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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의 숲을 헤쳐나가는 엔리카.... 가장 예민한 시기인 십대 소녀가 가진 자신의 영혼과 타인의 현실속에서... 여전히 모든 상황과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야하는 소녀가 새로운 미래의 인생을 홀로 개척해야하는 모습이 눈물겹네요. 위태로운 가족들과의 삶, 이기적인 사랑과 욕망, 충동적인 성매매, 임신과 낙태. 소녀는 이 모든 난관 속에서 주저하고 좌절하면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찾아보려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잔잔하게 남습니다. 정말 이 소설은 독백과 대화의 매 순간에서 느낌과 영혼들이 드러납니다.
한국과 이탈리아... 환경과 문화는 다르지만 청소년 시기에 체험하는 <배회하는 공간>은 누구나 같은 것 같네요. 그래서 더 절절하고 쓸쓸합니다.
내 마음 한 구석엔 엔리카가 <바보같은 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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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말고, 표지속 무표정한 소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알 것만 같아' 웃는것도, 우는것도, 싫은것도 아닌 그저 무표정한 소녀.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상관없다는 그녀의 무관심이 나를 책 속으로 이끌었다.
엔리카는 캄캄한 어둠속을 걷는 소녀다. 아버지는 생활을 돌보지 않고 새장 만드는 일에 미쳐있다. 생활을 책임진 어머니는 늘 피곤한 모습을 보이다 어느날 폐암으로 세상을 등진다. 사랑하는 남자친구는 엔리카를 그저 잠자리 파트너로만 여기고 필요할때만 부르고, 세상 남자들은 엔리카를 그저 한 번 품어보고 싶은 쾌락의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집에서도, 세상에서도 엔리카가 설 자리는 전혀 없다.
원치않는 임신과, 원치않는 남자들과의 잠자리,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방황속에서도 엔리카는 갈 곳을 모르고 방황한다. 방황의 밑바닥에는 언젠가 푸석하고 기운없는 어머니처럼 찌들고 우울하게 늙어갈지 모른다는 불안이 자리잡고 있다.
누군가는 엔리카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방황하면 안된다고. 그럴수록 더욱더 기운을 내서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판에 박힌 말이 엔리카에게 도움이 될까? 어둠속에 길을 잃은 사람에게 말로만 방향을 설명하면 결코 출구를 찾지 못한다. 엔리카에게 필요한건, 결국 한 줄기 빛일 것이다.
무책임한 아버지, 무책임한 남자친구, 사랑에 목말라하는 백작부인, 장례식을 도와주는 척하며 어머니의 물건을 훔쳐간 윗집 아주머니등 엔리카는 방황의 시절에 여러 사람들을 경험하고 겪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 비틀거리며 방황하던 시절을 끝내고 자신에게 비친 한줄기 빛을 향해 걸어가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가난한 여자 고등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이란, 어쩌면 극히 제한적일 것이다. 애써 빛을 향한 엔리카가 다시 방황을 시작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책을 덮는 그 순간 희망을 발견한 것은, 방황의 시절에 엔리카가 자신을 늘 되돌아보고 되돌아봤다는 점일 것이다. 방황의 시절은, 그렇게 엔리카에게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방황의 시절은, 언젠가 지나가기 마련이다. 엔리카는 그녀만의 방황을 끝내고 세상으로 들어갔다. 그녀에게...소리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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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 엔리코. 아버지 말을 따르면 엔리코는 불행하게 태어난 아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랑도 없이 엔리코를 낳았다. 되고 싶은 예술가가 되지 못한 아버지는 해야 했던 아버지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철사에 손을 다쳐가면서 새장 만드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새장들은 모두 쓸 만하고 예뻤으며 어떤 것은 아주 훌륭했다. 하나를 만드는 데 여러 달이 걸렸다. 하지만 새장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보험회사에서 하는 일은 일정치 않았고 보수도 아주 적었다. 생계는 거의 전적으로 어머니가 우체국에서 일하는 것에 의존했다. 엔리코는 상업학교에 다니지만 지루해하는 선생님들처럼 별 의미 없이 학교를 다닌다. 엔리코의 마음이 온통 가 있는 곳은 체사레이다. 그녀의 첫 번째 남자다. 28살이지만 체사레와 함께한 처음은 정말 즐거웠다. 그렇지만 체사레는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친구들을 초대할 수 있는 집을 갖고 싶어 하지만 그럴 능력은 없다. 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졸업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돈 많은 여자를 만났다. 체사레를 사랑하는 마음이 몇 년째 변하지 않는 여자이다. 게다가 여자의 아버지는 비누 공장을 경영하고 있다. 체사레는 그곳에서 장인어른과 함께 일을 하고 싶어 한다. 학위를 따지 않아도 상관없다. 체사레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의 여자를 만난 것이다. 그러니 체사레는 엔리코를 성적인 상대로만 생각할 따름이다. 엔리코는 체사레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체사레가 약혼녀랑 혼인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틈만 나면 체사레를 찾아간다. 체사레와 함께하고 싶어 안달한다. 소설의 시작도 엔리코가 체사레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체사레 아버지가 문을 열어주고, 체사레는 엔리코를 자기의 방에 앉아 기다리게 하며 책을 읽고, 그러다가 엔리코가 더러운 옷을 입었다며 투덜대고, 그러다가 성관계를 맺는다. 모욕과도 같은 대접을 받지만 엔리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체사레의 아기를 낙태한 뒤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좋아하는 학교 친구나 하룻밤의 쾌락을 위해 여자를 만나는 변호사랑 성관계를 해도 오직 마음이 가 있는 곳은 체사레이다. 어머니가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난 뒤 엔리코는 아버지와 따로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엔리코는 낙태 조산원을 소개해준 백작부인의 비서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된다. 백작부인은 스무 살이나 어린 애인이 전화해주기를 기다리면서 혼자 사는 사람이다. 그리움이 견딜 수 없으면 코냑 병이나 잡지 한 뭉치를 들고 침대에 누워 지낸다. 그러다가 젊은 애인이 오면 생생하게 살아나는데 그것은 잠깐일 뿐이다. 백작부인과 지내던 엔리코는 어느 날 거울 속에서 백작주인과 닮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고는 그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체사레는 곧 혼인할 것이고, 아버지는 엔리코가 없어도 그리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훈훈한 기운과 함께 빗방울은 듬성듬성 인도 위로 떨어졌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곧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우선은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일은 새벽에 일어나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날 것이다. (30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