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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이면서 약간의 불쾌감(?)을 유발하는 표지에 이끌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김운하라는 저자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굉장히 많은 책을 낸 소설가이자 비평가인데 어떻게 이렇게 몰랐을까? '카프카의 서재'라는 책은
알고 있었지만 그 책의 저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선함이라든가, 그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든가 하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면 할수록, 더욱 기숙이 자기 내부의 진흙탕 속에 빠져들어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어 버린다. 무엇보다 난처한 것은, 그것이 모두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이 여겨지고, 결코 병이나 변태로는 생각되지 않으므로, 결국 이 변태와 싸우려는 생각은 아주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것이 나의 정상적인 상태인가 보다, 라고 거의 믿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는 무언가 비정상적인, 비열한, 비밀스러운 쾌락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 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 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다. 그들은 어느 날 무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 버린다. 아름다움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는 이런저런 사건들과 사실들의 총체가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허구의 소설이다. 반면, 진짜 삶의 진실은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인 물리적 사건들과 사실들의 총체일 뿐이다. - p121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완전히 독자적인 전대미문의 행복감, 그 근거가 무엇인지 나 자신도 알 수없는 그런 행복감이 내 온몸에 흘러 퍼졌다. 단번에 나는 삶의 굴곡에 무관심해졌고, 삶의 재앙도 그저 대수롭지 않는 불운이었으며, 삶의 짧음도 단순히 우리 감각의 기만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내 안에서 무언가가, 보통은 사랑만이 이룰 수 있는 무언가가 일어났고, ㄱ이와 동시에 나는 어떤 진미의 물질로 채워진 듯이 느꼈다. 아니, 이 물질이 내 속에 있다기보다는 나 자신이 그 물질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평범하다거나, 공연한 존재라거나, 죽어 없어질 몸이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나와 싸우는 중이었다. 개인적인 상황때문에 책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나를 설득해야했고, 또
다독여야했고, 이도저도안될땐 미치광이처럼 울부짖어야 했다. 그런데 책속의 몇몇 구절이, 많은 문학 작품들의 사심없는 인간에 대한 탐구와 생과
사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과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들이 조금의 위로가 되어준게 사실이다. 마치 나의 고군분투에 동감하는 듯한 느낌, 마치...
생의 의미를 이해하고자하는, 삶의 무의미를 어떻게든 의미로 고쳐놓고자 있는 것 없는 것을 다 쥐어짜내고 있는 이 지랄 발광이... 응원과 지지를
받고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사람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책들은 하나같이 아주 매력적인 작품들인 것은, 또다른 고마움이다. 이미 읽은 책, 아직 읽지않은 책을 다시한번 찾아보며 한동안 이 작품들을 통해 위로를 받기로 자처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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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는 처음부터 눈길을 끈다. 포르투갈의 시인의 이름을 따온 책제목부터 한 외국 여성이 묵묵히 책을 응시하고 있는 표지부터 호기심이 갔다. 사실 페소아가 누군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불안의 서>라는 책을 지은 저자라는 기초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포루투칼의 시인. 영어에도 능숙하여 영어로 쓴 시도 많이 남겼으며 생존 당시는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 그의 방대한 시는《시집《詩集)》으로 발간되어 중판을 거듭하고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과연 새벽 2시에 페소아를 만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작가의 말도 상당히 흥미롭다. 어느 강연장에서 만난 전 작품의 독자가 자신을 보며 고민을 털어놨다는 것. 자신의 정체성, 신의 의미, 인생의 의미 등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는, 그러나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을 내뱉었다는 것이다. 