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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두 사람의 멘토가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이 도올 김용옥이다. 일면식도 없었고, 앞으로도 만날 가능성이 별로 없다. 다만, 그 저서를 통해 배우고 있고 느끼고 있다. 논어역주는 내가 읽은 도올 저서 중 최고봉이다. 늘 공부하는 사람이라, 더 오를 가능성은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깊이와 품격은 결코 쉽게 얻어질 수가 없다. 도올은 이 책에서 공자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공자의 입을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음악과 예를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고 학문을 사랑하고, 늘 꿈이 있고 그 꿈을 펼치고 싶은 이상이 있고, 그러나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 그럼에도 다시 또 학문과 인생을 사랑하고 부단히 자신을 연마하고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 공자 이야기지만 결국 도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 방식으로 요약하자면 도올은 " 한 갑자가 지나고 나서 보니, 공자는 성인이 아니고 나 도올과 같은 학문과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슴을 알게 되었다" 라고 차분하게 도올표 논어를 서술하고 있다.
깊이 있는 인문학자의 글에는 젊음의 환희 또는 죽음의 그림자라는 두 개의 향기가 있다. 젊어 기개가 넘칠 때에는 환희의 내음이 글 사방에 넘쳐흐른다. 거리낌이 없고, 배려가 없다. 혁명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을 때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는다. 게바라와 랑보의 글이 그렇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서서히 환희 대신 죽음의 그림자가 문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글은 깊어지고 넓어진다. 부드러워 지고 읽는 맛이 느껴진다. 도올의 이 글에서 나는 죽음을 준비하는 힌 인문학자의 마음을 읽는다. 그것은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다. 깊은 자기 성찰이고, 우주속에서 생명론적 순환속에서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스스로 전체와 대면하는 자신의 고독함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많이 깊어졌다. 공자와 하나가 되었다. 어느 것이 공자의 말씀이고 어느 것이 도올의 시편인지, 분별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모든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자신에 대한 글쓰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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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결코 70000원이 아깝지 않은 책이다. 도올선생님의 초인적인 노력과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인류문명의 전체적인 통찰과 한자문명의 위대성을 잘 말해주며 나아가 미래를 사는 우리들의 비젼을 제시해 주는 책이다.
공자는 과거의 중국에 살았던 사람이 아니고 현재 우리와 같이 숨쉬는 유기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느낄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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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도서관에서 빌려본 뒤 2주간에 한권을 채 읽지 못하고 반납한 후 큰 마음 먹고 3권을 구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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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재해석 하여 읽는 맛이 색다르게 다가온다. 영혼을 살찌우게 만드는 것 같다. 공자라고 하면 지금 세상의 사람들은 저멀리 위에 있는 근엄한 존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렇게 고차원적인 존재는 아니고, 보통사람에 비해서 학식이 뛰어난 인물일 뿐이다. 책과 말을 통해서는 매우 좋은 내용만을 이야기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여자들을 너무 낮은 존재로 만든것이 유감일 따름이다. 하긴 이 문제는 동양뿐만이 아니라 서양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참고로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지가 불과 수십년전의 일이다. 미국은 1960년대, 그리고 스위스에서는 무려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참정권이 부여되었다고하니,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 것 같다. 아뭏든 이러한 부조화가 인간이 가지는 한계일 것이다. 겉으로는 좋은 말을 하지만 뒤로는 허접한 일을 저지르는 유명인사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목격하고 있다. 논어좀 읽고 언행일치가 되었으며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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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삼경의 대표 논어를 드디어 완독했다. 워낙 익숙한 구절이 많아 노자를 처음 접했을 때와 같은 신선한 충격은 많지 않았지만 송나라 유학자들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공자의 모습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이미 언제부턴가 기소불욕은 나의 도덕관이 되었고, 신종추원은 나의 종교관이 되었다. 이 책은 논어과 관련된 다양한 문헌학적 논의들이 포함되어 있어 나와 같은 초보자들에게 필요없는 내용이 많다. 주희의 주 또한 고리타분한 내용이 많아 대부분 그냥 넘겨서 봤다. 