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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는 내내 날이 좋았어요. 아니 오히려 살짝 덥기까지 했죠. 체감 온도가 90도 가까이 오른 날도 많았으니깐. 그런데 오히려 그게 참 좋더라구요. 짧은 반바지를 입고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거... 반팔 티를 입어도 하나도 안 춥다는 거, 뭐 그런 거. 그래서 살짝 오버를 했나?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암튼 금요일 저녁이 되자 급피곤해져서 아홉시도 되기 전에 침대에 누웠어요. 책도 안 읽고 바로 자는 나를 남편이 이상하다는 듯 봤죠. "어디 아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자고 싶네." 그리곤 그냥 잔 거에요. 아홉 시도 되기 전에 잔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인데... 그리곤 토요일도 10시가 조금 안 돼서 잠을 잤어요. 딱히 이유는 없었어요. 피곤해서라든가 심심해서라든가... 굳이 이유를 대자면 책을 읽는다는 일이 좀 귀찮게 느껴졌어요. 그럼 뭘하지? 생각하다가 그냥 잠이 들어버린 거죠. 그리고 주일... 오후에 낮잠을 잔 거에요. 주말 오후에 아주 가끔 낮잠을 자긴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딱히 이유는 없었어요. 그냥...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드는 거에요. 그때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었다면 그걸 했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또 잠이 들었죠. 우리집은 출입구가 두 개에요. 집 앞쪽에 현관문이 있고, 주방에 거라지로 가는 문이 있지요. 주말에, 남편과 나 모두 집에 있을 땐 가끔 두 문을 다 열어놔요. 그리고 방방에 있는 창문들도 모두 열어놓지요. 바람들이 춤을 추듯 집안을 다니는 그 느낌이 너무 좋은 거에요. 그래서 슬리퍼를 벗고 양말도 벗고 맨발로 집안을 돌아다니죠. 이 집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 중 하나인데, 이 집은 거실과 방을 비롯한 모든 곳에 카펫이 깔려 있지 않아요. 왁스칠이 잘 된 나무로 바닥을 깔았죠. 발에 닿는 나무의 느낌이 너무 좋아서 기분이 좋은 날은 맨발로 그렇게 집안을 돌아다녀요. 때론 음악을 틀어놓기도 하구요. 꿈속에서도 그렇게 온 집안의 문을 다 열어 놨더라구요. 따뜻하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집안을 감싸고 있었어요. 집안 전체가 춤추는 것 같은 그런 흥겨운 기분. 따뜻한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포근하게 감싸는... 그런 느낌 있잖아요. 나른하고 충만하고 뭐 그런. 근데 그 바람결에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엄마야. 엄마 왔어." "엄마?"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갔지요. 바람은 주방쪽에 있는 뒷문에서 들어오고 있었어요. "엄마?" 엄마의 겉옷이 문에 걸려 있었어요. 내가 사드렸던 검은색 겨울 외투. "엄마야, 나와봐." 긴 길을 오느라 약간 피곤한 듯 했지만, 환한 봄을 보고 잔뜩 설레어하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어요. 엄마가... 꽃이나 식물을 볼 때마다 그렇듯이 평소보다 한 톤 업된... "엄마?" 나는 열린 문으로 한 발을 내딛었어요. 원래라면 거기에선 거라지가 보여야 하지만... 아주 밝고 환한 그런 곳이였어요. "엄마." 그러다 잠이 깼는데... 뭐랄까, 기쁘다거나 슬프다거나 무섭다거나 즐겁다거나... 그런 감정과는 무관한... 정말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감정의 진공 상태랄까? 아니면 아직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핑크색 원피스(민소매라 여름에만 입는)를 꺼내 입고, 핑크색 귀걸이를 찾아 하고 저녁을 먹고 운동을 하고 돌아와... 이 책을 꺼내 든 거에요. 이유가 뭐였을까요?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연수가 번역한 책이었기 때문에? 네, 맞아요.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책이 주는 위로가. 그럼 나는 슬펐던 걸까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책... '나는 치즈다'라는 말랑말랑한 제목(?)과는 전혀 딴판이에요. 읽는 내내 번역하면서도 심적으로 힘들었겠다, 그런 생각을 했지요. 뭐... 번역가가 저처럼 주변 사람이나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청소년 문학'이라고 가벼울 거라 생각한 게 잘못이었어요. 하긴... 조금 읽다 '이건 아닌데...' 싶어 표지를 들여다보니, 표지가 작품을 말해주더군요. 