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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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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를 다시 읽고 싶다는 포스팅을 한 적이 있다. 그 때는 내 자신도 도대체 내가 이 책을 왜 읽고 싶어진 건지 알 수 없었는데, 어젯밤에서야 무릎을 탁 쳤다. '아, 내가 이래서 이 책을 읽고 싶었던 거구나.'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의 요지는 압축적 근대화다. 서구 사회에서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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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를 다시 읽고 싶다는 포스팅을 한 적이 있다. 그 때는 내 자신도 도대체 내가 이 책을 왜 읽고 싶어진 건지 알 수 없었는데, 어젯밤에서야 무릎을 탁 쳤다. '아, 내가 이래서 이 책을 읽고 싶었던 거구나.'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의 요지는 압축적 근대화다. 서구 사회에서는 300년간 경험했던 '근대성'이 한국에 이식되었을 때 한국 사회와 한국인들은 이것을 30년이란 짧은 시간동안 압축해서 경험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혼동을 느낄 수밖에 없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를 읽으면서 느낀 점도 이와 비슷하다.

한국에 기독교가 이식된 건 100여전 전이다. 한국 사회와 한국인들은 이 짧은 시간동안 압축해서 기독교를 경험했다. 이런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부여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생각은 이렇다.

 

한국 기독교 내부에 프리모던적, 모던적, 포스트모던적 성격들이 혼재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무엇은 지양해야 한다던가, 어떤 발전 단계를 상정하고 어떠어떠한 모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자칫 그외의 것들은 배제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예수의 이름 안에서' 하나로 아우르고 포용할 수는 없을까? 인종이 달라도 연령이 달라도 성별이 달라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깐 현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프리모던, 모던, 포스트모던 중 어느 지점에 와 있느냐? 어느 것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냐가 아니라 post-post modernism 혹은 post {post-modernism}을 추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고 통합하고 포용할 수 있는.

 

저자의 주장이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매우 급진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책의 내용 중 일부는 실제로도 조금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러한 주장들이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바리새인들을 닮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스스로 반성을 촉구하면서 예수의 얼굴을 닮은 기독교를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것에 가깝다.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기독교인'들은 이미 우리 중에 있으며 그가 꿈꾸는 '새로운 교회'나 '새로운 신학교'의 모습도 반드시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에 동조하는 많은(소수일까?) 그리스도인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1. 이단으로 찍힐까봐. 혹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어서(나는 소수일까? 다수일까? 다수에서 편하게 있는 게 좋지 괜히 분란을 일으키는 건 조직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피곤하다. 더욱이 이단으로 찍힌다면 일은 너무 커져 버린다).

 

2. 약한 자를 배려하는 마음. 결국은 'capacity'의 문제인데, 어떤 새로운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나 역량이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럴 때 capacity가 충분히 큰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나로 인해 그 사람이 시험에 들거나 실족하면 안 되니깐. 이건 바울의 마음이기도 하다. 물론 역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 역시 좀더 포용적이고 아량적이고,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인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저 사람들이 나쁜 게 아니라 내가 인정할 능력과 역량이 부족한 것이다.'라는 걸 인정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암튼 바리새인화되고 교회 내의 권력만을 중시한다거나, 혹은 너무 관성화된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도전을 줄 수 있는 책이다. 연대할 수 있는 뜻이 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칠 수 있다면 이런 새로운 교회 모델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초대교회를 닮은 멋진 교회라니...! 생각만 해도 설렌다.

 

[덧붙임] 1. 다음은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졸리맨님과의 대화. 원래는 책 내용을 본따서 이를 중심으로 리뷰를 쓰려고 했는데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암튼 참조하시길.

 

복음주의에 대한 졸리맨님과의 대화

 

2. 책들의 내용을 발췌한 것들이다. 읽어보면 대강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려하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면 구입해서 읽어 봐도 좋겠다.

 

3 댄이 십자가와 드림캐처의 접점을 발견하다

5 네오가 예수님과 보조를 맞추는 삶을 고민하다

6 성경 해석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

11 의로움, 그 이상으로 나아가라

13 혼자서 또는 공동체와 함께하는 영적 훈련

16 공인 무명인이 평범한 무명인에게 주는 교회 리더십에 대한 해설

 

 



YES마니아 : 로얄 c*****g 2009.07.22. 신고 공감 2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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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어스의 빨간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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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였다.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난 요즘 유행하는 ‘이머징(Emerging) 운동’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거 빨간 책이다. 책 표지부터 현란한 꽃 핑크 색으로 눈을 희롱하더만, 내용을 보아하니 이거 빨간 책 맞다. 작년 우리에게 큰 웃음을 주었던 식으로 표현하자면 (한국 기독교 버전의) 불온서적, 역시 빨간 책이다.   네오(NEO)? 이 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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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였다.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난 요즘 유행하는 ‘이머징(Emerging) 운동’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거 빨간 책이다. 책 표지부터 현란한 꽃 핑크 색으로 눈을 희롱하더만, 내용을 보아하니 이거 빨간 책 맞다. 작년 우리에게 큰 웃음을 주었던 식으로 표현하자면 (한국 기독교 버전의) 불온서적, 역시 빨간 책이다. 
 

