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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글의 장점은 쉽게 읽히고 그러면서 말만 화려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용이 있다. 그런 글이 잘쓴 글이다. 이책은 그런 김용옥 글의 정점이다. 생활에 쫓기다보면 어려운 한문원문을 붙잡고 볼 에너지가 없다. 그러나 김용옥의 글은 그런 노력을 줄여준다. 1권은 논어 20편에서 단 3편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거쳐야되는 권이다. 2권과 3권 논의의 베이스가 되는 논의가 모두 1권에 있기 때문이다. 논어는 공자란 인물을 느껴야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받으려면 여러번 봐야 한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다. 1권은 그런 시간ㅇ르 줄여준다. 공자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를 그리는데 상당부분의 지면응ㄹ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3편의 주석을 통해 실제 공자가 한 말에서 자신이 그린 공자의 이미지를 실증해 나간다.
1권과 2권의 5편 공야장까지는 예전에 방송대본으로 출판된 도올논어 3권을 거의 수정없이 다시 출판한 것이다. 달라진 것은 주자주까지 해석을 달고 코멘트를 달았다는 것이다. 주자주에도 관심이 있다면 예전에 나온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1권은 살 가치가 있다. 그리고 달라진 것은 예전 책엔 한글독음까지 달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것엔 없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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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열전을 읽으며, 우리문화, 동양문화의 뿌리가 된 공자님 말씀, 논어를 읽어봐야겠다 생각했다. 공자님, 공자님 하는데 대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기에 그렇게 추앙 받았던 걸까?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에게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활 그 자체였다. 도대체 어떠하길래 종교로서 추앙되고 받아들여지는 것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삶을 지배하였던가? 우리 조상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그 기저가 이 책 안에 있을 것이다. 도서관에 가보니 많은 논어 책이 있었다. 제대로 감당도 못해내면서 이놈의 욕심이 뭔지, 그 중 가장 두꺼운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 책 3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도올 선생의 논어한글역주를 골랐다.
이 책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논어를 설명하기 앞서 책 한권 분량은 되는 수백 페이지를, 방대한 사상사와 문명에 관해 논하고 있으며, 논어 또한 주자(주희)의 집주를 그대로 소개하면서, 덧붙여 그동안 학계에 보고된 다양한 해석 및 의견들을 밝히고, 이 모든 것을 총합한 도올 김용옥 선생 자신의 해석/혹은 의견을 전개한다. 사실 이 책은 논어를 이미 꽤 읽고, 한자도 좀 아는 사람을 위해 집대성 해 쓴 책인 것이다. 천자문정도 대충 훑은 나같은 일자 무식이 보기엔 오히려 좀 부담스러운 감이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엄청난 학문작업이 녹아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논어 본문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1권의 목차를 간단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논어를 독자에게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해 저자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아래 목차만 보고도 느낄 수 있다.
자! 아래에 이 논어한글역주 1권을 힘들게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과 나의 느낌을 적어본다. ------------------------- 20세기의 근대화(Modernization)라고 하는 현상은 암암리 서구적 가치의 수용이라는 대세와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근대화가 반드시 서구화(Westernization)를 의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민족사의 현실은 근대화 = 서구화라는 검증되지 않은 등식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상당수의 조선식자들이 근대화 = 서구화라는 등식에 부지불식간 또 하나의 가치를 얹어서 생각했으니 그것이 바로 기독화(Christianization)라는 것이다. 근대화 = 서구화 = 기독화 과연 이러한 도식을 우리는 우리 삶의 정당한 가치관으로서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나 정작 핵심적 문제는 이러한 도식의 정당성에 관한 논박에 있지 않다. 불행하게도 상기의 도식을 자신의 검토되지 않는 신념체계로서, 그러니까 종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한국의 엘리트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현실이 먼저 지적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들은 서구유학의 깃발을 휘날렸으며, 법조계, 정계, 재계, 예술계, 학계, 교육계, 등 한국문화 일반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엘리트층은, "보수"라는 말의 개념규정조차 애매하지만, 보수의 논리에 헌신하는 경향성을 강하게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엘리트층의 상당수가 상기의 도식을 자기의 신념체계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다. 