자전거를 타고 뒤돌아보는 아이의 눈빛이 불길하고 불안했거든요. 흑백톤의 여자는 눈동자만 푸른색인데... 눈 안이 텅 비어 있어요. 어떤 것도 응시하고 있지 않아요. 주사기와... 도로변의 모텔 간판, 그리고 푸른빛의... 상담실이라기보다는 취조실같은 그곳에 두 사람이 앉아 있어요. 삭막해요. 그림 그 자체만으로. 개인지 짐승인지... 암튼 사나운 동물의 날카로운 이빨과... 계단 위의 한 사람, 모든 게 음산해요. 어둡고. 어쩌자고 로버트 코마이어라는 이 미국인은 '청소년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작품을 쓴 걸까요? 그리고 김연수는 하고 많은 작품 중 이 소설을 번역하고 싶었던 걸까요? 내내 의문이 생기는 거죠. 그렇게 끝까지 다 읽었고 (278쪽 분량인데다 줄간격도 넓어서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나는 또 잠이 들었어요. 아마... 10시 40분쯤 됐으려나? (사실은 중간에 몇 번 자다 깨다 했어요) 밤새 심란하고 요란한 꿈들을 참 많이 꾼 것 같아요. 그래도 한 번도 깨지 않은 건 그만큼 피곤했기 때문일까요? 알람이 울리고 아침에 눈을 뜨고 남편에게 제일 먼저 물어본 말은... "나 어제 잘 잤어?" "응" "혹시 울거나 잠꼬대 같은 거 하지 않았어?" "아니, 아주 잘 잤어." "그랬구나. 다행이야." 그리고... 씻고 나왔죠. 거라지로 향하는 주방문을 열어 보고 수수께끼 같은 모든 게 해결되는 기분이었어요. 밤새 비가 왔더라구요. 사방이 온통 축축하게 습기에 잠겨 있었어요. "그래서였구나." 실마리를 찾은 느낌. 지금 오후 1시가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날이 잔뜩 흐리네요. 순전히 실내에만 있는 데도 밖에서 비가 오거나 날이 잔뜩 흐리면 희한하게도 몸이 그걸 알아요. 어떻게 그럴까요? 정말 신기하죠?
<나는 치즈다>는 그런 소설이에요. '청소년 문학'에 국한시키고 싶지는 않아요. 이 작품은 어찌 보면... 심리스릴러 같아요. 다 읽고 나면 찜찜하다기보다는 내가 몰랐던, 혹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세상의 이면을 알게 되어 슬프다고 해야 할까, 체념하게 된다고 할까? '이런 거였어? 이런 거였지?' 뭐 그런 느낌이 들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에요. 아이는 언제나 안전하다는 느낌이에요. 왜냐하면 엄마와 아빠가 철저하게 보호해준다는 걸 아니깐요.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닫게 되는 거죠. 엄마도 아빠도 나와 같은 연약한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 더 큰 무엇 앞에서는 초라하고 한없이 연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부모조차 어느 순간 내 곁을 떠날 수도 있다는 것. 생각해보세요. 그걸 깨닫는 순간이 어떤 공포소설이나 영화보다 가장 두렵지 않았나요? 뭐... 그런 이야기랍니다. 그러니... 저처럼 주변 환경에 많이 영향을 받거나, 기분이 별로인 날이나, 날씨가 우중충한 날엔 읽지 않는 게 좋을 거에요. 완전 '쥐약'이 될 수 있거든요. 그러니... 조심 또 조심.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왜... 동화책에 보면 아이의 열 몇 살 생일에 아이가 물레 바늘에 찔려 죽을 거란 저주를 내리고 사라지잖아요. 마녀가. 그래서 왕과 왕비(그러니깐 부모)는 나라의 모든 물레들을 다 없애버리잖아요. 그런 데도 아이는 저주가 내려진 그 나이에 결국 물레를 발견하고 물레 바늘에 찔리게 되잖아요. 나는 종종 그 동화야말로 기가 막히게 인생을 비유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게 부모 마음인 거겠죠. 그런데 또... 부모가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아이는 어느 순간 물레를 발견하게 되잖아요. 그런 건... 도저히 인간의 힘으론 막을 수 없는 것이죠. 그런 게 참... 헛헛해도... 그게 또 인생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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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소설이다. 이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소설이 전혀 청소년 소설 같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 희망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이 책은 단적으로 말한다. 희망없다. 누구도 믿지 마라. 왜 이 작가는 청소년 들에게 이런 암울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청소년 시절을 한참 지난 나도 읽는 내내 푹 내려 앉은 가슴을 한 손으로 움켜 잡고 지탱했는 데, 청소년들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어떤 심정으로 읽어 내려 갈까.