네오(NEO)? 이 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 고등학교 과학 선생님 겸 여자 축구부 코치는 별명을 바꿔야 마땅하다. 검은 코트 자락 휘날리던 키아누 리브스-네오가 아니라, 검은 선글라스 뒤로 음험한 웃음을 날리면서 빨간 약 줄까? 파란 약 줄까? 했던 모피어스가 더 어울린다. 정체를 밝혀라! 그는 영락없는 모피어스다. 아마도 독자들은 이 책을 열면서 소파에 깊숙이 앉아서 빨갛고 파란 약들을 내미는 모피어스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빨간 약인가? 아니면 책을 덮겠는가? 책을 덮고 파란 하늘을 향해 달려 나간다하더라도 좋다. 요즘은 좀 추우니 목도리는 필히 지참 요망. 하지만 빨간 약을 선택했다면 과감하게 삼키자. 그리고, Welcome to the Matrix.

“아놔, 못 해먹겠어...”라는 한숨과 푸념은 단지 이 책 속의 댄 목사뿐만이 아닐 것이다. 적어도 나도 그러고 있으니까. 물론 댄 목사만큼의 경력에 비할 것은 아니겠지만, 왠지 그의 자조 섞인 한숨은 나에게 그리 낯설진 않았다. 나도 그러고 있으니까. 아니, 나만 그럴까? 요즘 들어 부쩍 소리가 커진 현대 기독교 전통의 갱신과 개혁을 향한 요청들의 중심에는 현대 기독교에 대한 실망과 아쉬움, 그리고 자조와 분노가 있다는 것이 나만의 분석이 아니다. 적어도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처한 위기는, 거두절미한다면 현대 기독교 전통의 시대착오적인 한계에 대한 걱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때문에 모피어스-네오의 유혹은 댄 목사뿐만이 아니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나에게도 달콤한 것이었다. 얼마나 달콤한가?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니. 하지만 입에서 달콤한 것은 배에서 쓰다고 누가 그러던데. 한숨으로부터 시작한 유혹의 소나타는 결국 또 하나의 한숨을 불러왔다.

다 맞다. ‘오늘’의 상황이 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티로 변화하는 기로에 서 있다는 저자의 분석 역시 맞고, 현재의 기독교 전통이 모더니티에 근거한 모더니즘적인 기독교라는 시각에도 (개인적으론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오늘날의 기독교가 처한 위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니 따라가려 시도조차 하지 않는 시대착오에 있다는 암묵적인 지적 역시 두 손에 두 발 들고 찬성하는 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는 한숨, 그 이름은 ‘So What?'?

아무래도 내가 두 발을 딛고 있는 한국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한국의 상황, 아니 시야를 좁혀, 한국의 기독교가 몸담고 있는 2009년의 상황이 정말로 포스트 모던할까? 오히려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서 ‘과거로, 과거로’를 외치는 작금의 시대착오적인 유행이 한국의 교회에서 많은 부분 근거하고 있다는 시니컬한 관점에서 볼 때, 과연 한국 기독교의 상황은 정말로 포스트모더니티와 관계하고는 있는 것일까? 관계하고 있다면 과연 얼마나?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포스트모더니티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부분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 ‘일부’가 전체를 대변할 수 있을까? 또한 단지 포스트모더니티의 자궁이라고 할 수 있을 북미의 포스트-베이비부머 세대와 같은 서력을 공유한다고 해도, 그곳의 시계와 이곳의 시계가 과연 같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을까? 하긴, 요즘 한국의 혼란스러움은 딱 포스트 모더니티적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만.

아무튼, 이러한 문제 상황 속에 이 ‘빨간 책’은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라는 한숨이 나오게 된다. 모피어스의 빨간 약처럼 정말로 매트릭스를 자각하고,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낸 키아누 리브스-네오를 인도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한 순간의 불놀이로 치부한 채 다시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려했던 사이퍼-스미스를 만들어낼 뿐일까? 모를 일이다.


또 한 가지 한숨이라면, 과연 포스트 모더니티의 상황에 적응하고 변화한다고 한다면 그 여정의 ‘날은 어디냐? 는 것이다. 여정에는 끝이 있어야 할 텐데, 만약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와 상황에 따라 기독교 전통이 변화한다고 한다면, 그 변화의 끝은 어디이며 어떤 모습일 것인가? 솔직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소위 ‘좌파빨갱이’ 수준으로 매도당하는 나사 빠진 자유주의의 모습일까? 아님 ‘보수꼴통’으로 치부되는 근본주의의 또 다른 모습일까? 아니, 그것이 과연 ‘기독교’ 전통의 모습이기는 할까? 역시 모를 일이다.

결국 모피어스의 달콤한 유혹은 또 하나의 한숨을 낳게 된다. 정답이 있기나 할까? 음험한 모피어스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난 몰라’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겠다. (끝까지 모피어스네. 지못미, 네오. 하지만 난 여자 축구부 코치 키아누 리브스는 상상조차 안 가.) 이렇게 불친절한 것도 포스트모더니티일까?

