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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생활에 고전을 접할 수 있게 하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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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글의 장점은 쉽게 읽히고 그러면서 말만 화려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용이 있다. 그런 글이 잘쓴 글이다. 이책은 그런 김용옥 글의 정점이다. 생활에 쫓기다보면 어려운 한문원문을 붙잡고 볼 에너지가 없다. 그러나 김용옥의 글은 그런 노력을 줄여준다. 1권은 논어 20편에서 단 3편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거쳐야되는 권이다. 2권과 3권 논의의 베이스가 되는 논의가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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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글의 장점은 쉽게 읽히고 그러면서 말만 화려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용이 있다. 그런 글이 잘쓴 글이다. 이책은 그런 김용옥 글의 정점이다. 생활에 쫓기다보면 어려운 한문원문을 붙잡고 볼 에너지가 없다. 그러나 김용옥의 글은 그런 노력을 줄여준다. 1권은 논어 20편에서 단 3편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거쳐야되는 권이다. 2권과 3권 논의의 베이스가 되는 논의가 모두 1권에 있기 때문이다. 논어는 공자란 인물을 느껴야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받으려면 여러번 봐야 한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다. 1권은 그런 시간ㅇ르 줄여준다. 공자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를 그리는데 상당부분의 지면응ㄹ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3편의 주석을 통해 실제 공자가 한 말에서 자신이 그린 공자의 이미지를 실증해 나간다.  

 

 1권과 2권의 5편 공야장까지는 예전에 방송대본으로 출판된 도올논어 3권을 거의 수정없이 다시 출판한 것이다.  달라진 것은 주자주까지 해석을 달고 코멘트를 달았다는 것이다. 주자주에도 관심이 있다면 예전에 나온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1권은 살 가치가 있다. 그리고 달라진 것은 예전 책엔 한글독음까지 달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것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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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와 우리 문화의 근저, 논어를 공부해보자_도올의 논어한글역주1(1)_모창 최(Mochang Choi)
"유교와 우리 문화의 근저, 논어를 공부해보자_도올의 논어한글역주1(1)_모창 최(Mochang Choi)" 내용보기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읽으며, 우리문화, 동양문화의 뿌리가 된 공자님 말씀, 논어를 읽어봐야겠다 생각했다.공자님, 공자님 하는데 대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기에 그렇게 추앙 받았던 걸까?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에게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활 그 자체였다. 도대체 어떠하길래 종교로서 추앙되고 받아들여지는 것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삶을 지배하였던가? 우리 조상들은 무슨 생각을
"유교와 우리 문화의 근저, 논어를 공부해보자_도올의 논어한글역주1(1)_모창 최(Mochang Choi)" 내용보기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읽으며, 우리문화, 동양문화의 뿌리가 된 공자님 말씀, 논어를 읽어봐야겠다 생각했다.


공자님, 공자님 하는데 대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기에 그렇게 추앙 받았던 걸까?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에게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활 그 자체였다. 도대체 어떠하길래 종교로서 추앙되고 받아들여지는 것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삶을 지배하였던가? 우리 조상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그 기저가 이 책 안에 있을 것이다.


도서관에 가보니 많은 논어 책이 있었다.

제대로 감당도 못해내면서 이놈의 욕심이 뭔지, 그 중 가장 두꺼운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 책 3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도올 선생의 논어한글역주를 골랐다.

 


이 책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논어를 설명하기 앞서 책 한권 분량은 되는 수백 페이지를, 방대한 사상사와 문명에 관해 논하고 있으며, 논어 또한 주자(주희)의 집주를 그대로 소개하면서, 덧붙여 그동안 학계에 보고된 다양한 해석 및 의견들을 밝히고, 이 모든 것을 총합한 도올 김용옥 선생 자신의 해석/혹은 의견을 전개한다.


사실 이 책은 논어를 이미 꽤 읽고, 한자도 좀 아는 사람을 위해 집대성 해 쓴 책인 것이다. 천자문정도 대충 훑은 나같은 일자 무식이 보기엔 오히려 좀 부담스러운 감이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엄청난 학문작업이 녹아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논어 본문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1권의 목차를 간단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논어를 독자에게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해 저자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아래 목차만 보고도 느낄 수 있다. 








자! 아래에 이 논어한글역주 1권을 힘들게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과 나의 느낌을 적어본다.


------------------------- 

20세기의 근대화(Modernization)라고 하는 현상은 암암리 서구적 가치의 수용이라는 대세와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근대화가 반드시 서구화(Westernization)를 의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민족사의 현실은 근대화 = 서구화라는 검증되지 않은 등식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상당수의 조선식자들이 근대화 = 서구화라는 등식에 부지불식간 또 하나의 가치를 얹어서 생각했으니 그것이 바로 기독화(Christianization)라는 것이다.  


