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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의 작품들을 읽고 나면 참 난감해진다. 과연 내가 이 작가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그냥 느낌대로 봤다고 해도 되는 것인지... 그런데 그 느낌이 왔다갔다 하는데 어떤 게 내 느낌인지도 명확하지가 않은데... 게다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각이 분명 내 이성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논쟁이 많다는 것, 그게 문학작품에 대한 것 치고는 적지 않게 격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격렬함이 ‘문학’만이 대상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다. 사실 나의 곤란함도 그 논쟁의 쟁점과 비슷한 셈이다. 미셀 우엘벡이 침몰하는 현대인의 우울함, 그 민낯을 여과없이 보여준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래서 그가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된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플랫폼』 역시 과감하게, 얘기하기 힘든 것들을 얘기하면서 현대사회의 편견을 낱낱이 까발린다. 지하철에서 들고 다니며 읽을라치면 제목 때문이 아니라 ‘미셸 우엘벡’이라는 작가를 아는 다른 승객이 나를 어찌 볼까, 약간 걱정이 될 정도로 노골적인 성 묘사도, 그것 자체 때문에 이 소설가의 이 작품을 터부할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이 작가의 끈질긴 반이슬람, 인종차별적 성향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게 그저 작가적 성향이 아니라 분명하게 작품에 드러낸다. 그래서 내팽개쳐야 하는 소설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만약 미셸 우엘벡이 정말 노벨문학상에 선정된다면 반발이 거셀 것이고, 나도 찬성할 수 없을 것 같다. 노벨상이라는 것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열보다는 통합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라는 고고한 이상에 비추면 말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미셸 우엘벡의 작품, 『플랫폼』과 같은 작품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위선적이지 않는지를 상당히 집요하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나 솔직한데, 당신들은 어떤가? 하고 비아냥대는 것 같고, 그 비아냥에 선뜻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그런 머뭇거림이 바로 이 소설이 노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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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미셸 우엘벡’이 초지일관하는 인간사회에 대한 이상향이 있다. 그는 새로운 경쟁과 그칠 줄 모르는 물욕이라고는 없는 새로운 인종, 신인류가 꾸려가는 평화와 자유가 넘치는 미래세계를 희구하는『소립자』같은 작품에 이르기도 했으니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오늘의 인간사회에 지닌 회의와 역겨움의 정도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역시 오늘의 서구물질사회가 안고 있는, 나아가 서구화를 맹목으로 지향하는 한국과 같은 사회가 받들고 있는 합리적 이성주의라는 것, 그리고 사람의 의견, 취향 같은 비물질적 요소를 포함한 삶의 모든 방식들에 완벽한 표준화를 보장해준 돈에 대한 열정, 그래서 냉정해지고, 지나치게 개인의 존재와 권리에 집착하며, 정확한 규칙과 선행적 합의 같은 것을 강요하고, 그에 열중하며, 마침내 경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한없이 비안간적이고 잔인해지는 오늘의 사회를, 그 치부들을 거침없이 조롱하고 비웃어댄다. 이런 연유에서 그의 소설은 오늘의 인간들이 위선 속에 은폐시킨 것들을 여과 없이 꺼내들고 마음껏 떠들어댄다. 인종에 대한 속내, 자신의 종교에 대한 편협성, 성적 취향 등까지 마구 쏟아낸다. 나 개인이 싫어하고 짜증나고 폭력적이며, 이기적인 것들을 왜 말 할 수 없다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이는 오늘의 권위적 담론이 덮고 있는 억압의 기만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 누군가인 타자에게 강요하거나 선동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이는 냉정한 합리성이라는 척도로만 세상을 재단하고, 그래서 이를 거대한 규범으로 만들어 모든 인간을 그 틀 안에 가두어두려는 사회의 암묵적 통념과 가치관, 윤리의식을 깨부수고자 하는 적극적인 저항 수단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살갗이 직접 부딪히는 섹슈얼리티, 그러나 점점 이를 회피하는 현대인들의 정신작용과 