판단은 개인의 몫으로 돌아간다. 하긴, 우리는 그저 새로운 종류의 그리스도인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유일하게’ 새로운 종류나, ‘더 나은’ 종류, 또는 ‘유일하게’ 우월한 종류를 말하는 게 아니라, 단지 ‘새로운 종류’를 말하고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난 이런 여정이 맘에 든다. 어떤 교수님이 그랬지. 포스트모더니티 시대에서는 정답보다는 ‘나에게 좋은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했던가. 정답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모피어스가 말하는 매트릭스 세계의 정체가 무엇인지, 사람 좋아 보이는 맥클라렌씨의 저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책을 읽게 하신 ‘그 분’의 뜻이 무엇일지. 하긴, 어찌 사람이 ‘그 분’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나 있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향한 관심과 여정은 흥미로운 것이라는 점이다.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걱정을 하고, 같은 한숨을 쉬는 이들에게 이 여정은 ‘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해도 흥미로운’, 그런 여정이 될 것이다. 아니,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당신’보다 조금 일찍 이 빨간 책의 여정 속으로 뛰어든 나의 바람이다.

자, 빨간 약인가? 파란 약인가?

c*****w 2009.01.07.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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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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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벌써 신앙서적 2권째다.. 왠지 줄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먼저든다.   이번 책은 나의 소중한 친구인 요한군의 소개로 일게되었다. 귀가 얇은(남의 말을 잘듣는) 성격이라서 추천하고 바로 읽게되었다.   먼저 나의 친구인 요한이에게 고맙다는 말 전한다.   이 책을 읽은 것은 정말 시의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카톨릭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해야할 것 같은 나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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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벌써 신앙서적 2권째다.. 왠지 줄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먼저든다.

 

이번 책은 나의 소중한 친구인 요한군의 소개로 일게되었다. 귀가 얇은(남의 말을 잘듣는) 성격이라서 추천하고 바로 읽게되었다.

 

먼저 나의 친구인 요한이에게 고맙다는 말 전한다.

 

이 책을 읽은 것은 정말 시의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카톨릭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해야할 것 같은 나의 신앙적 상황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카톨릭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껄끄럽고 입밖에 잘 나오지 않는다.

 

그건 나라는 사람이 바뀐것도 아닌데, "개신교 그리스도인"이었을때의 소속, 행동, 그 모든것들이 부인되어지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인것 같다.

 

그리고 지금의 나의 모습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고 또한 나의 설명이 그들에게 받아들여질지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 였을 것이다.

 

 도리어 그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는(교회내에서 비판받으며, 죄의 영향으로, 기존의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준다는 식의 비판과 기피, 배척 등 -책에서 말하고 있는 다분히 근대적 사고에 의한 교육 의 영향) 부담감을 떨칠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고 책의 내용은 이야기 하지 않고, 뜬구름 잡는 개인사와 감정을 늘어 놓는 건 좋은게 아닌데, 아직 고쳐지지 않는다.  텅빈 혼자만의 공간에 나의 생각을 흩어뿌리는 식의 사고는 읽는 사람을 혼란스럽게만 만들테니까.. 미안하지만 이해해 주기를 바랄뿐이다.

 

본격적으로 이 책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약간의 읽은 소감을 쓰겠습니다. (급, 존댓말)  그전에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은, 이 책의 저자나 책에 나오는 사람(가상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작가가 생명을 넣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별도로 씀) 만큼이나 높은 지적 수준과 신앙의 깊은 고민을 가지지 못한 저로서는 이 책의 내용 이상으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목회직에 대한 회의와 고민을 가지고 있는 댄(목사님)과 전 목회자로서 현재는 고등학교 과학교사로 도피한 네오(교사)의 만남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 둘의 이야기는 결국 댄의 고민과 회의의 원인 그리고 대안을 주제로 한 서로간의 대화가 중심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댄이 고민의 원인은 포스트모더니티(탈근대성, 후근대성)의 현실에서 목회자로서 이전 모더니티(근대성)을 기반으로하는 현대 기독교의 한계에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네오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죠, 막연한 불안, 근심을 가지고 있었을뿐입니다.)

 

그리고 전직 17년차 목회자(댄은 나중에서야 알게되는 사실임)로  댄과 비슷한 고민을 했으나, 목회직을 포기(도피)하여 교사로서 살고 있는 네오와의 대화와 질문을 통해서 "새로운 그리스도인"이라는 대안을 찾게되는 거죠.

 

이렇게 두 문단으로 줄일수도 있지만, 결국 내용은 책 안에 고스란히 녹여 있습니다. 저도 고민했었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부분들, 혹은 먼 생각의 너머로 버려둔 고민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되어 있습니다.

 

혹시 급진적이라고 생각할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이 책 또한 변혁(convert)라고 말할수 있는 정도는 아닌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이 나온지도 7년이 넘게 흘렀으니까 그럴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의 많은 교회다시니는(?) 분들에게는 가슴에 쿵하고 충격을 줄수 있는 책임에는 틀림없는것 같습니다.

