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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카를로스》는 스페인 무적함대가 전 유럽을 지배하던 시대, 절대왕권을 가진 필리페 2세의 궁정이 배경인 사극이다. 필리페 2세는 권력의 정점에 있지만 자신이 부왕을 하야시키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인 카를로스까지도 경계할 뿐 아니라 왕비들이 출산후에 계속 사망하면서 가정의 행복도 누리지 못하는 외로운 남자이다. 돈 카를로스도 출생하자마자 어머니는 사망하고 아버지의 무관심속에 귀족들의 권력암투에 짓눌리는 불행한 왕자이다. 프랑스 발루아 왕가 앙리 2세의 딸인 엘리자베트 공주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평화조약을 위해 카를로스와 약혼한 사이였지만 필리페 2세의 두번째 왕비가 사망하자 갑자기 늙은 필리페와 결혼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카를로스는 사랑하는 여자를 어머니라고 불러야하는 처지가 되고 늙은 왕은 젊고 아름다운 왕비와 아들 사이를 의심하는 오이디푸스같은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구세대를 대표하는 아버지에게는 종교재판장을 필두로 하는 가톨릭과 보수귀족들이, 신세대를 대표하는 아들에게는 플랑드르의 독립을 지지하는 포사 후작같은 자유주의적 지식인과 신교도들이 함께 하며 신구세력의 격돌이 시작된다. 이들은 모두 역사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이지만 왕과 왕자 모두에게 신뢰를 얻는 신비로운 인물인 포사 후작 로드리고(책에서는 로데리히라고 번역됨)는 실러가 자신의 철학을 설파하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로 창조한 인물이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가였던 그의 꿈은 구세대의 강고하고 치밀한 저항에 부딪혀 무산되고 만다. 포사 후작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왕자가 맞이한 최후는 우리나라 역사속의 사도세자를 떠오르게 한다. 오페라에서는 이 비참한 왕자를 선왕인 카를의 영령이 거두어주는 것으로 결말을 수정했다. 책속에서 발견한 포사 후작 로드리고는 카를로스 왕자를 친구로서 사랑했지만 왕비를 향해 무모한 열정을 불태우는 미숙한 그를 보며 유럽에 자유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주기에는 부족한 인물로 보았다. 그보다는 냉혹하지만 당시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필리페 2세의 마음을 움직여서 스페인 왕정을 변화시킬 수 있지않을까 고뇌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러가 창조한 인물 로드리고는 플랑드르 민중들을 위해 헌신하고, 카를로스에게 목숨을 건 우정을 바치고, 귀족들에게 존경을 받고, 왕과 왕비의 절대신임을 받는 고귀한 인물이지만 왕과 왕자를 다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려다 결국은 자신의 지략에 희생되는 불운한 지식인이다. 왕에게 충성하며 점진적 개혁을 이루던지, 왕자를 우정으로 다독이며 다가올 시대를 기다렸으면 좋으련만 동분서주했으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구세대에게 몽상가라고 불릴 뿐이다.
올해는 베르디 탄생 200주년으로 그의 그랜드 오페라인 <돈 카를로>도 공연을 앞두고 있다. <돈 카를로>는 전체 5막에 공연과 인터미션을 합치면 거의 다섯시간이 걸리며 역량있는 베이스 가수가 많이 필요하여 쉽게 무대에 올릴 수 없는 대작이다. 바로 이 오페라의 원작이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이다. 오페라에 푹빠져 원작을 찾아 읽으면서 공연마다 쫓아다니던 시절에 공연을 보면서도 포사 후작 로드리고라는 인물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파악되지 않아서 안타까왔던 기억이 있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표지의 책으로 지금이나마 읽게 된 것이 너무나 기쁘다. 포사 후작의 희생으로 카를로스 왕자는 왕비에 대한 이룰 수 없는 연정이라는 미망에서 깨어났으니 우정과 이상은 사랑보다 고귀한 셈이다. 우정의 테마로 불리우는, 왕자 돈 카를로스와 포사 후작 로드리고의 이중창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를 다시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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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이야기를 창작할 때 특히 매력적인 소재 중의 하나다. 하지만 사극의 역사왜곡 논쟁에서 보듯이, 역사 기록과 어긋나는 전개가 나오면 창작자의 재량으로 보아야 하는지 역사왜곡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특히 역사 기록과 어느 정도 배치되는 설정과 묘사가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면 이 딜레마는 더욱 깊어진다. <빌헬름 텔>의 저자로 유명한 실러는 역사를 소재로 한 사극을 여러 편 썼다. 