불교도라해서 근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과학과 같은 근대화의 선두에 서있으면서도 서구적 가치에 자신을 오염시키지 않으려고 방비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화 = 서구화 = 기독화"라는 가치관을 수용하든 하지않든 간에 대부분의 한국식자들이 인류의 역사를 서구중심으로 생각하고, 모든 인류의 경험의 축적의 형태가 오로지 그들이 생각하는 서구적 근대의 가치를 발현하기 위한 목적론적 체계(a teleological system)라고 인지하는데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감증세는 일차적으로 무지에서 온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는 의도적 무지가 아니라 별다른 정보가 부재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매우 상식적인 현실이다. 이러한 상식적 현실이야 말로 가증스럽고 가공스러운 것이다. 비의도적 무지는 아무 곳에나 쉽게 별 저항없이 침투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땅의 젊은이들의 가치관과 비젼을 형성하는 교과서가 모두 그러한 왜곡된 서구중심의 역사기술,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모든 무형의 가치기술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좌, 우 이념의 말초적 시비는 있으되, 이러한 거시적이고도 본원적인 문제에 대한 대책이나, 새로운 인식이나, 정보의 발굴은 없는 것이다. 서양역사가 인류사의 주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모든 텍스트를 장악하고, 철학사, 건축사, 음악사, 미술사, 문학사 등등의 모든 개론이 그에 준하여 기술되고 있다. 중국문명에 관한 기술도 소외된 변방의 이야기처럼 들리고, 인도문명에 관한 이야기도 이그조틱한(exotic) 판타지 테일처럼 들리며, 중동문명에 이르게 되면 흑암의 커텐이 차단의 막을 친다. ------------------------- 위 도올 선생의 말이 내 마음을 울린다. 무지에서 오는 서구중심의 가치관. 하지만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지한지 조차 모른다. 그렇게 무지한 상태에서 본인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고 우월하다고 생각하기에 문제가 심각해 지는 것이다. 중국문명에 관한 기술도 소외된 변방의 이야기처럼 들리고, 인도문명에 관한 이야기도 이그조틱한(exotic) 판타지 테일처럼 들리며, 중동문명에 이르게 되면 흑암의 커텐이 차단의 막을 친다. 무지에서 오는 경계/무시 더 나아가 경멸까지. 소위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사람부터 시작되는 이 무지는 중국 문명과 인도 문명은 무시하고 중동 문명은 악의 근원이라도 되는 냥 경멸하고 배척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들은, 그 문명이 그들의 문화가 무엇인지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저 미국이 악의 축이라고 하면 악이 되는 것이고, 미국이 좋다고 하면 좋은 것이 되는 것이지. 공자는 우리 조상의 사고체계, 문화, 삶, 그 전반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행사했다. 그를 모르고, 논어를 모르고 우리 조상에게 다가갈 수 없다. 아, 동양의 전통이여! 이천 년간 한중일 동북아를 지배한 큰 사상과 문화를 이제는 전혀 배우지 않는다니 너무나 안타깝다. 교양으로라도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닌가? 저 유명한 논어 1장 1편을 소개하고 오늘 글은 마무리하자. ------------------------- 1-1.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1-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배워 때에 맞추어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뜻을 같이 하는 자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 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 학이시습지, 부역열호? 공자는 배움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다. 배우고, 배운 것을 내 몸에 익히는 것이 어찌 기쁘지 않은가? 이렇게 배워 익히는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먼 곳에서도 찾아와 함께하니 어찌 즐겁지 않을까? 첫 문장도 내 가슴을 크게 울리지만, 이 문장의 마지막이 내 가슴을 저린다. 내가 배우고 익히는 것은 누구한테 나 이렇게 잘난 놈이다 자랑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다. 그 자체로 내가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이렇게 배우고 익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보통의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이상한 생각을 하는 이상한 놈이라고 심지어 욕까지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다. 공자님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전엔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인 삶을 살지 않았던가? 이는 예수님도, 부처님도, 소크라테스도 다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군자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심지어 배척해도 노여워 하지 않는다. 이미 내가 배워 익히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하기 때문이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하루 하루 행복하다. 하루 하루 배워 내 몸에 익히니 어찌 늘 기쁘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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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이어서... 2-13.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 其言而後從之."
2-14. 子曰: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2-15.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참으로 명언이다. 무엇을 듣거나 배울 때는 반드시 생각을 해야 한다. 그것을 비판적 사고라 하나? 어쨌거나. 먼저 나 자신을 반성하며, 논어 한글 역주 1권 독후감을 여기서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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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논어한글역주 1권, 지난 번에 이어서.
