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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어야 멋진 죽음인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성찰을 위해서는 인문학을 읽어야 한다. 평생 목숨을 걸고 사유하는 인생의 질문에 몰입해야 한다. 내가 평생 몰입한 인생의 질문이 있었던가? 문득 비참한 생각이 든다. 그런 것들이 없이 오십 반평생을 지내온 것이다. 열정을 가지고 죽을만큼 어떤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살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삶이란 강한 지향성을 지닌 것이며 음악 역시 그러한 지향성에 기반한다고 보면 베토벤의 삶은 곧 하나의 음악이다. 나의 인생은 곧 하나의 그 무엇이라고 말하기가 곤란하다면 인생 헛살은 거다. 작가로 글을 쓰겠다고 해 놓고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노력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아 가는 것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베토벤이 음악에서 삶을 구현했듯이 평범한 사람들 역시 그들의 일에서 삶을 구현해야 한다.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 삶이 승화의 역동성을 잃어버리면 베토벤의 관점에서 그것으느 인간의 삶이 아닌 셈이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려면 정신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간들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필요하다. 인간의 삶이란 모름지기 어떻게든 자신이 하는 일로 숭고함을 들춰내는 창조의 과정이어야 한다. 베토벤은 삶의 고통과 고독에 맞서 투쟁적인 3~40대를 보내고 50세가 되던 1820년 2월, 그는 대화첩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인생은 덧없다. 하지만 예술은 영원하다. 인생의 생명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 고독과 투쟁에 맞서는 50대를 보내야만 한다. 고통의 시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단련된 승화의 업적을 이룰 수가 없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순간순간에 모든 것을 즐기면서 환희에 찬 삶을 살아가는 투쟁을 50대에는 해야 한다. 베토벤이 삶과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거침없는 전진, 극단적인 대존, 극적인 긴장감, 빈틈없는 설계, 폭발적인 에너지가 그의 음악에 실렸다. 삶은 발견하는 것이 나이라 창조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 또한 그들의 일에서 삶을 구현해야 한다. 일상의 테두리에 안주하지 않고 숭고함을 위해 자신을 승화시킬 수 있는지에 따라 삶의 가시성이 드러난다. 삶의 승화를 위한 부단단 노력을 해야 한다. 인간의 삶이란 모름지기 어떻게든 자신이 하는 일로 숭고함을 들춰내는 창조의 과정이어야 한다. 삶의 최고 영예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 것에 있지 않고 쓰러질 때마다 일어나는 것에 있다. 베토벤은 고난을 딛고 환희로 나아갔다. 내 삶 또한 베토벤의 삶의 흔적을 찾아 쫓아가면 된다. 그러면 베토벤이 보이고 언젠가는, 베토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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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피아노 연주 스타일은 모차르트의 연주 스타일에 비교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모차르트보다 페달을 더 많이 사용하고 노래하는 듯한 연주가 특징적이었다. 당대의 명 피아니스트였던 조제프 젤리네크는 베토벤의 연주를 듣고 경탄했다고 한다. 그는 사람이 아닌 악마다. 그의 연주는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다. 게다가 즉흥 연주를 하는 그의 솜씨는 놀랍다고 했다. 리하노브스키 공작의 후원은 꽤 오래도록 이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