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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오늘날 지극히 낡은 것이 되어버렸을까? 왜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적 자유라는 신념을 경제적 영역이 아닌 다른 사회적 영역에도 적용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을까? 왜 사회주의는 공화주의 그리고 페미니즘과 화해하는 데 실패했을까?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세상에는 갑자기 소련이 붕괴됐고, 이어서 등장한 이들은 소련해체, 사회주의해체의 길을 택했다. 왜 그랬을까, 마치 물이 99도까지 끓다가 100도 되면서, 기화, 수증기로 바뀌는 질적변화로 설명을 해도 될런지 조차 모르겠다. 지은이 호네트는 이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속시원한 대답을 들어보자, 그는 사회주의의 근본이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재구성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것은 단순한 경제적 평등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개혁, 혹은 혁명적 극복을 통해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것이며, 이런 사회적 관계는 프랑스 대혁명의 목표인 자유, 평등, 우애를 모두 아우르고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자유”를 기반으로 할 때에만 가능하다. 즉, 사회주의의 근본이념은 사회적 자유의 실현이라는 ‘목표’에 있다고 1장에서 밝히고 있다. 이어서 2장에서는 회주의 기획들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으며, 사회주의 이념이 그동안 진부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한다. 특히 그는 과거의 사회주의 기획이 가졌던 세 가지 태생적 결함을 냉철히 분석해낸다. 그 태생적 한계는 자유를 단지 개인적 의도의 사적추구로 이해하게 만든 원인이 오로지 자본주의적 경제제도 속에 만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즉 경제중심투쟁과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된 대항 세력과 연계되어야 하며, 저항 운동의 필연적 승리를 역사철학적으로 예견하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자들이 가졌던 믿음으로 이는 잘못됐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사회주의의 재발명을 위해 이러한 낡은 가정을 청산, 사회주의는 더 이상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를 의미하지 않으며,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라는 혁명 주체도, 자본주의 붕괴와 더불어 사회주의가 도래한다는 식의 역사적 필연성도 주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가정들은 모든 사회적 현상들이 산업적 생산을 통해 규정될 것이라고 믿는 “산업주의 정신”에 매몰되어 있을 때에만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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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바라보며 많은 이들은 생각했다. 역시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요, 개개인의 이윤추구야 말로 이 사회를 진보케 만드는 힘이라고. 자본주의의 승리에 만세를 부르는 일도 잠시, 이후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상했던 핑크빛 미래와는 다른 현실과 만나게 되었다. 개개인의 나태로 평하기에는 빈부의 격차가 너무도 컸다. 애초에 시작지점이 다른데 경쟁을 공정하다 말할 수 있는지 의구심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자본주의를 견제할 다른 체제는 존재치 않는다. 획기적인 무언가를 고안해 낼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한물 갔다 여겨온 사회주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왜 이 시점에서 사회주의인가. 더구나 우리처럼 국토가 둘로 나뉘었으며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이해가 쉽지 않다.
20세기를 뒤흔든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마르크스는 언제나 빠지지 않고 언급되곤 한다. 그의 이론을 실현해 보겠다며 많은 이들이 혁명가가 되길 자처했다. 안타깝게도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가장 드셌다.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실패였다. 역사가 기억하고 있는 사회주의는 숨막혔다.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했는데, 개개인의 사상적인 부분에까지도 국가의 힘이 미쳤다. 사회는 급격하게 생기를 잃어갔고, 정치적 망명만을 살길로 여긴 이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다. 저자가 희망을 위해 꺼내어 든 것이 사회주의가 맞긴 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이론적으로 사회주의는 경제적인 부분이 강했다. 생산물을 동일하게 나누는 것을 많은 이들은 중히 여겼고, 사회주의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평등을 위한 폭력이 정당성을 인정 받기도 했다. 당시 인류는 사회주의의 의미를 잘못 이해했다. 자유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사회주의에 치중한 나머지 집단을 강조했다. 개인과 집단의 이익이 상충할 때면 언제나 집단이 우선시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개인이 실종되고야 말았다. 물론 모두가 사회주의를 그렇게 이해하진 않았다. 저자는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벤야민, 마르쿠제, 프롬, 하버마스 등 프랑크부르트학파로 불리는 이들의 뜻을 이어 받았다. 그런 그가 이해한 사회주의는 앞부분 ‘사회’를 힘줘 언급해야만 한다. 그의 사회주의에는 혁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의 사회주의에선 ‘공동체’가 중시되긴 하나 절대적이진 않다. 그는 사회가 사회적이길 바랄 따름이다. 흔히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뜻할 때 사람들은 ‘사회적’이라는 단어를 망각한다. 그래서 개개인이 추구하는 이기적 행태가 마치 자유인 것처럼 다루어진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자유는 개개인이 사회 안에서 형성한 관계를 고려한다. 나의 자유가 당신의 자유를 침해한다면 그것은 결코 자유일 수 없다. 오히려 내가 자유를 추구함으로써 너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만이 진정한 자유다. 저자가 언급한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는 자유 또한 손 맞잡고 함께 협동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유행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한 사회적경제 또한 저자가 말하는 사회주의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 즈음 되면 우리가 사회주의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신개념 사회주의가 탄생한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이제껏 알던 사회주의와는 다분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는 사회주의 앞에서 적잖은 이들이 어색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라서 안 된다는 식의 말은 소용 없다. 오히려 우리는 공동체를 복원한답시고 막대한 예산을 사용하는 등 저자의 사회주의에 부합하는 사업들을 펼치고 있다. 이미 실천 중인데 머리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뿐. 이제 사회주의에 대한 저항은 그만 둘 차례 같다. 이 또한 오늘날의 문제를 해소할 가능성을 제시해줄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우린 인정해야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