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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때에 맞춰 익히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배우고 때에 맞춰 익히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내용보기
이 책, 여러모로 반갑고 기쁜, 그런 책이다. 먼저 "히스토리아 대논쟁"이라는 거창한 제목에 걸맞는 논쟁의 대담함과 스케일이다.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논점을 놓치지 않는 논의의 전개는 전적으로 오랜 세월을 현장에서 살아온 지은이의 경력이 적잖이 반영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 1권인 이 책,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격돌을 하고 '사르트르'와 '
"배우고 때에 맞춰 익히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내용보기
 이 책, 여러모로 반갑고 기쁜, 그런 책이다. 먼저 "히스토리아 대논쟁"이라는 거창한 제목에 걸맞는 논쟁의 대담함과 스케일이다.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논점을 놓치지 않는 논의의 전개는 전적으로 오랜 세월을 현장에서 살아온 지은이의 경력이 적잖이 반영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 1권인 이 책, '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가 격돌을 하고 '사르트르''리오타르'가 맞붙는다. 
 이러한 맞붙임만으로도 '어허, 대단한데'라고 생각할 수 있을 터인데 그들의 실제 사상과 논지들이 핵심을 잘 갈무리하며 펼쳐진다. 논쟁의 마무리에는 두 논자의 실제 저작물이 가려뽑아져 소개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이도 이 책을 만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얼마만큼 이 논쟁들을 즐길 수 있느냐는 사전지식의 유무에 따라 조금은 좌우되겠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논지들을 얇은 - 두 논쟁에 겨우 200여쪽이니 한 논쟁당 100여쪽이라는 이야기이다.- 쪽 수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재미나게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이 갖는 큰 장점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비록 시리즈 1차분에 해당하는 3권의 책이 나왔지만 이 책들만으로도 감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한 개인이 각각의 논쟁들에 대하여 속속들이 깨우치고 이해하고 있어야만 가능한 중간조정자, '박쌤'의 역할을 지은이는 그 명성에 걸맞게 잘 해내고 있다. 그러니 얼치기로 알던 이야기일지라도 우리들은 그냥 부담없이 따라나서면 되는 것이다. 이번 논쟁의 상대자가 '소크라테스'이든, '사르트르'이든 말이다. 자, 그럼 어설프게나마 이번에 다시 만난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3권이 시리즈중 이 책을 먼저 집어든 계기는 '사르트르'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나는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에 만났었고 귀를 기울였고 그의 사상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지식인은 '영원한 자기 비판이 있어야 한다', '혜택받지 못한 계층의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또한 철저하게 연대를 맺어야 한다' ('원문읽기', 사르트르,[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옮김) (196) 는 그의 말에 감명 혹은 소명의식을 부여받았다고나 할까? 1980년대는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하지 않으면 부끄러워지던.... 
 그런데 그 시대를 가로질러, 사람들을, 우리들을 지식인이라 여기도록 만들었던 그 모든 환경들은 이제 어떻게 변하였나? 이제 그들은, 우리는, 나는, '이제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니다. 그는 보편적 주체와 동일시될 필요도 없고, 창조라는 책임을 지기 위해서 인간 공동체에 대해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원문읽기',리오타르,[지식인의 종언]에서, 옮김) (201) 어, 그래..사실 나는 리오타르라는 이름을 이 책에서 처음 듣는다. 
 하지만 뭐, 어때. 내가 궁금한 것은 '지식인'이라는 존재가 지금, 이 곳에서 어떻게 변해가고, 달라지고, 나아가고 있는지이지, 어떤 말을 어떤 이가 했는지를 외우는 것이 아니기에 스스럼 없이 이 책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부딪혔다. 마치 20여년전의 그날처럼….
 그리고 이 책의 장점이 또 하나 나타나는데 논쟁의 고비에 "지식 넓히기"라는 별도의 심화 학습의 터가 펼쳐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서 진행된 논쟁들을 정리도 하고 그 논쟁의 역사적 배경까지 살펴보게 된다. 어떻게? 지은이의 자상한 설명으로. 하여 '덕'과 관련한 두 철인의 논쟁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한 방에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소트라테스의 윤리관은 철학적인 의미에서 이중적인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덕(德)을 곧 지(知)로 바라본 소크라테스의 관점은 그 이전까지 그리스 철학을 지배하던 자연철학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지식 넓히기 1"에서 ) (37)
 윤리학의 측면에서 그(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의 역할과 함께 실천 및 습관화의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모든 악은 무지에서 나오고 모든 덕은 참된 앎에서 나온다고 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관점을 수정하고, 현실 속에서 참다운 존재를 찾고자 도덕의 의미를 실천적인 측면으로 확장했다. ( "지식 넓히기 1"에서 ) (40)
 지행합일(知行合一)설로 요약되곤 하는 소크라테스의 윤리학에서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행하려는 의지임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는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더 크다. 그리하여 1편에 해당하는 '안다는 것과 행한 다는 것의 구분이냐 아니냐'는 논쟁은 2편의 지식인 논쟁인, '이제 지식인이라는 존재가 그 뜻 그대로 존재하느냐'는 물음과, 언뜻 다른 이야기같지만 본질적으로 비슷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마도 이 부분이 지은이가 이 두가지 논쟁을 한 권에 모아놓은 까닭이리라. 그리고 내가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 옳고 그름을 떠나, 지은이가 이 시리즈물을 펴내며 희망한 '자신의 머리와 가슴으로 문제를 의식하고 분석하며 해결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독자적 사고를 하는' ( "책 머리에"에서 ) (5) 본보기일 것이다. 그래서 이만큼 온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앞으로도 한 걸음씩 더 나아갈테니까….
 나 역시 예전 같으면 단순히 그래, 그래서 누구 말이 옳다는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이 책을 보았겠지만 이제는 조금은 달라져서 그래, 이 부분은 이러한 까닭으로 타당성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흔한 양비론으로 빠져드는 것은 당연히 경계하며 논쟁을 따라가는 것이다. 리오타르가 지적한 '거대이론'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르트르의 견해에 전반적으로, 아직도 동의한다. 그리고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도덕은 그 자체, '앎'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의지'에도 고개를 끄덕이기에 나는 오늘밤도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존재를 믿고 따라간다. 그래야 사람사는 재미가 있을 터이니....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고 실천을 이끄는 나침반일 뿐입니다. 현실과 실천에서 이론의 한계가 드러났다고 해서 이론이 무효라고 선언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요? 오히려 이론은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검증받고, 어떤 경우에는 부분적으로 수정을 해나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 사르트르 ) (160)