근대화 = 서구화 = 기독화


과연 이러한 도식을 우리는 우리 삶의 정당한 가치관으로서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나 정작 핵심적 문제는 이러한 도식의 정당성에 관한 논박에 있지 않다. 불행하게도 상기의 도식을 자신의 검토되지 않는 신념체계로서, 그러니까 종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한국의 엘리트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현실이 먼저 지적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들은 서구유학의 깃발을 휘날렸으며, 법조계, 정계, 재계, 예술계, 학계, 교육계, 등 한국문화 일반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엘리트층은, "보수"라는 말의 개념규정조차 애매하지만, 보수의 논리에 헌신하는 경향성을 강하게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엘리트층의 상당수가 상기의 도식을 자기의 신념체계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다. 불교도라해서 근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과학과 같은 근대화의 선두에 서있으면서도 서구적 가치에 자신을 오염시키지 않으려고 방비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화 = 서구화 = 기독화"라는 가치관을 수용하든 하지않든 간에 대부분의 한국식자들이 인류의 역사를 서구중심으로 생각하고, 모든 인류의 경험의 축적의 형태가 오로지 그들이 생각하는 서구적 근대의 가치를 발현하기 위한 목적론적 체계(a teleological system)라고 인지하는데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감증세는 일차적으로 무지에서 온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는 의도적 무지가 아니라 별다른 정보가 부재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매우 상식적인 현실이다. 이러한 상식적 현실이야 말로 가증스럽고 가공스러운 것이다. 비의도적 무지는 아무 곳에나 쉽게 별 저항없이 침투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땅의 젊은이들의 가치관과 비젼을 형성하는 교과서가 모두 그러한 왜곡된 서구중심의 역사기술,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모든 무형의 가치기술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좌, 우 이념의 말초적 시비는 있으되, 이러한 거시적이고도 본원적인 문제에 대한 대책이나, 새로운 인식이나, 정보의 발굴은 없는 것이다. 서양역사가 인류사의 주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모든 텍스트를 장악하고, 철학사, 건축사, 음악사, 미술사, 문학사 등등의 모든 개론이 그에 준하여 기술되고 있다. 중국문명에 관한 기술도 소외된 변방의 이야기처럼 들리고, 인도문명에 관한 이야기도 이그조틱한(exotic) 판타지 테일처럼 들리며, 중동문명에 이르게 되면 흑암의 커텐이 차단의 막을 친다. 

-------------------------

위 도올 선생의 말이 내 마음을 울린다. 무지에서 오는 서구중심의 가치관. 하지만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지한지 조차 모른다. 그렇게 무지한 상태에서 본인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고 우월하다고 생각하기에 문제가 심각해 지는 것이다. 


중국문명에 관한 기술도 소외된 변방의 이야기처럼 들리고, 인도문명에 관한 이야기도 이그조틱한(exotic) 판타지 테일처럼 들리며, 중동문명에 이르게 되면 흑암의 커텐이 차단의 막을 친다. 


무지에서 오는 경계/무시 더 나아가 경멸까지. 소위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사람부터 시작되는 이 무지는 중국 문명과 인도 문명은 무시하고 중동 문명은 악의 근원이라도 되는 냥 경멸하고 배척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들은, 그 문명이 그들의 문화가 무엇인지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저 미국이 악의 축이라고 하면 악이 되는 것이고, 미국이 좋다고 하면 좋은 것이 되는 것이지.


공자는 우리 조상의 사고체계, 문화, 삶, 그 전반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행사했다. 그를 모르고, 논어를 모르고 우리 조상에게 다가갈 수 없다. 아, 동양의 전통이여! 이천 년간 한중일 동북아를 지배한 큰 사상과 문화를 이제는 전혀 배우지 않는다니 너무나 안타깝다. 교양으로라도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닌가?


저 유명한 논어 1장 1편을 소개하고 오늘 글은 마무리하자.


-------------------------

1-1. : "?"


1-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배워 때에 맞추어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뜻을 같이 하는 자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 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

학이시습지, 부역열호? 공자는 배움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다. 배우고, 배운 것을 내 몸에 익히는 것이 어찌 기쁘지 않은가? 이렇게 배워 익히는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먼 곳에서도 찾아와 함께하니 어찌 즐겁지 않을까?


첫 문장도 내 가슴을 크게 울리지만, 이 문장의 마지막이 내 가슴을 저린다.