도올의 해석과 해설 위주로 살펴보다 보니 두꺼운 책을 독파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나 보수적인 유생이 보기엔 불편한 표현이 많이 담겨있으므로 유의하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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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선생님 강의를 접하기 전에 알베르 카뮈의 말을 먼저 들었다. "나라는 '존재'는 육체의 덩어리라는 '실존'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물,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부조리한 삶에 대한 있을 수 있는 대책으로는 '자살' '희망' '반항'이다. 이 가운데 자살이 해결책이 못 되는 것은 부조리의 한쪽 항인 '인간의 의식'을 삭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희망, 즉 종교가 해결책이 못되는 것은 부조리의 다른 쪽 항인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삭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과 종교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회피일 뿐이다. 그렇다면 가장 존귀한 것은 의식의 끊임없는 유지라는 것인데, 반항이란 세계의 모순을 살아있는 의식으로 바라보며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카뮈의 말은 나의 가치관을 확립하고 자신감을 복돋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반항의 가치가 너무 고귀했기 때문에,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도올 선생님 강의에서 특히 감명받은 부분은 화이트헤드를 소개하는 부분이다. 열역학부터 시작이 된다. 역사는 시간을 가진 모든 사건의 과정이다. 시간의 특징이 비가역적이라고 한다. 시간의 층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과 일치한다. 엔트로피=무질서의 정도로 이해하면 쉽다고 한다. 즉, 열역학에서 뜨거운 물체가 차가운 물체로 온도가 전도되어 온도가 같아질 때 불교에서는 이를 무차별이라고 한다.
역사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 즉 무질서의 정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내 방이 시간이 흐를수록 지저분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엔트로피의 감소 현상이 일어난다. 바로 청소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패가 일어난다. 시간이 흘러감=엔트로피의 증가=부패. 그런데 봄이 오면 생명은 싹을 틔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부패가 아닌 생명이 싹 튼 것이다. 생명=엔트로피의 감소.
물의 역사는 흘러간다. 아래로. 하향이다. 물의 역사는 downward, downward이다. 즉, 물의 역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차별적 방향으로 진행 된다는 것이다. 냇가에 있는 돌이 동그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물의 역사가 무차별적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모난 부분이 깍여가는 것이다. 하지만 냇가에 엔트로피의 증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엔트로피의 감소가 바로 붕어이다. 엔트로피가 여김없이 증가하는 역사에 대한 위대한 반역자가 있는데 그것을 바로 생명이라 한다.
다윈은 적자생존을 생존경쟁의 법칙으로 진화을 설명했다. 적자생존 개념으로 보자면 도봉산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적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간단히 깨질 수 있다. 진화는 환경에로의 성공적 적응이라는 측면에서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환경을 자기의 삶을 위하여 능동적으로 개변시키는 충동에서 진화는 일어난다. 한마디로,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안정적 상태를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어떤 노력이 있기에 진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도봉산의 바위가 적자이고 그에 비하면 인간은 한 없이 약하다. 하지만 인간은 고등하게 진화된 것이다. 진화될수록 불안정한 요소가 많다. 그 어떤 힘을 도올 선생님은 이성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다. 그 우주적 이성을 충동이라고 표현했다.
존재에 있어서는 즉, to live에 있어서는 바위가 더 낫다. to live well이라는 충동이 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충동은 to live better에 있다. 생명의 환경에 대한 능동적이 공격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충동 근저에는 이성이 있다. 이 충동은 엔트로피의 감소=upward=우주의 이성(또는 신이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이란 욕망들을 제어하는 또 하나의 욕망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이성=욕망이다. 생명의 특질은 막이다. 차별적인 특수상황을 만들기 때문이다. 차별을 유지시키기 위해 능동수송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상피세포가 막이다. 따라서 우리는 피부라는 껍데기로 막에 싸여 있어야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생명을 유지하기 위해-끊임없이 엔트로피의 감소=반항=무차별적 대한 항거=욕망=이성을 촉구한다. 우리가 사막에 가면 수분이 계속 빠져 나간다(열역학의 법칙에 따라 사막의 수분 상태와 우리의 수분 상태가 동일해지기 위해)=엔트로피의 증가. 그러나 우리는 생명이 있기에 갈증이 생긴다(사막의 수분 상태와 동일해지려는 엔트로피 증가 현상에 대한 반역)=엔트로피의 감소. 무차별한 대한 항거가 일어나는데 그게 바로 갈증(욕망)이다. 욕망은 아나킥하다. 즉 무정부적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막에서 물을 발견하면 갈증상태인 우리는 서로 물을 차지하기 위해 다툰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다. 무정부적인 상태=욕(慾)이 있어야 생명이다. 그런 상황에서 물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이성이 작동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물을 위해 다투는 욕망보다 상위의 욕망=이성이다.
