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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이데거를 읽어야 할까?
"왜 하이데거를 읽어야 할까?" 내용보기
20세기 철학자 중 '아마 절대 안읽을 것 같다.. '는 철학자가 한 명 있었다. 그건 바로 하이데거.난해하다고 악명 높을 뿐더러 뭐랄까. 철학자들이라고 항상 옳은 행동을 해야 한는건 아니지만'나치에 협력했다'는 말을 종종 듣는 하이데거이기에왠지 읽기 싫었다. 하지만 철학사를 읽어나가다 보면 20세기 철학전반에 걸쳐서 하이데거의 영향력을 확인하게 된다.그는 20세기
"왜 하이데거를 읽어야 할까?" 내용보기

20세기 철학자 중 '아마 절대 안읽을 것 같다.. '
는 철학자가 한 명 있었다. 
그건 바로 하이데거.
난해하다고 악명 높을 뿐더러 뭐랄까. 
철학자들이라고 항상 옳은 행동을 해야 한는건 아니지만
'나치에 협력했다'는 말을 종종 듣는 하이데거이기에
왠지 읽기 싫었다. 



하지만 철학사를 읽어나가다 보면 20세기 철학
전반에 걸쳐서 하이데거의 영향력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20세기 대륙철학, 특히 '실존주의' 철학 
이해할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많은 철학자들이 그의 사상에 주석을 달았다. 그리고 또 비판하기도 했다.




이 책 <how to read 하이데거>는 하이데거의 사상 중
중요한 용어인
'현존재' '세계-내-존재' '본래성' 
에 대한 설명과 함께,
'예술'과 '과학' 에 대한 하이데거의 생각도 같이 담았다.
하이데거의 한 시기만 조망하는 것이 아닌,
그의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주목할만한 핵심 사상을 골라담은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런말을 한다.
하이데거의 경우, '어떻게 읽을 것인가?' 보다는
'왜 하이데거를 읽어야 하는가?' 가 중요하다고.


한 때 나치 당원이었던 하이데거는 그 이후 
이 일에 대해 언급한 적도 별로 없었고, 
따라서
사과하거나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또한 하이데거의 사상은
'존재란 무엇인가?' 라는
모호한 질문만 던지기 일쑤고, 
"무는 무화한다" 와 같은 말장난스러운 답변을 즐겨 
제시했기 때문에 그를 궤변가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읽었던 주된 이유도 다음과 같았다.
'왜 하이데거를 읽어야만 할까?' 그리고
'왜 하이데거는 나치에 협력했을까?'





왜 하이데거를 읽어야만 할까?

인간 실존의 존엄함과 자유



하이데거의 사유가 기여한 바는 무엇일까?

그는 난해한 단어와 문장 을 썼다.
누군가가 해설서를 달아주지 않으면 읽지 못할 정도다.
그는 우리가 이해하고자 노력을 기울일 만큼
가치 있는 철학자일까?
하이데거는 과연 어떤 철학자였을까?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을 자연과학적 현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인간 실존의 존엄함과 자유'를 확보하고자
투쟁해왔다. 


하이데거의 가장 중요한 통찰 중 하나는 인간 실존이,
우리가 언제나 어떤 세계 안에서 존재한다 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세계 안에 있는 존재자만이 생각과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처럼 인간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를 '현존재'라고 부른다.



현존재인 나에게는 삶의 방식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나는 내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
즉, 문제는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현대사회의 '표준화'경향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우리는 항상 타인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간다.
근대 이후로 사회는 나날이 '표준화'되어가고 있으며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기준을 학습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표준화' 경향은
인간 존재를 이루는
본질적인 특성 
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우리의 활동들 중 대부분은
타인을 위한 활동,
혹은 타인과 관련되는 행동들이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공동존재는 세계-내-존재의 한 가지 구성요소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을 독자적으로 인식하진 않는다.
바로 세상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행동, 
'표준'과 '평균'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을 이해한다.
즉 세계에서 실존하는 방식은 본래
타인들에 의해서
구조화되어 있다. 

나로 하여금
누구인가 가 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결국
'타인들'인 것이다.



또한 이런
'표준화'가 마냥 나쁜 것은 아니다.
가령 내가 아주 사소한 어떤 일을 행할 때,
아침에 무슨 옷을 입을 것인지 혹은 도로의 어느 편에서 운전할 
것인지 등등과 같은 일들을 일일이 결정해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재앙일 것이다.

이런 소소한 일들이 '표준화'가 되어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왜 하이데거는 나치에 협력했을까?

짧았던 나치 당원 기간, 침묵의 철학자


이 부분은 평소에 궁금했던 터라 인터넷으로도 찾아봤다.

