그 사진에 찍힌 <양>을 찾는다고 했다. 그렇게, 반협박으로 시작된 <나>의 <양>찾기 모험. <나>는 그녀와 홋카이도로 건너가 예전에 면양회관이었던 돌고래 호텔에서 <양박사>를 만나, 등에 별이 있는 양에 대해 듣게 된다. 그 양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비밀. <나>는 <쥐>의 홋카이도 별장에 머무르며, <쥐>와 <양>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쥐>도 <양>도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 <나>의 앞에 <양사나이>가 나타나, <나>와 <양사나이>는 친구가 된다. 우익 거물의 비서가 <나>에게 준 한 달이란 기간이 지나기 얼마전, <나>의 앞에 <쥐>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었다. <나>는 <쥐>의 영혼과 이야기를 나누며, <양>에 대한 엄청난 비밀 이야기를 듣는다. <쥐>는 <나>에게 떠나라고 하면서, 부탁 하나를 남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는 세상으로 돌아왔다. 이상이 『양을 쫓는 모험』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물론, 중간중간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큰 흐름에서 보면 이 정도로 요약된다. 『양을 쫓는 모험』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982년 작품으로,『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3년의 핀볼』다음에 쓰여진 하루키의 세번째 소설이자, 통칭 하루키 초기 3부작 혹은 쥐 3부작으로 이야기되어지는 작품의 마지막 완결편이기도 하다. 『양을 쫓는 모험』은 앞의 두 소설에 비해 훨씬 정리된 느낌이고, 소설답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앞의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중간중간 색다른 에피소드가 등장하지만, 큰 흐름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앞의 두 작품은 뭐랄까, 신선한 구성을 하고 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를 그런 느낌을 주었다는게 좀 달라진 점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여전히 하루키식의 독특한 표현이 많이 눈에 띈다. 그런 것이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묘미이기도 하다. 5년 동안 연락두절 이었던 친구 <쥐>가 보내온 어느 목장과 양의 사진으로 인해, <나>는 사진속의 <양>을 찾아 나서게 되는 입장에 처한다. 그러나 쥐의 행방은 묘연하고, 그 <양>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채, 귀모델인 여자친구와 홋카이도에 향하는 <나>. <쥐>가 보내온 편지와 사진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등에 별무늬 얼룩이 있는 <양>을 찾아 홋카이도에 있는 <쥐>의 별장까지 오지만, 여자친구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홋카이도에 오기전 귀모델인 그녀는 <나>에게 "양과 관련된 전화가 올 것"이란 기묘한 말을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평범함속의 비일상을 어느샌가 마주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쥐>의 편지, 귀모델의 그녀, 그리고 우익 거물과 그의 비서, 돌고래 호텔의 양박사, 그리고 <쥐>의 별장에서 만난 <양사나이>까지. <나>의 평범했던 일상은 순식간에 비일상적인 현실로 뒤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대학교때 알았던 여자의 죽음, 그리고 아내와의 이혼, 귀모델 여자친구의 실종, 그리고 <쥐>의 죽음까지 또다시 상실에 상실을 거듭한다. 그렇다면, <쥐>가 보낸 사진속의 <양>과 우익 거물, <양박사>의 관계는? 이 소설속에 등장하는 등에 별무늬가 있는 양은 사람의 몸속에 들어와서 살면서, 그 사람을 지배하고 조종한다. 그렇게 하여 별 볼일 없던 우익 청년이 한순간에 우익의 거물로 자리잡게 되었고, 그 양이 떠남으로서 우익 거물은 죽음을 맞이한다. <양박사> 는 우익거물의 몸속에 들어가기 전에 <양>이 잠시 머물렀던 사람이지만, 그의 이용가치가 다 했다는 것을 알고 양이 그를 떠난 경우다. <양박사>는 <양>이 떠남으로해서 관념의 세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종합해 보자면, <양박사>를 거쳐, 우익 거물에 몸에 들어갔던 <양>은 마지막으로 <쥐>의 몸속에 들어갔다. 그렇게 하면 <쥐>는 권력이라는 것을 얻는 대신 자신을 잃게 되는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지만, <쥐>는 자신의 몸속에 <양>이 완전히 자리잡기 전 자살이란 것으로 <양>을 영원히 매장시켜 버렀다. <쥐>는 <나>를 찾아올 때, <양사나이>의 몸을 빌려 잠시 찾아와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해준다. 