행동양식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기도 하며, 인간의 즐거움, 행복을 위해서 남아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본질적인 것이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현대의 도시인들이 “이제 무엇이건 교환하고 싶은 욕망도 안 느끼고”, 또한 멘탈리티(mentality)에 맞지도 않게 된 것은 더 이상 타인을 즐겁게 해주는 것, 자신을 기꺼이 타인을 위해 내어 놓는 것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데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건 나르시시즘, 개인성의 강화된 느낌에 침몰되어가는 자본주의 물질사회, 끝도 없이 멈추는 것은 곧 종말이라는 삭막한 형식에서 어쩔 수 없이 출현하는 현상이다. 그러다보니 “제각기 유일한 자기만의 감각들에 흠뻑 빠져 자기 살갗 속에 갇혀”지내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세상을 보는 오늘의 사람들의 방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타인과 일체화될 가능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행동방식은 고통을 찾고 잔혹해진다. 200여 년 전 꼭‘사드’가 한 말처럼 되어버렸는데, 혹여 우엘벡의 작품이 21세기 판 사드의 계보에 잇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 할 줄 모르는 현대인들, 서로의 살갗을 부딪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 그저 유혹하고 과시하는 자기도취에 허우적대는 사람들, 그래서 사디스트들인 현대인들은 SM처럼 “모두가 장갑을 끼고 도구를 사용”하며, “결코 살과 살이 맞닿는 일도, 키스나 가벼운 스침, 애무도 없”는 “정확히 섹슈얼리티에 반하는” 행동 양식을 창안했을 것이다. 정확한 규칙과 선행적 합의가 되어 있는 순전히 지적인 세계의 역겨움 속으로. 그래서 이러한 피부 접촉이 없는 이상한 변태행위에 역겨워하는 나는 진정 성적이고 동물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정상인 것이니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다. 사교적이지도 못하고 그저 권태로운 삶에 체념하고 살아가는 미셸을 스스로에게 회의적인 모습이 좋아 사랑에 빠지는 발레리는 완벽한 섹슈얼리티를 지향하는 인물들이다. 판에 박힌 관료 생활에 익숙한 미셸과는 달리 발레리는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소위 잘나가는 워킹우먼이다. 그러나 그녀의 선량한 성품과 타인의 즐거움을 우선 배려하는 태도는 일종의 냉정한 현실주의에 종속된 요즘의 여성들과 다르기만 하다. 따라서 그녀는 섹슈얼리티의 근본을 상실한 SM을 싫어하는 지극히 성적이며 동물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현대인들이 망각하고 잃어버린 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이 두 사람의 사랑에 얼굴이 홧홧 달아오른다. 적도의 태양이 작열하는 쿠바의 푸른 바닷가, 그리고 태국의 매혹 넘치는 클럽 등에서 벌어지는 정사는 그 자체 그대로가 살아있음에 대한 기쁨이요 행복을 확인하는 유일한 것이 된다. 물론 인간의 행복에 대해 지나치게 극단적인 결론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행복감에 젖어들게 하는 것이 오늘의 세상에서 다른 무엇이 있는가를 진실 되게 고민해보면 그 답변은 그리 쓸만한 게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반증될 것이다. 사실 부분마다에서 비틀린 우엘벡의 시선이 제어되지 않은 채 극단을 치닫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서구 백인들의 동남아, 아프리카, 중남미지역서 벌이는 성적탐닉을 위한 만연한 관광이 마치 서구사회의 현대화가 만들어낸 건조하고 개인화된 세계를 벗어나 보다 인간적인 제3세계의 순진한 관능을 찾는 보상심리라고 합리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더해 이슬람에 대해서는 “일신론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비인간적이고 잔인해집니다. 이슬람은 모든 종교들 가운데 가장 철저한 일신론을 강요”하고 있다면서,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더구나 미셸의 연인, 발레리를 이슬람 테러범들의 총격으로 사망하게 하여 그 증오심을 확인하기까지 한다. 어쨌든 그의 주장처럼 내 생각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냐,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냐! 식의 항변은 사상의 자유라는 기본권의 발휘정도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개인의 행복을 도저히 보장 할 수 없는 불투명한 세상, 지금 우리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점점 더 자주 의심이 생겨나는 것에 대한 그 근원을 드러내고 대안을 찾는 진심의 여정을 담고 있으니 말이다. 