내가 배우고 익히는 것은 누구한테 나 이렇게 잘난 놈이다 자랑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다. 그 자체로 내가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이렇게 배우고 익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보통의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이상한 생각을 하는 이상한 놈이라고 심지어 욕까지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다. 공자님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전엔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인 삶을 살지 않았던가? 이는 예수님도, 부처님도, 소크라테스도 다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군자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심지어 배척해도 노여워 하지 않는다. 이미 내가 배워 익히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하기 때문이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하루 하루 행복하다. 하루 하루 배워 내 몸에 익히니 어찌 늘 기쁘지 않겠는가?


f******y 2016.02.2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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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와 우리 문화의 근저, 논어를 공부해보자_도올의 논어한글역주1(4)_모창 최(Mochang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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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이어서...2-13.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 其言而後從之."2-13. 자공이 군자에 관하여 여쭈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먼저 실행하라. 말은 실행한 후 그 행동을 따르게 하라."......자공은 말의 명수였다. 말로써 제후들을 설득시키고 말로써 재화를 벌어들이는 탁월한 재주꾼이었다. 이러한 자공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선행先行" 그 한마디였던 것이다. 먼저 행(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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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이어서...



2-13.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 其言而後從之."
2-13. 자공이 군자에 관하여 여쭈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먼저 실행하라. 말은 실행한 후 그 행동을 따르게 하라."

......

자공은 말의 명수였다. 말로써 제후들을 설득시키고 말로써 재화를 벌어들이는 탁월한 재주꾼이었다. 이러한 자공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선행先行" 그 한마디였던 것이다. 먼저 행(行)하라! 말인즉슨 그 행함을 뒤따라가게 하면 족하다.

우리 동양인의 교육방법으로 가장 잘 쓰는 말이 "솔건수범"이라는 말이다. 남에게 말로써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모범을 보인다는 말이다. 솔선수범이야말로 만고에 양보할 수 없는 보편적 진리인 것이다. 오늘 우리사회가 혼란과 무기력증세를 보이는 것도 바로 우리사회의 리더들이, 말만을 앞세울 뿐, 후학들이 진심으로 따를 수 있는 행동의 모범을 보이고 있질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말만 많은 놈이었다. 내 지금 상황에 대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의 이상적 모습과 현실과의 괴리에 대해 부모 탓, 세상 탓, 환경 탓하며 변명거리를 찾아내느라 바빴다. 나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고 나를 위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말보다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닫고 있다. 아직 완전하진 않더라도 그렇게 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내가 굉장히 존경하는 분인 정주영 회장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당시, 정주영 회장보다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이 배운 사람은
머리 좋은 사람은
경험 많은 사람은
환경 좋았던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나는 그를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인으로 만든 그 성공비결은 바로 실행능력이라고 본다. 위의 모든 것이 정주영회장보다 뛰어난 사람은 정말 많았지만, 실행력이 그보다 뛰어났던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면 실행했다. 아무 것도 못 배운 사람이 소라도 팔고 도망이라도 쳤기에 도시 생활을 해볼 수 있었고, 경리 학원에 등록했던 덕분에 숫자라도 볼 수 있었다. 쌀집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배달하고 일한 덕분에 주인이 아들이 아닌 정주영 회장에게 쌀집을 인수시켰고, 처음 시작한 자신의 사업, 자동차 공업사가 일주일 만에 불이 나 망했어도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서라도 가게도 없이 다시 시작했기에, 그것을 단속하는 일본인 순사 집에 새벽마다가서 허락해줄 때까지 절을 계속 했기에 그는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었다.

말은 쉽고, 행동은 어렵다.
지금의 우리들은 말만 많고 행동하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부탁한다. 제발 아이들 앞에서 책보라, 공부해라, 어른 공경해라, 예의 있게 굴어라, 말로 때우지 말라. 

부모가 책을 보고, 공부 하고, 어른 공경하고, 예의 있게 행동하면 아이들은 자연히 그것을 따라 배운다. 말을 할 필요 조차 없다. 
입으로만 하는 것도 아마 그 부모조차 제 부모로부터 따라 배워 그런 것일지나, 자기 자식을 바꾸고 싶다면 제 부모 탓 그만 하고 어렵더라도 자신의 대에서 바꾸어야 한다. 왜 실행이 어려우니까 자신은 실행치 않고 말로만 하면서 어른보다 어리석을 수 밖에 없는 자식은 그 말을 듣고 바뀌기를 원하는가? 이렇게 사는 사람은 부모 탓에 결국 자식 탓까지 더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나는 모든 종류의 경영, 즉 자기 경영, 자식 경영, 집안경영, 사업체 경영에서 다른 많은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실행력이라고 보는 사람이다. 다른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 지지 않고, 비록 다른 능력이 조금 부족하여 실행했으나 실패하였을 지라도, 멈추지 않고 실행을 지속하는 한, 멈출 때 까지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2-14. 子曰: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2-1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두루 마음쓰고 편당 짓지 아니하며, 소인은 편당 짓고 두루 마음쓰지 아니한다."

