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5 쪽 마지막 장을 덮고 네 권의 책에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떠올려 본다. 사건들은 2차 세계 대전과 현대를 넘나들며 거미줄처럼 복잡하고도 정교한 구조이다. 인물들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해커 출신의 프로그래머 랜디, 롤플레잉 게임으로 친구가 되었다 사업상의 동반자가 된 애비,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의 암호를 풀었던 랜디의 할아버지 로렌스, 로렌스와 동문수학한 독일의 암호연구자 루디, 영국의 암호연구자 튜닝, 그리고 2차 대전에 실전 현장에서 있었던 미국인 해병대원 샤프토(샤프토의 손녀는 랜디와 연인이 되어 이야기의 한 축이 된다), 독일인 함장 비쇼프, 일본의 건설기술자 고토 덴코, 그리고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 같은 역할을 하는 에녹 루트 - 그리고 맥아더, 레이건, 괴링 같은 실존 인물들이 카메오 같은 존재로 재미있게 등장한다.
이야기는 ‘금’이라는 재화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일본이 2차 대전 말기에 패전을 앞두고 모은 이 금은 필리핀의 어느 밀림의 지하에 묻혀 있는데, 그 저장고를 만든 사람이 일본인 고토 덴코이며, 2차 대전의 암호전에서 적에서 친구로 역할이 바뀌는 로렌스, 루디(로렌스와 루디의 경우는 친구에서 적으로, 다시 친구로), 샤프토, 비쇼프, 에녹 루트는 이 금을 전쟁의 상흔을 복구하고 전쟁이 발생하지 않게끔 하는데 쓰자는데 의기투합한다 그리고 그 금을 찾는 사람은 할아버지의 암호를 해독한 로렌스의 손자 랜디, 샤프토의 아들인 맥아더, 샤프터의 딸 에이미(랜디와 연인 사이), 그리고 이 소설의 간달프 에녹 루트이다.
그러나 ‘금’을 쫓는다고 해서 소설적의 주도적 인물들이 집착적이거나 탐욕적으로는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금’으로 연결된 퍼즐에 뛰어든 게이머 같은 느낌이다. 그들은 자신이 선택 아래서 열심히 즐기면서 일하고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 2차 대전 말기에 이 복잡한 퍼즐을 풀어낸 로렌스는 그 금이 미국이라는 국가체제에 노출되는 것을 막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시골에서 성장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시골 대학에서 수학 교수가 되는 것이다. 그 결혼의 결과로 태어난 랜디는 할아버지가 미국정부에 은폐한 금을 찾아내고 <타임>지와 <뉴스위크>지의 표지에 실리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에이미와 결혼해서 죽는 날까지 자기 앞가림이나 잘 하고 사는 것이었다. 금과 연결된 전쟁과 첩보전의 모험담뿐 아니라 이 소설은 국가 체제가 행하려는 정보의 통제에 대해 강한 비판과 냉소를 드러낸다. 작가 닐 스티븐슨은 또한 해커들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뛰어난 재능이 있지만 계산적이지는 못하며, 현실적인 욕망보다는 자유를 원하는 자들로 본다
이 소설은 대단히 정교하고, 또한 산만하며, 재미있고, 냉소적인 조롱들이 베어있지만 과학기술의 미래와 그것을 담당하는 자들의 대안적인 모습을 작가만의 스타일로 그리고 있다. 나로서는 수학과 암호체계, 그리고 하이테크놀로지에 대한 설명들은 그냥 넘어가면서 읽었다. 도저히 접근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작가의 박식함에 찬사를 보내야 할지 나의 무지함을 반성해야 할지 좀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해의 유무를 떠나서 이 세상에는 미지의 다양한 체계로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것 또한 큰 수확이다. 나의 범위가 확장되는 즐거움이 있었으니까. 작가 닐 스티븐슨은 그리스 신화에서 차용한 ‘메티스’라는 용어로 현대 과학 기술이 나아갈 바를, 폭력적인 전체 권력에 대항해야 할 바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당신은 아마 초등하교 시절에, 아테나가 투구를 쓰고 아이기스라는 이름의 방패를 들고 있으며, 전쟁과 지혜의 여신이자 공예-앞서 말한 대로 직조술과 같은-의 여신이라고 배웠을 겁니다. 괴상한 조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나 아레스가 전쟁의 신으로 알려져 있고 헤스티아가 가사 노동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체 뭣 때문에 이런 중복이 있는 걸까요? 하지만 번역을 하다 보면 많은 것이 뒤엉켜 버리는 법이지요. 소생과 같은 늙다리 괴짜와 관련되어 있는 지혜, 그리고 지금 내가 당신에게 전달하려 하는 것 같은 지혜를 그리스인들은 ‘디케dike'라고 불렀어요. 아테나의 전문 분야는 이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메티스‘의 여신이었어요. 메티스는 교활한 술책과 숙련을 가리키지요. 그리고 떠올려보면 이미 아테나의 탄생에 관한 한 가지 신화에서 어머니로 나왔던 이름이기도 해요. 흥미롭게도 메티스(인물이 아니라 속성으로서)는 젊은 시절의 제우스에게 약을 주어 크로노스가 삼킨 어린 신들을 모조리 토해내게 만들었던 신입니다. 그러니까 메티스는 거신 전쟁을 이끌어낸 장본인이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이제 아테나가 담당한다는 공예가 무엇과 관련된 것인지가 명확해집니다. 여기서의 공예란 메티스 적용 기술을 가리키는 겁니다. 우리가 요즘 쓰는 말 중에서 아테나가 담당하는 ’공예‘에 가장 가까운 말은 ’기술‘이지요.”