 

책의 내용이 좋은 부분이 많고, 이전의 고민에 대한 대안적 답변들이 많아서 줄을 많이 긋고 읽었습니다. 나중에 그런 고민이 날때마다 곱씹어 볼수 있을 것 같네요. 댄에게 네오가 있었던 것처럼 이런 깊은 고민이 가능한 친구들이 내 삶에도 있기를 내가 그렇게 될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덮었습니다.

 

P.S 이제야 모든 사람에게 말할수 있을 것 같네요. 제가 성당을 다닌다고 말하기 껄끄러웠던 것은 이전에 내가 교회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에게 모정의 배신(?) 비슷한 것을 주는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서였고, 저 또한 많은 사람들을 잃는 것 같은 기분이어서 맘이 석연치 않았고, 어디선가 저를 판단하고 있을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겠지요.. 그렇지만, 단연코 나의 주님이 변하지 않으신 것 처럼 나의 믿음또한 변한게 없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카톨릭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모두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구분짓는 것도 저는 맘에 안들지만..)

 

어쩌면 제가 대학교에서 배워왔던 부분들도 책에서 만날수 있어서 기뻣고, 이전 수호자의 역할을 충실히(?) 했지만, 이젠 추구자가 될수 있어서 기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런 기쁨을 누릴수 있게 도와준 저의 여자친구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오타가 많을 수 있습니다.*^^*

l*****2 2009.02.2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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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는 세상, 이젠 익숙해지셔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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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에 최신형이였던 노트북이 말썽을 일으켜 서비스센터에 간 적이 있습니다. 수리하시는 아저씨는 컴퓨터를 한참 보시더니 요즘 저렴한 넷북 하나 사는 것이 수리하는 것보다 낫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가격에 수리를 해서 사용하기에는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료의 넷북을 잠시 사용해보면서 느꼈던 너무 작은 자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아저씨에게 물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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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전에 최신형이였던 노트북이 말썽을 일으켜 서비스센터에 간 적이 있습니다. 수리하시는 아저씨는 컴퓨터를 한참 보시더니 요즘 저렴한 넷북 하나 사는 것이 수리하는 것보다 낫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가격에 수리를 해서 사용하기에는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료의 넷북을 잠시 사용해보면서 느꼈던 너무 작은 자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아저씨에게 물었습니다. "넷북을 사면 좋기는 하지만, 자판이 너무 작아서 저와 같이 많은 자판 사용을 필요로하는 사람에게는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아저씨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변하는 세상에 이젠 익숙해지셔야죠.”

 

  브라이언 맥클라렌은『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를 통해 노트북을 수리해주시는 아저씨와 같이 말합니다. “변하는 세상에 익숙해지셔야죠” 확고부동하다는 기독교 패러다임에 대하여 그는 쉽고도 깊은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 문제제기는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첫째는 현재의 기독교에 대한 역사적 이해입니다. 현재의 기독교가 모더니티 시대의 산물인 ‘모던 기독교’라고 말하는 저자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탄탄하게 살핍니다. 모더니티를 중심으로한 프리모던 시대와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를 독자들에게 소개 함으로써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모더니티의 중심에서 깊이 파뭍혀 살아가던 성도들에게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변하는 다양한 기독교를 보게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확고부동하다 생각했던 기독교의 정통성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로 맥클라렌은 변화하는 시대와 환경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보며 독자들로 하여금 진정한 복음을 직시하게 합니다. 복음의 실체를 직시하게 합니다. 그것은 C.S.루이스가 그의 책 헤아려본 슬픔에서도 언급했던 ‘실체는 우상 파괴적이다’와도 일맥상통하게 이해됩니다.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았던 예수님 당시의 순수한 복음의 실체가 모더니티로 빗어진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이야기는 이제까지 당연하게 알고 지내던 기독교가 모더니티의 산물임을 폭로함과 동시에 복음의 실체를 간직하고서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방식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무엇보다 이 책이 주는 큰 유익은 우리에게 신선하고도 넓은 시각을 제공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포스트모던 시대는 기독교가 대응하고 대비해야할 진리를 파괴하는 요소가 있는 반기독교적인 시대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변화하는 환경 즉 다원화되고 상대화 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 속에서 불변하고 유일한 진리를 어떻게 수호할 것인가 하는 것은 교회의 고민이며 믿는 자들의 고민이었습니다. 변화하는 삶의 현장과 수호하는 교회의 차이가 점점 커졌고, 믿는 자들의 이중적인 삶과 언어는 신앙의 혼돈을 더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파괴하려는 다원성과 상대성의 대표주자 천덕꾸러기 포스트모던 시대는 맥클라렌을 통하여 비로소 새롭게 복음이 도착해야할 목적지가 됩니다. 그것은 마치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학생이 중학교 때의 교복을 버리고 새로운 교복을 입는 것과 같이 느껴집니다. 맥클라렌은 우리에게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새로운 교복을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맥클라렌의 이런 패러다임 쉬프트 적인 주장에 대한 구체적 대안이 무엇인지는 독자가 스스로 더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것은 이 책이 일으키는 큰 물결에 비하면 작은 노력입니다. 맥클라렌을 만난 사람은 그의 다른 저서를 찾아다니게 될 것이며, 그의 블로그를 찾아가게 될 것이고, 이머징 처치의 현장을 찾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두에게 주저함 없이 일독을 권합니다!

