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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원(屈原) 어부사(漁父詞) 지식인중 진정 현상을 이해하고, 진리를 찾아 대중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지 의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굴원의 <어부사漁夫辭>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된다. 굴원: B.C. 343 ~ B.C. 290 추정. 성은 굴(屈)이고, 자(字)는 원(原). 전국(戰國) 시대 초(楚)나라 선왕(宣王) 27년에 왕족으로 태어났고 죽은 해는 정확하지 않지만 음모에 의해 귀양을 가다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음력5월5일 단오절의 유래가 됨. 학식이 높을 뿐만 아니라 수완 좋은 정치가로 두각을 보였다. <어부사>는 굴원이 버림받고 전전하던 시기에 지어진 글이다. 혼란했던 전국 시대 말에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자신의 신세를 주옥같은 언어로 표현하였고, 이런 그의 작품들이 후세에 초사(楚辭)로 불리게 되었다.
屈原旣放(굴원기방) 굴원(屈原)이 이미 쫓겨나 游於江潭(유어강담) 강과 연못에서 노닐고 行吟澤畔(행음택반), 못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조릴 때, 顔色憔悴(안색초췌) 안색이 초췌하고 形容枯槁(형용고고). 몸이 수척했다.
漁父見而問之曰(어부견이문지왈).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子非三閭大夫與(자비삼려대부여)? “당신은 삼려대부(三閭大夫)가 아니시오? 何故至於斯(하고지어사)?” 어찌하여 이곳까지 이르셨소?”
屈原曰(굴원왈). 굴원이 대답했다. “擧世皆濁我獨淸(거세개탁아독청), “온 세상이 다 혼탁한데 나만 홀로 맑고, 衆人皆醉我獨醒(중인개취아독성), 뭇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있으니, 是以見放(시이견방).” 그런 연유로 추방을 당했소.”
漁父曰(어부왈). 어부가 말했다. “聖人不凝滯於物(성인불응체어물) 성인(聖人)은 만물에 얽매이거나 막히지 않고 而能與世推移(이능여세추이), 능히 세상을 따라 옮겨 가는 것이니, 世人皆濁(세인개탁), 세상 사람들이 다 혼탁하면 何不淈其泥而揚其波(하불굴기니이양기파),왜 그 진흙을 휘저어 물결을 일으키지 않으며, 衆人皆醉(중인개취) 뭇사람이 다 취했으면 何不餔其糟而歠其醨(하불포기조이철기리)왜 그 술지게미를 먹고 박주(薄酒)를 마시지 않고, 何故深思高擧(하고심사고거) 무슨 이유로 깊은 생각과 고매한 행동으로 自令放爲(자령방위)?” 스스로 추방을 당하셨소?”
屈原曰(굴원왈). 굴원이 말했다. “吾聞之(오문지), “나는, 新沐者必彈冠(신목자필탄관), 새로 머리감은 자는 반드시 갓의 먼지를 털어서 쓰고 新浴者必振衣(신욕자필진의). 새로 목욕한 자는 반드시 옷의 먼지를 털어 입는다고 들었소. 安能以身之察察(안능이신지찰찰) 어찌 몸의 깨끗한 곳을 受物之汶汶者乎(수물지문문자호)?외물(外物)로 더럽히겠소? 寧赴湘流(영부상류) 차라리 상강(湘江)물에 뛰어들어 葬於江魚之服中(장어강어지복중),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낼지언정 安能以皓皓之白(안능이호호지백)어찌 희디흰 순백(純白)으로 而蒙世俗之塵埃乎(이몽세속지진애호)?”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쓴단 말이요?”
漁父莞爾而笑(어부완이이소) 어부가 빙그레 웃고는 鼓枻而去(고예이거). 노를 두드리며 떠나갔다. 乃歌曰(내가왈), 이내 노래를 불렀다. “滄浪之水淸兮(창랑지수청혜)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可以濯吾纓(가이탁오영), 내 갓 끈을 씻으리. 滄浪之水濁兮(창랑지수탁혜) 창랑(滄浪)의 물이 흐리면 可以濯吾足(가이탁오족)”. 내 발을 씻으리.”
遂去不復與言(수거불부여언). 마침내 가버리니, 다시는 그와 얘기할 수 없었다.
굴원이 쫓겨나 강가에 다다랐을 때 얼굴은 초췌하고 몸은 삐쩍 말라있었다. 어부가 그를 보면 묻기를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닙니까? 무슨 연고로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하니, 굴원이 대답하길 “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혼자 청렴하고, 모든 사람들이 취해있는데, 나 홀로 깨어있으니, 이 때문에 쫓겨나게 된 것이다.”하였다. 어부가 말하길 “온 세상이 혼탁하다면 그대가 밑바닥까지 내려가 파란을 일으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취해있다면 그대가 술 찌꺼기까지 마셔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어째서 고상하게 있다가 이렇게 버림을 받은 것이요?” 하니, 굴원이 말하길 “ 머리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다려서 입는다 하였소. 어찌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곳에 빠질 수 있겠소? 차라리 물에 빠져 물고기 밥이 되는 것이 낫겠소. 어찌 희고 흰 것이 먼지에 뒤덮이게 두겠소?” 하였다. 어부는 은은히 미소 짓고는 노 저어 가며 부르길 “흐르는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으면 되고, 흐르는 물이 탁하면 내 발을 씻으면 되지” 하고는 떠나가 버렸다.
글에는 굴원 자신과 어부 두 사람이 나오지만 기실 어부 역시 굴원의 또 다른 입장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더러워서 먼저 피한다며 몸을 빼는 것처럼 <어부사>의 굴원 역시 자신의 고상함을 지키기 위해 고고한 자태로 남아 있으려 한다. 진리를 찾고 이를 지켜나가는 고상한 지식인, 철학자의 모습이 금세 연상된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어부는 이 고상한 선생님에게 차라리 더 밑바닥까지 내려가 세상의 혼돈에 휩싸이라고 요구한다. 철저하게 대중과 섞이며 대중보다 더욱 더러움을 맛 보라고 이야기 한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진리를 보존하려고 하는 사람이 굴원이라면 더 나아가 민중에 섞여 그들의 문화를 고양시키라고 주문한 것이 어부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문득 대중에게 진리를 깨우치게 하려고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녔다던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연상된다. 아마 굴원 역시 눈 앞의 과제에 매달리는 민중들을 깨우쳐 궁극적인 삶을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진정한 선각자, 지식인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머리로는 알아도 실천 할 수 없었던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것이 그를 자살이라는 길로 이끌었을지 모르겠다. 고대 지식인의 고뇌를 엿보며,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 진정한 지식, 배움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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