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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을 읽고, 진중권을 읽으면서 홍세화를 읽게 되었다. 우리 시대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막연한 느낌에 대해 홍세화는 다분히 직설적인 어조로 설명하며 질타하고 있다. 이 땅에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자칭 지식인들의 위선적 모습이 역겨웠었다. 지식인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홍세화가 말하듯 사회의 진보와 개선을 위한 삶을 사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은 자신의 유리한 자리매김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 나는 강준만의 실명비판이 상당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실명비판이 "이문열"같은 사이비 지식인들에게는 독침과도 같겠지만 우리 사회의 건전한 발전과 미래상에는 유익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홍세화는 말한다. "나는 오늘 무언인가를 알기 위하여 읽고 있다. 젊은 시절에 많이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도 읽고 또 읽고 있다만, 그 앎을 통하여 나 지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지, 진정 한국 사회의 개선과 진보를 도모하려는 글쓰기를 위한 것인지 스스로 묻는다" 이러한 자기 검증은 아직도 어두운 사회현상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대한민국에 사는 지식인이라면 늘 가져야 하는 화두라고 생각한다.
물론 프랑스가 과연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미래상을 가지고 있는 나라인가에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 그의 책에서도 프랑스가 가지고 있는 장점에 대하여서는 자세히 조목조목 언급하고 있지만, 그러한 프랑스가 침략과 약탈을 통해 성장해 온 제국주의의 결과물이라는 과거단점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공동체로서의 우월성은 우리가 가슴 깊히 새겨볼 만 하다. 오로지 나 혼자 잘 살자고 아웅다웅 대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그 것이 얼마나 공허한 삶인지를 깨우쳐 주는 잣대로서의 프랑스 공화주의는 참으로 부러운 면이 아닐 수 없다.
홍세화는 연대를 이야기 한다. 또 극우헤게모니와 조선일보, 정형근과 전라도를 이야기 한다. 이 모든 화두들은 이 땅이 가지고 있는 절대절명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논외로 여겨져 왔고 이에 대해 이야기하면 무언가 트집잡히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발을 빼는 지식인들을 보아왔다. 그러나 홍세화는 대놓고 이러한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문혐의자가 국회의원인 나라...이처럼 부끄러운 자화상은 없다. 이재오와 김문수따위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별문제가 않되겠지만, 홍세화와 강준만 같은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음에 안도한다. 앵똘레랑스로 똘똘 뭉친 이 땅의 자화상이 얼마나 부끄러운 현실인지를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꼭 알게 되기를 바란다. 결론적으로 이 책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읽으며 나는 감동이 잔잔히 밀려옴을 느꼈다. 현실속에서 가장 썩어가고 있는 문제점들을 이 처럼 명확히 지적하고 나서는 지식인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도 소중하고 고맙다. 반성하지 않고 있는 조선일보를 향해, 또 권력속에서 집착하고 있는 극우주의자들을 향해 홍세화의 말들이 창이되고 칼이 되어 쳐들어 갈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고대한다. [인상깊은구절] 그리하여 개XX들은 다수였다. 이 다수는 몇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저사람처럼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의식을 적극적, 공격적으로 선언하는 자들, 둘은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저사람처럼 적극적,공격적으로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을 은근히 표명하면서 즐기는 자들, 셋은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차별에대해 모르거나 무관심하(는 척하)여 결과적으로 이에 동조하는 자들, 넷은 영남과 호남의 지역주의가 똑같이 나쁘다는 양비론을 펴는 사이비 비판의 기회주의자들, 다섯은 호남 차별을 비판하긴 하지만 차별의 공격성, 적극성에 비해 단호함이 떨어져 균형감각을 상실한 자들, 여섯은 호남 차별에 맞서 싸우지 않고 굴종하는 전라도 사람들. |