f*****r 2009.01.0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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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야하는 모던한 신앙인의 영적 여정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야하는 모던한 신앙인의 영적 여정" 내용보기
오랫동안 고정된 한 가지 틀로 사고하던 사람이 자신의 사고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을까? 충분히 상상은 되지 않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진다. 다른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낯설 뿐만 아니라 어떻게 보면 자기의 지나간 모든 것을 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불온해 보일 것 같아서 그렇다. 그래서 그것은 쉽게 이단이 된다. 나에게는 <포스트 모던>이라고 하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야하는 모던한 신앙인의 영적 여정" 내용보기
 

오랫동안 고정된 한 가지 틀로 사고하던 사람이 자신의 사고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을까? 충분히 상상은 되지 않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진다. 다른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낯설 뿐만 아니라 어떻게 보면 자기의 지나간 모든 것을 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불온해 보일 것 같아서 그렇다. 그래서 그것은 쉽게 이단이 된다. 나에게는 <포스트 모던>이라고 하는 게 그렇게 다가왔다.

나는 <포스트 모던>을 권위의 틀을 깨는 시대적 흐름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이 이해가 맞든지 틀리든지 앞으로의 시대는 과연 그런 시대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권위주의 시대를 살아온 내가 그런 탈권위의 시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생각해 본다. 물론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니까 쉬운 답을 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떻게든지 나는 다음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문제는 내가 <포스트 모던>이라고 하는 흐름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포스트 모던>은 나에게 종교다원주의를 먼저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단지 포스트 모던식의 신학하기일 뿐이라고 애써 마음을 추스르지만 그것을 위험하게 보는 경계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단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의『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는 그런 나를 논리적으로 수긍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사고하는 방식을 바꾼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중세의 끄트머리에서 근대가 시작될 때 교회의 권위를 대항하는 개혁가들의 모습하고도 비슷하다. 그리고 그렇게 보니까 성경 시대에 바리새주의를 뒤흔드는 예수의 모습에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책은 소설 형식으로 구성된 두 사람의 대화록이다. 주인공인 댄은 현직 목사이지만 목사직을 그만두고 고등학교 교사 자리를 찾고 있고 또 다른 주인공인 네오는 전직 목사이면서 나중에 과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현재는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사람이다. 둘 다 모단 시대에 신앙생활을 하고 신학교를 다녔지만 한 사람은 여전히 모던 시대에 발을 붙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포스트 모던의 경계를 어느 정도 넘어가 있는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서 브라인언은 우리가 평소에 들었을 법한 교리들을 밀도 있게 다룬다.

대화를 좇아가다 보면 모던시대는 개념을 규정하고 관찰하고 분석해서 추상화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데 동의하게 된다. 고대, 중세, 근대라고 하는 시대구분도 역시 모던 시대의 산물이다. 그들은 믿음이나 신학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다보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일이 인격적인 일이 아니고 어느 정도는 기계화된 것 같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도 예수를 따르는 일로 이해되기 보다는 경계선을 넘는 문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에게 가장 충격을 준 그림이기도 하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 가운데 많은 부분은 평소에 내 안에도 있던 고민들이다. 저자는 그런 나의 가려움을 박박 긁어주었다. 하지만 어떤 부분은 여전히 파격적이다. 다른 종교인들에 관한 문제가 대표적으로 그렇다. 다른 종교인들의 구원 문제를 다루면서 저자는 C. S. 루이스를 인용했다. 그 유명한 <나니아 이야기>다. 비록 다른 종교를 가지고 평생을 살았더라도 그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용납하실 것이고, 비록 기독교 영역에서 한 평생을 살았더라도 그의 삶의 방식이 마귀에게 속한 방식이었다면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실 거라는 이야기가 결론이다. 논리적으로는 수긍이 가지만 심정적으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 대목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차례 ‘허허’ 웃었다. 저자의 흐트러짐 없는 논리에 탄복했고 그 논증에 속이 시원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은 책은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하지만 이 책을 소개할지 어떨지를 아직까지 결정하지는 못했다. 이 책을 읽고 보통의 대한민국 신자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확신이 서지 않을 만큼 저자의 주장이 너무 파격적이어서 그렇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여러 사람들에게 읽히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다.

공동체와 성경해석, 천국과 지옥, 하나님의 나라, 믿음과 구원, 전도와 선교 등 여러 가지를 다루는 이 글은 재미있기는 하지만 모던과 포스트 모던의 차이를 이론적으로 그림 그려주었다. 여기에 실천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제시된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도 그 부분을 약간 다루기는 하지만 역시 충분하지는 않다. 다음 번에 나올 책에서는 실천을 다룰 수 있을까?

저자는 이 글을 3부작으로 썼다고 한다. 그 중에서 첫 번째 책이 이번에 번역되었을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했던 나는 이 글의 다음 편이 궁금하다. 그것을 다 읽으면 나는 그의 논리에 설득되어 있을까? 갈등과 분노를 거쳐서 댄이 그랬던 것처럼...

