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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숨겨진 진실 밝혀내기.
보수나 진보보다 진실이 기준이 되는 삶을 위해
촛불집회로 바라본 진실에 대한 접근
사회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선택을 통해 나의 의견을 발표할 때 '보수'와 '진보'로 구분을 한다.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람이 진보이고 참석하지 않은 사람이 보수인가?
광우병 수입소의 관한 진실을 파악하고 나의 명확한 의견을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정확한 사실을 알아야 하고 사회가 마땅히 밝히지 않아도 많은 이들에게 유익한 쪽으로 의견을 내어야 한다.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보수는 현실을 유지하려는 경향이고 진보는 현실을 바꾸려는 경향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는 타인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는 사고를 지닌 사람들의 성향이고 진보는 자신보다는 타인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사고를 지닌 사람들의 성향이다.
보수와 진보의 선택이전에 더 중요한 선택이 있다. 거짓이냐? 진실이냐? 는 것이다. 거짓은 스스로 거짓임을 털어 놓지 않는다. 모든 거짓은 진실을 가장 한다. 더 큰 문제는 진실의 가면을 쓴 거짓에 스스로 속아 거짓을 진실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숱하다는데 있다. 언제 어디서나 진실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일. 그 어떤 이데올로기 보다 진실에 충성하는 일, 바로 그것이 청소년이 순수성을 올 곧게 지키며 살아가는 첫 걸음이다.
2. 자기발로 우뚝 서기.
자신의 두발로 우뚝 서지 않으면 진실은 보이지 않습니다.
육체적 직립 정신적 직립 ‘육체적 직립’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자라나는 것을 의미하고 사람의 ‘정신적 직립’은 10세 무렵 자기세계를 열어가다 15세를 전후해 본격적인 자아정립을 하게 된다. 공자도 15세 무렵 학문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열어 가려고 학문적 탐색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정신적 직립이란 자기 두발로 서서 자신의 눈으로 ‘세상읽기’를 뜻한다.
[사회화. 우리가 스스로 두 발로 서려면 조금 더 깊이 성찰해야 할 개념이다. 국어사전에서 그 뜻은 ‘인간이 사회의 한 성원으로 생활 하도록 기성세대에 동화함. 또는 그런 일’로 정의하고 있다. 사람이 자신을 그 사회에 적응해 가는 과정이다. 사회화가 사람에게 필요한 까닭은 사람의 기본 조건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동물과는 달리 미숙한 존재로 태어나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사람들과 만나면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 기술, 가치, 규범, 태도를 배워 가야 한다. 그것이 사회화이다. 맨 처음 가족이 모여 사는 집(가정)은 사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사회생활의 기본 단위이다. 또 유치원에서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과 어울리고 학습하면서 세상을 배워 간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학교 못지않게 영향을 주는 곳이 대중매체이다.
사회화란? 기성세대의 틀로 새로운 세대를 담아내는 과정이다. 그때 사회화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순응하는 과정이 된다. 20세기 후반부터 많은 지식인들은 개개인의 자발적 의지를 무시하는 사회화 개념 자체를 재구성하고 나섰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사람이 조지 허버트 미드이다. 미드는 개개인의 ‘자아’가 일방적 주입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 작용의 결과로 형성된다고 보았다. 자아를 ‘주체로서의 자아‘와 ’객체로서의 자아‘로 나누었다. 부모나 교사처럼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을 ’중요한 타인‘이라고 개념화 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살고 있던 세대가 만들어 놓은 질서 속에 출생하고, 그 속에서 중요한 타인들을 만나며 사회화 하게 된다.
그 중요한 타인 가운데 대중매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중요한 타인’들에게 두루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타인’이다. 이제 스스로 물어보기 바란다. 타인이 행동하라는 대로 행동하는 ‘수동적 자아’ 곧 객체로서의 자아‘로 살고 싶은가? 아니면 스스로 결정하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자아‘로 살고 싶은가?