------------------------------------- 앞서 말했듯이 자공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여기 자공의 질문은 학문하는 자로서 이재에 밝은 자신의 파라독시칼한 상황에 대한 깊은 반성의 톤으로 시작하고 있다. 자공의 질문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신이 반성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리치를 드러낸 것이다. "선생님! 빈궁하면서도 아첨하지 아니하고, 부유하면서도 교만치 아니한다면 그래도 훌륭한 삶의 자세라 할 만 하지 않겠습니까?" 이 한 질문은 자공에 있어서는 뼈저린 반성의 외침이었다. 내가 지금 비록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말자! 또 세상이 바귀어 내가 돈을 다 잃어버리고 가난하게 되었을지라도 아첨하지 말자! 이렇게만 살면 우리 훌륭한 공자님의 제자라 할 만하지 않을까? 자공은 공자님의 입에서 "너 참으로 훌륭하다"는 긍정의 말씀을 잔뜩 기대했을 것이다. 그 긴장의 순간! 공자의 입술에서 떨어진 한마디는 무엇이던가? "可也." 이 순간 자공의 가슴이 저미어졌을 것이다. 철컹! 결코 긍정의 대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야可也"는 부정의 온화한 표현일 뿐이다. 중국사람이 좋아하는 "츠아뿌뚜어러差不多了"란 표현과 차이가 없는 표현이다. 그것은 "하오지러好極了"가 아닌 것이다. 그 다음엔, "커스可是"(but)로 연결되기 마련인 것이다. 공자가 자공의 질문에 대한 부정 끝에 제시한 새로운 차원의 긍정적 진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빈궁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자만 같지 못하다. 빈(貧)에 대한 무첨(無諂)이나, 부(富)에 대한 무교(無驕)는 모두 "무無"라는 부정사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부정적 가치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부정적 가치에 의한 소극적 대처로써는 군자다운 삶을 만들어 갈 수가 없다. 공자는 빈(貧)에 대한 락(樂)을, 부(富)에 대한 호례(好禮)를 새롭게 제시한 것이다. ..........(중략)............ ------------------------------------- ------------------------------------- 1-16.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1-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라.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할지니." 이 장은 별다른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학이] 편의 첫 장에서 이미 논파한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을 이어 [학이]편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공자의 일생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데 대한 한 맺힌 생애였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한을 새로운 보편적 인(人)의 간(間)의 지평으로 확산시켰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한이 있다면, 우리는 그 한을 역으로 내가 이 순간 남의 훌륭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자각의 내성으로 회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 2-3.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2-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정령으로써 이끌고 형벌로써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이 면하기만 할 뿐이요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나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사람들이 부끄러움이 있을 뿐 아니라 떳떳해진다." ....(중략)......... "도지이정道之以政"의 "도道"는 "치리治理"의 듯이 있고, "인도引導"의 듯이 있다. 황본, 정평본에는 "도道"가 "도導"로 되어있다. "정政"을 고주(공안국)는 "법교法敎"라 하였다. 정법(政法), 정령(政令) 정도의 듯이 될 것이다. 신주는 "법제금령法制禁令"이라 하였다. "제齊"는 가지런히 한다, 정돈한다, 뒷처리한다는 뜻이다. 과거의 법가적 법의 개념은 민법(民法)이 아닌 형법(刑法)이었다. 다시 말해서 법을 통해 민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타부의 강요며, 총치자의 권익을 위한 질서의 강압이며, 형벌의 강제였다. 그러므로 정령(政令)으로 이끈다는 것은 형벌로 정돈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면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면免)이라는 글자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형벌을 모면키만 하는 타율적 행위를 말한다. 행위의 자율성이나 도덕적 의지는 전무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치無恥" 즉 수치를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법령에 의하여 질서가 잘 잡혀지는 사회라 할지라도 그 사회의 성원에게 수치감이 없다면 그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맨하탄을 가볼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그 사회 질서가 대체적으로 폴리스의 강력단속에 의하여만 유지되고 인간이 점점 수치감을 모르고 뻔뻔스러워져만 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데, 이것은 미국사회가 퓨리타니즘 이래로 축적해온 그 나름대로의 도덕적 기반을 상실하고 근원적인 해체로 진입하고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바로 우리사회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로 적용되어야 할 우려일 것이다. 