쥐는 1973년 과거에 얽매이는 자신을 버리고 도망치듯 마을을 떠났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마음에 있는 상실감을 치유하지 못한채, 공허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 마음의 부재에 <양>이 찾아 왔던 것이다. <쥐>는 자신이 자살한 이유를 <나>에게 말해준다. 난 제대로 된 모습으로 자네를 만나고 싶었던 거야. 내 기억과 내 자신의 나약함을 지닌 본래의 모습으로 말야. 자네에게 암호 비슷한 사진을 보낸 것도 그 때문이지. 자네가 우연히 이곳에 오게 된다면 나는 마지막으로 구원받을 거라고 말이야. (419p) <쥐>는 과거로부터 도망쳤지만, <양>에게는 자신을 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의 자신으로 죽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양>의 존재는 무엇일까? <양>에 대한 해설을 보면, 양은 관념과 이상의 세계, 즉 권력과 결부된 어떤 힘이라고 나온다. 세상을 움직일 만한 인물을 만나면, 그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 그에게 세상을 장악할 권력을 주는 대신, 그의 정신을 모조리 빼앗아 자신의 대리인으로 사용한다. <쥐>는 그런 관념을 자신과 함께 죽임으로써, 그 관념의 세계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양>의 힘을 노리고 있는 우익 거물의 비서에게도 제재를 가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이 권력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것을 막고, 친구인 <나>가 현실로 돌아갈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귀 모델인 그녀는 <나>를 적당한 곳까지 인도해주는 역할이다. 『1973년의 핀볼』에 나왔던 쌍둥이 자매처럼, 그녀는 그녀의 역할을 다한 순간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양>을 쫓는 모험을 통해 많은 것을 잃었다. 아내도, 친구도, 그리고 새로운 여자 친구도. 그러나, 비록 잃게 된 것은 많지만 그것을 통해 나는 나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는 과거에 상실했던 그 어떤 것들에만 매달려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남은 것이다. 나는 강을 따라서 하구까지 걸어가 마지막으로 남은 50미터 정도 되는 모래 사장에 앉아 두 시간동안 울었다. 난생 처음 그렇게 울어 보았다. 두 시간 동안 울고 나서 겨우 일어설 수가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 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나는 일어서서 바지에 묻은 고운 모래를 털었다. 날은 완전히 저물었고, 걷기 시작하자 등뒤에서 파도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447p) |
| 양 사나이...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99년 여름..잠도 안 오고 날도 덥고 우연히 펼쳐든 서적..잠도 안 자고 새벽녘까지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2002년 우연히 다시 생각나 부랴부랴 인터넷으로 구입해 읽은 이 책은 이전보다는 나에게 화두가 되어 주지는 못했다. 양사나이.. 양사나이가 누굴까하고 오랫동안 생각해 본적이 있다. 읽어버린 자의식, 그가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60년대 허무주의와 70년대가 그에게 남기고 간 공허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아니면 자기 자신의 정신적 죽음을 이야기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워낙 그의 소설들이 '없는 존재(실제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환상이 많으니.. 누구나 그렇지만 자의식과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잠재된 의식은 공꽁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자기 자신조차 본심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의 작가적 정신이 그런 자신을 이끌어 내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 우리나라에서는 '상실의 시대'만큼 사랑 받지는 못했지만 내가 가장 아끼는 책중의 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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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을 밑거름으로 '댄스 댄스 댄스' 와 '상실의 시대'라는 대작을 엮어 냈다는 점에서 '양을 쫓는 모험'은 그 가치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에 이어서 장편 3부작을 완결하는 작품으로 1982년에 발표되었던 작품이다. 주인공 '나'를 둘러싼 기묘한 모험 이야기이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어선 모험이다. 소설의 전반적인 무대 자체가 모호하다.