앞서 서막에서도 논의한 바 있지만, 군자와 소인의 대비적 가치판단은 반드시 동일한 가치평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점이라는 것이 확실히 인식되어야 한다. 군자는 사(士)가 지향해야 할 이상이며 소인은 사가 극복해야 할 현실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의 소인에 대한 비판은 사에 대비되는 서민(庶民)에 대한 경멸의 언사가 아니라, 사임을 자처하는 사회리더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다. 다시 말해서 군자와 소인은 계급적으로 준별되는 개념이 아니며, 둘 다 사회지도층이 되고자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가치개념(value terms)인 것이다. 공자는 저 민중을 무지랭이 소인들로서 바라본 적이 없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로서 자기를 우월하게 인식한 적도 없다. 민(民)은 존재의 기반이며, 그것은 치(治)의 대상인 동시에 지고의 가치다. 공자에게 오늘날과 같은 민주(民主)의 관념은 없다. 그러나 의회 민주주의의 정도에 의한 선거결과조차도 민의를 판가름하는 바른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21세기 오늘날의 세계정세를 관망할 때, 민주라는 가치의 표현은 시대에 따라 그 양식을 달리했을 뿐이며 그 민주의 정신이 오늘날에만 있다고 농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공자에게도 민이 사회적 가치의 주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 고대사상가보다도 투철했다고 사료된다.

주(周)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지향이다. 비(比)는 비슷비슷한 똘만이들끼리 똘똘 뭉치는 현상이다. 공안국의 주에 "아당위비야阿黨爲比也"(아첨하는 자들끼리 무리짓는 것을 비比라 한다)라 한 것이 그것이다. 주자는 "주周는 보편이요, 비比는 편당이다, 주는 공公이요, 비는 사私다"라 했는데 비교적 그 의미맥락이 명료하다.
인간은 항상 자연스럽게 비슷비슷한 자들끼리 뭉치게 마련이다. 마음에 맞는 자들끼리 모여 살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슷비슷한 자들끼리만 뭉치고, 마음에 맞는 자들끼리만 모여 사는 것은 결국 소인의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마음에 맞는 자들끼리 모여 살더라도 그 모임이 하나의 편당적 성격을 지녀서는 아니 되는 것이요, 그 붕당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에 대해 항상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며, 자신의 감정적 궤적의 일상성을 탈피하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지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구상에 존속하는 모든 종교들이 인간세에 폐해를 끼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편당의식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공자가 외치는 것은 "해석의 지평의 열림"(open horizon)이요, "민주의 개방성"이며, "우주의 에로스"다. "군자불기君子不器"의 해석에 있어서, 기(器)와 불기(不器)가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비와 주는 결코 서로를 부정하는 관계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비하게 마련이지만, 비에서 머무르면 그것은 소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비(比, partiality)를 초극하여 끊임없이 주(周), universality)로 나아가는 삶의 과정이야말로 사람의 군자다움의 바른 기준일 것이다.



2-15.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2-1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치 않으면 맹목적으로 되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참으로 명언이다. 무엇을 듣거나 배울 때는 반드시 생각을 해야 한다. 그것을 비판적 사고라 하나? 어쨌거나.
배우기만 하고 생각치 않아 맹목적으로 된 사례는 너무나 많다.

종교에 빠져 맹신하거나, 더 나아가 집단 자살, 살인 등을 저지르는 행위.
뉴스에서 나온 말은 모두 진실이라 믿는 행위.
자신들이 배운 것, 즉 그 논리만을 맞다고 생각하고 다른 것은 모두 무시/배척하는 행위. 
나치즘, 파시즘, 반공 등 정부가 가르치는 이념대로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국민들.
부모가 가르친대로 돈의 노예가 되어 맹목적으로 돈만을 쫓는 이 시대 많은 의사, 판사 등.

이렇게 맹목적이 되어 버린 사람은 사고가 마비되기에,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전혀 대화가 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굉장히 위험하다.

또한,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아 위험한 경우도 너무 많다.
이러한 경우는 자신이 똑똑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더더욱 귀를 닫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는데, 일면 배우기만 하고 생각치 않는 것과 궁극적으로 비슷한 면도 있다.
이러한 사례는 페이스북이나 에서 공유되는 여러 글들이나 인터넷 뉴스 댓글을 보면 쉽게 느낄 수 있는데, 자신의 생각만 내세우고 주장하면서 이면의 사정이나 진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보려고 하지 않거나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경우. 무엇이 나쁘다 좋다 이렇게 규정해 놓고 욕하거나 지지하면서 오히려 그것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 

뭐 이런 것이 예가 될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만약 어떤 사람이 독립문 사진과 함께 우리나라 독립에 대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글이 페이스북등에 실린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공유하며 감동하거나 멋져하거나 할 것이다.
그런데 조금 공부해보면, 사실 우리집 앞 독립문은 일제식민지 상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독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이다. 게다가 우리 양식도 아니고 외세(라고 쓰고 청이라고 읽는다.)로 부터 독립한다고 세운 문이 또 다른 외세인 프랑스 문을 베껴다가 허접하게 만든 수준이다. 당시 이 문을 세운 독립협회 사람들의 사고 수준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독립문에 새겨진 '독립문'이라는 한글 글씨는 매국노 이완용이 썼다.독립공원에 세워진 독립협회의 창립자 서재필은 사실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왕을 우습게 여긴, 조선사람도 아니고 미국인이다.