2009.2.11. 깊은 밤, 다시 듣는 사르트르의 이야기,

                  아직도 나를 두근거리게 합니다.

들풀처럼

*2009-036-02-08

 

 

*논어(論語)의 學而篇(학이편)

* 學而第一(학이제일) -

"子曰 學而時習之不亦說乎아.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공자에게 있어서의 학(學)이란 "무지로부터의 탈출"이며

"미지의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이다.

 

공자의 일생을 통해 추구된 학(學)의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학문"이 아닌,

"禮(예)·樂(악)·射(사)·御(어)·書(서)·數(수)"로

통칭되는 육예(六藝)를 말한다.

 

그것은 문무의 구분이 전혀 없는 매우 실용적인 개념이다.

 

"習(습)"은 學과 병치되는 독립된 개념이다.

"習"(익힌다)이라는 것은, 學이 미지의 세계로의 던짐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실천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실천은 반드시 "때"(時)를 갖는다는 것이다.

 

문무가 통합된 六藝(육예)를 익히는 과정이란 반드시 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린 아이가 書(서)·數(수)를 할 수는 있으나 射(사)·御(어)를 할 수는 없다. 장년이 되어도 여름의 맑은 날씨에 말달리고 활을 쏠 수는 있으나 추운 겨울날씨에 빙판에서 말달리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배움의 익힘이란 내 몸의 모든 상태에 따라 그 익힘의 형태가 달라질 것이요(身中時), 또 계절의 형태에 따라(年中時), 또 하루 중에서 아침,점심,저녁에 따라(日中時) 익힘이 달라질 것이다. 때를 잘못 타서 배우고 익히면 그것이 병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평생을 통해 때를 맞추어 끊임없이 정진하여 삶의 기쁨을 만끽했다는 뜻이다. "不亦說乎(불역열호)"라 한 구문에서 "亦"의 뜻도, 딴 즐거움도 있는데 이것 "또한" 즐겁다는 식으로 새기면 안된다. 여기서 "亦"이란 자기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남에게 전달하고 남의 동의를 얻고자 하는 강조의 뜻으로 새겨야 한다. 그것은 상대적인 "亦"이 아니라 기쁨의 절대적 경지를 구가하는 것이다.