스스로 주체로 살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누군가에 철저히 기만당한 체 살아가고 있다. 우리사회가 걸어온 역사에서 구체적 예를 들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청소년들은 서당에 다녔다. 민주주의 사회의 기준으로 본다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신분제도를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수천 년 동안 인류 구성원들이 묵묵히 받아들이며 살아간 비결’도 바로 사회화에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 [독립신문은 의병을 ‘비도’혹은 ‘폭도’로 보도했다. 개화파가 주축이 된 독립신문과 당시의 ‘계몽운동가’들은 동아시아 3개국 연맹을 주장하며 일본이 맹주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세상을 보는 눈, 논리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되새기게 된다. 세상을 개화파의 논리대로 읽으면 어떻게 될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경계의식은 시나브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1980년 5월 26일, 광주 시내에 울려 퍼졌던 방송내용이다. “지금 부산 앞바다에는 미 항공모함 두 대가 정박해 있습니다. 잔인무도한 저들의 살육이 더 이상 계속되는 것을 방지하고 광주 시민을 지원하기 위해 왔습니다. 시민여러분, 안심 하십시오” 라고 했다. 그러나 ‘광주 민주화 투쟁 대학생 본부’가 광주 시내를 돌며 가두 선전한 내용은 진실이 아니었다. 그 당시 미국은 광주 민주 시민을 학살하려는 쿠데타군의 추가 이동을 승인했다. 광주시민들은 올바른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된 정보를 믿고 방송했던 것이다. 당시 광주를 제외한 대한민국 전역에서도 광주의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었다.
자기발로 서고 싶은 사람에게 S 진실을 찾으려는 호기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자기 두 발로 서서 사회를 읽기 시작할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역사와 만나게 됩니다. 역사 속에서 사회를 돌아보고 전망할 때 비로소 진실을 온새미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인류의 길 톺아보기.
인류가 역사의 길을 쉼 없이 걸어온 힘은 사랑과 싸움이었습니다.
공룡은 137억년 전에 세상을 지배하면 살았던 동물들이다. 그들의 멸절과 그로인해 추측되는 우주의 신비, 그를 통해 지금 존재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깊은 성찰을 보여준 칸트는 세 가지 질문으로 인간 본질에 대해 의미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첫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셋째 나는 무엇을 소망할 수 있는가 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란 질문으로 귀결되는 이 질문들을 통해 칸트는 계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계몽이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성숙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이다.
미성숙이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성 자체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이성을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서 말미 암기 때문이다. 과감히 지혜롭고자 하라! 당신 스스로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바로 계몽의 표어이다.
그러면 성숙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이성을 사용”하는 단계이다. 자기발로 우뚝 서기이고 자기 두 눈으로 세상 보기 이다. 칸트는 자신의 두 눈으로 세상을 읽으려는 결단과 용기를 ‘대부분이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다며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적인 성숙에 따라 이미 오래전에 다른 사람의 지도로 부터 해방되었음에도 게으름과 비겁으로 일생 동안 기꺼이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게 되고 쉽사리 후견인에게 자기 자신을 내맡기게 된다. 미성숙에 머무는 것은 너무나 편안하다. 만약 나에게 이성의 역할을 해 줄 책이나 나의 양심이 되어 줄 정신적 지도자나 나의 건강관리를 판단해 줄 의사가 있다면 나는 수고스럽게 스스로 고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
300만년 넘도록 인류를 존재케 한 원천은 무엇보다 사랑이다. 여기서 사랑은 종교에서 말하듯이 거룩한 어떤 게 아니라 심오한 어떤 사색이 담긴 것으로 해석하기보다 너무나 잘알고 있는 진실이어서 오히려 잊기 쉬운 폭넓은 일상생활의 사랑이라 이야기 하고 싶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는 오랜 기간 노예제도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살아왔다. 수 천년 동안 엄격한 신분제에 바탕을 둔 계급제도는 사람을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역사는 사랑의 연쇄로 끝없이 이어지면서 신분 제도는 점점 느슨해 졌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지배세력이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피지배 계급에게 양보해 왔기 때문일까? 지배계급의 이성적 토론을 통해 문제점을 각성하고 평화적으로 특권을 양보해서 일까? 아니다. 싸움을 통해 피지배 계급이 인간 차별에 항의해 신분제도를 폐지하려는 싸움을 애면글면 벌여 왔기 때문이다. 평화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순수하되 결코 순진해서는 안 된다. 노예와 노예소유자 사이의 평화란 어떤 것일까? 노예의 ‘반란’ 아래로부터의 싸움이 없었다면 노예제도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을지 모른다.