영화 '허공에의 질주'를 떠올렸다. 사회악을 파헤치고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의해 피해다니는 가족이 주인공이다. 허공에의 질주는 희망적으로 끝나지만,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가족들은 결국 그 사회악에 의해 희생당하고 주인공 소년은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여기서 더 절망적인 것은 가족을 보호해 주는 쪽도 해치려는 쪽도 더 이상 주인공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권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회다.
작가는 이런 사회가 바로 이 책이 쓰여질 당시, 70년대 미국 사회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 개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자신을 믿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가라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연대? 연대는 가능한가. 이도 저도 불가능하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절망을 직시할 때 희망은 정말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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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소설이라고 해서, 좀 가볍게 봤었습니다만,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이 책이 청소년소설이라는 것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일단 내용은 이렇습니다. 실제 책의 내용은 좀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제 나름대로 정리해봅니다. 애덤 파머는 어느날, 자신의 출생 기록이 2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혹시 어려서 죽은 쌍둥이 동생이라도 있는 것은 아닌가? 혹시 내가 입양된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하고 또 고민하지만, 부모님은 의외로 순순히 알려줍니다. 사실, 아버지는 옛날 기자활동을 하다가, 암흑 세력의 비밀을 알게되고, 그 비밀을 재판에서 증언해주면서, 암흑 세력의 제거 1호 대상이 되어버리지요. 이에, 아버지는 증인 보호 프로그램의 대상자로 선택되어 이전의 삶의 기록을 모두 폐기하고, 낯선 곳에서 낯선 신분을 새롭게 부여받습니다. 애덤의 출생 기록이 2건인 것도, 2개의 조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남은 나머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아버지가 알고 있는 모든 비밀을 알아내지 못한 정부기관에서는 계속해서 아버지에게 남은 비밀을 말해줄 것을 요구합니다만, 아버지는 더 이상 악당과 정부의 싸움에 최전방에 서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신분이 발칵되었을 지도 모르니, 빨리 대피하라는 소식을 받고, 애덤의 가족은 차를 타고 또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와중에 악당들에게 붙잡혀, 부모님은 살해당하고 애덤만 혼자 살아남아 정부기관에 구조되지요. 그러나 이때의 충격으로 애덤은 과거를 잊게 되고, 혹시 애덤의 아버지가 남겼을 지도 모르는 그 비밀을 애덤을 통해 얻어내려는 정부 기관은 애덤에게 정신과 치료를 빙자해, 시설에 감금한 뒤, 약물을 투여하면서, 애덤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애덤의 담당자가 보고서를 올리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나지요. "애덤에게서 잃어버린 비밀을 찾아내기는 불가능한 것 같으니, 애덤을 미끼로 다시금 그 악당들의 공격을 유도해내거나, 애덤을 그냥 방치하거나 하는 것이 좋겠다" 라고 말입니다. ============= 냉혹한 국가정보국 (여기에서는 미국이니까, FBI나 CIA 혹은 NSA 정도가 되겠네요)의 어른들에게는 아이라고 봐 주는 것이 없습니다. 수치를 내서, 비용과 이득을 따져보고, 수지가 맞지 않으면 냉혹하게 폐기 시켜버리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에서의 애덤 처럼 말입니다. 어린아이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은, 공자가 말한, 사람들의 착한 심성일수도 있고, F. 라살(Ferdinand Lassalle)의 사회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만, 최후의 상황에서,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아이의 손을 붙잡아 줄 수 있는 것은, 그 아이의 부모 밖에 없는 것인가 싶기도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