| 이책은 오방이 산 책이다..물론 [대여가능]이지..'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가르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의 저자 홍세화氏가 대한민국 귀족사회와 지식인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던진다. 너무나도 신랄하게 까발리지만 그 내용이 반박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기에 상대편의 대꾸는 언제나 '무응답'일수 밖에는 없으며, 그비판자는 언제나 '아웃사이더'가 될수 밖에는 없는 현실이다. 홍세화의 글은 프랑스와 한국의 상황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프랑스는 성공한 혁명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시민들은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알고 있고 그것을 실천하며, '관용'정신을 전하지만 '불관용'에 대해서는 단호한 '불관용'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혁명의 승리를 통해서 얻어낸 가장 크도 숭고한 선물이다.홍세화氏는 민주화운동으로 수배중에 프랑스로 망명하여 23년간 프랑스에서 생활했다.그의 부인은 프랑스에서 외국(?)노동자로 일하고 있으며, 그의 자녀들도 그곳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는 자녀들은 계속 그곳에서 대학원진학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는 '한겨레'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책은 초지일관 한국의 사회귀족들의 나아갈바를 제시하며, 조선일보와 극후헤게모니를 비난하고 자신의 의무는 다하지않고 지위만을 이용하려고 하는 지식인들의 행태를 질타한다. 프랑스에서의 20여년간의 외국노동자로서의 생활을 바탕으로 한 한국의 노동현실을 꼬집는 이야기는 그의 실제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더큰 감동과 공감을 가능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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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개의 리뷰를 다는 보지 못했어도 거의 다 읽어보았다. 아직은 혈기왕성한 대학생들의 문체가 많이 엿보인다. 그래서 나는 더욱 슬프다 홍세화는 자신이 악역을 맡은 자라고 했다. 하지만 대학가에서는 그의 말이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할 것 같다. 오히려 그는 대학가의 영웅이자 이 시대의 유일한 지식인으로 대변되고 있다. 그가 비판하는 사회귀족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봤다. 보수의 시각으로 진보를 말이다. 물론 이 리뷰를 읽는 사람, 즉 다른 55개의 리뷰를 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뒤떨어지는게 무서울 학생들이 많을 것 같다. 학생떄 아마 진보적 가치가 가장 우대받을 테니깐. 하지만 진보만이 이 시대의 모든 가치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수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지적 우월감을 더 돋보이려고, 그저 그런 이유만으로 진보의 길을 택하는 척 하면서도 자신의 삶은 자신이 그렇게도 비판하던 '사회귀족'의 길을 걷는 모습을 나는 수 없이도 많이, 반복적으로 경험했었다. 평택 시위를 하면서 카츄사를 지망하는 수 많은 대학생들처럼...
홍세화의 가치는 잘못된 가치이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바로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생각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서 별 다섯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을 갖기를 바란다.
내가 보기에는, 당신들에게 매우 슬픈 말처럼 들리겠지만, 홍세화가 비판하는 '사회귀족'들과 그 사이에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 왜냐하면 홍세화가 추구하는 진보는 모순일 수 밖에 없는 진보이기 떄문이다.
물론 내 글을 읽은 수 많은 사람들이 ks 마크 달고 책도 많이 쓴 홍세화 글을 너따위가 뭔데 좋다 나쁘다 할 수 있겠냐는 사람도 많겠지만, 혹시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미 사회귀족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모순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홍세화가 추구하던것이 바로 그런 사회귀족과 아닌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별 3개를 주었다. 충분히 읽어볼 가치는 읽는 책이다.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고. 하지만 옳다고 받아들이지는 말길 바란다. 그저 여러 사람들 중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존재하는구나 정도에서 끝나기를....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지금 이 순간에 몇십, 몇백만의 북한 동포들이 개같이 인권탄압을 받고 있다. 과연 몇십년전의 박정희 시대의 인권탄압이 우선일까 지금, 여러분이 컴퓨터 앞에서 한손에는 먹고 마실것을 들면서 여유롭게 웃고 떠들고 할 이 시점에도 고통받고 있는 북한 동포들이 우선일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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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건강에 해로운 책이다.
읽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으나, 심히 괴로웠다.
옳은 말들이지만, 가야할 길과 되돌려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걸 느끼게 해 주니까.
그리고 말했다시피 그런 것을 안다는 것은 아픈 것이다.
알면 알수록 아프다.
이성복 시인이 예전에 이렇게 말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홍세화는 이 시적인 문구를 책 하나로 요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병듦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일 것이다.
각박한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쉽게 적응하게 된다.
나와 우리는 대부분 비굴해 지고, 남보다 나 자신의 안위에 집중하게 된다.
남 신경 쓸 처지가 못 된다. 그러나..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 너무도 오래 걸렸다.
이런 건 고통스럽다.
세상이 어두워 진다.