동양사회의 전통적 미덕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 "수치恥"라는 한 마디인 것이다. 우리문화는 "수치의 문화"인 것이다. 사회의 성원이 서로간에 "수치"를 아는 사회, 서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사회, 그것이 바로 유교가 포기할 수 없는 인간학이다. 그래서 말한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유치차격(有恥且格)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덕(德)이 정(政)과 대비되고, 예(禮)가 형(刑)과 대비되었다는 것이다. ------------------------------------- 이 구절을 보며, 우리 사회를, 그 구성원인 우리 하나 하나를 돌아보게 된다. 덕과 예를 가르치지 않고 행하지 않는 사회. 법대로만 한다고, 그 구성원이 행복하거나 그 사회가 아름다워질 수는 없다. 법은 최악을 면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일 뿐.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부끄러움은 모르는 가운데 떳떳하고 당당하지 못한 사람들. 굽신굽신대기 바쁜 우리들. 이것이 우리가 오랜 기간 지켜온 우리의 좋은 문화를 잊은 결과다. 나부터라도 덕과 예를 공부하고 실천하려 노력할 때, 그것이 주변에 미칠 것이고 조금씩 내가, 내 주변이, 그리고 이 사회가, 우리들이 부끄러움을 아는 가운데 당당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행복한 곳이 되지 않을까?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오늘은 여기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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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 저번 글에 이어서. ------------------------------- 1-6. 子曰: "弟子, 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위에서 제자는 젊은이를 일컫는 말이다. 야하다는 것은 짐승같이 된다는 것이다. 이 장의 핵심은 결국 먼저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집안에서는 효를 행하고 밖에서는 아랫사람으로써 사람들을 공경하며 대하고 말할 때는 책임질 수 있는 말 믿음 있는 말만 하시오. 사람들을 사랑하고 인한자를 가까이 하시오. 이 모든 것을 실천하고 여력이 있으면 공부를 하시오. 정말 주옥같은 말씀이다. 의사, 법관, 기술자, 사업가, 과학자 등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러한 것이 되기 위한 공부 이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사람이 되는 공부는 전혀 가르치지 않는, 이것과 반대로 돌아가는 요즈음의 세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병폐들과 불신을 보며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비록 나는 이러한 것을 전혀 배우지 못했지만 너무 늦기 전에, 우리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 그런데 이러한 의례들을 우리는 허례허식의 구속으로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예는 예로서 독립되는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는 반드시 악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악이 없는 예란 존재할 수가 없고, 예가 없는 악이 존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양자는 고례에 있어서는 더욱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과거의 모든 집례자가 실제로 악사들이었다. 어떤 때에 누가 등장하고 어떤 의복을 입으며 어떤 기물을 활용하고 어떤 음악이 연주되는가, 이러한 구체적 세목에 밝은 자는 악관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즉 예의 핵심이 악에 있었던 것이다. 예는 본시 지루한 것이요, 분별을 위한 것이요, 서열을 가리기 위한 것이요, 공경키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악은 본시 즐거운 것이요, 같음을 위한 것이요, 서열을 초월키 위한 것이요, 친함을 위한 것이다. 악이 없는 예는 맹목적 형식이 되고, 예가 없는 악은 감정이 낭자한 난장판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공자 이전의 교육기관들의 교수들이 모두 악사였다는 사실과 공자가 어려서부터 음악의 연주와 연구로서 출세의 기반을 마련케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사태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예악의 마당이 분화되고 외교예식은 불란서식 프로토콜을 중심으로 하는 딱딱한 의례가 되었고, 일상생활 속의 모든 절목도 의미없이 흐트러져 버렸다. 상례는 병원 영안실로 가고, 혼례는 천박한 예식장으로 가고, 음주례는 룸싸롱이나 노래방으로, 그리고 음악은 콘서트홀로 가버렸다. 그러니까 예는 예대로 형식화되어 재미없게 되고, 악은 악대로 전문화되어 삶의 무대를 떠나 방관자들의 무대로 올라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고대 선왕지도는 인문학의 총화였으며, 악과 예가 조화되어 어떻게 참가자들 모두에게 황홀한 엑스타시의 경험을 안겨주는가 하는 데로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 일상생활 속의 모든 절목도 의미없이 흐트러져 버렸다. 