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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박한 영상이 브라운관을 타고 흐른다. 마치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 내 온몸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혹자들은 매스미디어의 발달이 사람의 삶과 죽음마저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노라고 말한다. 막연히 끔찍한 것이라고 전쟁을 생각했던 예전을 떠올려 본다면 이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은 영상 그 자체라기보다는 전쟁을 일으킨 인간의 불필요한 욕심이 아닐까 한다. 사실에 왜곡을 가한 영상이라면 물론 문제가 되겠지만 있는 그대로를 담아낸 영상은 오히려 전쟁의 끔찍함을 알리는 훌륭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한 번 방영되면 그만일 수도 있는 하지만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남을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카메라 앞에 서서 직접 멘트를 날리는 기자들과는 또 다른 것이 카메라기자이다. 그들은 카메라 한 대에 의존해 작업을 한다. 그다지 전문적인 지식을 소유하지 않은 이도 쉽게 포토샵 등의 프로그램을 활용해 사진에 변형을 가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한다. 카메라가 담아낸 영상이야말로 결코 진실을 배신하지 않는 법이라고. 처음 사진이 등장했을 때 예술로 이를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놓고 말이 많았던 걸로 안다. 현실을 고스란히 ‘모사’해대는 게 어찌 예술이냐는 반론이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 그와 같은 사진의 특성이 어쩌면 카메라 기자에게는 생명력과도 같이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현장을 누빈 이들의 기록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현장이라 하였을 때 가장 먼저 내가 떠올린 것은 바로 전쟁터였다. 종군기자의 이미지가 내 뇌리에 심히 박힌 탓이었던 것도 같다. 물론 이 책에는 일분일초를 다투는 전쟁터에 발을 디딘 이들의 기록도 담겨 있다. 좋은 영상을 얻겠다며 제 목숨까지도 기꺼이 희생할 각오를 하는 사람들의 우직함이 없었더라면 우린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토록 생생하게 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겪는 노고라 하는 게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인 듯하다. 충분히 몰두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겠고 그것이 글이 지닌 한계일지도 모르겠으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충분히 긴장치 못한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자의 여유이자 오만함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 아니, 적어도 나는 그들과 같은 어려움에 놓일 일이 전혀 없으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보니 완벽히 책에 동화되지 못한 듯도 하다. 어쨌건 가장 현장감 넘치는 글들은 전쟁의 현장을 누빈 이들로부터 나왔다. 전쟁 못지않게 인간으로서는 피해야 하는 게 바로 자연재해이다. 사실 전쟁은 힘들다고는 하나 인간이 의지를 가진다면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의 위대한 힘이 빚어낸 현상들은 예측은 가능할지 몰라도 완벽한 예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칠레와 아이티의 지진을 두고 아이티가 칠레 정도로만 견고한(?) 건물들을 보유했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물론 맞는 말이기는 한데, 그와 같은 사회 인프라의 구축은 하루아침에 얻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이티가 지닌 수백 년의 슬픈 역사를 고려한다면 더더욱. 다가와 사망한 아내와 아이의 시신만이라도 꺼내 달라 애원하는 사람들의 슬픈 눈빛을 직접 접하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순식간에 세상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의 애환을 카메라에 담아내야 한다는 것만큼 잔인한 일도 없을 듯하다. 카메라기자도 특종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언론의 습성을 온몸으로 체득한 이들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들 역시 사람이어서 때때로 카메라 뒤에 제 모습을 숨긴 채 남몰래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영상들을 오늘날 우린 마치 마트의 상품진열대에 진열된 물건들을 접하듯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또 잊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TV를 수놓은 영상의 완성도 안에 깃든 사람들의 땀과 눈물까지 오롯이 받아들이기에 우린 ‘소비’라는 단어에 너무도 심히 길들여져 왔다. 오래전 우리의 부모 이상 세대가 경험한 전쟁을 우린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다. 그 당시 아마도 이 땅엔 많은 외신들이 발을 디뎠을 것이고 그 시절을 살다간 사람들의 모습은 사진과 영상에 담겨져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 때 탄생한 화면들이 혹 오늘날 우리가 그렇듯 하나의 소비상품마냥 흘러지나가기만 했더라면 어땠을까? 조금은 불편한 마음이 독서를 마친 지금까지도 내 안에 감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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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 보도·문학·음악상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퓰리처상 수상작 가운데 전 세계인들을 충격에 빠뜨린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바로 케빈 카터의 ‘수단의 굶주린 소녀’다. 