개인적으로 하루키 소설처럼 책장이 잘 넘어가는 소설도 없다. 그렇타고 결코 가볍지 않고 싸구려가 아닌 그런 하루키를 좋아한다. '양을 쫓는 모험'은 현재의 그의 밑거름이 된 책으로 이때부터 하루키 특유의 기묘한 느낌과 극도의 허무주의가 느껴진다.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면 이 책도 꼭 읽어 보길 권한다. [인상깊은구절] 아무리 취했더라고 눈을 감은 채 자로 선을 그은 것처럼 똑바로 열여섯 걸음을 걸을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의미없는 자기 훈련 덕분이다. 취할 때마다 등줄기를 곧게 펴고, 고개를 들고, 아침 공기와 콘크리트 복도의 냄새를 한껏 폐에 들이마신다. 그러고 나서 눈을 감고 위스키의 안개 속을 똑바로 열여섯 걸음 걷는 것이다. 그 열여섯 걸음의 세계에서, 나는 '가장 예의바른 술주정꾼'이라는 칭호를 부여받고 있다. 그건 간단한 일이다. 취했다는 사실을 사실로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도 '그렇지만'도 '다만'도 '그래도'도 아무것도 없다. 단지 나는 취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가장 예의바른 술주정꾼이 된다. 가장 일찍일어나는 찌르레기가 되고, 가장 마지막으로 철교를 건너는 유개 화차가 된다. |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이어 '1973년의 핀볼'의 연장선에서 3부를 마무리짓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상실의 시대'에 익숙해 있어서 그 이전에 씌여졌던 소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읽을수록 바져들게 되는 마력에서 결국 하루키의 모든 책을 읽게 되었다. 양을 찾아 떠나는 일들 속에서 하나하나 연결 고리들이 풀려지고 결국 그 끝은 이미 다 결정난 상태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나... 항상 그렇다. 책을 읽는 당시는 너무나 가슴이 벅차 할 말도 많을 것 같고 느끼는 바도 많은데 막상 글로 나타내려고 하면 머리속이 하얗게 백지가 되어 버린다. 아직 한번으로 그 느낌을 제대로 다 느낄 수 없어서일까... 다시금 곱씹으면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책장을 들취 봐야할 것 같다. 현실에서 너무나 온순하고 나약함의 대명사가 되었던 양은 권력을 향한 강한 집념으로 파멸을 향해 가는 캐릭터가 되어 있다. 사람들에게 별다른 호감을 주지 못하는 쥐는 이 세상의 혼돈을 혼자서 희생하여 막아내는 외로운 사람이다. 마지막에 쥐가 하는 말 중에 "나는 나의 나약함이 좋아"라는 것에 공감을 느낀다. 그의 나약함이 현실에서 도망치게 만들었고 그 현실을 이겨내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만든 것이다. 나도 나의 나약함을 좋아한다. 휘청거리고 머뭇거리고 상처받고... 이런 모습들을 들키기 싫어하고... 하지만 이런 내 모습에 감사한다. 나도 쥐처럼 나약함을 인해 다른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래서 그들을 지켜줄 수 있을거란 생각에... 쥐를 위해 울어준 '나'같은 친구를 가질 수만 있다면... 상실된 것들을 버리고 현실로 돌아오는 힘겨운 과정을 함께 하고 싶다. 과거를 과감히 버리고 휘청이는 모습일지라도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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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글들은 단백하다.
-나는 강을 따라서 하구까지 걸어가 마지막으로 남은 50미터정도되는 모래사장 안에 앉아 두 시간 동안 울었다. 난생 처음 그렇게울어 보앗다. 두 시간 정도 울고 나서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어디로가야 할 지는 몰랐지만, 어쨋든 나는 일어서서 바지에 묻은 고운 모래를 털었다. 날은 완전히 저물었고, 걷기 시작하자 등뒤에서 파도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본문 中
2003.12.20 |
|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의 책은 나의 이러한 호감을 아직까지는 저버린 적이 없다. 처음 만났던 '공주를 위하여'부터 '양을 쫓는 모험'까지... 그의 문체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작가는 글을 쓸 때 누군가 보아 줄 것을 바라고, 그들의 눈을 의식해서 쓰기 마련이다. 하루키의 글은 '남이야 어떻든?' 이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문체가 우리에게는 더욱 더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 그의 특이함은 책 속의 인물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독특한 작가의 독특한 시각을 맛보고 싶다면 하루키를 찾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 중에서도 '양을 쫓는 모험'은 어떻겠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