물적 과시에 몰입하고 있는 현대인들, 근본주의적 교조적인 종교와 정치사상이 뿜어내는 광기, 이것에 휘둘려 성과 종족보존의 본능마저 이탈케 하는 현대사회는 과연 지속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그녀의 육체가 내 몸 아래에서 전율하는 것이 느껴졌을 때 나는 종종 모든 악이 소멸된, 전적으로 차원이 다른 의식세계에 다가선 느낌이 들었다. (中略) 유보된 순간, 평안과 격동을 조장하는 신이 된 것 같은...”.... “이 몇 개월간의 추억을 떠올려보면 내가 행복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내가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 나머지를 이해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섹슈얼리티를 문학으로, 그리고 사회비평으로 마침내 철학으로 인도하는 그러면서 아름답고 눈부신 사랑이 있는 그런 정말 기묘한 걸작이다. 우엘벡은 결코 그의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다. |
| 나는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 기차 플랫폼에 서 있다. 나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서 있다. 그리고 깊게 페인 기차 레인이 나란히 놓여 있고, 그 곳으로 기차가 올 것이다.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서 내릴 것이고, 그곳을 거쳐 또 다른 어딘가로 갈 것이다. 단순히 기차를 타야 한다는 목적만을 두고 본다면 우리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지만 기차를 타는 것이 플랫폼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목표는 아니다. 기차는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기차가 도착했다. 플랫폼에 있던 사람은 함께 그 기차를 탔다. 단지 같은 기차를 탔을 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개개인은 서로 다른 목적지를 가지고 있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이 <플랫폼>의 의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을 매개로 형성되는 사회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을 소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구분된다. 이 자본을 소유하기 위해 일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이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판매하는 것이고, 누군가 그 소유를 사용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구조이다. <플랫폼>은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에 섹스를 덧씌웠다. 작가 아니 <플랫폼>의 미셸은 분명 인종차별주의자이고, 문화차별주의자이다. 그리고 핍쇼를 보고 쓰리썸을 하고, 애널 섹스를 하는 변태성욕주의자이다. 작가는 동남아시아, 특히 태국을 유럽인들의 사정액을 처리하는 쓰레기장으로 전락시킨다. 유럽은 문화와 기술을 팔아 번 돈으로 섹스 여행을 하며 쓰고 동남아시아는 자연과 몸을 팔아 그 돈을 번다. <플랫폼>은 핍쇼나 보면서 의미없는 삶을 살던 중년 남성이 진정한 섹스 대상을 만나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 별 내용 없이 적나라 한 성애 장면을 포르노급으로 세밀히 묘사한 삼류 소설인가? ‘미셸’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혹은 섹스의 진정한 쾌락을 즐길 수 있는 발레리를 만나면서 삶의 의미 혹은 섹스의 의미를 깨닫고, 이슬람교도의 테러로 사망하자 삶의 의미,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섹스의 의미를 잃은 미셸은 죽음의 길을 택하는 사랑에 대한 소설로 본다면 우엘벡은 <11분>의 코엘류처럼 그저 포르노급 소설이나 쓰는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매춘산업이나 섹스 관광에 대한 비판적인 글로 보아야 할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종교가 이슬람교라고 했던 우엘벡은 <플랫폼>에서 섹스 관광을 하는 태국 리조트에 테러를 가하는 단체를 이슬람교로 설정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엘벡은 한낱 포르노급 삼류 소설을 쓰는 극단적인 문화. 인종 차별주의자에 불과하다. <플랫폼>에서 작가의 의도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미셸이 발레리의 오럴 섹스를 통해 사정을 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오고 발레리가 이러한 섹스를 좋아한 것으로 나오지만 발레리의 이러한 취향은 우엘벡에 의해 만들어진 취향일 뿐이다. 태국으로의 섹스 관광 역시 남성 중심의 배설 문화일 뿐이다. 그러면 우엘벡은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소재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문학적 논란만 일으키는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적 논란의 어디에 손을 들어주던 우엘벡의 평가는 분명하게 구분될 수 밖에 없고, 극단적인 차별주의자라는 평을 면하기는 힘들 것 같다.