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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노벨문학상 수상후보자가 거론될 때마다 우리나라에는 수상자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하지만 과연 우리에게 하인리히 뵐 같은 작가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도리스레싱같은, 주제사라마구같은, 작가가 말이다. 작품에 대한 막연한 신뢰와 작품을 읽은 후 어김없이 갖게 되는 작가에 대한 경의와 존경, 그것이 내게 있어 노벨문학상이 갖는 권위이고, 의미이다. 삶과 작품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 '작가'가 아닌 '지식인'의로서의 칭호가 더 잘 어울리는, 써온 작품보다 쓸 작품이 더 궁금해지는 그런 작가들 말이다.(물론 노벨문학상 수상자마다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개중에는 토할 것 같은 작가도 있었다.) 하이린히 뵐은 막 시작했다. '카타리나 블름의 잃어버린 명예' 다음으로 두 번째 접하는 책이니, 그가 좋아진 이유 중 하나는 명쾌함이다. 문학과 명쾌함은 어울리지 않는 관계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의도한 바를 두번 세번 꼬아서 숨겨놓지 않는다. '나는 문학을 통해, 이러저러한 것을 말하고 싶고, 이러저러한 독일을 만들고 싶어. 왜 안돼?'하고 거만하게 되묻고 있는 듯 하다. 답이 빤히 보여 식상한 게 아니라 오히려 딱 들어맞는 퍼즐처럼 읽는 이를 맑고 기분좋게 만든다. '운전임무를 마치고'라는 제목 탓인지 작품 초반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운전임무가 도대체 뭘까 읽는 내내 궁금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검열 전 킬로수를 맞추기 위한 목적없는 주행이라니.. 이 책에서 뵐은 전후 팽창해 가는 군부에 대한 맹렬한 비판과 경계를 감추려 하지 않는다. 다분히 항거적인 그룰 부자의 군용차 방화사건이 치부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군부와, 대중의 선동이 두려운 정치권과, 그들의 눈치 보기에 급급한 언론까지. 각자의 이해관계와 교묘히 맞아 떨어져 적당히 무마되고 마는 하루의 재판을 그린다. 그나마 그룰 부자를 도우려는 이웃의 의도만큼은 순수하다 하겠다. 그러나 방화사건이 예술로 위장되어 무죄에 가까운 판결을 이끌어내는 마지막 부분은 난데없기도 하고, 다소 억지스럽기도 했다. 작가는 권력의 예술에 대한 호의는 오로지 예술이 그 영역에만 머물기를 바라는 권력의 의도임을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작가의 의도와는 상반되게 예술이 정치적인 의도를 은폐하려는 교묘한 수단으로 치부되는 결말로 끝을 맺음으로 예술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 내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나 저러나, 독일의 힘. 전쟁 도발국과 패전국의 멍에와 오욕을 딛고 지금의 독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그 힘은 바로 하인리히 뵐과 같은 지식인들의 힘이지 않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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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언제샀더라, 아...언제나 처럼 전질을 모아보고자 하는 수집욕때문에 집어들었구나.
요즘엔 좀 더 깔끔한 커버로 나오던데, 아쉽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내용이 중요한 거니까.
사회제도와 그를 둘러싼 이권이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복잡하고 어둡고 때로는 웃기기도 한다. 뒤집고 뒤엎고 덮어버리고는 겉으로 하하 웃고 지나가려고 하지만 그 속을 헤집어 보면 눈을 찌푸리게 하는 오물이 들어나곤 한다.
분명히 제대로 자기 할 일을 다 하면서도 빚만 들어간다거나, 필요없음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규범에 따라서 할당량을 채워야하는 임무와 같은 그런 일들은 변함없이 일어나고 있다.
변화하려는 시도는 여기저기에서 보이지만 그렇게 마음먹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것이 사회이고 단체이고 권력일지 모른다. 되려 움직임이 보이면 즉시 조치를 취해 그 상태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겠지.
그렇다면 변화하려는 시도를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으로 개개인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이 독일 작가는 독일 당시 분위기에 맞추어 '예술'이라는 필터를 움직임에 씌워주었다.
예술이라는 필터와 순박하면서도 특징적인 인물을 배치시킴으로써 체제에 반항적인 사건을 덮어두려는 권력을 비웃는 듯, 그러면서도 그리 열정적이지 않게 그리고 있다.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닌데도 읽는데 오래 걸린 건 대화부분와 서술부분이 구분되어있지 않은 서술방식 때문이기도 하고, 또 독일인들의 이름 때문이기도 하다. 러시아 소설도 그렇지만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특유의 이름들은 왠지 몰입도를 감소시키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익숙해져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생각은 한다.
몇 안되는 책 감상을 쓰면서 느끼는 거지만 이야기의 내용을 줄여 말하는데는 재주가 없나보다 생각을 한다. 게다가 느낀 점을 쓰려해도 하고자 하는 내용과 가까운지도 모르겠고 한글 맞춤법 등등 부족한 부분을 많이 느끼곤 한다.