조금이라도 공정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느껴진다.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좀더 공정한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고통스러워도 알아야 하고, 읽어야 하고, 경청해야 한다. [인상깊은구절] 비관적 현실을 의지로 낙관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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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거울을 바라보았을 때, 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도 낯설어 당혹스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사람의 눈은 타인의 행동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정작 자신의 모습과 행동에 대해서는 둔감할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거울을 보는 순간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이 보일 수도 있고, 또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어떤 결점이 생각한 이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거울 속의 모습은 어느 경우이던지 세상 사람들은 다 보고 있지만, 오히려 자기 혼자만 모르는 것이기가 쉽다. 아니면 그 모습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애써 피하고 싶었던 자신의 결점일 수도 있겠다. 물론 똑같이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도 사람에 따라 그에 대한 느낌은 다를 수가 있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거울을 들여다보듯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성찰(省察)할 필요를 절감한다.
‘사회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산다는 것’이라는 부제가 붙은 홍세화의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이라는 책을 거듭 읽으면서, 나는 그의 글 속에 비친 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했다. 나에게도 이미 살아오면서 붙은 이러저러한 ‘상징 자본’이 얻어졌기에 우리 주위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의 권익에 대한 관심을 말하면서도, 정작 행동이 따르지 않는 관념에 머무르지는 않았는지. 진정한 ‘연대’의 정신이란 무엇인지. 홍세화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마치 거울을 통해 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한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많은 경우 타인들의 약점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지적하며 비판하곤 하지만,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적당히 양비론(兩非論) 혹은 양시론(兩是論)으로, 마치 자신이 판관인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글들을 대중 매체를 통해서 숱하게 보았다. 이 사회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의 글이 때로는 주목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얼마 전 언론사 세무조사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부 인사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상징 자본’을 등에 업고 무지와 궤변으로 점철된 글을 대중매체에 기고하는 용기는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때문에 세상의 잘못된 점에 대해서 준열하게 꾸짖는 지식인들의 역할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대중의 눈에 비친 ‘지식인’은 현실에 한 발짝 비켜 서 있으면서, 전문적인 이론을 들먹이며 관념적인 수사(修辭)를 펼치는 모습으로 비춰지곤 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지식인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들은 존경받고 본받아야 할 존재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오늘날 ‘지식인’이라고 여겨지는 많은 인물들의 행태는 과연 수많은 대중들에 의해 존경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또한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이 사회 속에서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글을 시작하기로 하자.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무엇인가. 절제된 생활과 도덕적 성품, 그리고 후학(後學)들에게 모범이 될만한 언행 등등…. 이러한 요인들은 지식인이라면 갖춰야할 덕목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처럼 개인적인 품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진정 이 시대의 지식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인가
지식인이 사회 속에서 끼치는 영향력을 생각할 때, 지식인의 올바른 자세는 이러한 개인적인 품성을 논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가 구체적인 역사와 현실 속에서 호흡하고 있다면, 공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반드시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즉 앞에서 언급한 개인적인 요인 이외에도, 지식인이라면 보다 넓게 생각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녀야만 한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가 막중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공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끊임없이 자각하고, 이론과 실천을 병행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이 책의 저자인 홍세화를 진정한 지식인의 반열에 세우는 것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오랜 동안 타의에 의해 망명 생활을 했던 홍세화가 우리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란 책을 통해서 이다. 프랑스라는 ‘거울’을 통해 한국 사회의 요모조모를 세세히 조망하고 있는 그의 저서를 통해서, 나는 내가 미처 알고 있지 못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세 번째 저서인 이 책에 이르러서는 아직도 ‘중세성’을 극복하지 못한 한국 사회의 다양한 부문들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습속’을 용인하는 나의 무관심과 나태를 다시 한번 질책하였다.