번잡한 자리라 바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저자는 독자의 연락처를 받아왔지만, 결국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책에도 나와 있다고 알려준다. 이 책의 부재 ‘나를 묻는 밤의 독서’처럼 독서를 통해 나를 알아나갈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책은 여러 책을 세세하게 분석한다. 총 11장으로 이뤄져 1장 당 한권부터 세권의 책을 들어 근원적인 물음의 해답을 책에서 찾는다. 책은 도스토옙스키 프루스트 등의 고전도 있고, 최근에 나온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의미의 축제>도 있다. 근원적인 물음 또한 다양하다.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추억의 불완전성, 자의식의 과잉, 삶의 품격 등 철학책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질문들로 이뤄져있다. 질문만 봐서는 감조차 오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내용은 쉽게 읽힌다. 마치 한편의 긴 평론을 보는 것처럼 책의 내용, 인물, 배경에 담긴 의미들을 낱낱이 해석한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뜻과 곱씹어볼 내용을 찬찬히 일러준다. 마치 대신 독서를 해주는 것처럼, 독서의 길라잡이처럼 쉽고 편하게 풀어낸다. 그저 작가가 말하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저절로 철학적 질문에 답에 다다르게 된다. 질문에 대한 해석, 답을 내리는 건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책 중 읽은 책은 다시 한 번 ‘이런 내용이었구나.’,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라고 깨닫게 되었고, 읽지 않은 책은 설명으로 인해 읽어보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놀랍다. 대신 독서해주는 게 이런 느낌이라니. 평론보다 편하고 이해하기 쉬웠다. 가독성이 좋지만 생각거리에서는 한참을 주춤하게 한다. 답을 못 내린 질문들도 남아 있지만 자문한 것부터 큰 발전이다. 고맙다. 다시 곱씹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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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인 제목이다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 ! 처음 책을 받고 나서 언니랑 왜 하필 새벽 2시일까 생각해봤는데 감성에 촉촉히 젖어들기에 새벽 1시는 너무 이르고 3시는 너무 피곤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ㅋㅋㅋㅋ 책 디자인을 중요시하는 편은 아닌데도 책이 엄청 예뻐서 책장에 표지가 보이게 올려뒀다. 노란색 띠지랑 회색 표지랑 색대비가 되어서 예쁘다. 페소아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포르투갈의 시인이라고 한다.
목차. 각 챕터별로 주제가 되는 책이 있고 그 책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서 내가 읽어본 책이 3분의 1밖에 안된다. 이번 방학에는 여기서 다룬 책들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 중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찍어 봤다. 읽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우울하고 우중충하고 혼란스럽고... 그런 내용이라 재미있게 읽었다는건 좀 이상하고 푹 빠져서 읽었다 정도? 도스토옙스키만의 그 정신나간듯 하면서 책만 읽어도 곰팡이내가 나는 것 같은 칙칙한 분위기가 좋다. 챕터 이름이 자의식 과잉, 자존심이 강한 건 자랑이 아니야. 사실 내가 도스토옙스키의 책과 그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주 평범한 평준화 고등학교에 다녔기에 대학 입학 전에는 늘 공부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막상 대학에 들어오니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던지, 내 강한 자존감이 금간 사이로 열등감이 비집고 들어와서 아주아주아주 우울했다. 그러던중에 우연히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을 읽게 되었는데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가 나와 닮아 보였고 그 후로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도장깨기식으로 하나씩 읽어나갔다. 그래서 아직도 도스토옙스키 책을 보면 그때의 내가 생각났다. 결국 지나고 보면 다 추억이 되는 것 같다.
어쨌든 각설하고 이 챕터에서는 지하생활의 수기를 중점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철학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접근하여 해설한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계속 찔러줘서 재밌게 읽었다. 어쩌면 도스토옙스키는 인류 전체를 향해 "아닌 척하지만 사실 너의 내면도 결코 다르지 않아!"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집중력이 약해서 두서없이 횡설수설하거나 문장구조가 복잡하고 문체가 깔끔하지 않은 책을 싫어하는데 이 책은 다 마음에 들었다. 불필요한 부분은 최대한 제거하고 계속 새로운 소재를 던져줘서 적절히 생각하면서 읽는 재미가 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은 그 기억을 되살리면서 보고 아직 읽어보지 않은 책은 일요일에 하는 영화프로그램을 보는 기분으로 재밌게 읽었다. 읽으면서 재미있어 보이는 책은 다 폰 메모장에 추가해뒀다. 시험이 끝나면 하나씩 읽어볼 생각에 설렌다.