 

YES마니아 : 로얄 k*****h 2009.02.0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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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부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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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책이 왔다. 실은 오래된 책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2001년에 나온 책이니까. 지금에서야 한국에 번역 소개되면서 ‘새로운 그리스도인(A New Kind of Christian)’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책이 배경으로 하는 시점이 1999년이니, ‘10년 지난 그리스도인이 온다’가 더 어울리겠구나. 이 서평의 제목도 바꿔야겠다. ‘오래된 책이 왔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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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책이 왔다. 실은 오래된 책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2001년에 나온 책이니까. 지금에서야 한국에 번역 소개되면서 ‘새로운 그리스도인(A New Kind of Christian)’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책이 배경으로 하는 시점이 1999년이니, ‘10년 지난 그리스도인이 온다’가 더 어울리겠구나. 이 서평의 제목도 바꿔야겠다. ‘오래된 책이 왔다.’로. (이런 농담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친절하게 덧붙이자면,) 하지만 난 결국 서평의 제목을 바꾸지 않았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나온다. 네오라고 불린다. 새롭다는 이름 뜻부터가 심상치 않은데, 주님의 섭리 아래 진화가 이루어졌다고 믿으며, 성경 말씀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에이, 이게 새로운 그리스도인인가? 네오와의 대화 끝에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댄 목사의 반응은 꼭 그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결국 그에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으면 터져버릴 테니까. 내가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다. 현재의 기독교는 어느 순간 헌 부대가 되어버렸다. 헌 부대는 말짱히 버티는 것처럼 보이지만, 금이 가고 언제 터질지 모른다. 인터넷과 하위 문화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기독교 비토층을 보라. 사실 이미 터져 버린 곳도 있다. 종교개혁의 중심지였고 오랜 기독교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에서, 기독교는 낡은 유물이 되어버렸다. 68혁명은 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티로의 이행을 의미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모더니티에 머물러 있었다. 새로운 흐름이 나오기는 했다. 자유주의였다. 하지만 유럽인들에게 이는 포스트모더니티에 맞는 새로운 틀로 인정받지 못했다.


새로운 것이었다. 현재의 기독교가 말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흐름 속에서, 가톨릭(‘일반, 보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은 더 이상 일반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등장한 새 부대가 현재의 기독교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 속에서 더 이상 새로울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헌 부대가 그 의미를 잃은 것은 아니다. 가톨릭은 여전히 헌 술을 담고 있다. 헌 술을 새 부대에 담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새 부대가 필요하다. 가톨릭이라는 헌 부대와, 복음주의나 자유주의라는 헌 부대를 없애라는 말이 아니다. 헌 부대에 들어갈 수 없는 새 술을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하다. 새 부대가 어떤 형태인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으라. 당신이 새 술이라면, 즉 포스트모던적 인간이라면, 이 책을 읽으라. 헌 부대와 새 부대가 공존할 때, 여전히 연약한 우리들은 주님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왔다. 드디어 우리에게 왔다.

k*****i 2009.01.1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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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라! 새로'온' 그리스도인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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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910년대의 성경을 읽고, 1850년대의 서구신학으로,  중세의 내세관을 가지고  2009년을 살아가며 해석한다. 시대는 변화하는데 교회는 절대 진리의 수호자 답게 그 변화의 폭이 좁다. 특별히 120년 기독교역사의 대부분을 근본주의 신학으로 연명한 한국 개신교는 더욱 그렇다. 그러한 한국 교회의 보수성 내지는 심하게 말해서 ‘편협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미 오래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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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910년대의 성경을 읽고, 1850년대의 서구신학으로,  중세의 내세관을 가지고  2009년을 살아가며 해석한다. 시대는 변화하는데 교회는 절대 진리의 수호자 답게 변화의 폭이 좁다.

특별히 120 기독교역사의 대부분을 근본주의 신학으로 연명한 한국 개신교는 더욱 그렇다. 그러한 한국 교회의 보수성 내지는 심하게 말해서 편협성 극복하기 위하여 이미 오래전부터 에큐메니컬 진영에서 많은 노력을 해왔던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존의 보수성이 이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이 이라고 할때, 둘의 충돌은 있어왔으나 일치와 함께 감의 노력인 여전히 주류인 비대성 덕에 묻혀왔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 으로만 계속 지속되다 보니 또한 방어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온 것도 사실이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의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 지향하는 책인것에 틀림이 없다.  책은 소설 형태로, 무언지 모르는 답답함때문에 목회를 포기하려고 까지 하였던기존 주류 입장의 목회자가 네오라는 새로운인물과 대화하며 기존의 보수성과 모던함에서 서서히 변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책의 point post-modernity 도래에 있고, 그렇기에 책을 어떤 신학적인 논쟁을 다룬 책으로 평가하는 것은 책의 진의를 다분히 왜곡하는 것이다. 책은 다만 post-modernism사회에서의 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도인 개인이 지향할 바를 모색하는 과정중에 신학적 논쟁을 포함 시켰을 뿐이다.  그럼에도 책이 신학적 주류와 에큐메니컬 신학간의 논쟁에 관한 글로도 있는 것은 저자가 그만큼 등장인물들을 통해 기존의 신학적 입장들, 또한 입장을 지닌 사람들의 심리와 생각을 적확하게 표현 했기 때문이다. 물론 네오라는 인물의 신학적 입장을 기존 에큐메니컬 신학으로 볼수도 어렵기 때문에 책은 그를 새로운인물로 그려내고 있는 하다. 그점에 있어서 과연 책이 말하는 새로운그리스도인과 기존의 열려있는에큐메니앙 들과의 차이가 정확히 무엇인지 의문이 들고, 특별히 modernity post-modernity라는 틀의 변화만을 transforming 전부인 것처럼 묘사하는 일부 내용들은 아직 변화와 논쟁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한국의 상황에 100%적용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적어도 서적이 아닌 서적에서 그동안 다루지 못했던 고민들과 논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전적인 변화가 요구되는 한국교회에 필요한 책이라고 있다. 책의 내용을 담기는 힘들겠다. 다만 책이 요구하는 대로 틀을 깨라. 더욱 열린 마음을 갖으라. 그렇지 않으면 새로그리스도인은 .

