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적 현실주의자의 사랑학 - 김영현 『폭설』
『폭설』에 나타나는 사랑의 담론은 개인의 사랑이 역사적인 사랑으로 이어지는 지점, 곧 주인공 장형섭이 "멀고 낯선 곳"(24)에서 "사람들이 벅적거리는 시장바닥"(285)으로 내려오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소설 곳곳에 드러나는 장형섭의 '외로움', '슬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등의 감정들은 '짐승의 시간'에서 '인간의 냄새'를 찾으려는 작가의 소설 전략을 대변한다. 사랑은 장형섭의 이러한 감정들이 모여드는 소설적 핵심에 해당되는바, 그러므로 그에게 사랑은 현실 속에 뿌리내리기 위한 주체적인 과정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체적 과정으로서의 사랑의 형식은 무엇보다도 현실과의 구체적인 접점이 없으면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정연희를 향한 장형섭의 사랑이, 그리고 문미경에 대한 장형섭의 사랑이 실패하는 이유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정연희와 문미경은 장형섭의 의식 속에서 주관화된, 동일화된 타자일 뿐이다. 그들에 대한 기억이 과거의 상황에 종속되어 거기서 한치도 나아가지 못하듯, 그들은 장형섭에게 기억 속의 내면화된 존재들이며, 때문에 주체의 내면적 이미지 그 이상의 의미, 즉 타자성-외부성의 맥락을 지닐 수 없다.
사랑의 감정은 여전히 주체의 내면 속에 '흔적'으로 남아 있지만 그것은 주체의 의식(주관)을 벗어날 수 없는 뚜렷한 위상학적 한계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장형섭과 정연희, 장형섭과 문미경의 사랑은 장형섭이라는 주체의 의식 외부로는 나아갈 수 없는 '반쪽'의 사랑인 것이다. 그들과의 사랑이 장형섭의 외로움을 더욱 증폭시키는 까닭은 이러한 점과 상관되는데, 그의 사랑이 타자를 전제하는 사랑의 형식으로 변환되는 지점은 그가 타자성으로서의 사랑의 대상과 마주할 수 있을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다.
윤애림이라는 인물이 지닌 소설적 중요성은 이렇게 그녀에게 내포된 타자성의 맥락과 연관된다. 장형섭-윤애림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기억(과거)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현재적 삶을 규정하는 기억이 없으며, 그렇기에 그들 사이에는 기억과 관련된 피해의식이 자리할 수 없다. 사랑의 담론에서 기억은, 문미경에 대한 장형섭의 사랑에서 예시되는바, 사랑의 '현실성'을 저해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연희가 없었다면…… 형섭은 망설임 없이 미경의 나무로 날아갔을지 모른다"(219)라는 장형섭의 생각은 실상 정연희와 문미경이 주체의 의식으로 환원된 타자에 불과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에게 그녀들과의 이별은 그가 기억하는 세계와의 이별이 아닐 수 없다.
그래, 이젠 그들(성유다와 정연희 : 인용자)을 내 가슴속에서 떠나게 해주자. 이제 내가 사랑했던 연희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아. 길고긴 과거의 그림자일 뿐. 못다 한 사랑, 못다 이룬 약속일랑 이제 멀리멀리 날려 보내주자.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나듯 이제 그들 모두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자. 내 청춘의 한때에 마침표를 찍듯이……. 잘 가라, 사랑했던 이여. 슬픔도 그리움도 다 묻어버리고…… 가서 부디 행복해라. (222)
주체(장형섭)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대상(정연희)과의 이별은 주체 중심의 단일한 사유체계에 종속되어 있다. "내가 사랑했던 연희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체가 생각하는 순간, "가슴속"의 대상은 현실의 대상과 분리되고, 그에 따라 대상의 타자성은 완전히 소멸된다. 그러므로 이후에 벌어지는 장형섭과 정연희의 만남(정연희의 죽음으로 귀결되는)은 실제적으로는 췌언일 수밖에 없다. 그 만남은 차라리 기억(과거) 너머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장형섭의 실존적 결단을 보증하는 현실적 조건으로 의미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정연희의 죽음은 장형섭의 내면을 규정하던 '기억'의 죽음으로 이어지며, 그를 통해 그는 새로운 기억을 생성하는 주체로 다시 탄생하게 된다. 다소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이와 같은 과정에서, 우리는 기억이 항상-이미 (주체의) 욕망에 따른 재영토화의 영역이라는 들뢰즈-가타리의 말을 상기하게 된다. 요컨대 주체의 변화-탄생은 과거의 기억을 현실의 욕망으로 재영토화하는 주체의 의지(태도) 속에서만 가능하거니와, 생성의 주체가 자리하는 위상학적 공간이 '현실'일 수밖에 없는 것은 주체가 살아가는 세계가 '현실'이라는 점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폭설』이 장형섭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현실'로 불러냈음에도 여전히 '기억'의 세계를 떨쳐버리지는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정연희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장형섭'임을 밝히며, 문미경은 장형섭과의 하룻밤의 추억을 '기억한' 채 결혼한다. 장형섭이 '현실'로 들어설 때, 역설적으로 정연희와 문미경은 추억(기억=과거)이라는 이미지 속으로 갇혀버린다.