늘 현실의 모습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의 글을 신문 속에서 찾아 읽는 것은 내가 누릴 수 있는 하나의 기쁨이다. 이처럼 책을 통해서 한동안 그의 생각과 함께 호흡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내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이 책은 서문과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서문은 23년 간의 이방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한국으로 ‘귀향’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다. 어쩌면 ‘떠나 있으면서 떠나지 않았던’ 이 기간 동안 그는 ‘고국’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키워왔을 것이다. 특히 이국에서 겪은 택시 운전사의 눈을 통해서 더더욱 한국 사회의 모순을 바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1부는 ‘쎄느강에서 한강까지’라는 제목으로 한국 사회의 ‘신분질서’와 비합리적인 측면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 프랑스의 학자인 부르디외의 ‘국가귀족’이란 표현을 빌어서 만든 ‘사회귀족’이라는 단어는 한국의 부도덕한 이른바 ‘사회지도층’을 가장 적절히 설명하고 있다. 저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2002년에 총리 청문회에서, 총리 후보자들이 보여주었던 일부 ‘사회지도층’의 행태는 실상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극우적 색채를 분명히 하고 있는 족벌언론과 지식인들의 기묘한 ‘동거’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2부에서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로 옮겨간다. 저자는 여기에서 지식인들조차 합리적인 면보다 ‘힘의 논리’에 경도되어 있는 현상을 발견한다.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에 무감각하기만 한 지식인들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한국의 지식인에게’ 현실을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아마도 프랑스에 있을 때 집필한 듯한 3부의 ‘빠리 통신’에서는 노동자에 대한 진정한 연대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신문사에 재직하고 있는 그가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사실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사회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법관들의 ‘판사조합’까지도 용인하는 프랑스 사회의 ‘합리성’에 대한 일말의 부러움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서 ‘진정한 보수 우익이 없다’는 글로 시작하는 4부는 ‘한국 사회의 진보를 찾아서’ 다양한 탐색을 하고 있다. 최근 몇 차례의 선거에서 볼 수 있듯이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에 대한 지지가 과거에 비하면 주목할 정도로 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미약하기만 한 한국 의 진보세력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는다. 관념과 의식 속에서만 당원으로 활동하는 진보정당의 현실을 지적하고, 진정한 진보란 사회의 소수자 입장에서 그들과 진심으로 연대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 5부는 ‘희망 찾기’라는 제목으로, 이 사회에서 ‘더불어 살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저자가 생활에서 느끼고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면모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청소년과 교육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진정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앵똘레랑스)까지도 ‘똘레랑스(관용)’을 내세우는 것은 진정한 ‘똘레랑스’의 정신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자가 힘주어 말하고 있듯이, ‘몰상식과 불의로 가득한 사회를 창조적이며 자유로운 구성원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로 가꾸기 위한 투쟁’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인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역할을 하고 있는 저자가 왜 스스로 ‘악역’이라고 칭하고 있는가. 앞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들이 제 역할에 충실치 않은 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원칙과 상식, 그리고 합리적인 것을 따르기보다 때로는 현실적인 권력과 힘의 논리를 재생산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지식인’들을 우리 주변에서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근래 들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툭하면 ‘색깔론’과 ‘지역감정’을 앞세워 자신과 다른 의견을 묵살하는 풍토 역시 여전히 사회 일각에서 통용되곤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저자가 자신의 역할을 가리켜 ‘악역’이라 칭하며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닌지.(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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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아웃사이더이자 몰락해버린 진보좌파 지식인으로서의 홍세화는 프랑스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한국에도 속하지 못하는 소외자로서 스스로를 악역을 맡았다고 이 책을 통해서 자조하고 있다. 극우수구세력이 건전보수를 자처하고 보수세력은 진보, 또는 좌파로 불리우며, 진정한 진보는 친북좌파, 용공분자로 매도당하는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수구언론을 비판하고 진정한 개혁과 사회연대를 주장하는 홍세화 같은 이는 때려 잡아야 할 친북세력, 급진 혁명주의자로 매도당할 수 밖에 없는, 그야말로 대한미국의 숙청 1순위의 악역일수 밖에 없는 셈이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다양한 모순과 갈등, 지배와 착취 구조를 때로는 차갑게 비판하고, 때로는 가슴깊이 슬퍼하고 있는 홍세화는 어쩌면 교육이나 언론에 의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강요되는 보편 타당성에 속할 수 없는 영원한 아웃사이더로서밖에 남을 수 없음을 슬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망명하여 근 20여년을 가까이 살았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택시운전사로 사회 곳곳을 누볐을, 어찌보면 제2의 조국일수 있는 프랑스에서 자식과 아내를 놔두고 결코 환영하지 않는, 그가 지칭하는 사회귀족들만의 나라인 모국 "대한민국"을 굳이 다시 돌아온 까닭은 무엇일까? 조국이란 단어에서 느낄 수 있는 아련한 사랑, 개구리 잡으며 뛰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 같이 투쟁하고 고문받던 청년시절의 고통 등등의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에 자석처럼 이끌려, 진보란 머리로만 아닌 두 팔과 두 발로 연대하여 이뤄내야 한다는 신념을 가슴에 품은 채 어쩔수 없이 소수이자 핍박받을 수 밖에 없는 진보주의자로 돌아온 그의 심정이 어땠으리라는 걸 이 책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기도 한다.