신동엽의 장편 서사시 [금강 제 22장.
씻어내면 또 모여들 올 텐데,
씻어내면 또 또 열흘도 못 가 모여들 올 텐데,
이 맑은 피로만 채워 버리면 좋겠는데,
이틀도 못 가 검은 찌꺼기들은 또 모여들 올 텐데,
그러나, 내일 새 거품 모여 올지라도
우선, 오늘 할 일은
씻어내는 일,
저 하늘의 검은 찌꺼기 오늘 할 일은 모두 씻어내는 일.
4. 민주주의 나무 찾기.
민주주의는 21세기인 지금도 계속 가꾸어 가야 할 작은 나무랍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다. 인류가 걸어온 길에서 또렷이 확인할 수 있는 진실이다. 인간은 기나긴 시간 신분제도 아래서 보냈다. 민주주의를 옳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이라고 가정해 보라.
신분제도가 견고했던 조선 사회에서 대다수는 상민이나 천민으로 살아가며 억압과 모멸을 견뎌야 했다. 조선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모든 사회에서 왕의 역사는 수천 년을 이어 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해 온 비결은 다른 게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은 자신의 지배체제에 도전하는 귀족은 물론이고 가축 아닌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사람 자기 두발로 서고 싶다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잔인하게 삼족을 멸하기도 했다.
이러한 왕들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결코 평화적 집회가 아니었다. 아래로 부터의 싸움이었다. 그 핏빛 진실을 올바로 읽을 때 비로소 우리는 전쟁이 없고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 할 수 있다.
5. 자아 실현의 길 그리기.
인간은 창조로 자기를 실현하며 노동은 창조의 행복에 이르는 고갱이랍니다.
"나는 지금도 몇 개 위대한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그 다음에는 늙은 아이처럼 친절한 사람들 속 어딘가에서 내 지구상의 여정을 마치고 싶습니다." -베토벤-
미술가들은 피카소를 자신의 붓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사명을 타고 난 것 같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자아실현에 최선을 다했다.
죽음에 이르기 전 무엇으로 오직 하나뿐인 나의 삶을 실현해 나갈 것인가?
출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오직 일회적인 내 삶의 시간에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 그 물음에 답할 때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지 않을까?
샤르트르는 인생을 "B(brith)와 D(death)사이의 C(choice)"라고 말했지만, 저는 C에는 선택(choice)만이 아니라 창조(creation)가 있다는 진실을 강조하고 싶다.
인생은, 삶은 또 다른 의미에서 책에 비유할 수 있다. 모든 책은 처음과 끝이 있다. 책을 쓰는 주체, 곧 저자가 있다. 삶도 마찬가지이다. 개개인이 자신의 인생이 라는 책을 써 가는 저자이다. 그 책은 두꺼울 수도 얇을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이 주는 감동은 결코 책의 부피에 있지 않다. 책속에 얼마나 깊은 진실이 담겨 있는지가 중요 하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책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 것이다.
죽음 앞에서 삶의 자기완성에 중요한 기준은 그 삶에 얼마나 깊은 진실이 담겨 있는지, 자신의 삶으로 무엇을 창조해 냈는지가 아닐까? 그 진실과 창조의 고갱이가 우리 개개인 삶의 주제다. 그렇게 찾은 삶의 주제는 아마도 그 사람의 묘비명이 될 것이다.