[출처] 논어(論語)의 學而篇(학이편) : "도올 김용옥" 해설을 옮겨오다 !

w******e 2009.02.12.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달콤 쌉싸래한 도덕과 지식인에 대한 대논쟁
"달콤 쌉싸래한 도덕과 지식인에 대한 대논쟁" 내용보기
이 책 만만치 않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거장 두 사람이 좌석한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서로의 이론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은 ‘안다는 것’과 ‘실천한다는 것’에 대한 대논쟁을 벌인다. 두 번째 논쟁의 주인공은 샤르트르와 리오타르이다. 이들은 지식인이란 무엇이며 지식인은 보편적이 주체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를 놓고 논쟁한다. 고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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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만만치 않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거장 두 사람이 좌석한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서로의 이론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은 ‘안다는 것’과 ‘실천한다는 것’에 대한 대논쟁을 벌인다. 두 번째 논쟁의 주인공은 샤르트르와 리오타르이다. 이들은 지식인이란 무엇이며 지식인은 보편적이 주체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를 놓고 논쟁한다. 고대철학의 대표주자 두 사람과 현대철학의 대표주자 두 사람을 오늘 이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지식’과 ‘지식인’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 위해서이다.

 

소크라테스 철학의 기본은 지행합일이다. 지식과 행동,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지 않았다. 어떤 행위를 할 때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확실하고도 분명한 인식을 갖지 않으면 그 행위를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지식과 실천을 하나로 본 것이다. 따라서 알고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의주의자다. ‘의지’가 지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본다. 덕은 단순히 지식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위를 실천하고자 하는 “선의지”. 즉 실천의지의 중요성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안다는 것이 행동하는 것이라고 본 소크라테스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있다. 혹자들은 소크라테스철학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이 부분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상당한 민감하게 반응한다.

 

소크라테스가 이처럼 민감한 이유를 나는 그들이 국가에 대한 법을 이해는 차원에서 해석해봤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입장일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에 맞게 죽음을 맞는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그의 이론과 산파술이 젊은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며 ‘신에 대한 불경죄’로 고발당한다. 그는 “사람들이 진정한 덕을 갖고 있지 않은데도 가지고 있는 양 착각하는데 단지 지혜와 진리, 영혼의 향상을 위해 힘쓰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덕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진정으로 이를 안다는 것은 이를 실행할 의지도 함께 갖고 있을 때.” 라며 “내가 동의한 그 법에 따라 이 국가에서 한평생을 살아왔기에 중요한 순간에도 이를 어길 수 없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아들인다.

 

그런가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관계가 깊다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며 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에는 간극이 존재하는데 이를 메울 수 있는 것은 ‘선의지’라고 말한다. 선의지는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실행의 문제에서 어떻게 해야 덕이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잠깐,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을 말하기에 앞서 죽음의 배경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그가 태어났던 BC 384년은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지배했던 시기로 당시 그리스 세계를 지배했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왕 때이다. 필리포스왕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신의 어린 아들인 알렉산드로스의 개인교육을 담당하게 한다. 아테네시민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아테네를 점령하면서 자유를 박탈당했다고 생각했으며 알렉산드로스가 죽었을 때 그와 각별한 사이였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에 대한 불경죄’로 고소한다. 소크라테스의 사례를 보았을 때 사형을 예상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처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이 철학에 두 번씩이나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한다는 이유를 들며 도주한다. 그의 철학대로 얘기하자면 ‘선의지’가 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에 대한 간극을 메우지 못한 격이 되는 것인가? 나의 얄팍한 지식으로는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것이 바로 안다는 것이 덕이라고 생각했던 소크라테스와 덕은 별도의 선의자가 필요하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라고 말한다면 극히 단말마적일진 모르겠으나 난 그렇게 이해했다.

 

그렇다면 지식인에 대한 논쟁을 벌인 ‘사르트르’와 ‘리오타르’는 어떠한가?

 

사르트르(1905~1980)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20세기 사상가이다. 문학가로서 일생 동안 기존의 지배계급을 비판하고 고발하면서 참된 지식인이 되고자 노력했으며 지식인은 고독한 민주주의의 옹호자로서 실천하는 지식인상을 주장한다. 진정한 실존의 문제는 사회와의 교감에서 기초해야하며 나가서는 실천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일하지 않고 사회와 민중을 위해 일하는 것. 이것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인 것이다.

 

리오타르(1924~1998)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선두주자로 앞서 얘기한 사르트르가 지식인을 선구자로 봤다면 리오타르는 지식인의 종언을 주장하며 다양한 사회에서 하나의 이론적 틀로 해명하려는 기존의 거대이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보이면서 지식인의 역할은 이제 대중이 스스로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탈중심적 사고, 탈이성적 사고를 가장 큰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는 일률적인 것인 거부하고 다양성을 주장했으며, 칸트가 ‘순수이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했던 이념의 실현을 불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 정치철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어떤 이는 철학의 새 천년이 1968년 프랑스 ‘68혁명’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정재영’쌤은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역사의 한 시대가 마감되었다는 사인’을 즉 포스트모더니티의 새 시대의 징후를 1968년 파리의 낭테르대학 운동장에서 찾은 것이다.