푸른 눈의 이방인인 박노자의 시선이 조금은 부담감과 거부감이 느껴지지만 - 이 책에 자주 나오는 똘레랑스(관용,용인)와 언똘레랑스(배척,차별). 박노자에 대해 느끼는 어쩔수 없는 거부감이 아마도 머리로는 똘레랑스지만 가슴으로는 언똘레랑스인 나의 한계이다. - 홍세화의 비판은 바로 우리들의 자아비판이기에 더욱더 마음 아프고 부조리한 현실에 화도 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더욱더 빈부격차를 부채질하고, 사회 모순을 가속화하는 이 암울한 시기에 그래도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건 비록 소수이고 인정받지 못하지만 뜨거운 가슴으로 냉철하게 비판하고 행동하는 이런 진보지식인들이 아직은 이 사회의 건전성의 최후의 보루로서 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리영희, 신영복, 박노자, 김항규, 홍세화, 백낙청, 한홍구, 기타 묵묵히 사회 변혁을 꿈꾸며 어디선가에서 열심히 학습하고 활동하고 있을 많은 지성인들의 외침이 끊이지 않는 한 아직은 희망이 있다. 수 많은 촛불들이 어두운 밤을 밝혔듯 큰 불은 작은 불씨에서 일어난다. 이런 불씨들의 외침이 더이상 소수자나 아웃사이더의 투정이 아닌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성의 목소리로 당당히 여기지는 날이 과연 언제 올까? |
| 내부에서 적을 만든다는 말도 있지만 비슷한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하나의 목적을 가진 조직원들끼리 자주 갈등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듭 강조하지만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세계를 가치관의 세계인양 일상적으로 인식하는 경향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일상이기 때문에 갈등은 쉽게 풀어지지 않고 속으로 곪는 경향마저 갖는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 사회의 전근대적인 요소들도 함께 작용하고 사람은 모두 감정의 동물이라는 점도 작용한다. 하지만 각자의 일상이 갖는 좁은 세계에 갇혀 가치관의 세계를 놓침으로써 세계관으로 보면 응당 동반자 관계에 있는 사람까지 적대적인 관계로 만든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요컨대 일상의 덫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선 자기 성찰이 일상적으로 필요하고 토론과 학습 또한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p.278 ---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홍세화는 스스로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최고의 상징 자본을 획득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가 '악역'을 맡은 자라고 자칭한 것은 뻔뻔한 자들의 힘의 논리가 판치는 한국 사회에서 그 뻔뻔한 자들에 합류하지 않기 위한 전략이다. 아웃사이더로서 살아가는 것은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라는 금언의 실천일 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감히 남의 인간적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 자신의 인간적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보이지 않는 연대를 위해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사람이 되라." 교육이 희망인가? 이성으로 비관하자면 희망일리 없다. 교육이 희망이어야 하는가? 그러나 의지로 낙관하면 교육은 희망이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몰상식이 판치는 구체제로서 교육계에 발 딛고 있는 교사가 아웃사이더로서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하고 악역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
| 희망을 가지라 말하기엔 요즘의 세상은 너무도 멀리 온 것 같다. 그것도 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리고,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모른 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어디론가 가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아마도 저자는 더욱 더 얘기하고자 하는 듯 하다. 사실 이책에서는 귀족사회에 속한 우리 사회 지식인들과 지도자들을 고발하고 우리 사회의 새로운 희망을 찾고자 하고 있다. 물론 전작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보다는 개인적으로 그리 흥미롭지 않은 내용들이였지만, 우리 사회 아웃사이더로서의 냉철함은 아직 남아 있는 듯하다. 사실 최근들어 우리 사회의 유명한 비평가들의 글들을 이젠 나르시즘에 푹 빠져 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전엔 악역을 자청하며 무섭디 무서운 칼날을 휘둘어대던 그들의 저의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책을 손에 들고 있는 내내 홍세화라는 작가에 대한 '주류화' 부분을 찾고자 노력했다.