정부가 이런 것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기에, 갑자기 이런 곳이 문화재가 되고 사실 이곳과 전혀 상관 없는 (일제로부터의)독립 운동을 상징하는 또다른 조각물을 막 세운 후에 그것이 짬뽕되어 성역화 된다.  (뭐 근대 유산으로 문화재 까지는 될 수 있겠으나, 약간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그런 문화재의 성격은 절대 아니다.)

또, 이런 것에 대해 배우지 않기에 부모는 자식들을 데려와 이게 독립문이야! 저기 서있는 서재필 동상은 위인의 동상이야! 저 한글로 써진 독립문이라는 글씨 봐라! 신기하고 예쁘지? 우리나라 독립운동이 어쩌고 저쩌고 할 것 아닌가? 

너무나 위험한 것 아닌가? 

그런데 이러한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는 현상이, 고학력의 요즘 젊은 세대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먼저 나 자신을 반성하며, 논어 한글 역주 1권 독후감을 여기서 마친다.

f******y 2016.04.1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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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와 우리 문화의 근저, 논어를 공부해보자_도올의 논어한글역주1(3)_모창 최(Mochang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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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논어한글역주 1권, 지난 번에 이어서. -------------------------------------앞서 말했듯이 자공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여기 자공의 질문은 학문하는 자로서 이재에 밝은 자신의 파라독시칼한 상황에 대한 깊은 반성의 톤으로 시작하고 있다. 자공의 질문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신이 반성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리치를 드러낸 것이다."선생님! 빈궁하면서도 아첨하지 아니하
"유교와 우리 문화의 근저, 논어를 공부해보자_도올의 논어한글역주1(3)_모창 최(Mochang Choi)" 내용보기

도올의 논어한글역주 1권, 지난 번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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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이 자공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여기 자공의 질문은 학문하는 자로서 이재에 밝은 자신의 파라독시칼한 상황에 대한 깊은 반성의 톤으로 시작하고 있다. 자공의 질문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신이 반성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리치를 드러낸 것이다.


"선생님! 빈궁하면서도 아첨하지 아니하고, 부유하면서도 교만치 아니한다면 그래도 훌륭한 삶의 자세라 할 만 하지 않겠습니까?"


이 한 질문은 자공에 있어서는 뼈저린 반성의 외침이었다. 내가 지금 비록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말자! 또 세상이 바귀어 내가 돈을 다 잃어버리고 가난하게 되었을지라도 아첨하지 말자! 이렇게만 살면 우리 훌륭한 공자님의 제자라 할 만하지 않을까? 자공은 공자님의 입에서 "너 참으로 훌륭하다"는 긍정의 말씀을 잔뜩 기대했을 것이다. 그 긴장의 순간! 공자의 입술에서 떨어진 한마디는 무엇이던가?


"可也."


이 순간 자공의 가슴이 저미어졌을 것이다. 철컹! 결코 긍정의 대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야可也"는 부정의 온화한 표현일 뿐이다. 중국사람이 좋아하는 "츠아뿌뚜어러差不多了"란 표현과 차이가 없는 표현이다. 그것은 "하오지러了"가 아닌 것이다. 그 다음엔, "커스可是"(but)로 연결되기 마련인 것이다. 공자가 자공의 질문에 대한 부정 끝에 제시한 새로운 차원의 긍정적 진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빈궁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자만 같지 못하다. 

빈(貧)에 대한 무첨(無諂)이나, 부(富)에 대한 무교(無驕)는 모두 "무無"라는 부정사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부정적 가치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부정적 가치에 의한 소극적 대처로써는 군자다운 삶을 만들어 갈 수가 없다. 공자는 빈(貧)에 대한 락(樂)을, 부(富)에 대한 호례(好禮)를 새롭게 제시한 것이다. ..........(중략)............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갑부들은 세금 내기가 무서워 재단을 만든다. 문화사업을 한다는 시늉만 내는 것이다. 돈을 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요, 천운을 타고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이며, 또 무엇보다도 물류나 시세를 파악하는 탁월한 실력과 직관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부의 사회적 가치를 항상 동시에 고려할 때만이 그 부는 유지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돈을 벌게 만들어준 사회의 가치의 제고에 기여함이 없을 때는 돈은 바로 그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격절되고 생명력을 잃는다. 돈도 생명인 것이다. 부유하면서도 호례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공자의 명제는 부유한 자들의 사회적 가치에의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란 그 사회의 문화의 총체이다. 따라서 부자들은 그 예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진심으로 달성하고 싶은 적극적 비젼을 발견하고 그 비젼에 헌신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빈궁한 자는 빈궁하다고 해서 비굴해지지 말아야지 하는 어떤 경계심만을 유지할 것이 아니라, 그 빈궁함 속에서 진정한 삶의 기쁨(Joy of Life)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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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 ", ."