직업은 “사회에서 생활 하는 사람들이 재능과 능력에 따라 업에 종사하며, 정신적 · 육체적 에너지의 소모에 따른 대가로서 경제적 급부를 받아 생활을 지속해 나가는 활동 양식”이다. 자신의 삶을 전게해 나가는 데 경제생활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기본 조건이다.
취미와는 달리 직업에 엄숙하게 다가가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직업은 그 자체로 즐거워야 한다.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서 창조적 활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해 나가는 게 한 사회에서 개인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직업을 선택할 때 주요한 기준은 인류의 행복과 자기완성이다. 두 가지는 서로 엇갈리거나 적대적이어서 한 쪽이 다른 쪽을 배제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 일함으로 써 비로소 자기완성을 이룰 수 있다. 그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만일 사람이 자신만을 위해 일한다면 설령 저명한 학자나 훌륭한 현자 혹은 뛰어난 시인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결코 진정으로 완성된 위대한 인간이 될 수는 없을 터이다. 역사는 이 세상 전체를 위해 일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높여가는 사람을 위인으로 인정한다. 최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준 사람을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기린다.
종교도 가르쳐 준다. 모든 사람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물은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그것을 부정할 용기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만일 우리가 인류를 위해 자신이 최선을 다해 일 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그 직업이 주는 짐의 무게에 주저 않는 일은 없을 터이다. 왜냐하면 그 짐이란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 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비열하고 보잘 것 없는 이기적 기쁨이 아니다. 이때 행복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이 된다. 이때 우리가 한 일은 조용히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면서 살아 있으리라. 그리고 우리의 죽은 고결한 사람들의 뜨거운 눈물로 적셔지리라.
6 신문과 TV 짚어 보기
더듬이가 제구실을 못하면 달팽이는 어떻게 될까요?
개인이 자신의 적성과 의욕에 따라 자아실현의 길을 그릴 때, 또 그 길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했을 때 사회 환경을 파악할 ‘더듬이’가 필요 하다. 이는 다만 청소년기 에만 필요한게 아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인간은 평생 사회 속에 끈임 없는 ‘사회화 ’과정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화 과정에서 진실과 다르거나 뒤틀린 대목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옳은가? 누가 어떻게 진실을 가렸는지, 왜 뒤틀렸는지 살펴보는 호기심도 사회화 못지않게 절실한 과제이다.
언론은 무엇보다 먼저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를 파악하고,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함으로써 앞으로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언론이 제구실을 온전히 못할 때 사회 구성원들의 삶이 받는 피해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넓고 또 깊다.
대중매체에 대한 교육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신문 활용교육이 처음 선보인 시점은 1950년 후반이다. 청소년들의 문자 기피현상을 우려해 학교수업에 신문 활용의 중요성을 신문업계차원에서 부각시켜 나갔다.
이 신문 활용교육의 주체가 발행인 들이다. 왜 신문 발행인들이 편집인들이 신문 활용 교육에 적극 나섰을까? 무릇 어떤 사회현상과 마주쳤을 때 누가 왜 그랬을까를 짚어 보는 게 그 현상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이다.
신문 발행인들이 의도한 활자교육과 미래 독자확보란 측면을 긍정적이나 내용면에서 보면 아무래도 신문에 대한 긍정적 요소만 강조 할 수밖에 없다.
신문에는 여러 분야의 새로운 정보가 날마다 실리므로 이를 활용하면 유익하고 실용적인 학습을 할 수 있다는 논리나, 신문을 일러 ‘살아있는 교과서’로 자부하는 모습이 그 보기이다.
신문지면은 있는 그대로 현실을 담아 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현실가운데 중요한 것을 추려서 담아내는 ‘현실 재구성’이다.
신문은 사실이 아니라 그림이다. 신문은 기사와 사진 표제를 3원색으로 삼아 현실을 그려나가는 그림이다. 신문이 그리는 그림은 신문을 읽는 수백만 명의 생각에 영향을 끼치므로 여론을 형성하니까 신문그림은 독자적 생명력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무릇 모든 그림이 단순한 현실 복사가 아니듯 신문 편집이 라는 그림 또한 현실을 그대로 복사 하는 게 아니다. 무수한 삶의 현실 가운데 어느 것을 기사화 할지 선택하고 결정한다.