플랫폼>플랫폼>플랫폼>플랫폼>플랫폼>플랫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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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저자가 추천하길래 읽어봤습니다. 알랭 아니었으면 이 책을 알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알랭 드를 너무 좋아해서 플랫폼, 한번 읽어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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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미셸의 아버지는 미셸이 일하지 않고도 여유를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유산을 남기고 죽는다. 미셸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태국으로 단체관광을 떠난다. 여행길에서 만난 발레리라는 이름의 여자. 여행에서 프랑스 파리로 돌아온 미셸은 발레리와 재회하고, 둘은 연인이 된다. 극단적으로 자유로운 그들의 섹스. 그들에게 서로의 몸과 존재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고 그저 각자에게 쾌락(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을 주는 수단, 생명을 지닌 수단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유롭고 각자의 몸은 자본주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돈으로 맞교환할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은 태국의 어린 여자들과의 섹스를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관광상품을 계획하고 성공시킨다. 그러나 발레리는 결국 이슬람교도의 테러에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모든 것이 자본주의의 논리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이 시대를 사는 미셸에게 발레리는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였을까. 이 소설이 구체적이고 진부하게까지 여겨지는 '직장이야기'와 '직장에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퍽 괜찮은 소설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확하고 깔끔한 묘사, 태국여행을 하는 듯한 사실적인 정보, 상상을 뛰어넘는 충격적인 섹스장면 등등의 요소는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사유에 비하면 아주 사소하게 여겨졌다. 자본주의, 인종간의 평등, 종교차별에 대한 금지, 가족, 정신적 사랑 등이 갖는 가치에 대한 믿음을 가볍게 비틀어버리는 전복적 사고, 그리고 그러한 사유를 적절하게 담아내는 전복적인 문체. 자본주의가 쏟아내는 물질문명, 베스트셀러 북, 현대성, 섹스 등으로 가득찬 주인공의 머릿속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내적독백의 기록들. '새로운 자세,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거나 선택하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라는 말이다.'라고 말하는 미셸은 자본주의의 사회를 살고 있는 어느 누군가,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그 누군가의 모습이 아닐까. 미셸의 아버지가 평생 가져보지 못했으리라 생각하는 '인간조건의 실질적인 의문'에 대해 미셸은, 작가 우웰벡은 어떤 대답을 한 걸까.
* 백스물여덟 개의 채널이 있으니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 문화란 바로 이런 거다. 약간 지루한 것, 따라서 좋은 거지. * 스스로를 자각하게 되는 것은 바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이다. 바로 그런 까닭에 타인과의 관계를 못 견뎌하게 되는 것이다. * 책 없이 사는 건 위험하다. 그저 사는 데에만 만족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위험한 짓을 감행하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 삶을 포기하는 것, 자기 삶을 등한시 하는 것은 무척 쉽다. * 종족간의 싸움의 진정한 목표는 경제적인 것도 문화적인 것도 아니라 생물학적이고 야만적인 것이오. 요컨대 젊은 여성의 질을 놓고 다투는 것이지. * 인생은 부동화의 과정이라고 특징지어 말할 수 있다. *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정확히 바둑판 모양을 한 또다른 세계에 들어선 느낌이 든다. 나는 삶 그리고 삶의 양식들을 잘 알고 있다. 그건 이렇게 칸을 채우는 설문지와도 같은 것이다. * 점차 세계 전체가 일개 공항을 닮아가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 서구 세계가 네게 줄 수 있는 단 한가지가 있다면 그건 메이커 상품들이야. * 사랑의 삶이 끝나면, 삶 전체는 약간은 관례적이고 강요된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 사람들은 인간적 형식과 습관적인 행동들, 일종의 구조를 유지하지만. 