1-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라.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할지니."



이 장은 별다른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학이] 편의 첫 장에서 이미 논파한 "인부지이불온慍"을 이어 [학이]편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공자의 일생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데 대한 한 맺힌 생애였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한을 새로운 보편적 인(人)의 간(間)의 지평으로 확산시켰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한이 있다면, 우리는 그 한을 역으로 내가 이 순간 남의 훌륭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자각의 내성으로 회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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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 , ; , , ."


2-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정령으로써 이끌고 형벌로써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이 면하기만 할 뿐이요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나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사람들이 부끄러움이 있을 뿐 아니라 떳떳해진다."


....(중략).........

"도지이정政"의 "도"는 "치리治理"의 듯이 있고, "인도引導"의 듯이 있다. 황본, 정평본에는 "도道"가 "도導"로 되어있다. "정政"을 고주(공안국)는 "법교法敎"라 하였다. 정법(政法), 정령(政令) 정도의 듯이 될 것이다. 신주는 "법제금령法制禁令"이라 하였다. "제齊"는 가지런히 한다, 정돈한다, 뒷처리한다는 뜻이다. 과거의 법가적 법의 개념은 민법(民法)이 아닌 형법(刑法)이었다. 다시 말해서 법을 통해 민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타부의 강요며, 총치자의 권익을 위한 질서의 강압이며, 형벌의 강제였다. 그러므로 정령(政令)으로 이끈다는 것은 형벌로 정돈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면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면免)이라는 글자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형벌을 모면키만 하는 타율적 행위를 말한다. 행위의 자율성이나 도덕적 의지는 전무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치恥" 즉 수치를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법령에 의하여 질서가 잘 잡혀지는 사회라 할지라도 그 사회의 성원에게 수치감이 없다면 그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맨하탄을 가볼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그 사회 질서가 대체적으로 폴리스의 강력단속에 의하여만 유지되고 인간이 점점 수치감을 모르고 뻔뻔스러워져만 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데, 이것은 미국사회가 퓨리타니즘 이래로 축적해온 그 나름대로의 도덕적 기반을 상실하고 근원적인 해체로 진입하고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바로 우리사회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로 적용되어야 할 우려일 것이다. 


동양사회의 전통적 미덕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 "수치恥"라는 한 마디인 것이다. 우리문화는 "수치의 문화"인 것이다. 사회의 성원이 서로간에 "수치"를 아는 사회, 서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사회, 그것이 바로 유교가 포기할 수 없는 인간학이다. 그래서 말한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유치차격(格)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덕(德)이 정(政)과 대비되고, 예(禮)가 형(刑)과 대비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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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을 보며, 우리 사회를, 그 구성원인 우리 하나 하나를 돌아보게 된다. 덕과 예를 가르치지 않고 행하지 않는 사회. 법대로만 한다고, 그 구성원이 행복하거나 그 사회가 아름다워질 수는 없다. 법은 최악을 면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일 뿐.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부끄러움은 모르는 가운데 떳떳하고 당당하지 못한 사람들. 굽신굽신대기 바쁜 우리들. 이것이 우리가 오랜 기간 지켜온 우리의 좋은 문화를 잊은 결과다. 나부터라도 덕과 예를 공부하고 실천하려 노력할 때, 그것이 주변에 미칠 것이고 조금씩 내가, 내 주변이, 그리고 이 사회가, 우리들이 부끄러움을 아는 가운데 당당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행복한 곳이 되지 않을까?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오늘은 여기까지.

f******y 2016.03.08.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유교와 우리 문화의 근저, 논어를 공부해보자_도올의 논어한글역주1(2)_모창 최(Mochang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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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 저번 글에 이어서.-------------------------------1-6. 子曰: "弟子, 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젊은이들이여! 들어가서는 효성스럽게 하고, 나와서는 다정하게 하시오. 말은 삼가하되 믿음 있는 말만 하시오. 많은 사람을 널리 사랑하되 인한 자를 가까이 하시오. 이 모든 것을 실천하고
"유교와 우리 문화의 근저, 논어를 공부해보자_도올의 논어한글역주1(2)_모창 최(Mochang Choi)" 내용보기

 