기사의 선택과 결정은 가치 판단을 의미하며 가치판단은 어쩔 수 없이 주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예로 중요한사건 현장에 기자가 있더라도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해 기사화 하지 않으면 그 사건은 ‘없는 일’이 된다. 특히 한 가지 신문만 보는 정기 구독자가 대부분인 우리사회에서 특정 신문이 보도하지 않는 사실은 그 신문 독자에게는 ‘없는 일’이 된다.
취재기자가 기사화 했더라도 취재부장과 편집 기자와 편집부장의 손을 거쳐야 기사가 되는 것이다. 기사화된 기사들은 최소 취재기자, 취재부장, 편집기자, 편집부장, 편집국장의 손을 거쳐 ‘선택받은 사건’들이다.
단순한 신문읽기를 넘어 신문 편집을 보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첫째. 신문지면마다 그 그림을 그린 편집자의 의도를 헤아려야 한다. 화가의 작품에 그의 철학과 시대적 조류가 담겨있는 것처럼 신문이라는 그림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정된 기사의 수와 그에 따른 제목과 사진을 담아야 하는데 그 의미들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둘째. 신문그림이 과연 올바른 가치 판단을 담고 있는지 찬찬히 살펴야 한다. 신문이라는 그림 속에 편집자의 가치 판단만이 아니라 편집에 간섭하는 외적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민주화로 진전됨에 따라 신문편집에 따른 영향력은 시나브로 줄어들고 있다. 반면 대기업의 영향력을 커지고 있다. 광고 때문이다. 신문에 광고가 없으면 신문을 발행할 돈 곧 물적 토대가 바닥이 나고 만다.
TV가 우리 일상생활을 점점 잠식해 들어오면서 현실세계를 대체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TV를 보지 말자는 주장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회 현실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더듬이’는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프로듀서들이 의도를 했던 아니든 결과적으로 현실을 은폐하기도 한다는 진실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화사한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즐길 때 오직 상품을 팔려는 ‘일념’으로 눈과 뇌리에 융단 폭격하듯 화려한 이미지를 강렬하게 쏟아 붓는 광고에 ‘유혹’될 때 우리가 극복해 가야 할 현실의 문제점과 삶의 고통은 아예 잊게 된다.
선진국에서도 신문과 텔레비전의 비평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이유도 대중매체가 지닌 위험성 때문이다. 자아실현의 길을 걸어가야 할 청소년에게 대중매체 짚어보기는 ‘필수 교양’이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짚어보는 습관을 지닐 때 그 지면과 화면 안에 우리가 미처 모르고 살았던 이야기들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진실을 하나하나 발견 할 수 있다.
7 자기 주도 학습 익히기.
정보보다 중요한 슬기를 얻으려면 어떤 공부를 할까요?
10대 청소년들을 경쟁중심의 학교 교육이 인간성을 높여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황폐화 시켜가고 있는 현실이다. 문제는 학교가 언론 못지않은 사회화의 핵심기관이라는데 있다. 더구나 청소년기에는 학교생활이 중심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학교를 ‘대학 입시의 수단’ 정도로 무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다수 부모들 자녀들에게 명문대 입학라라는 목표를 위해 경쟁적으로 과외를 시키고 있다. 우리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왜? 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명문대 출신이 아니면 불안정한 직장에서 가난하게 살고, 심지어 생계가 곤란해지기 십상인 학벌 공화국이 대한민국이다.
경쟁중심의 학교교육, 그것은 경재중심의 대한민국과 고스란히 닮은꼴이다. 교육제도와 관련법을 바꿀 제도 정치권은 경쟁 중심의 교육을 강조하는 쪽이 다수이다. 획일적 경쟁 중심의 교육을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정치세력은 국회에서도 절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교육현실을 바꿀 제도 변화와 그를 위한 입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교육이 강조하는 경쟁이 일차원적이고 획일적 경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다양한 재능을 지닌 10대 청소년들의 모든 잣대가 대학입시를 중심으로 한 성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국어 구사능력과 시적재능이 뛰어난 학생이 과연 시인의 길을 걸어 갈수 있는 확률은? 일차적으로 부모들의 반대에 부딪힐 것이고 반대를 이겨 대학 국문학과에 들어 가기위해서는 영어와 수학을 잘해야 한다.