그러므로 장형섭이라는 주체의 변화는 원칙적으로 타자의 배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주체는 변했으되, 타자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체는 변했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은 실상 김영현 소설에 나타난 '사랑'의 현실적 의미망을 묻는 일과 다를 수 없다.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을 소설적 모티브로 하여 서사화되는 김영현 소설의 구조적 특징을 생각해 볼 때, 김영현 소설의 현실성은 그러한 과거의 기억이 현실과 만나는 자리, 그리고 그 기억의 주체가 현실(사랑)의 주체로 변환되는 지점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의미화 될 수 있을 것이다.
|
| 겨울이다. 눈이 내린다. 폭설이 내린다. 이소설을 읽는 내내,그렇게 내마음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다. 소설속의 이야기는 광주항쟁이 일어난 바로 직후인데도, 아주 먼 옛날이야기처럼 그렇게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그시절, 대,한,민,국,의 강철독재통치자 밑에서 발가벗겨지고 유린당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의지를 잃지 않았던 그 수많은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건 그만큼 나역시 세상의 때속에 물들어있다는 소리이기도 하겠다. 그래도, 읽을수 있어서 좋았다. 까마득하게라도, 읽을수 있어서, 잠시라도 기억하고 회자되어질수 있어서, 그시절의 순수한 감동을 느낄수 있어서, 그래서 좋았다. 언제나 강철이기만을 요구 되어졌던 그시절에도 놓칠수 없는 사랑을 읽을수 있어서 좋았다. 모든것의 시작과 끝에는 변할수 없는 작은 욕심,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생각할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해주어서 참으로 좋았다. 앞이 안보일정도의 폭설이 당장의 시야를 가로 막을 지라도 이 폭설이 끝나고 나면 다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빛을 줄수 있는 따뜻한 계절이 올수 있다는 희망을 엿볼수 있어서 좋았다. 읽기를 끝낸후에도 내눈은, 내 마음은 차가운 폭설로 한동안의 시려움을 감당해야겠지만, 믿는다. 곧 폭설은 그칠것이라고,, 폭설은 많은 이들에게 추위와 고통을 주겠지만 그 차가움이 그치면 얼어있던 자국들을 지워줄수 있는 또다른 푸근함이 내마음에, 많은 이들의 마음에 꽉 찰거라고..그래서 그치지 않은 폭설을 견뎌낼수 있는거라고.. |
|
위장 취업과 반독재 투쟁, 고문, 투옥과 강제 징집 등 80년대를 관통했던 아프고 슬픈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 자신의 체험 (학생운동으로 투옥, 강제징집된 바 있다)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을 이 이야기는 그래서 더 가슴을 저리게 한다. 깜깜한 절망의 시대에 저항하여 한줄기 빛이 되고자 했던 젊은이들의 고뇌와 방황, 고문의 비인간성, 시대의 요구와 개인의 사랑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 들을 작가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보여준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은 90년대를 풍미했던 그의 일련의 단편소설들을 떠오르게 한다. 후일담 문학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꾸고 난 듯, 오래전 흑백 사진 속의 내 모습을 본 듯, 작가가 보여주는 연민에 동감하며 가슴이 먹먹해져 있을 즈음, 우연히 내다본 창밖은 그새 내린 눈으로 순백의 세계로 변해 있었다. 군데군데 서있던 가로등 불빛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져 왔다. "이렇게 또 한 시대가 저물어 가는 구나. 잘가거라 우리의 시대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