1권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 저번 글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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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子: "."
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젊은이들이여! 들어가서는 효성스럽게 하고, 나와서는 다정하게 하시오. 말은 삼가하되 믿음 있는 말만 하시오. 많은 사람을 널리 사랑하되 인한 자를 가까이 하시오. 이 모든 것을 실천하고 남음이 있으면 곧 문자를 배우시오."
..............(중략)...... 이 장에서 가장 핵심에 놓인 말은 "행유여력, 즉이학문文"이라는 마지막 구문이다. 이 한마디를 위하여 앞의 모든 교훈이 존재한 것이다. "행유여력(力), 즉(則)....." 이라는 구문을 반드시 "행하고 나서 여유가 생기면" 이라는 시간의 단계적 선후를 말하는 것으로 풀면 안된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의 단계적 절차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학문과 일상적 덕목의 실천사이에서, 즉 학(學)과 행(行) 사이에서 "행行"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이디엄적인 표현일 뿐이다. .......(중략)...... 정이천이 말하였다. : "제자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힘에 남음이 있으면 문자를 배워라. 그 본분을 닦지도 않으면서 먼저 문자를 배우는 것은 진정한 자기를 위한 배움이 아니다."윤언명이 말해였다. : " 덕행이 근본이요, 문예는 말초적인 것이다. 본말을 잘 헤아려 그 선후를 잘 알면 입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홍씨가 말하였다. : "여력이 있기도 전에 문자를 배우면 문이 질을 멸해버린다. 여력이 있는데도 문자를 배우지 않으면, 질이 승하여 사람이 야하게 된다."나 주희가 말한다. 역행만을 힘쓰고 문자를 배우지 않는다면 성현의 성법을 고구할 수도 없고, 사리의 당연을 인식할 수도 없다. 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바가 사의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니, 단지 야하게 되는 것보다 더 나뻐질 수도 있다.-------------------------------

위에서 제자는 젊은이를 일컫는 말이다. 야하다는 것은 짐승같이 된다는 것이다. 이 장의 핵심은 결국 먼저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집안에서는 효를 행하고 밖에서는 아랫사람으로써 사람들을 공경하며 대하고 말할 때는 책임질 수 있는 말 믿음 있는 말만 하시오. 사람들을 사랑하고 인한자를 가까이 하시오. 이 모든 것을 실천하고 여력이 있으면 공부를 하시오.


정말 주옥같은 말씀이다.  의사, 법관, 기술자, 사업가, 과학자 등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러한 것이 되기 위한 공부 이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사람이 되는 공부는 전혀 가르치지 않는, 이것과 반대로 돌아가는 요즈음의 세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병폐들과 불신을 보며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비록 나는 이러한 것을 전혀 배우지 못했지만 너무 늦기 전에, 우리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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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의례들을 우리는 허례허식의 구속으로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예는 예로서 독립되는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는 반드시 악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악이 없는 예란 존재할 수가 없고, 예가 없는 악이 존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양자는 고례에 있어서는 더욱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과거의 모든 집례자가 실제로 악사들이었다. 어떤 때에 누가 등장하고 어떤 의복을 입으며 어떤 기물을 활용하고 어떤 음악이 연주되는가, 이러한 구체적 세목에 밝은 자는 악관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즉 예의 핵심이 악에 있었던 것이다. 예는 본시 지루한 것이요, 분별을 위한 것이요, 서열을 가리기 위한 것이요, 공경키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악은 본시 즐거운 것이요, 같음을 위한 것이요, 서열을 초월키 위한 것이요, 친함을 위한 것이다. 악이 없는 예는 맹목적 형식이 되고, 예가 없는 악은 감정이 낭자한 난장판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공자 이전의 교육기관들의 교수들이 모두 악사였다는 사실과 공자가 어려서부터 음악의 연주와 연구로서 출세의 기반을 마련케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사태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예악의 마당이 분화되고 외교예식은 불란서식 프로토콜을 중심으로 하는 딱딱한 의례가 되었고, 일상생활 속의 모든 절목도 의미없이 흐트러져 버렸다. 상례는 병원 영안실로 가고, 혼례는 천박한 예식장으로 가고, 음주례는 룸싸롱이나 노래방으로, 그리고 음악은 콘서트홀로 가버렸다. 그러니까 예는 예대로 형식화되어 재미없게 되고, 악은 악대로 전문화되어 삶의 무대를 떠나 방관자들의 무대로 올라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고대 선왕지도는 인문학의 총화였으며, 악과 예가 조화되어 어떻게 참가자들 모두에게 황홀한 엑스타시의 경험을 안겨주는가 하는 데로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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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 속의 모든 절목도 의미없이 흐트러져 버렸다. 상례는 병원 영안실로 가고, 혼례는 천박한 예식장으로 가고, 음주례는 룸싸롱이나 노래방으로, 그리고 음악은 콘서트홀로 가버렸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구축해온 전통을 부정하고 잊었기에, 그 속 뜻은 사라지고 형식만이 남았다. 그것들을 왜 하는지도 모르고 형식만 남아 흉내내다보니 효율성, 편안함, 경제성만을 구하는 쪽으로 흐를수 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근 20년 사이 병원 장례식장 아닌 곳의 상가를 보지 못했다. 혼례는 실제 서양에서는 어떤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지 모르나, 뭔가 그들을 대충 흉내내어 변질된, 간단한 방식으로 턱시도 빌려 입고, 드레스 빌려 입고 30분 혹은 1시간 마다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예식 공장에서 찍어내듯 치러질 뿐이다.  돈이 좀 많은 사람이라 해도 조금 더 긴 시간, 넓은 장소에서 비싼 음식을 차려놓고 치른다는 것만 다를 뿐, 그 내용의 공허함은 같다. 폐백이란 것도 사진찍기 요식행사. 그 누구도 왜 이렇게 하는지, 뭘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결혼식을 치른다. 혼례와 상례가 우리 인생에 가장 큰 행사 중 하나라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가장 중요하고 큰 행사를 이런식으로 치르고 흉내만 내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일상 삶은 얼마나 생각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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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 "."