내가 없는 나의 자서전이라는 표현이 좋다. 모든 책은 세상의 모든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정말 다양한 부류의 인간들이 책 속에 등장하지만 결국 조금씩 뜯어보면 나와 닮은 면이 하나씩은 꼭 있다. 소설 속 인물의 상황에 나를 대입해가면 나였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상상해보는 것도 소설을 읽는 하나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시험 공부하면서 밤에 조금씩 읽으니까 좋았다. 새벽 2시의 충만한 감성을 극대화시키고 싶은 사람한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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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문학작품들 소개되어지는 소주제들마다의 글들이 좋다. 일상의 삶이 기적이고 신비이며 또한 경이로움이라는 사실을. 의 글에는 충분히 끄덕이며 ... 직가분 글처럼 우리의 일상을 만날 수 있는 .... 순간을 영원으로! 지금 여기뿐인 삶의 품격_버지니아 울프<댈러웨이부인> 부분이 제일 맘에 드는 부분이다. 파티를 위해 스위트피꽃을 고르는 댈러웨이 부인의 마음받아 이 가을에 어울리는 국화라도 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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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유쾌했는지! 마치 대기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완연한 가을밤. 쌉쌀한 공기가 한밤의 독서애를 고취시킨다. 가을밤에 한장 한장 넘기는 책장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를 한밤 내내 들리게 하는 작품을 만나는 행복을 만났다. 새벽두시, 페소아를 만나다. 간만에 매력적인 작품을 만난듯하다. 그가 들려주는 불멸의 캐릭터를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한 “저주받은 자유” 즉 무한의 자유와 무한한 책임을 동시에 두 어깨 위에 걸머진 대가가 바로 근대인의 형이상학적 불안의 원인인 것이다. - 새벽두시, 페소아를 만나다 중.
가끔 불안하다. 하지만, 이도 좋다. 불확정하고 한정되지 않은 것들이 가지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책에는 이렇게 명확하지만 아름다운 문장들이 도처에 가득하다.
가을에 읽고 싶은 책 중에 하나는 댈러웨이 부인이다. 가을에 목마를 타고 가버린 숙녀의 영원한 여주인공 버지니아 울프의 자화상격인 댈러웨이 부인의 가녀린 어깨 위로 가을 햇살이 비추일 즈음이 요맘때가 아닌가? 댈러웨이는 어쩌다보니 몇 번이나 읽게 된 소설 중 하나이다. 몇 년에 한번씩은 읽게 되는데, 그때마다 클라리사에 대한 나의 생각은 매번 진화한다. 누군가 나보고 클라리사와 닮았다고 해서도 있고, 사실 클라리사는 마치 나의 사유하는 방식이 닮았다. (그렇다고 내가 너무 속물일 거라고 속단하시진 말길) 그래서 클라리사는 여러 소설의 여주인공중에서도 애정을 가지는 캐릭터이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얼마나 신선하고, 얼마나 고요했던지. 물론 오늘 아침보다도 더 조용했었다. 파도의 찰싹임처럼, 파도의 입맞춤처럼, 싸늘하고 날카롭고 그러면서도 - 당시 열여덟 살이던 소녀에게는 엄숙했다. 거기 그렇게 열린 창문 앞에 서 있노라면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꽃들과, 나무들과, 나무들을 감돌아 지나가는 연기와, 갈까마귀들이 날아오르고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서 있노라면. 그때 피터 월시가 물었다
나도 복잡한 내가 싫지만, 잠깐 동안에도 수없이 변하는 나의 자아가 어떤때는 세이렌처럼 요상스럽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는 풍경처럼 자꾸 변하는 그녀의 의식이 나와 닮았다. 지금 시작한 어떤 생각의 꼬리는 어디에서 끝날지 알길이 없다. 가끔 그런 나의 어떤면에 대해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 철학적인 베이스가 깊이 깔린 작가의 해석이 나를 안심시켰다고나 할까
(사실, 나는 매우 독립적인 성격이고 누굴 따라하는 걸 싫어한다. 그런 점도 울프를 닮았을 터. 그래서 책읽기 책은 거의 읽은 바다 없다. 하지만 우연히 알게된 카프카와 릴케를 읽은 후 작가의 팬이 되었다. 내가 읽은 책과 작가가 읽은 책이 다른 듯 같은데 그걸 찾는 묘미라고나 할까. 나는 감성적이면서도 끝까지 이성적이길 포기하질 않는 타입인데, 작가의 문체도 그렇다. 작가의 문체가 무척이나 맘에 든다. 이성적으로 건조하게 밀어붙이는 듯한 문체에 가끔씩 섞이는 부드러운 인간애 넘치고 유쾌한 몇몇 문체. 작가의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지만 논픽션에도 이런 문체가 있다니 주목할 만한 작가란 생각이 든다. 물론 앞으로도 김운하 작가의 책에는 애정을 가질 터가 분명하다 )
사실, 스무살에 처음 댈러웨이 부인을 접했을 땐 난감했다. 속내와 실제 말, 현재와 과거, 클라리사와 수많은 캐릭터들이 예고없이 뒤섞여 나오는 소설. 소위 의식의 흐름 기법이란게 쉽지 않을뿐더러, 젊은 혈기의 나로서는 그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새벽두시 페소아...이책을 읽고서야 그 의식의 흐름기법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클라리사의 의식의 흐름에 대한 설명은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이해를 한층 높인다. 비슷한 사람은 좋아하기도 하지만, 융의 그림자이론처럼 닮았기에 싫어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나도 댈러웨이를 거부감을 갖고 읽었던 듯하다.