“우리는 모두 아레스 같은 놈들을 알아왔어요. 그리스인들의 마음속에 아레스로 알려진 내적 표상을 일으켰던 행동 패턴은 오늘날의 우리와도 너무나 흡사한 것들이에요. 테러리스트, 연쇄 살인범, 폭동, 학살, 군사적으로는 무능하면서 공격적이기만 한 허풍선이 독재자들. 그 모든 어리석음과 무능력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작자들은 세계의 큰 덩어리를 정복하고 지배하고 싶어 하지요. 세상이 저항하지 않는다면요”
“누가 그 작자들과 싸우겠어요? 때로는 또 다른 아레스 숭배자들일 수도 있지요. 이란과 이라크가 전쟁에 돌입했을 때 아무도 누가 이길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아레스 숭배자들이 전 세계를 움직이는 사태를 막으려면 누군가가 그들을 응징해야 합니다.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사실이에요. 문명은 아이기스를 요구한다는 것, 그리고 종국에 개자식들과 맞붙어 싸울 유일한 수단은 머리를 쓰는 것 뿐이예요. 속임수. ‘메티스’ 말이에요.” [인상깊은구절] “누가 그 작자들과 싸우겠어요? 때로는 또 다른 아레스 숭배자들일 수도 있지요. 이란과 이라크가 전쟁에 돌입했을 때 아무도 누가 이길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아레스 숭배자들이 전 세계를 움직이는 사태를 막으려면 누군가가 그들을 응징해야 합니다.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사실이에요. 문명은 아이기스를 요구한다는 것, 그리고 종국에 개자식들과 맞붙어 싸울 유일한 수단은 머리를 쓰는 것 뿐이예요. 속임수. ‘메티스’ 말이에요.”뉴스위크>타임> |
| 책을 읽으면서 작가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많다. 특히 외국 작가의 경우 무슨 상을 받았다느니 베스트셀러라느니 하는 출판사의 광고 문구에 혹하는 경우가 많지만 작가 개인의 신상에 대해서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에 읽은 많은 재미있는 책들의 저자 이름을 기억하는 경우는 연속적으로 그의 책을 읽거나 어떤 계기가 이루어지는 경우에 한하여 기억한다. 이 소설의 작가도 이전에 읽은 책에서 대단한 재미를 느꼈지만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뭐 나의 기억력이 나쁜 것도 하나의 원인이고, 외국 작가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만한 정보도 없었다. 이 책을 선택하고 저자의 약력을 보면서 놀랐다. 아바타의 개념을 사이버 세계에서 도입하여 전개하는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준 ‘스노우 크래시’의 작가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대단히 재미있게 읽었고 대단한 상상력을 보여준 작품으로 기억하기에 이 소설은 기대감을 가득 채워주었다. 처음 자세한 정보를 보지 않고 읽었다. 가끔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읽는 경우도 많다. 이야기가 진행함에 따라 기대한 것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약간은 당황하였다. 복잡한 전개와 1900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으로 암호와 2차 대전 당시의 사라진 황금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암호와 관련된 부분과 초기 컴퓨터에 대한 이야기는 관심은 있지만 자세한 부분으로 들어가면서 집중력이 분산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면서 다양한 등장인물과 그 시대에 대한 묘사에서 흥미로운 부분과 관심이 덜한 부분이 교차하여 진행되었다. 제2차 대전 당시의 암호와 유보트에 대한 이야기와 현재의 전자화폐를 기축으로 과거의 작업이 현재의 탐욕과 맞물려가면서 유머와 현실세계의 치열함이 곳곳에 묻어나온다. 기업을 약탈하는 사람들과 이를 방어하려는 사람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사람들. 과거의 기억에서 현재의 부를 쫒는 사람들. 과거의 광기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들.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현재와 연결되면서 이 많은 등장인물들이나 그 후손들이 한 곳에서 만나고 과거의 인간관계가 현재와 이어지면서 마지막에 해결된다. 생각하지 못한 결말이었다. 책을 모두 읽고 난 후 며칠이 지났지만 소설 속의 상황이나 인물들을 생각하면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이다. 그들의 개성에 강한 인상을 받은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이 처한 상황도. 전체적으로 만족은 하지만 이전에 느낀 그의 작품에서 받은 강렬함과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허나 앞으로도 이 작가의 책은 나의 독서 목록에 올라갈 것이고 즐겁게 기다릴 것이다. 한 가지 이해가지 않는 것은 에녹 루트의 존재이다. 나의 책읽기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놓쳤는지 모르지만 그는 유럽에서 죽지 않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