그러나 마음은 사람들 말마따나 이제 그곳에 없는 것이다. * 삶을 포기하고 나서도 여전히 계속되는 사람들과의 마지막 접촉은 상인들과의 접촉이다. * 우리는 사는 것이 그저 불가능해져버린 체제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외국에 수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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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랫폼]의 세계는 음산하다. 미셸은 냉소로 가득 찬 인물이다. 그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이해, 관계를 상실한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1. 열대 태국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유산을 상속받은 미셸은 태국으로 패키지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만난 여러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미셸이 그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행지에서 책을 읽고, '바디 마사지'를 즐긴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매춘 관광에 대한 설전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작가는 그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2. 비교 우위 이 소설은 어떤 의미에선 2장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여행지에서 알게 된 발레리를 다시 만나게 되고 둘은 가까워진다. 2부의 주된 내용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미셸과 발레리의 관계, 섹스 관광을 돈벌이에 이용하는 관광업체의 이야기. 3. 파타야 비치 "사랑의 삶이 끝나면, 삶 전체는 약간은 관례적이고 강요된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 사람들은 인간적 형식과 습관적인 행동들, 일종의 구조를 유지하지만, 그러나 마음은 사람들 말마따나 이제 그곳에 없는 것이다."(362쪽) *이 소설은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 미셸-2. 미셸과 발레리-3. 다시 미셸 그러나 1장의 미셸과 3장의 미셸은 사뭇 다르다. 1장의 미셸이 타인의 부재 상태라면, 3장의 미셸은 타인을 상실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발레리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역자는 우엘벡의 작품에 대해 상반된 평가와 논란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섹스와 특정 종교에 대한 편견이 금기일까. 금기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도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도덕적 가치보다, 경제적 가치가 우위에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소설은 금기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오히려 금기를 상실한 시대를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섹스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다. 섹스가 종족 보존의 본능에서 벗어나 쾌락 추구의 수단이 되어버렸다고들 하지만, 오히려 섹스가 '성관계'에서 이탈하여 '성적만족감'의 수단이 되어버린 것 같다. '관계'를 잃어버리고 오직 '접촉'만이 남은 세상에 발레리는 우리 삶의 찬란한 예외를 꿈꾸게 해준다. "사랑에 대해서는 말하기 힘들다. 나는 이 점을 확신한다. 내게 발레리는 찬란한 예외였을 뿐이라고. 그녀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고, 그것을 매우 신중하게 자신의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에 속했다. 그런 현상은 참으로 신비가 아닐 수 없다. 그 속에는 행복과 단순한 기쁨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어떻게 그리고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만일 내가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 나머지를 이해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362쪽) |