j*****4 2009.01.0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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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뭐징? 그리스도인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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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자 그리스도인 노릇하기도 지쳤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리도 적절한 표현을 보았나!x2 내 마음 상태 역시 그 문장과 같았기에 책에 빠져들었다. 나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거의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했고,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나님이나 그 비슷한 무언가를 추구할 정신적 여력이 남아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사는 게 팍팍해서 주일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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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자 그리스도인 노릇하기도 지쳤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리도 적절한 표현을 보았나!x2 내 마음 상태 역시 그 문장과 같았기에 책에 빠져들었다. 나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거의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했고,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나님이나 그 비슷한 무언가를 추구할 정신적 여력이 남아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사는 게 팍팍해서 주일성수가 버겁다...... 고 한다면 그것은 엄살일지 모른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것을 하는 데에 내 선택권이 있느냐 였다. 나는 다른 것을 할 수 있지만 그 시간에 내 의지로 교회에 가는 것인지, 아니면 주위 환경의 구속으로 인해 교회에 가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글쎄......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인 노릇하기도 지쳤다.



저자는 여러 의문을 통해 현재 기독교에 어떤 균열이 있음을 깨닫는다. 나 역시 그런 의문들을 느꼈다. 왜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가? 물론 그것은 한국교회의 문화에 대한 존중이며, 내 개인적 취향일 수도 있지만, 나는 술을 먹는 그리스도인을 연약한 그리스도인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나 자신을 조금 더 낫게 생각하는 오만함이 스며 있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다시 질문해보자. 왜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하는가? 난 확신하며 대답할 말이 없다. 반공시대에 교육받은 아이들이 북한에 마귀만 사는 줄 알았던 것처럼 그저 세뇌당한 듯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는 교회에서 받은 가르침대로 주위 친구들을 전도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상대를 ‘전도대상자’라든지 ‘바른 길로 인도해줘야 할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전도한다는 것은, 내가 진리를 알고 상대는 진리를 모른다는 전제를 내포한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옳은가? 우리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가? 제도적 교회로 친구를 인도하여, 우리와 똑같이 주일성수를 하게하고, 목사님의 말씀을 잘 따르게 만든다면 성공한 것인가?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제자로 살아가는 것인가? 예수님 시대에도 열심히 종교 활동을 하는 분들이 계셨지만, 그분들의 외식과 위선은 예수님의 질타를 받았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그분들을 만났을 때 너희를 모른다고 말하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생각할수록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발설한다는 건 왠지 위험한 느낌이 든다.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대답으로 긴 설교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예수님이라면 이 의문에 뭐라고 대답하실까? 그 분은 내적 혼란을 억누르고 기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라고 하실까? 아니면 그리스도인 노릇을 집어치우라고 하실까?(내게 그럴 용기나 있는지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세 번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현재의 모습으로 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극복할 문제인가? 저자는 ‘모던’의 한계를 뛰어넘어가는 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현재 그리스도인이 발맞추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보았다. 기독교는 여전히 모더니티의 영향 속에 있었다. 산업화에 따른 성장주의, 이성에 따른 논쟁과 판단... 그러나 배제와 소외를 일으켰던 모더니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상은 포스트모던한 시대로 변화했다. 우리가 옳은가, 라는 질문이 우리가 선한가라는 질문으로 변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시대에 적합한 신앙을 가져야 세상 사람들에게 선교도 잘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거기서 그친다면, 폭력이 정의롭게 여겨지는 시대가 오면 우리 또한 그런 신앙체계를 가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새로운 시대, 포스트모던 시대 역시 그 나름의 문제가 있다.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듯 기독교가 시대에 맞춰 업그레이드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중요한 점은, 지금 우리의 종교도 변화하는 역사 속 한 지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절대적이라 믿는 지금의 신앙체계 역시 모더니즘이라는 시대상황에 따른 모습임을 알고 나면 우리는 우리 종교를 조금 더 겸손하고 자유롭게 대할 수 있다. 당연시되는 흐름을 되돌아보는 데엔 용기가 필요하다. 더 큰 흐름에 합세하기 위해 방향을 트는 실천까지 하려면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하는 동역자들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엔 부모가 가르쳐준 대로 살아간다. 그러다 청년이 되면 왜 부모가 그런 선택과 행동을 해왔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서 잘못된 가족 전통은 수정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도 현재의 기독교가 복음을 제한하진 않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영적 모험을 시작할 때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 나는 새처럼 자유로이 주님을 믿고 싶다. 내가 사랑한 기독교인들은 모두 눈부시게 자유로웠으니. 