그래서 내가 이 강의에서 얻은 결론은 내가 존재하는 것이 단순히 to live로 한정한다면 나는 바위보다 못한 존재이다. 적어도 적자라는 개념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더 잘 살기 위해 환경에 대한 능동적 공격을 한다. 환경을 나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반항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반항하지 않는 삶은 생명 없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 없는 삶은 욕(慾)이 없는 삶이고 또한 이성(Reason)이 없는 삶이다. 삶이라는 단어도 어색하다. 욕망=이성=무차별에 대한 항거=엔트로피의 감소(청소)가 없다면 나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도올의 논어이야기 리뷰 더보기 http://someno.tistory.com/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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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의 『논어한글역주』를 읽고 논어(論語)는 한국인에게 사랑받고 꾸준히 읽히고 있는, 삶의 지혜와 철학을 담고 있는 고전이어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올 김용옥의 『논어한글역주』는 감히 뭐라고 논평하기 어렵다. 우선, 도올 김용옥의 폭넓은 역사, 철학적 지식과 사유 세계를 감히 일반인으로 평가하거나 토를 다는 것이 감히 초등학생이 박사의 논문에 대하여 뭐라뭐라 말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일반 논어 해설서와 확실히 구별되는 도올의 『논어한글역주』가 갖는 장점이다. 도올은 세속적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으로써의 공자의 인간적 삶과 깨달음에 중점을 두고 논어를 해제(解題)하고 있으며, 후대의 공자 제자들이 공자를 성인(聖人)시하는 공자에 대한 허구(Fiction)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경계하는 한편, 논어(論語)속에서 짱구(공자의 이름 구(丘)는 언덕모양으로 생긴 머리모양을 딴 오늘날로 치면 짱구)라는 비천한 출신의 공자(孔子)라는 인간의 삶을 만나는 장으로서 논어를 해석하고 읽어 내려간다. 도올은 논어에서 나타나는 인간적인, 인간사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보여주는 공자상은 성인(聖人)화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논어는 유교의 이단(異端)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논어에서처럼 한 인간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펼쳐진 문헌은 고대 세계에 그 유례가 없으며, 논어는 인류문명사의 한 축복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논어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21세기의 유학은 조선에서 떠 받든 주희(朱熹)의 영향을 벋어나 새로운 유학이 되어야 한다는 자못 교만스러운 도올의 주장은 그가 집필하면서 참조한 광대한 참고 문헌을 살펴보면 감히 논박할 엄두를 잃게 함에 부적함이 없다. 아울러 말미의 탈고(脫苦)의 장에서 도올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나는 본시 자비(自卑)를 싫어하고 불필요한 겸사(謙辭)를 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심으로 나의 학문의 부족함을 절감했다” 라는 처절한 자기고백(自己告白)과 울컥한 심정을 대신하여 인용한 시 한 구절은 도올의 심경을 보는 듯하다.
끝으로 도올의 『논어한글역주』에서 강조한 논어의 핵심중에서 나에게 인상깊은 교훈을 주관적으로 꼽자면 i) 말만 번드르하게 잘하는 사람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높이 산 공자의 경험적 가르침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ii) 자신의 충신(忠信)함을 넘어 보편적인 안목으로로의 배움을 추구하는 호학(好學)의 자세, 끊임없이 배움을 추구하는 공자의 삶의 자세라고 할 것이다. -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아울러 논어에서 지금의 시기에는 말도 꺼내지 못하는, 그러나 얼마전까지만 해도 들을 수 있었던 과거의 가치관, 예를 들면,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가 어려우니 가까이 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등등의 문구를 발견하는 것을 논어를 읽으며 발견하는 색다른 재미이다. - 子曰, “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P.S. 논어를 학문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고자한다면 굳이 도올의 논어한글역주를 읽을 필요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