“의식의 흐름은 마치 바람이 잔뜩 든 풍선을 손에서 놓아 버렸을 때, 그것이 멋대로 허공을 휘돌아 어디에 떨어질지 결코 알 수 없는 것처럼 ,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를 거쳐 어디서 끝날지 의식자신도 결코 알지 못하는 것이다. 바람이 빠지는 풍선의 궤적이 풍선에 든 바람과 외부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에 따라 결정되듯이. .. 의식은 그 자체가 무의식의 상연 무대이자 동시에 어떤 사고를 연출하는 주연배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표면적 의식과 반성적 의식의 분열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의식 자체의 분열상이다“
작가가 명명하길 “나-뇌의 딜레마”. 이런거 없는 현대인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걸 문학으로 표현한 버지니아가 다시 한번 위대한듯하다. 나의 갖가지 상념들은 결국 내적인 자극과 외적이 자극이 결합해내는 신비다. 겉으로 보여지는 나의 삶과 속에서 익어가는 또다른 나의 분열사이에서 나는 방황하지만 어찌됐건 나는 삶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나를 미소짓게 했다. 아마 나처럼 잡념많은 여인들은 작가의 문장에 마음이 놓일 것이다. (그토록 몇 번이나 읽었는데도 나는 왜 그 생각은 못한거지? 또한 나는 몇 번을 읽어도 1923년 6월 23일 이라는 날짜는 찾지 못했는데...흠. 작가님 도대체 그게 어디 나와요???? 역시, 작가는 작가인가부다)
새벽두시에 이 책을 읽으며 괜시리 뭉클했다. 나와는 다른 작가가 골라준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들. 작가는 말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사물들과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 안에서 함께 살고 있음을 느낀다라고. 그런 세상은 살만하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인생을 그렇게 사랑하고, 어떻게 그런 관점으로 인생을 보고, 여전히 꿈을 꾸는 걸까?
“어쩜 이리 화창하지! 바깥으로 뛰어들고 싶어”
작가가 두 번이나 인용한 문장을 나도 다시 인용해본다. 세익스피어의 작품 “심벨린” 4막2장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더 이상 두려워 마라, 태양의 뜨거움을, 또한 광폭한 겨울의 사나움을“
작가의 말을 다시 인용해본다.
1923년 6월 23일의 하루, 이 하루는 사실 평범한 하루다. 파티라는 행사를 제외하면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무수한 하루들과 별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이 하루는 과거의 하루들과는 다른 하루다. “일상에 파묻혀 자기자신을 잃으며 살아가는” 그런 하루와는 또 다른 하루다. 그녀가 자신과 주변의 삶과 존재를 돌아보고 회상하면서 자신이 지금 무엇을 잃어버리고 잇는지, 삶에서 진정으로 지켜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면서, 온 영혼으로 이 하루를 느끼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존재들과 내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고, 그 통일성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기쁨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말대로, 오늘은 나를 잃으며 살아가는 하루가 아니다. 시간 루프에 갇혀 닿지 않는 시간의 일부도 아니다. 세계와 내가, 외적자극과 내적자극이 깊이 연결해 통일성을 이루며 나의 세계를 이룬 하루다. 이런 하루가 감사하다. 그리고 그런 통찰력을 보여준 작가의 도움에 감사하는 하루다. 땡큐, 작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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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저자가 읽은 14권의 문학작품들을 활용하여 각 장의 주제를 재미있게 풀어낸 책이다. 책을 읽고 있는데 책이 읽고 싶어진다. 소설이야말로 살아 숨 쉬는 구체적인 인간들을 모델로 삶의 총체성을 그려낼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 작가의말 김운하 페르난두페소아 불안의서 내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렇다. 고정불변하는 자아 같은 건 없다. 자아는 내속의 다양한 내가 춤추고 연기하는 무대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변신하는 변신기계이다. 트랜스포머와도 같다. 우리는 자아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 대신, 내속의 다양한 잠재적 자아들이 무엇을 할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변신 가능성은 실제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변신을 '생의놀이' 로서 즐길수 있어야 한다. - p. 143 . 역사가 아무것도 가르치는것이 없듯이, 인생 경험도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진정한 경험은 현실과의 접촉을 줄이는 데에 있는 반면, 동시에 그 접촉에 대한 분석을 강화하는 것에 있다. 그러면 감성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가 깊어지는데, 왜냐하면 우리 안에 모든것이 있기 때문이다. .. . 순간을 영원으로! 지금 여기뿐인 삶의품격 더이상 두려워 마라, 태양의 뜨거움을 또한 광폭한 겨울의 사나움을. 버지나아울프 댈리웨이부인 . 책을 통해 많은 주인공의 삶을 들여다 보며 등장하는 소설의 주인공의 감정에 공감하며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들 자신의 분열상. 복잡하고 뒤틀린 자의식,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저지르게 되는 무수한 헛발질과 착오.. 이 기묘하고 복잡한 생의 한가운데서 맞닥뜨리게 되는 덫과 함정. 