전국단위의 글짓기 대회에서 장원을 할 때 특별전형도 가능하지만 그것은 예외적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영어· 수학 중심의 획일적 경쟁으로 모든 청소년의 ‘천부적 재능’을 줄 세우는 경쟁, 그 경쟁의 서열이 평생을 좌우하도록 만들어 놓은 ‘학벌 경쟁’ 과연 그것이 제대로 된 경쟁인가?
20세기 후반,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 기술 혁명으로 사회 구성원의 다양한 창조성이 경제 발전, 좁게는 기업성장의 동력이 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획일적이고 암기 중심의 경쟁으로 청소년을 옭아매는 지금의 교육체계는 한국의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악습이다.
자기주도 학습이란 학습자가 주도가 된 학습을 말한다. 학습자의 주도성과 자기관리가 무엇보다 관건이 된다. 21세기에는 개개인의 창조적 노동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시대가 펼쳐진다.
기업들 또한 창조적 자본주의를 준비해 가고 있다. 이제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초·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목은 결코 대학 입시를 위해 암기만 해야 할 수업이 아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의 대다수는 앞으로 청소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들이다. 단순히 유용성만 있는 게 아니다.
과학, 물리, 화학, 생물 교과목은 오랜 세월 인류가 탐색해 온 우주와 생명의 신비에 다가갈 수 있는 고갱이들을 간추려 들려준다. 윤리· 세계사· 국사· 한국 근, 현대사· 정치· 경제· 사회문화· 지리· 철학들은 우리가 역사와 사회의 진실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성찰하게 해 준다. 음악과 미술은 사람의 삶에 소중하고 아름다운 예술감각을 , 체육은 우리 몸의 건강과 운동능력을 키워 준다. 영어와 제2외국어도 입시를 위해 공부할 과목으로만 생각하기보다는 ‘세계화’시대를 살아갈 청소년이 앞으로 지구를 무대로 활동하는데 갖춰야할 ‘무기’로 여기면 어떨까?
자기주도 학습은 발상의 전환이다.
오늘의 학교 현실에 비추어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항변도 할 수 있다. 학교여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손 놓고 학교 교육정책이 바뀌기만 기다리거나 교사의 수업 방법과 내용이 변화하기만 고대하며 자신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비록 학교가 대학입시중심, 또는 단편적지식의 암기중심으로 획일적 경쟁만을 요구하더라도 청소년 스스로 그 차원을 넘어선 발상의 전환과 주체적 학습의지를 꿋꿋히 세우는 게 중요하다.
청소년 스스로 우리사회와 인간의 진실을 탐색하겠다는 새로운 틀로 공부를 할 때 그 발상의 전환은 학교 수업을 적어도 과거보다는 즐거운 시간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때 학업 성취도 또한 전반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인터넷의 오락과 정보가 난무하는 가운데 인터넷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정보는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혜이다. 어떤 정보가 유익하고 불량한지 지금 이 순간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 숱한 정보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는 어떤 것 인지 정보와 정보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인지 판단하는 일은 언제나 주체의 몫으로 남아 있다.
그 판단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자기 주도학습’은 책읽기이다. 도스토엡스키는 “한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읽은 책과 그가 쓴 글이다”고 말했다.
인터넷을 통해 고전의 줄거리는 섭취 할 수 있지만 줄거리로는 결코 감동을 받을 수 없다. 그것은 위대한 작품이 우리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 차원으로 전락하는 셈이다.
