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두운 운명을 예고하는 듯한 두터운 구름과 같은 오케스트레이션이 멈추면, 구름을 뚫고 올라간 그 누군가의 시선, 차가운 달과 별의 세계를 홀로 목격하는 자의 구슬픈 음성이 들려 옵니다(음반 표지그림이 참 적절하죠). 누구도 가밟은 적이 없는 세계에 다다른 자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경이와 고독. 협주곡 4번 1악장. 오케스트라가 잠시 침묵하고 그뤼미오의 바이올린이 첫 음계를 밟는 순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우주류" 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아마도 깊이와 초연함이라는 측면 때문일 것입니다. 품위가 느껴지면서도 가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슬퍼 보이면서도 감상적이지 않은, 격렬한 무브먼트에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우주를 연상시키는 깊이 혹은 자연스러움. 그뤼미오는 이 곡이 요구하는 강렬한 센티멘털함을 충분히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세계를 보여 줍니다. 오케스트레이션의 폭풍에 휘말리지 않고, 그 폭풍 위에 고고히 올라앉은 독주 바이올린의 초현실적인 아름다움. 그 오묘한 기품은 그뤼미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비록 바이올린 분야는 익숙치 않기 때문에 테크닉적인 면에 대해서는 그다지 왈가왈부 할 수 없겠지만, 어떤 연주가 마음을 움직이는 연주인가 하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비르투오조적인 자신감과 흔들림 없는 당당함을 요구하는 5번 협주곡에서라면, 그야말로 "완벽"한 테크니션인 하이페츠나 송곳같으면서도 뜨거운 귀기를 내뿜는 정겨와가 그뤼미오를 능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4번 협주곡의 서정성은 그뤼미오의 스타일이 단연 압도적입니다. 좀 낯설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이 음반의 구입을 망설이게 했었지만, 굳이 이름값을 따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오케스트라의 서포트 역시 좋았습니다. 로젠탈의 지휘 역시 그뤼미오의 스타일처럼 보다 서정적이고 드라마틱한 곡이 더 어울리는 듯, 5번 협주곡 보다는 4번이 더욱 인상적이네요. 60년대 녹음이다보니 팀파니를 비롯한 저음부가 좀 뭉치는 감이 있고, 음의 선명도도 좋은 편은 아니지만, 리마스터링을 거쳐서인지 풍부하고 뜨듯한 음질 역시 마음에 듭니다. (그러고보니 음질 역시 5번보다 4번에 유리한 상태군요...이런 ^^;) 압도적인 4번 때문에 같이 커플링된 5번 협주곡이 상대적으로 빛바랜 감은 있습니다만, 5번 또한 최고는 아니어도 그뤼미오 스타일로 풀어낸 좋은 연주입니다. 거기다가 보너스라 할 수 있는 [발라드와 폴로네이즈] 는 구하기 힘든 레퍼토리인데다가, 따뜻한 기품과 흐뭇함이 가득한 연주라 무척 알찬 보너스라 할 수 있겠습니다. 최고의 4번과 괜찮은 5번, 그리고 사랑스러운 보너스를 담은 음반을 저렴한 가격에 구한다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죠. ^^ 4번 협주곡은 멜로디도 무척 아름다워서 초심자분들께도 권할만 하구요. 엘로퀸스 시리즈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될 명반 중 하나로 강력히 추천합니다. Fortu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