상처와 고통이 모두 바로 나 자신의 것인양 생각되는 것이다. 이책에 나온 많은책을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책의 대한 배경과 지식... 가슴에 남는 문장과 구절들이.. 나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진정한 나를 만나는 시간이 된거 같다. 방항하며 노력하는 우리 각자의 삶 자체. . 삶이란, 이 얼마나 놀랍고 위태롭고, 슬프고, 그리고 또한 아름다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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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리카의 서재>,<릴케의 침묵>저자인 김운하 작가 그는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다.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 표지에 실려 있는 여자의 포즈부터 책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저자는 이번 책의 주제는 ' 나' 그리고 '내가 삶과 세계를 맺는 관계'이다. 물론 이야기 중심은 '나' 혹은 '나의 삶에'있다. 이는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문학적 작품들을 활용하여 각 장의 주제를 재미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 실린 문학작품과 책들을 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이 책이 사용되길 바라고 있으며 이 책을 통해 책을 읽는 행위 자체 독서의 기쁨을 창조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노벨 수상자 월리엄 포크는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 가를 가르친다" 그는 수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책에 등장하는 문학작품들을 살펴보니 읽지 못한 책들이 수두룩하게 포진되어 있었다.
11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저자가 읽은 14권의 책이 소개되고 있다. 저자가 읽은 14권의 책들은 내가 친숙하지 못한 책이었기에 이 책을 읽는데 좀 오래 걸렸다. 그리고 내가 마음에 들었던 챕터들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무엇을 원해야 하는가? 질문에는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캐츠비> 작품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저자는 소설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 시선에 주목한다. 개츠비에게는 초록 불빛이 있었다. 톰과 데이지에게는 넘치는 물질적 부를 소비하고, 쾌락적이지만 덧없고 공허한 향락을 누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소설의 화자인 닉 자신도 남들처럼 혹은 세상이 그렇듯 세속적인 성공과 부를 좇아 뉴옥의 증권가에 몸을 담았지만 개츠비 사건을 겪으면서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는다. 오만한 시선으로 다른 인간의 내면을 내려다보는 행위가 아닌 "나는 그 시절의 것들을 고스란히 다시 되살려 모든 종류의 전문가 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존재, 이른바 '균형 잡힌 인간'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닉은 자기가 겪은 경험을 자기 성찰의 기회를 삼았다. 그리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한 생을 살아가면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고 숙고하지 않는 다면 삶에 대한 뼈아픈 모독일지도 모른다라고, 나는 뼈아픈 헤어짐을 통해 나 자신을 찾는 행위를 시도하였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본질적으로 나라는 사람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과연 자신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고, 법정 스님이 말했다. "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라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의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을 그 물음 속에 있을 것이다." 라고 나는 언제쯤 그 물음 속에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흔들리는 내 자아, 미성숙한 육체와 영혼 사이의 딜레마 에서는 서머싯 몸 <인생의 베일>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소개하면서 이 소설의 미덕은 한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라고 말하고 있다. 키티라는 여주인공 삶을 이야기하며 인간은 어떻게 미성숙한 존재에서 성숙하는 존재로 삶을 찾아가는 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을 다루고 있으며 여성의 정신적 성숙과정에 대해 다루고 있다. 억압적인 가족관계로 인한 잘못된 결혼 자신도 통제하기 어려운 육체적인 열정이 빚어낸 불륜 사랑 자존심과 질투 허영심 그리고 무서운 질병과 남편의 죽음 여주인공 키티오를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