c****n 2008.12.2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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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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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너무 ‘발칙한 도전’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기존의 보수적인 장로교, 개혁주의 문화에서 자라온 내게는 깊은 울림이 하나 있었다.   ‘나는 네오(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 묘사되는 책 속의 인물)만큼이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라는.. 질문이었다.   우리의 삶은 매우 복잡하고 늘 변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시각각 우리에게 도전하고 여러 가지 과제를 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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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너무 발칙한 도전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기존의 보수적인 장로교, 개혁주의 문화에서 자라온 내게는 깊은 울림이 하나 있었다.

 

나는 네오(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 묘사되는 책 속의 인물)만큼이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라는.. 질문이었다.

 

우리의 삶은 매우 복잡하고 늘 변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시각각 우리에게 도전하고 여러 가지 과제를 던지고 있지만 많은 사람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실제 그런 삶에 대해 매번 신앙이 부족해서혹은 믿음 혹은 공부가 부족해서라고 하고 넘어가곤 한다.

 

그 중에 소수의 사람들이 그 신앙과 공부가 무엇인지 시도해 보지만 멀지 않아 숨이 막혀

헉헉거리며 자신이 가는 길이 대체 맞는지 아닌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책에서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보수적 신앙인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왜? 보수신학이 어째서란 말인가? 그들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솔직히 교회의 정통성(Orthodoxy)’에 기인하고 있으며, ‘케리그마역시 가지고 있다.

 

교회조직과 조직/역사/성경/실천신학을 가지고 있으며, 신학교도 있다. 그런데 왜?

 

이 책에서의 네오(혹은 저자의 목소리일 수도 있지만)관계대화를 이야기한다.

 

그 관계를 거미줄(Web)로 표현해서 신선했다. 그리고 이 관계현실은 내게 지나치게

위를 바라보지만 말고 현실에 눈을 돌리고 네 자신과 이웃을 볼 것을 요청한다.

 

이 점이야말로 이 책이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대화를 할 용기가 있게 해준 점에 있어서

클라렌과 네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PS 자신이 보수적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추천한다!

 

      또한 이 책과 같이 살림출판사의 '나쁜 그리스도인'을 추천한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w*****e 2009.02.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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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지 않지만,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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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그리스도인이라던가 emerging church 라는 말을 들을때면 두가지 마음이 동시에 든다. 어떠한 새로움일까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것일까 하는 기대감이 첫번째이고 그렇다고 하여 무언가 신선하고 획기적인 정답은 존재할 수 없는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그 두번째이다. 이 두가지 마음이 복잡하게 뒤섞이면서, 책을 신청하여 받아보았다.     [종교라는 단어의 라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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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그리스도인이라던가 emerging church 라는 말을 들을때면

두가지 마음이 동시에 든다.

어떠한 새로움일까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것일까 하는 기대감이 첫번째이고

그렇다고 하여 무언가 신선하고 획기적인 정답은 존재할 수 없는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그 두번째이다.

이 두가지 마음이 복잡하게 뒤섞이면서, 책을 신청하여 받아보았다.

 

 

[종교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을 보면 "재연결(reconnecting)"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끊어진 줄이나 단절된 관계를  다시 연결하고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것 아닙니까, 그렇죠?  '끊어지고' 단절되고 파편화된

우리는 '다시 묶이고' 재연결되어,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다시 만나고,

자기 안에서 재통합되며, 우리가 속한 세계와도 재연결 되어야 합니다 ]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종교가 욕을 먹고 종교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분리되는 현실

도덕과 윤리로 사람을 판단하고 손가락질 하는 수단으로 종교가 사용되는 상황속에서  

어쩐지 위안이 되면서 새롭게 다가온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나 자신과 재통합 되기 위해서

 

무언가 정답을 찾고 싶은 마음에 펼쳐든 책이지만 결국에는

자 무언가 확정짓고 싶어하는 너의 근대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정답을 찾고 규정짓고 구분하려는 생각에서 한걸음 물러나서

미지와 불확실성과 복수성을 인정하는 지평으로 나아가라는 것.

끊임없는 가능성에 나 자신을 열어두며 무지를 겸손함을

불편해 하지 말라는 것.

이것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예상대로 많이 특별하고 충격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참 많은 사람들이 하는 고민과 갈등과 생각들이지만,

그것이 공식적이고 차분하게 적혀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고민들이

믿음좋지 않은 문제아들의 생각으로 취급받는 것이 아니라

"포스트모던" 의 얼굴로 조금 더 폼나게 ^^' 표현되었다는 것이

다른점이겠구나 싶다.

나는 문제아인가 ? 하였던 참 많은 이들이 이 책을 통해 위안을 받고

동지를 만날 수 있겠군 하는 생각도 든다.

 

 

 

s********e 2009.01.1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