1933년 4월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이 된다.
그리고 나치 간부들이 찾아와 그에게 입당을 권한다.
그러자 하이데거는 
"당직을 맡지 않고, 당을 위해 활동하지도 않는다" 는 조건하에,
명목상으로만 입당하기로 한다.


그는
나치가 요구하는 것들을 잘 지키진 않았다.
나치가 유대인 저자 장서를 태우라고 할 때도,
반 유대주의 현수막을 대학에 게양하라고 할 때도
그는 총장 권한으로 금지시켰다.
그래서 결국 나치와 사이가 벌어저 하이데거는 불과
10개월만에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그 짧았던 기간에도 불구하고,
나치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평생 그를 쫓아다니는 꼬리표가 되고 만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난해하다. 어렵다.
해석하기 나름이다.
그래서 그의 저작에
친나치적인 대목들이 있다 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개다가 하이데거는 야스퍼스가 히틀러를 "교양이라곤 없는 인간"
이라고 비판하자, 하이데거는 그게 뭐 중요하냐면서
"우아하기 그지없는 그의 손을 보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한편 하이데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참여에 대한
비판이 거세었을 때도 죄책 고백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희생자에 대해서 언급한 적도 없고
유감 조차 표현한 적도 없었다.



참 이럴때는 난감하다.
철학자의 개인적 성향과 성격, 업적을
그의 철학적 사유와 관련지어 봐야 할까 말아야 할까?
개인적으로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을 참 싫어하는데
그게 '저자'일 때는 참 곤란해진다.

과연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비판받는 사람일지라도
훌륭한 사유가 담긴 책을 써냈다면 그 책을 인정해야 할 것인가?



정말 지독한 딜레마이다.





왜 하이데거는 기술을 반대했을까?

건축하기, 거주하기, 사유하기



하이데거가 활동했던 시대에는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기술이
"매일 더욱더 호되게 인간 자신을 반격하고
인간을, 주문할 수 있는 현품의 조각으로 격하시키는"

한에서 우리 자신은 결국 우리의 본질을 잃고 만다.


영화 <메트릭스>에서는 이러한 기술 지배 세상을 경고한다.
1931년 슈펭글러는 기계의 위험을 말하면서

"세계의 주인이 기계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기계는 그 주인을, 실로 우리 모두를,
우리가 알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또 우리가 원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기계의 항로를 따라가도록 강요한다."


고 썼다.




한편, 하이데거는 이와 조금 다르다.
그는 이러한 위험은 기술이 우리의
인간적인 본질
박탈하리라는데 있다고 보았다.


"인간이 전적으로 기술의 손아귀에 사로잡히고 어느 날
조종당하는 기계가 될지 모르는 위험이 존재한다."


그는 우리가 한갓 현품이 될지 모르는 가능성 이 있다고 본 것이다.
 


한편
'거주하기'는 이러한 위험에 대한 하이데거의 응답이다.
거주하기는 인간이 다시 한 번 자신의 본질을 요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우리는
주변 세계에 어울리는 사물들을 '건축'함으로써
그것의 본질 속에 들어가게 된다.
'거주'하게 되는 것이다.





기술의 세계에서 우리는 갈수록 편리성에 중독되고 있다.
갈수록 시간이 단축되고 편리하게 세상을 이용하면
우리의 삶이 감동스럽고 만족스러울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적 여유가 많아질수록 사람은 '권태'에 빠진다.
이러한 권태는 향락, 오락거리를 탐닉하면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도록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감추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으로,
영화나 텔레비전 쇼에 미친듯이 매달린다.

결국 현대인은 오락거리로 시간을 죽이면서
지루할 정도로 긴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고유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사방에 고유하게 어울리는 사물들을 건축함으로써
'사물들 속에서 사방을 간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우리답게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런 곳에서 결국 우리는 고향에 안긴 듯한 아늑함을 누릴 것이다.




역시나 하이데거는 어렵다.
책을 읽다가 가끔씩 등장하는 하이데거의 원문은
이걸 독일어로 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하지만 독일엔 이런 농담 도 있다고 한다.

"<존재의 시간>은 언제 독일어로 번역되지?"

아. 그렇다는 것이다.
즉, 독일인들조차도 이해못하는 말을 쓰는 하이데거...



하지만 '권태'같은 '지루함' 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유는
분명 매력적이다.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또한 '존재' 에 대한 부분.
과학적으로, 자신의 삶을 하나의 부속품으로 바라보지 말고
'책임감'있게 나 자신만의 '고유성'을 회복하라는 것.
그런 사유들은 분명 마음을 잡아끄는 구석이 있다.



<존재의 시간>이 읽기 버겁다면, 그나마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다.

YES마니아 : 로얄 m*******a 2016.03.09.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