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나의 의심병이 도진게다. 결론은 모두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웃사이더로 남기를 희망하고, 그곳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엿보이는 듯해 기분이 한결나아진다. 특히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지난 수십년간 휘둘려 온 "착한보수"의 실체를 보여주고 착한놈과 나쁜놈으로 구분지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해 온 귀족사회를 고발하였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몰론 논박하고 끝나버린 듯한 느낌은 그리 개운치 않았지만, 뭔가 그들에 대한 구체적 대응책이 제시되지 못한 점엔 마이너스를 주었다. 앞으로도 개인적으로 홍세화 작가의 아웃사이더로서의 역할을 기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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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느껴지던 이방인의 비애는 이방인의 숙명으로 바껴져 있다. 우리 사회를 비판적으로 관찰하려는 저자는 이방인의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방인의 눈은 우리의 치부를 건드리며 우리의 심기를 어지럽힌다. 그러나 그 치부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공고하게 내재된 왜곡된 현실이다. 저자가 비판하려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란 부제가 암시하듯 사회귀족의 나라로서 권리만 있을뿐 의무는 지니지 않는 특권층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이다. 민주 공화국이면서 공화국의 이념은 실현하지 못하는 공화국.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면서 저자가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현실이다. 공화국의 이상인 연대와 그리고 공공성의 확대야말로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는 길이다.
공화국의 이상은 상식 뿐만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그러나 보수를 자처하는 극우 세력과 보수 언론은 그러한 상식조차 위반하고 있다. 친일과 반공 그리고 국가주의에 대한 맹신을 추종하는 세력에 대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행동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똘레랑스를 지니되 불건전한 앵똘레랑스에 대해서는 앵똘레랑스로 대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가 언급하는 조선일보의 왜곡과 거기에 대한 지적과 비판은 이러한 정신에 기인한다. 건전한 이성을 믿는 계몽주의자의 눈으로 그리고 공화주의자의 눈으로 희망을 위해. Open your eyes! [인상깊은구절]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
| 고등학교때 도덕선생님 이성하 선생님 며칠전에 뵈었다. 대영박물관이 부산에 온 . 그래서 보러 갔었다. 거기서 뵈었다. 난. 인사드렸다.( 갈등이 정말 잠시였다. 비록 그분은 날 기억 못하는듯 하엿으나) 이런 기억이 있다. 그분이 심하게 우리에게 화를 냈다. 가볍다고 우리가 너무 가벼워서 나약해보인다고. 문제집만 풀며 대학만이 꿈의 성취장인 듯 생각하는 지금의 너희들이 너무 싫다고. .. 난 선생님이 왜 화를 내는지 어렴풋했다. 지금도 확실친 않지만. 아마 선생님도 . 일요일 아침 마이크 앞에서 수능대비 문제집을 풀어줄 요량으로 도덕선생님이 된 것은 아니니라. 사상적 반신불수.12년 의무 교육요량으로 받아온 나는 전혀 사회적인 인물이지 않았다.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만으로 박정희를 군인출신으로 전두환을 제2의 군인으로만 시대순의 암기만을 했을 뿐 그시대의 모습의 겉도 햝지 못한채 국사를 마쳤다. 국사이면서 한국을 모르고서 수능을 쳤다. 그 교육과정에 순종적인 우리를 그날 TV에 나온 연예인의 옷차림에 수다의 열을 올리던 우리가 한심해보인것이리라. -선생님이 바라던 사항은. 전혀 교과서에 없었던 것이다. ..국가주의 교육의 마름 노릇에 충실한 교장이 학교현장에는 봉건영주처럼 군림하면서 교사들을 관리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자식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고, 물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교직을 가볍게 여기는 사회 풍조에 아이들까지 물들어 있다. 모로보나 교사들에게 자조와 냉소에 빠지오록 만드는 사회환경이다... 국가 시장주의와 구성체들의 3박자가 맞아 떨어진 학교현장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존배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내팽겨쳐져 있다. (나 자신이 그 증인이기도 하다.) 장차 교사가 된다는 사명감 아닌 중압감에 짓눌리는 당신. 그리고 나. 교실에서 나는 /당신은 어찌해야하는 것인가. 이성으로 비판하더라고 의지로 낙관하라는 세화님의 말에 조금은 답을 찾아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