뭐, 많이 쓰다보면 좀 나아지겠지 생각하면서 맺음을 짓도록하겠다.
(어투가 좀 많이 딱딱한 느낌이...ㅠㅅ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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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의 집중 부족탓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독서를 하고 나서도 과연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하였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행간에서 막연히 무언가를 비판하거나, 풍자한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였지만, 과연 그게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는 좀 어려웠다. 내용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우왕좌왕하며 이어가는 재판과정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그러나 소설작품을 읽고는 꼭 이것의 주제가 무엇인지,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싶어하는 나의 습관적 의무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 때는 과연 내가 읽은 것이 무엇이었던가하는 회의가 절로 들었었다. 후에 이 작품과 관련된 다른 블로거의 글과 역자 후기를 읽고나서야 비로소 그룰 부자의 의도와 등장인물과 재판과정이 담아내려했던 것의 의미를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수학문제를 내 힘으로 생각하고 푼 것이 아니고, 해설을 따라가며 왜 그런 답이 가능했는지 이해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요즘 유행하는 헌재놀이란 것처럼 나 역시 책은 읽었으나 독서한 것은 아니라고 해야하는건지. 스스로 이해해 내지 못하고, 남이 주어준 작품의 의미로 후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끝끝내 혼자 이해하려 하였다면, 합리를 강조하는 사회가 드러내는 부조리한 이면, 합리에도 불합리에도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적 갈등과 고민 등등을 여전히 생각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파악한다해도, 하인리히 뵐이란 작가의 작품 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나는 오히려 자동차 폭발 사건에 거창한 예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작가의 의도에서 너무 멀리 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룰부자가 무죄 판결을 받는 것이 그들이 자동차 폭발로 의도했던 예술적 의미를 진정 모두에게 이해시킨 것임을 의미한다는 것엔 도저희 공감할수 없다. 누군가 내게 그들의 행위는 거짓된 사회에 항변하는 아름다운 의도였음을 아무리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준다고해도, 내가 직접 그 폭발음을 듣지 못하고, 글로만 읽게 되는 이상은 그 행위에 공감하고 그들이 느꼈을 카타르시스를 함께 느끼기엔 다분히 부족하다. 어쩌면, 그 예술적 소음을 직접 들었대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심지어 소설 속 등장인물들 조차도, 그들의 행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없는 듯 하다. 가장 근접하게 이해한 것 처럼 보이는 사람은 사람은 전재산을 그룰 부자에게 넘긴다는 유서를 쓰는 판사의 친척누이 정도인 듯하지만, 돈의 양이 이해의 깊이를 파악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으며, 그녀 역시 젊은 시절 자신과 사랑을 이루지 못한 판사에 대한 반발심으로 그러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재판 마지막에 그룰 부자의 행위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하며 그들의 무죄를 항변하는 미술교수 역시 행위의 담긴 의미를 이해하기보다는, 미술교수로서의 자기의 미학적 관점만을 피력하기 위해 그들을 옹호하는 듯 하고, 변호사 역시 변호사의 의무로서, 그리고, 판사 역시 임기의 마지막 재판을 순조롭게 마무리 하려는 의도에서 그러했던 듯 하다. 사건의 핵심인물인 그룰 부자역시 진술을 해나갈 때, 그들의 의도에 어떤 예술적 가치와 의미를 두기 보다는 남의 일 읊듯이 아무 가치부여를 하지 않는 진술을 늘어놓는다. 물론 재판장이라는 공간적/사회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러하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그룰 부자의 자동차 폭발 사건에 깊은 예술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역자의 생각, 혹은 문학 비평가의 생각일뿐이란 생각이 아닐까한다. 관점을 달리하여 생각하면 그룰 부자의 행위는 공공재산과 기본 사회안전을 위협하는 짓으로 보여질 수 도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죄를 판결해가는 과정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자신과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데만 급급한 이기적인 존재들일 뿐 진정 그룰부자의 행위의 속내를 완벽히 이해하고, 그들이 무죄임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심지어 그룰 자신들도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질 않는데, 누군가 그것에 대해 '예술적 의미' 를 부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녕 우물가에서 숭늉 찾으러 갔다 결국 숭늉을 떠온 겪이라고 하고싶다. 다만 그 숭늉이 그 우물에서 나온 게 맞냐는 의문은 계속 남지만 말이다. 자동차 폭발에 담긴 거창한 예술적의미를 떠나서도, 재판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등장인물의 내면의 생각과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의 차이만 짚어낸다해도, 이 작품에 담긴 예술적의미는 어느정도 파악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은 여러 가능성을 두고 봐야하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떠온 숭늉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게 꼭 숭늉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문제다. 후에 누군가 이 작품을 읽게 된다면, 흙탕물을 마시던, 약수를 마셨던 각자의 맛으로 음미할 수 있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