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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내 기술적 문제를 점검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에리피 프롬의 《사랑의 기술》
제목은 멋졌지만 내가 원했던 사랑의 '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짜증을 내니까 누가 이런 말을 했다. "과일 맛이 나는 사탕을 먹으면서 진짜 과일이 아니라고 짜증을 내고 있는 것 같다."라고.
에리히 프롬이 어려운 용어를 최대한 뺀 담백한 문장으로 썼다는 건 높이 평가할 만 하지만 <선과 정신분석>을 <사랑의 기술>에 묶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이라 다른 사람의 밑줄이 종종 눈에 띄었다. 색색의 볼펜으로 그어 놓은 밑줄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사랑은 행동이며 인간의 힘의 실천이다. 이 힘은 오직 자유의 상태에서만 실천되며, 어떤 강제의 결과로서는 결코 실천되지 않는다.'
- 30p <제2장 사랑의 이론 - 1. 사랑, 인간의 실존의 문제에 대한 해답>
사랑은 불가피하기도 하다. 자유와 힘의 실천은 맞지만 마음이 하는 일을 머리가 감당하기 힘든 순간도 있다. 강제로 사랑할 수 없고, 강제로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다.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신비」를 알고자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사랑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능동적인 침투이다. 그 침두에서 알고자 하는 나의 욕구는 결합에 의하여 달성된다. 융합의 행동을 통해 나는 당신을 알며, 나 자신을 알며, 모든 사람을 안다. (중략)
사랑은 지식, 앎의 유일한 한 가지 방법이며, 그것은 결합의 행동 안에서 나의 질문에 답한다. 사랑하는 행위 속에서, 즉 나 자신을 주는 가운데 타인에게 침투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며 자신을 깨우치며 우리라는 두 사람을 발견하며 인간을 발견한다.
- 39p <제2장 사랑의 이론 - 1. 사랑, 인간의 실존의 문제에 대한 해답>
사랑을 할 때 세상은 사랑하는 '대상'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알고자 하는 욕구를 '능동적 침투'로 해석한 부분은 굉장히 멋졌다. '나 자신을 주는 가운데 타인에게 침투하는 행위' 그것은 남녀의 애정문제 뿐만 아니라 부모의 사랑, 또는 자원봉사자들의 희생정신과 비슷한 성격으로 보였다.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을 따르고, 미성숙의 사랑은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 49p <제2장 사랑의 이론 - 2. 부모와 자녀 사이의 사랑>
과연, 사랑을 성숙과 미성숙으로 나눌 수 있을까?
심지어는 분노의 표시, 혐오의 표현, 자제력의 완전한 결여까지도 친밀의 표시로 간주된다. 이것은 결혼한 부부들이 흔히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곡해된 매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어떤 부부는 그들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만, 혹은 서로 혐오와 분노를 발산시킬 때에만 친밀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 61p <제2장 사랑의 이론 - 3. 사랑의 대상>
분명 사랑에는 애증이 존재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증오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혐오와 분노를 발산시킬 때 친밀한 사이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때가 가장 솔직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애증은 사랑의 또다른 이름이다.
당신은 한꺼번에 많은 것을 행하고 있다. 즉 당신은 독서하고 라디오를 청취하며 이야기하고 담배를 피우며 먹고 마신다. 당신은 입을 열어 모든 것 ㅡ 그림, 술, 지식ㅡ 을 삼켜버리는 데 열중하고 또 준비하고 있는 소비자이다. 이와 같은 집중성의 결여는 우리들이 홀로 있기 곤란하다는 점에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이야기하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독서를 하거나 마시는 것 없이 조용하게 앉아 있는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신경질적이고 안절부절 못하게 되며, 그리하여 입이나 손으로 어떤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 113p <제4장 사랑의 실천>
인간은 선천적으로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존재 아닐까. 프롬의 언급처럼 이렇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동물은 인간 뿐이다.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걸까. 나 역시 그러하다. 습관적으로 늘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 침묵보다 더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순간'이다.
사랑의 기술을 실천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사랑이란 나르시시즘의 상대적 부재에 의존하며, 또 그것은 겸손과 객관성 그리고 이성의 발전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싶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서 객관성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되며, 내가 객관적이지 못한 상황에 대해서는 민감해져야 한다.
- 124p <제4장 사랑의 실천>
어떻게 '사랑'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어떻게 겸손해 질 수 있으며, 어떻게 이성적일 수 있을까. 말은 쉽다. 왜 사랑을 '미친짓'이라고 하겠는가. 모든 기관에 마비가 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할 때 객관적일 수 없고, 겸손해질 수 없으며, 이성적일 수도 없다. 오직 '미친' 상태를 경험하게 될 뿐이다.
사랑의 기술에 겸손과 객관적인 이성이 필요하다면 그때부터 그건 사랑이 아니라 연기가 되는 것 아닐까.
선은 본질적으로 자기의 존재의 본성을 관조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속박으로부터 자유로 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다. 선은 우리 개개인 속에 원래부터 자연히 축적되어 있는 모든 에네르기를 해방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에네르기는 평소에는 구속되고 왜곡되어 있어 자유롭게 행동하는 통로를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의 목적은 우리가 광인이 되거나 불구자가 되는 것을 구하는 데 있다.
- 195p <선과 정신분석 - 제 6장 억압의 제거와 개오>
선과 정신분석으로 넘어가자 이야기가 약간 더 지루해졌다. 하지만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과 선을 행하는 인간의 마음은 같은 맥락이기 때문에 책을 읽는데 크게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다.
결국 인간의 '선'은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남녀의 사랑보다 더 넓은 의미의 사랑이다. 선의 목적이 우리가 광인이 되거나 불구자가 되는 것을 구하는데 있다면 사랑의 목적도 그와 같거나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누구도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할 수는 없다. 사람은 다만 나 자신을 구할 수 있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 199p <선과 정신분석 - 제 6장 억압의 제거와 개오>
사랑을 할 때 가장 빠지기 쉬운 착각이 바로 이것이다. 나 때문에 그가 변하고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가장 무섭고 이기적인 바람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도 구할 수 없다. 사랑하는 행위는 내가 너를 구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나를 구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너를 사랑하고 있는 내 마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기적이고 불가피한 마음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것 아닐까. 사랑 때문에 폭력적이고, 사랑 때문에 불행해지는 마음이 또한 '사랑'때문에 구원받고 스스로를 구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랑같다.
사랑에 대한 기술보다는 사랑에 대한 수많은 정의와 마음가짐에 대해 적어 놓은 책이다. 아무렴 마음이 하는 일인데 어떻게 '기술'이 존재하겠는가.
2012년 6월 2일 다 읽음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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