‘68혁명’은 이전의 사회운동 또는 사회 혁명과 달리 그 주장이 선명하지 않다. 시위에 등장한 구호가 어지럽고 산만하다. ‘우리는 그 무엇도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점거한다.’, ‘지루함은 반혁명이다.’, ‘상상력에 권력을’, ‘행복은 살 수 없다. 그것을 훔쳐라.’,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행복이야말로 새로운 이념이다.’ 이것이 ‘68 시위에 등장했던 구호들이다. 시위대는 낡는 세계에 대한 ’이의 제기‘의 표시로 돌멩이를 던졌다는 것이다. 이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바로 오늘 이 토론장에 나타난 리오타르이다.

 

이들의 대논쟁에 휩쓸리면서 나의 얇은 귀는 더욱 얇아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의지가 옳은 것이라 생각했으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개인주의적이고 얄팍한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많은 배울 점을 시사하고 있으며, 사르트르가 말한 지식인에 대한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으나 리오타르의 주장 또한 우리 스스로의 힘과 내가 든 돌멩이라는 좀 더 실천적 생각에 적극성을 주었다는 점에서 이번 대논쟁은 나의 생각을 뒤집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철학은 씹을수록 그 맛이 달콤 쌉싸래하여 나의 오감을 자극한다.

b****h 2009.02.1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이 시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이 시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내용보기
정기 뉴스 외 시사 토론을 포함해 무겁고 때론 어두운 사회 주요 이슈를 깊이 있게 다룬 프로그램을 찾아서 보지는 않았다. 일상 속 호기심이나 문제를 의식하는 정도? 건설적인 논쟁의 중요성을 알지만 격한 의견 충돌이 잦은 논쟁은 가슴을 더 답답하게 하고 자칫 화나게 만들어 피하게 된다.    끔찍한 사건들과 이념의 갈등들로 가득 채운 요즘의 뉴스들에 방송을 보기 꺼려지면서
"이 시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내용보기
정기 뉴스 외 시사 토론을 포함해 무겁고 때론 어두운 사회 주요 이슈를 깊이 있게 다룬 프로그램을 찾아서 보지는 않았다. 일상 속 호기심이나 문제를 의식하는 정도? 건설적인 논쟁의 중요성을 알지만 격한 의견 충돌이 잦은 논쟁은 가슴을 더 답답하게 하고 자칫 화나게 만들어 피하게 된다.

 

 끔찍한 사건들과 이념의 갈등들로 가득 채운 요즘의 뉴스들에 방송을 보기 꺼려지면서도 이리 편안하게 사회 이슈에 나몰라라 살면 안된다는 생각이 번뜩 들어 의식적으로 찾아 읽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도덕과 지식인에 대해 다룬 <히스토리아 대논쟁 1>에 먼저 관심을 두고 읽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쟁. 도덕과 관한 그들의 생각은 같으면서도 달랐다. 아는 것을 행하는 자만이 진정 아는 것이고 그것이 도덕이라는 소크라테스, 아는 것과 실천은 별개이며 그 둘을 잇는 것이 바로 의지-선의지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자 박홍순씨가 토론회 사회자로 두 철학자가 도덕에 대한 생각을 조곤조곤 전하고 있다. 때론 격하게 서로의 의견에 반박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에 손을 들며 시작한 책읽기.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니 소크라테스의 의견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서양을 대표하는 대 철학자의 주장을 들어보면 어느 누구의 말도 틀리지 않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분명 다르지만 귀기울여 보면 우리가 아는 것이 과연 진정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책의 두 번째 꼭지에선 지식인이란 주제로 사르트르와 리오타르가 논쟁을 벌인다. 이 책을 통해 리오타르란 철할자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평안할 날 없는 요즘 정치 경제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앞날이 걱정된다. 사르트르와 리오타르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지식인이란 누구인지, 과연 지금도 진정한 지식인이 존재하는 것인지, 그들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누가 그 역할을 해야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그리 가볍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은 책의 내용과 지루하지 않은 구성에 쉽게 읽혔지만 읽는 동안 도덕과 지식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좋은 기회가 되었다. 

s***i 2009.02.0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