책은 한 사람이 10년, 20년 또는 평생에 걸쳐 쌓아 온 경험이나 지식을 다듬어 집약한 창조물이다. 짧은 시간 내 한 사람이 얻은 진실과 결실을 얻어 낼 수 있는 게 책이다. 좋은 책을 고르는 가장 쉬운 기준은 우리에게 삶의 현실을 새롭게 보여주거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가에 있다.
8 싱그러운 사랑 배우기
삶은 싱그러운 사랑을 배우는 ‘평생학교’이지요
우리나라 한 도시에서 일어난 초등학교 성폭력 사건이 있었다. 2년간 상습적으로 드러난 집단성폭행 사건은 사회의 큰 물의를 일으켰다. 하지만 일선 교사의 말에 따르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도시나 그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다.
무엇이 순진한 어린이들을 흉악한 범죄로 내몰았는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범죄인줄 모르고 범죄를 저지른 어린이들은 인터넷에서 포르노를 보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놀이하듯 따라 했다고 말했다.
어린이답지 않은 그 어린이들의 범죄를 개탄하기 전에 우리 시대를 되 돌아 보아야겠다.
인터넷이 더 보편화되고 더 상업화해 갈 때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청소년이 성에 아름다운 인식을 갖는 게 원천적으로 뒤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 금기시 되어 있는 사회문화에서 청소년들이 먼저 인터넷을 통해 성을 접하는 오늘의 10대 청소년은 불행한 세대이다. 인터넷에서는 몸과 성은 성기로 국한되고, 성기는 상품화되어 가는 게 현실이다. 상 상력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여기서 다시 “누가 왜?”라고 물어야 한다.
답은 분명하다. 원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 이다. 원조교재를 비롯한 성매매에도 그 밑바닥에는 돈이 깔려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은 점점 더 상품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더 많이 유통해야 많은 돈을 끌어 들일 수 있다.
성은 쾌락을 주지만 그전에 더 중요한 사실은 성은 무엇보다 신성한 것이다. 성을 통해 생명이 탄생하고 새로운 사람이 출생하는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포르노 동영상이 혐오스러운 것은 그 안에 타인을 위한 배려와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적 교합수준으로 사람을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사랑의 대전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다. 배우자와 이성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며 우리의 삶은 더 풍부해 지고 인격은 더욱 성숙해 진다.
9 정치 경멸의 정치 읽기
정치의 수준이 우리 삶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현실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실천하는 일’ ‘현실을 새롭게 창조하는 일’ 그것을 한마디로 줄이면 정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한 현실, 곧 현실을 밑절이로 형제애나 자매애를 실천하는 일이 사랑의 정치, 정치의 사랑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국민들이 정치인들의 부도덕성과 이기주의 단합에 실망을 느껴 정치자체를 외면하며 경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경멸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정치를 하려면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해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안다.
정치를 알고 정치에 바르게 참여 한다는 사실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일 또한 아니다.
이 책에서 제안한 열 가지 삶의 주제를 잘 갈무리 해 나갈 때 민주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정치의식을 자연스럽게 성숙해 나갈 것이다.
영어에서 (idiot)는 바보 백치라는 뜻이다. 그 말의 뿌리가 대단히 시사적이다.
그리스말 ‘이디오테스’(idotes)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뜻은 ‘공동의 문제에 관심이 없이 오직 사사로운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이다.
자신이 정치적 동물임에도 오직 사사로운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바보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혹시 “대한민국 모든 권력은 ‘바보’로부터 나온다”는 아닐런지.
바보의 길과 주권자의 길,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갈림길이다.
10 아름다운 집 상상하기
모든 사람이 골고루 행복하게 살아가는 집,
그 아름다운 집의 건축은 변함없는 인류의 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 사고야 말로 인생의 반석 또는 미덕이라고 강조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게 이기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면 좋은 일이 많이 있게 된다.
그러나 무조건 적인 긍정적인 사고는 오히려 위험할 수 도 있다. 더구나 현실이 모순투성이 인데 이를 ‘긍정적으로 사고’한다면 어떻게 될까?
긍정적 사고나 부정적 사고이전에 중요한 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이다.