내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의 정체는 무엇일까? 챕터에서는 페드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를 다루고 있다. 불안의 서는 그가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맞은 후에 발견된 유고 원고 였다. 저자는 "현대인의 불안이 현대적인 이유는 자신의 삶 전체를 스스로 기획하고 실행하고 책임져야 하는 무한 선택의 짐을 진 근대 개인주의의 탄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도 말한다.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던 전근대적인 신분제도에서 해방된 개인은 이제 행복과 불행, 삶의 목표와 방향. 심지어 삶과 죽음의 의미까지 일체를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해야만 운명에 처한 것이다." 즉 무한한 자유와 무한한 책임을 동시에 두 어깨 위에 걸머진 대가가 바로 근대인의 형이상학적 불안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경험이 그저 순간순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몸의 지각들로만 한정된다면 과연 영혼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영혼과 삶이 진실 존재의 의미는 어떤 경험들과 어떤 내면의 탐색을 통해 발견되어야 하는가. 이런 물음이야 말로 파스칼 메르시어가, 페르난두 페소아가 우리에게 던지는 아픈 질문들이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나는 자아상이 구축되지 않은 인간이다. 그래서 뚜렷한 기준이 없기에 정체성이 없는 나는 항상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늘 휘둘리는 삶을 살아내고 있다. 덕분에 독서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나의 삶을 관통할 만한 생각과 신념을 정립할 수 있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자아상을 형성하는 도구가 되어주는 책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성과 내가 지닌 인간적인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안목을 문학을 통해 고찰시켜줌으로써 어떻게 자아를 가공할 것인가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책이 많이 어려웠다. 내가 아직 미개한 수준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정확하게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섭렵하지 못했고 행간을 놓쳐 버렸다.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읽어보고 싶다. 그때는 더 많은 것을 향유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해당도서는 출판사로 부터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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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하의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를 이야기 하려면, 우선 책에 등장하는 책들을 아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책에는 총 11장에 16개의 작품이 등장한다. 그 중 서머싯 몸의 작품이 세편을 차지한다. 적지 않은 비중이다. 솔직히 토로하자면 16개 작품 중 7개 작품만을 읽었다. 절반이 채 못 된다. ― 앞으로 읽어야 할 책들이 더 많아졌다. ― 어쩌면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를 이야기 하는 데는 결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일정한 분량의 설명을 해두었으나, 역시 읽는 것, 그것도 제대로 시간을 들여 탐독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소개하고 있는 책들이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들을 펼치기 위한 징검다리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모든 작가들의 작품은 거의 언제나 천둥 번개가 치고 거센 바람이 불고 있는 넓은 들판을 향한 하나의 창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작가도 바람에 기울어가는 나무들의 모습을 모두 그릴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며, 시선이 미치지 못하거나 방해를 받아 굴절된 부분을 남길 수밖에 없다. 언덕 너머의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것은 또 어떨 것인가! 상상력과 추론을 통해 나머지 부분들을 하나하나 저마다 색이 다른 천 조각을 덧대듯이 이어 맞춰 나가는 것이다. 책이 아닌 다른 형태의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장르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세상의 이야기는 언제나 해석의 이야기다. 해석의 대상에는 책과 함께 다른 모든 장르의 예술이 또한 들어간다. 책을 대상으로 해석을 시도하고, 이야기를 펼쳐가는 것은 그래서 늘 창(窓)을 통하여 또 다른 창(窓)이 바라본 것을 읽어내는 것과 같다. 거대한 갤러리에서 직접적으로 하나의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거울을 통하여 또 다른 거울에 비쳤던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해석이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경우라면 해석이 갖고 있는 숙명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해석은 ‘오독’, ‘오해’의 숙명에도 불구하고 방향과 목적지를 가지려는 의지에 언제나 충만해 있다. 아무 의미 없이 긴 글이 펼쳐지지는 않는다. 저자는 16개의 창(窓)을 마주하고, 그 창(窓)들이 인간의 어떤 모습을, 인간이 만든 어떤 세상을 읽으려 했는지를 진맥(診脈)하고 있다. 그 진맥(診脈)은 사람을 향한 것이리라. 각각의 창(窓)은 각각의 병증(病症)을 드러냈을 것이고, 저자는 각각의 병증에 대한 처방전을 쓰기 위해 고심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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