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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걸으면서 강의나 토론을 했다. 그래서 이 학자들을 소요학파라고 불렀다. 아인슈타인은 고향의 논두렁길을 걷다가 상대성 이론을 생각해냈다. 또, 철학자 칸트는 하루도 빠짐없이 마치 의식을 치르듯 오후 4시의 산책을 즐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걷기는 단순한 하체 운동이 아니다. 걸을 때 발의 근육을 사용하고 자세롤 바로잡는 과정에서 뇌가 각성되고, 피의 흐름이 원활해져 뇌의 신경세포를 활성화시킨다. 아이디어 창출을 위해 기획 회의를 할 때 의자가 없는 방에서 회의를 하는 회사도 있다. 앉아서 생각하는 것보다 두 발로 걸으며 생각하는 것이 더 많은 창조력을 길러 준다.
남태평양 어느 섬의 원주민들은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해 독특한 방법을 쓴다.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해 그들이 쓰는 무기는 날이 선 톱이 아니라 사람들의 아우성이다.
모든 주민들이 쓰러뜨릴 나무 주위에 둘러서서 3일 밤낮을 나무를 향해 고함을 쳐댄다. 그러면 나무 속에 깃들어 있던 혼이 빠져 나가면서 나무가 쓰러진다고 한다. 우리말에도 고함 소리가 사람의 혼을 빼놓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소리가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숲에서는 영혼에 휴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아주 섬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풀벌레가 날개 치는 소리, 바람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 아주 섬세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꽃이 피어나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다.
그는 삼사년에 한번씩은 꼭 단식을 하는데, 단식을 시작한지 십여 일후 지리산 종주를 한다는 것이었다. 산행 역시 단식을 하면서 하고 산행을 끝낸 후에도 마무리 단식을 한다고 했다.
그 시간 이후로 그와의 묘한 산행이 시작되었다. 그가 어디서 잤는지 어디서 물을 떠먹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길 곳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는 달팽이 걸음으로 가고 그는 나보다 빠르긴 하지만 곳곳에서 오래도록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먼 발치서 바라본 그의 모습은 모든 것을 비운 나무 같았다. 그가 만약 누군가와 같이 왔다면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을 포기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집안에서 가만히 앉아 단식을 하기도 어려운데 물만 마시며 지리산 종주 산행을 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모든 것을 비우고 홀로 산행을 하면서 우주의 무한한 에너지를 받아들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역시 그와 헤어진 후 육체로부터 벗어난 영혼의 자유로움을 맛보았다. 밤낮으로 걸으려 바라보았던 지리산의 장릉과 그곳에서 온갖 퐁상을 겪으며 살고 있는 나무들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추억이다. 사람이고 나무고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제 나름의 길을 걷는 수행자라는 깨달음, 이것이 내가 '혼자 걷는 산행'에서 얻은 교훈이다.
고추밭을 예로 들자. 무엇을 심든 나는 땅을 갈지 않는데, 그것은 고추를 심을 때 또한 마찬가지다. 땅을 가는 대신 풀이 자라는 대로 두었다가 고추 모종을 심을 곳만 낮게 벤 뒤 삽으로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뒷간에서 똥거름을 날라다 한 삽씩 넣는다. 그 똥거름과 파낸 흙을 뒤섞은 뒤, 그 위에 고추를 심는다.
심고 난 뒤 한동안 고추는 자라지 않는다. 뿌리를 내리는 시기다. 그 때 쑥쑥 자라는 풀이 금방 고추를 따라잡는데, 풀이 고추 키만큼 자라기 전에 한 고랑씩 건너뛰어 가며 고랑의 풀을 낫으로 멘다. 베되 한 고랑은 베고, 한 고랑은 안 베는데, 안 벤 고랑은 벤 고랑의 풀이 어느 정도 자라 벌레들이 그 풀숲을 서식지로 삼고 살만할 때 벤다. 그러므로 우리 고추밭에는 벌레들이 깃들어 살 수 있는 풀이 늘 있는 셈이다. 벌레가 되어 보면 언제쯤 풀을 베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벌레를 배려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풀은 벌레의 집이자 밥이다. 그러므로 풀을 몽땅 뽑아버리면 벌레들은 작물에 덤벼들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병충해라고 부르는 싸움이, 원치 않는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저 쪽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저 쪽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밥을 벌레와 나눠야 한다. 풀은 벌레의 밥이자 집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삶을 돕고자 하는 것이 내 방법이다.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한 가족이 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는 땅을 갈지 않는다. 풀을 베되 다 베지 않고, 벤 풀은 논밭 바깥으로 내지 않고 그 자리에 놓아준다. 열매를 빼고는 거기서 난 것은 그 자리로 다시 돌려준다. 똥오줌도 그것이 온 곳, 곧 논밭으로 돌려준다. 이것이 나는 개가 할 수 있는 다른 생명체를 향한 최고의 밥 나누기라고 보고 있다.
궁금할 것이다. 논에 가서 벌레에게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세요"라고 말했다고 썼는데, 과연 벌레가 그 말을 들어주리라 믿고 했는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이었는지
나는 믿었다. 그렇게 해서 어떻데 됐느냐 하면, 벌레가 곧바로 내 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너무 많이 드시지는 않아서' 한 해 먹을 양식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면 되고. 그 정도로도 나는 고맙다.
벌레가 내 말을 바로 들어주지 않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 정성이 부족한가 보구나. 내게 뭔가 문제가 있나 보구나.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월든 호숫가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살았던 미국의 자연주의 사상가 소로우가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은 서른아홉 권의 일기장이었다.
24년 동안 해온 일기 쓰는 습관을 통해, 그는 간결하고 소탈한 표현 방법을 터득했으며 관찰력이 날카로워지고 사고가 깊어질 수 있었다. 또 일기를 씀으로써 그는 이전의 경험을 아주 오랫동안 되새겨볼 수 있었다. 자신의 진보와 후퇴를 점검하며 반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꾸준한 일기 쓰기가 있었기에 그의 걸작 〈월든〉은 탄생할 수 있었다.
일기는 안식과 카타르시스를 줌과 동시에 쓰는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방법으로도,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방법으로도 일기 쓰기는 최고의 습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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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극도의 스트레스는 어찌보면 필연적인 장애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스트레스라는 단어와 대척점에 서있는 명상이라는 단어도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다. 명상을 권유하는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러나 막상 피상적으로 쉽게만 생각했던 명상을 본격적으로 하려고 하면 '내가 이렇게 하는게 맞나?' 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은 맞는 것 같은데, 좀 더 디테일하게 길잡이 역할을 해 줄 누군가가 있다면.. 이 책 생활 속의 명상은 이러한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