그것은 곧 진실을 추구하는 일이다. 현실을 긍정할 때 현실에 대한 순응, 무비판적 순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결혼으로 가정을 이루었을 때, 그 집을 반석위에 세우려면 무엇보다 현실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골고루 행복하게 살아가는 집, 그 아름다운 건축은 변함없는 인류의 꿈이다.
청소년이 정치를 이야기 할 때 기성세대가 나무라는 말이 있다. “정치가 밥 먹여 주냐?” 가 그것이다.
‘자기 주도학습’을 익히는데도 자기 두 발로 서서 현실을 분석하는 눈이 필요함을, 정치 혐오나 무관심 또한 엄연한 정치행위 라는 사실을 짚어본 우리가 그 말에 동의는 할 수 없다.
경제는 우리가 선뜻 다가서기 어려운 영역이다. 설령 다가서더라도 온전히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국민 대다수가 눈뜨고 코 베이는 오늘이다.
가령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면 곧 “쇄국하자는 것이냐?”는 식의 지극히 단순한 흑백 논리가 판을 치고 있다. 수준 낮은 ‘유언비어’들이 제법 무게 있게 여론을 형성하고 있는 배경에 신문사와 방송사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보았다.
지금 우리나라와 미국 또 다른 선진국들도 긴급한 현안을 경제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07년 대선에서 도덕성과 적법성에 큰 의문이 불거진 이명박 후보가 큰 표차로 당선된 것도 경제의 중요성을 입증해 주는 보기이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경제일까? 경제를 둘러싼 논의에서 마치 상식처럼 퍼져있는 잘못된 전제가 있다.
‘보수는 성장을 중시하고, 진보는 분배를 중시한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보수와 진보의 틀을 넘어 진실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그 사실을 간단히 한국경제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97년 외환위기때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경제의 구조적·제도적 변화가 단숨에 이루어졌다. 나라전체가 부도는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에서였다.
그 결과 자본시장이 ‘자유화’됐고 외국 투자자들이 반 이상 주식시장을 장악했고 대다수 은행들은 국가의 산업 정책과 연관성이 단절됐다. 기업들은 주주의 수익성만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경영으로 돌아섰고 고용에 대한 권한을 사업주에게 더 많이 부여하는 노동시장의 ‘자유화’ 또한 가파르게 진행됐다.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평생직장이 사라져갔다. 한국의 시장 중심주의는 기형적이다.
수출이 해마다 늘고 대기업의 순이익은 천문학적 규모로 늘어나지만 중소기업과의 연관성은 더 희미해져 가고 있다. 대기업들은 오히려 직접 생산자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구조조정을 일상화 해가고 있다. 민중들의 생활경제는 더 어려워져 가고 있음에도 신자유주의의 ‘글로벌 스탠더드’ 라며 마치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글로벌 스탠더드’ 가 아니다. 미국식 자본주의를 강요하는 ‘아메리칸 스탠더드’ 나 자본이익에 모든 기준을 맞추는 ‘캐피탈 스탠더드’ 일 뿐이다. 실제로 전 세계 200여 개국 중 글로벌 스탠더드로 이익을 보는 나라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몇 나라 뿐이다.
그 몇 나라조차 내부는 양극화의 깊은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08년 전 세계를 강타한 미국의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 질서가 위기 국면으로 접어 들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이 걸어간 길을 추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현실적으로 위험하다.
핵심은 ‘경제 또한 정치적 선택의 문제’ 라는 데 있다. 이제 선입견을 지우고 상식의 선에서 출발할 때이다.
선진국이란 ‘모든 사람이 골고루 잘살며 자아를 실천해 가는 사회’이어야 한다. 경제성장과 분배의 문제도 그 문맥에서 성찰해야 한다.
분배 못지않게 또한 성장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성장도 환경과 생태를 고려한 성장이고 무엇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한 성장이어야 한다. 이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긍정적 사고가 아니라 창조적 사고로 바뀌어야 한다. 창조적 정치사상과 민중이 결합할 때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일 그것은 혁명이자 예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