상례는 병원 영안실로 가고, 혼례는 천박한 예식장으로 가고, 음주례는 룸싸롱이나 노래방으로, 그리고 음악은 콘서트홀로 가버렸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구축해온 전통을 부정하고 잊었기에, 그 속 뜻은 사라지고 형식만이 남았다. 그것들을 왜 하는지도 모르고 형식만 남아 흉내내다보니 효율성, 편안함, 경제성만을 구하는 쪽으로 흐를수 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근 20년 사이 병원 장례식장 아닌 곳의 상가를 보지 못했다. 혼례는 실제 서양에서는 어떤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지 모르나, 뭔가 그들을 대충 흉내내어 변질된, 간단한 방식으로 턱시도 빌려 입고, 드레스 빌려 입고 30분 혹은 1시간 마다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예식 공장에서 찍어내듯 치러질 뿐이다. 돈이 좀 많은 사람이라 해도 조금 더 긴 시간, 넓은 장소에서 비싼 음식을 차려놓고 치른다는 것만 다를 뿐, 그 내용의 공허함은 같다. 폐백이란 것도 사진찍기 요식행사. 그 누구도 왜 이렇게 하는지, 뭘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결혼식을 치른다. 혼례와 상례가 우리 인생에 가장 큰 행사 중 하나라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가장 중요하고 큰 행사를 이런식으로 치르고 흉내만 내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일상 삶은 얼마나 생각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 ------------------------------- 1-14.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1.1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거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하며, 일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삼가할 줄 알며, 항상 도가 있는 자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르게 한다. 이만하면 배움을 좋아한다 이를만하다." ------------------------------- 참 어려운 말이다!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사는데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한다니. ㅠ.ㅠ 읽을 때는 멋지다 생각하지만, 이놈의 욕망이 하고싶은 것이 너무 많다. 아! 욕망 덩어리 나 자신을 그냥 그대로 바라 보며 오늘은 이만 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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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논어강설>이란 책으로 논어에 도전했다가 다 읽지 못하고 실패했다. 읽다보니 너무 지루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논어강설>이란 책의 지루함이 아니라 논어에 대한 지루함이였다. 현시대와 맞지 않는 이야기들도 있고, 무엇보다 뻔한 이야기들이 나열되어있는 느낌이였다. 그러다가 신영복 교수의 <강의>를 읽고 논어에 한번 더 도전기회를 노리다가 이번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도올교수의 책은 여러권 읽어봐서 그의 에너지와 재미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 책도 역시 도올교수임을 입증하는 책이다. 지식을 지식으로 전달하지 않고 잘 곰씹어서 독자들에게 전한다. 따라서 지루한 논어의 이야기가 새롭고 재미있게 탄생한다. 읽으면서 너무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듯한 부분도 있고, 또 너무 자신의 주장에 매몰되어 일반적인 학계의 상식에서 벗어나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뭐 또 이런게 도올교수의 매력이 아닌가 하고 재밌게 읽었다.
특히 이책에서 공자의 모습을 새롭게 부각한것이 인상적이다. 형식적인 예절과 고리타분한 전통을 고집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서의 공자가 아니라, 형식보다는 내용에, 그리고 모든 것에 열려있는 개방적인 모습, 그리고 인간적인 공자의 모습이 친근하고 공감이 간다.
이번에 논어를 읽으면서 더욱 재미를 더하게 된것은
1. 논어의 이야기를 나와 나의 주위를 통해서 적용함으로써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게 다가왔다. 단지 저자의 해설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에게 또는 현재 일어나는 일에 적용해보니 논어구절의 맛을 알게 되었다.
2. 초보지만 한문원문을 먼저 해석도 해보고 또 해설을 읽고 다시 원문을 보고하니, 한문 공부가 되는듯하다. 그리고 점점 뒤로 갈수록 원문으로 해석하는 실력이 향상되는 듯해서 그 재미가 쏠쏠하다. 예전의 <논어강설> 책을 참고용으로 같이 보고 있다.
이제 겨우 1권을 읽었지만 2, 3권도 계속 읽을 생각이다.
책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책 가격이 비싸다고 할수 없겠으나, 한권도 아닌 세권을 사기에는 개인적으로 부담스러운것이 현실이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다보니 좀 쫒기듯이 읽어야 하는것이 아쉽다.
어째든 논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아주 좋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