1.1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거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하며, 일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삼가할 줄 알며, 항상 도가 있는 자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르게 한다. 이만하면 배움을 좋아한다 이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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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려운 말이다!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사는데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한다니. ㅠ.ㅠ 읽을 때는 멋지다 생각하지만, 이놈의 욕망이 하고싶은 것이 너무 많다. 아! 욕망 덩어리 나 자신을 그냥 그대로 바라 보며 오늘은 이만 마무리.

f******y 2016.03.04.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논어의 새로운 재미를 맛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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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논어강설>이란 책으로 논어에 도전했다가 다 읽지 못하고 실패했다. 읽다보니 너무 지루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논어강설>이란 책의 지루함이 아니라 논어에 대한 지루함이였다. 현시대와 맞지 않는 이야기들도 있고, 무엇보다 뻔한 이야기들이 나열되어있는 느낌이였다. 그러다가 신영복 교수의 <강의>를 읽고 논어에 한번 더 도전기회를 노리다가 이번에 이 책을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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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논어강설>이란 책으로 논어에 도전했다가 다 읽지 못하고 실패했다.

읽다보니 너무 지루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논어강설>이란 책의 지루함이 아니라 논어에 대한 지루함이였다.

현시대와 맞지 않는 이야기들도 있고, 무엇보다 뻔한 이야기들이 나열되어있는 느낌이였다.

그러다가 신영복 교수의 <강의>를 읽고 논어에 한번 더 도전기회를 노리다가 이번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도올교수의 책은 여러권 읽어봐서 그의 에너지와 재미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 책도 역시 도올교수임을 입증하는 책이다.

지식을 지식으로 전달하지 않고 잘 곰씹어서 독자들에게 전한다.

따라서 지루한 논어의 이야기가 새롭고 재미있게 탄생한다.

읽으면서 너무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듯한 부분도 있고,

또 너무 자신의 주장에 매몰되어 일반적인 학계의 상식에서 벗어나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뭐 또 이런게 도올교수의 매력이 아닌가 하고 재밌게 읽었다.

 

특히 이책에서 공자의 모습을 새롭게 부각한것이 인상적이다.

형식적인 예절과 고리타분한 전통을 고집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서의 공자가 아니라,

형식보다는 내용에, 그리고 모든 것에 열려있는 개방적인 모습,

그리고 인간적인 공자의 모습이 친근하고 공감이 간다.

 

이번에 논어를 읽으면서 더욱 재미를 더하게 된것은

 

1. 논어의 이야기를 나와 나의 주위를 통해서 적용함으로써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게 다가왔다. 단지 저자의 해설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에게 또는 현재 일어나는 일에 적용해보니 논어구절의 맛을 알게 되었다.

 

2. 초보지만 한문원문을 먼저 해석도 해보고 또 해설을 읽고 다시 원문을 보고하니, 한문 공부가 되는듯하다. 그리고 점점 뒤로 갈수록 원문으로 해석하는 실력이 향상되는 듯해서 그 재미가 쏠쏠하다. 예전의 <논어강설> 책을 참고용으로 같이 보고 있다.

 

이제 겨우 1권을 읽었지만 2, 3권도 계속 읽을 생각이다.

 

책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책 가격이 비싸다고 할수 없겠으나,

한권도 아닌 세권을 사기에는 개인적으로 부담스러운것이 현실이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다보니 좀 쫒기듯이 읽어야 하는것이 아쉽다.

 

 

어째든 논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아주 좋은 책이다.

i****t 2010.02.1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