카터는 1994년 아프리카 기아를 촬영하기 위해 수단 남부로 간다. 그는 식량센터로 가기 위해 이동하던 중 힘이 다해 무릎을 굽히고 있는 앙상한 소녀를 보게 된다. 소녀의 뒤에는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살찐 독수리의 모습이 보인다. 카터는 기자 본연의 소명의식을 느끼고 이를 촬영한다. 그리고 이 사진이 신문에 기재되어 33살의 젊은 사진작가를 퓰리처상 수상자로 만든다. 이 사진은 지구촌 사람들에게 아프리카 기아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데 박차를 가하게 한다. 하지만 카터 본인은 수상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수상 3개월 후 자살을 선택한다. 소녀를 향해 셔터를 누르기보다 소녀를 먼저 구했어야 한다는 비난의 목소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처음 이 사진을 접했을 당시 반향을 일으킬 충격적인 장면이 담긴 사진을 얻고자 하는 기자의 욕심을 비난했다. 사실 카터는 촬영 후 소녀를 식량센터로 데리고 갔고 소녀는 살아났다. 카터의 사진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의 경각심을 일깨우지 못했을 것이고 반면 카터가 사진을 찍지 않았다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과연 카터는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이런 내 물음에 답을 찾은 것이 바로 ‘그 때 카메라가 내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라는 책이다. 이 책은 한 방송사 카메라 기자 55인의 취재 일지 같은 책이다. 이 책속의 기자들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인간의 기본권이 지켜지지 않는 비극 속에서,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은 한 없이 무력한 존재임을 느끼게 해주는 재해의 현장에서, 남극이나 금강산 등 일반인들은 경험하기 힘든 행운의 장소를 몸소 체험하며 그들이 느끼고 경험했던 일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12킬로그램이 넘는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2인치의 작은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에게 영상으로 이야기 한다.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를 강타한 쓰나미는 5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더운 날씨와 열악한 구조 장비 때문에 신원확인 조차 하지 못한 체 매장하는 시체를 보고 어떤 사람이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처절한 절규와 절망을 전달하는 카메라기자들에게 고통을 느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그 장면을 기록하고 전달할 뿐이다. 모든 기자가 그러하듯 객관적인 사실만을 전달해야 하는 중립적인 위치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책속에 ‘천일간의 사랑’은 루게릭으로 투병중인 부인과 그런 부인 곁을 지키는 남편의 이야기이다. 남편은 한 달 평균 2백만 원이 넘는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사장에서 철골 박는 작업을 하며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아내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 매일매일 편지를 쓴다는 남편. 이제 모든 근육이 굳어서 듣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내에게 오늘도 그는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남편의 변함없는 사랑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아내의 모습 속에서 기자는 그들의 사랑이 천일이고 사천일이고 이어지길 기도한다. 쓰나미의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가, 불치병에 걸린 부부의 모습을 찍는 기자가 영상 속에 자신의 슬픔과 눈물을 담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우리는 울지 못할 것이다. 어린아이가 울 때 옆에서 아무리 달래보아도 울음보가 터진 아이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한다. 이 때 아이를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달래는 사람이 더 크게 우는 것이다. 카메라 기자가 자신이 느끼는 슬픔을 영상 속에 담는다면 우리는 기자의 울음을 지켜보느라 정작 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자는 눈물이 흘러도 그냥 흘려보낼 뿐 눈물을 영상에 담지 않는다. 자신의 슬픔을 억누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사실을 마주해야만 진실성을 담은 작품이 만들어지고 이를 보는 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 아마 카터도 카메라에 굶주린 소녀의 모습을 담으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으리라. 하지만 철저하게 자신의 고통을 배제했기에 전 세계인들에게 세계시민으로서 작은 소녀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책임감, 이를 봉사와 기부라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한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기 전 TV를 볼 땐 화면에 비쳐지는 영상만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영상을 보면서도 이 영상을 찍고 있을 카메라 기자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내가 이 자리에 묶여 있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일들을 그들은 나대신 보고 듣고 이야기해준다. 