| 플랫폼은 여행의 시작점이면서 동시에 여행의 마지막 지점이기도 하다. 그곳은 또 다른 여행을 잉태한 곳이기도 하며 결국 그곳은 여행이 마감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여행이 아닌 우리들 삶에도 이렇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어떤 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곳이 플랫폼이다. 주인공이 끊임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곳은 곧 삶의 여정이 된다. 파리 - 태국 - 파리 - 쿠바 - 파리 - 태국 - 파리 - 태국으로 이어지는 그의 여행은 아버지의 죽음 - 발레리와의 만남 - 발레리와의 사랑 - 장 이브와의 만남 - 발레리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꿈틀거리는 관능이 있다. 꽤 늙은 나이에도 학생인 젊은 가정부와 육체적 관계를 맺었던 아버지, 핍쇼를 보며 자위를 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주인공, 열일곱살에 여자 친구와 레즈비언 관계를 가졌던 발레리, 발레리와 나의 끊임없는 육체적 향연, 장 이브와 보모인 여고생과의 오랄 섹스 등등... 서툴고 건조한 현대인들의 만남, 그리고 이처럼 바스러질 것 같은 관계로부터의 도피처인 여행, 서구인들의 패키지 여행의 한 장르가 되어버린 섹스관광,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방책으로 꽤 보편화된 듯 보이는 스와핑 등등... 하지만 결과적으로 소설의 본질 장르는 멜로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 대해 어떤 미련도 없어 보이는(아버지의 죽음에도 크게 동요되지 않는) 내가 여행 중에 발레리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을 하는 것이 바로 소설의 주요 토대이다. “...분명 그녀는 화장을 한다거나 색다르게 모자를 쓴다거나 스타일리스트에게 자문을 구한다든지 해서 그런 부분들을 좀더 돋보이게 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무언가가 크게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은, 유혹하고자 하는 욕망, 그것이었다.” 유혹하고자 하는 욕망이 결핍된 발레리는 십여년의 나이차를 무시하고 파리로 돌아와 그녀를 찾은 나와 열렬하게 결합한다.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게 나는 좋은 거 같아. 여행내내 무척이나 당신을 원했어. 정말 끔찍할 정도였지. 매일같이 그 생각뿐이었으니까.” 둘 사이에는 어떠한 트러블도 없다. 끊임없는 열락의 탐구와 그 사이사이 자신의 비즈니스에도 철저하다. 그리고 아예 사직서를 내버리고 발레리와 장 이브의 여행 사업에 조언하기도 한다. “...백인들은 피부를 태우고 싶어하고 흑인들의 춤을 배우고 싶어한다. 반면 흑인들은 피부색을 밝게 하려 하고 꼬불꼬불한 머리를 풀려고 한다. 인류 전체는 본능적으로 혼혈, 전반적인 미분화 상태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류는 무엇보다도 먼저 가장 기본적인 방법인 성을 통해 그것을 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끝까지 밀고나간 사람은 마이클 잭슨 혼자다. 그는 이제 흑인도 백인도 아니며 젊지도 늙지도 않다.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이상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역시 투어 여행에는 성이라는 요소가 빠질 수 없다며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발레리, 장 이브, 나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투어 상품을 자축하며 들른 태국에서 이들은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습격을 받게 된다. 발레리는 죽고(“나는 이제 이 점을 확신한다. 발레리는 내게 찬란한 예외였을 뿐이라고.”) 장 이브는 섹스 투어의 기획자로서 본국으로 송환되고 나 또한 상처를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파리에서 상처를 치료받은 후 다시금 태국으로 돌아와 죽음을 이해하는 지경에 다다른다. “이제 나는 죽음을 이해했다. 죽음이 내게 크게 고통스러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증오, 경멸, 노쇠 그 밖에 여러 가지 것들을 겪었다. 심지어 짧은 사랑의 순간도 있었다. 내게서 살아남을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또 그 어떤 것이 살아남을 만한 그런 자격도 내겐 없다. 나는 어느 모로 보나 보잘것없는 개별적인 존재일 것이다.” 나와 발레리의 사랑을 고리로 삼아 서구사회에 만연한 성적 건조함, 그리고 이 때문에 발생하는 성적 결합을 목적으로 하는 투어, 성적 결합 방식의 분화 등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가슴 절절한 로맨스를 등에 업고 진행되는 작가의 좌충우돌 섹스 탐험기이기도 한 이야기는 어쩐지 미끼를 물리지 않은 낚시대처럼 헐렁하다. 그것이 작가 자신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한 바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것인지 헷갈려 섣불리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사실 『소립자』라는 작품에서 받은 작가의 현대적 품격에 대한 존경은 『투쟁영역의 확장』과 이 작품을 거치면서 그 신뢰도가 조금씩 하락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다음 작품이 번역되는 날을 기다려볼 작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