책의 머리말에도 소개된 것처럼 마셜 맥루한은 그의 책 ‘미디어의 이해’에서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고 정의했다. 일상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우리는 자칫하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에게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기 쉽다. 카메라 기자들은 정중지와[井中之蛙] 같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전해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세상에는 아직도 전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고,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세계의 오지 그 곳에도 누군가 살고 있다고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낸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음에도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지구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것이고, 작으나마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것이다. 카메라 기자들의 눈물을 닦아줄 사람이 없는지 몰라도 그들의 눈을 통해 우리는 울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다. 우리는 카메라 기자를 통해 언제나 팔딱이는 의식(意識)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 이제는 아무도 ‘수단의 굶주린 소녀’를 찍은 카터를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카터가 자신의 눈물을 감추고 사람들에게 전달한 메시지를 통해 전 세계인들의 눈이, 도움의 손길이, 발걸음이 아프리카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도 세계 각국 방방곡곡에서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고 뛰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그들을 위해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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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그 누구보다 먼저 보고, 먼저 듣고, 먼저 보여주는, '세상 사람들의 눈'을 대신하고자, 그들은 총탄이 퍼붓는 전쟁터에도, 수많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인류 대재앙의 현장에도, 물길 거센 바다 속에도, 인질극이 벌어지는 현장에도, 불길이 치솟는 화마의 현장에도 가쁜 숨을 몰아시며 달려 나갑니다.
모두들 살아남기 위해 벗어나려 하는 그 현장에 12Kg 카메라를 어깨위에 짊어지고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그들. 우리는 그 현장에 갈 수는 없었지만, 카메라 뒤에 있는 그들을 볼 수는 없었지만, TV 화면을 통해 그들이 본 것을 볼 수 있었고, 그들이 느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본 역사의 현장에서 목숨을 읽은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과 비통함, 그리고 그 생명들의 살아가기위한 몸부림이 그들을, 그리고 우리를 눈물짓게 했습니다. 그들의 목숨 건 노력이 있었기에 또한 국제적 관심과 협력, 구호의 손길들이 그 현장에 늦기 전에 들어가 살아남은 자들에게 작은 희망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온 국민에게 짜릿한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기도 하고, 뼈아픈 패배의 눈물을 안겨주기도 하는 국제경기의 현장! 외교문제가 걸려 있어 취재가 제한되고 단 6초 동안의 촬영을 위한 치열한 취재경쟁과 수 시간의 뻗치기 끝에 얻어낸 짧지만 값진 취재, 정상회담과 6자회담의 현장! 또한 그렇게 힘들게 얻어낸 영상과 음성을 여러 단계에 거쳐 시간안에 송출해야하는 시간을 다투는 위성송출과정. 카메라 기자들의 피 말리는 노력과 땀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현장을 어떻게 듣고 볼 수 있었겠습니까?
단 몇 분짜리 뉴스 속에서, 또 때로는 몇 십 분간의 다큐멘터리 속의 화면에서 우리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봅니다. 그 짧은 시간동안 그 사람들을 다 알 수도, 다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직접 그 곳에 가서 경험하지 않은 TV 앞의 우리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때로는 역사의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 생명의 몸부림을 보게되고, 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오지의 원시부족들의 삶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나름의 당연히 살아가야 하는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뿐입니다. 짧은 몇 분, 몇 십 분동안 우리는 그들을 다르다고만 보지 않고, 그들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 들을 이해하고, 아픔을 격고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카미노', 그 길 위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카메라 기자가 만난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우리들 모두는 각자의 삶 속에서 실패와 좌절을 격기도하고, 일상의 삶 속에서 잃어버린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고뇌하게 됩니다. 결국 '카미노' 위에서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을 때, 버리고 나누는 것이 순례의 길, 우리네 인생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