하지만 <빌헬름 텔>을 제외한 다른 실러의 사극을 접하기는 여의치 않던 차에, <돈 카를로스>가 가뭄의 단비처럼 출간되어 실러의 사극을 새롭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표제작인 <돈 카를로스>의 주인공은 펠리페 2세의 첫째아들인 실존인물이다. 개인적으로 결혼생활이 가장 불행했던 왕으로 스페인의 펠리페 2세를 꼽는다. 여섯 왕비로 유명한 헨리 8세는 자기 마음대로 왕비를 갈아치웠던 것에 비해, 펠리페 2세는 아내 네 명을 사별했고 후계자 복도 없었다. 첫째 왕비와 넷째 왕비는 아이를 낳다 죽고, 셋째 왕비는 아이를 사산했다가 그 후유증으로 죽고, 둘째 왕비는 병으로 죽었다. 네 왕비 소생 중 펠리페 2세보다 오래 산 아이는 셋째 왕비의 두 딸과 넷째 왕비의 아들 한 명뿐이었다. 많은 아이가 유산되었거나 유아기에 죽었고, 첫째 왕비가 목숨과 바꿔 낳은 아들 돈 카를로스는 성인이 되었지만 유폐된 이후 자살시도를 거듭하다가 어느 날 시신으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역사상 돈 카를로스에 대한 서술을 대강 정리하면 이렇다. 펠리페 2세의 셋째 왕비는 원래 돈 카를로스의 약혼녀였지만, 강화 조약 때문에 펠리페 2세와 결혼한다. 동갑내기 약혼녀가 졸지에 새엄마가 된 돈 카를로스는 급기야 미쳐버렸고, 펠리페 2세는 보다못해 아들을 유폐한다. 돈 카를로스가 어떤 대우를 받다 죽었는지 나중에야 듣게 된 셋째 왕비는 충격으로 사산했고 그 후유증으로 죽는다. 셋째 왕비는 돈 카를로스에게 가족으로서의 애정은 가졌으되 연정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역사적 정설이지만, 실러는 이 두 명을 연인 사이로 설정했다. 또한 실제로는 미쳐버렸고, 최소한 정신이 굉장히 불안정했던 돈 카를로스 왕자는 의연하고 기품 있고 명철한 인물로 묘사된다.
이게 역사왜곡일까?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실러의 사극은 역사를 배우기 위한 참고자료로는 하자가 많다. 하지만 그런 '왜곡'이 과연 작품으로서는 어떨까? 실러 작품에서 돈 카를로스와 셋째 왕비 엘리자베트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괴로워하면서 고뇌한다. 서로를 사랑하고 가까이 있을 수 있지만 마음으로는 떠나보내야만 하는 사이, 사랑하지만 부부가 아니라 어머니와 아들로 만나야만 하는 비극적인 상황을 실러는 애틋하면서도 비장하게 그려냈다. 실제 역사에서 돈 카를로스가 어떤 인물이었고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건 간에, <돈 카를로스>의 두 사람은 너무나도 애절하고 비극적이다. 이런 작품을 그저 역사적 기록과 어긋난다는 이유만으로 내쳐버릴 수 있을까?
<돈 카를로스>를 오페라로 만든 베르디는 실러의 원작을 두고, 역사적으로 가당치 않은 묘사로 가득 차 있다는 평을 한 적 있다. 특히 돈 카를로스의 친구로 나오는 포사 후작을 두고, 펠리페 2세 시대의 스페인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포사 후작은 철저한 카톨릭교도 펠리페 2세에게 신교도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당위성과는 별도로, 포사 후작은 정말 매력적이고 인상적인 캐릭터이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일은 극도로 삼가고, 자신이 믿고 따르는 주군이자 유일한 친구인 돈 카를로스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도와 주고, 마지막에는 돈 카를로스 대신 죽기까지 한다. 죽어가면서도 돈 카를로스에게 자신의 죽음보다 대의를 더욱 기억해달라고 말하는 인물. <돈 카를로스>는 역사적 묘사는 부정확할지 모르지만, 문학작품으로서는 더없이 감동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실존인물이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움직인다는 점 때문에 비장함과 감동은 더욱 배가된다.
이런 경향은 이 책 뒤편에 실려 있는 <오를레앙의 처녀>에서도 드러난다. 잔 다르크는 실제 역사에서는 프랑스군에게 배신당해 영국군으로 넘겨져 화형되었다. 하지만 <오를레앙의 처녀>에서의 잔 다르크는 다른 결말을 맞는다. 잔 다르크가 마녀라는 헛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내쫓아버리지만, 샤를 7세가 또다시 위기에 처했을 때 잔 다르크는 샤를 7세를 구해내고 대신 죽는다. 죽어가는 잔 다르크를 앞에 두고 경솔한 행동을 후회하는 샤를 7세와, 샤를 7세를 원망하기는커녕 미담을 가득 남긴 채 잔 다르크가 죽는 마지막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역사를 소재로 작품을 쓴다는 것은 '창작자의 재량 vs 역사 왜곡'의 딜레마를 피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딜레마의 절대적인 해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러는 독자적인 작품관에 입각해서 자기만의 해답을 내놓았다. 역사적 정확성을 의식하는 관점에서라면 실러의 작품이 불만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무시하기에 실러의 사극은 너무나도 훌륭하다. 작품은 작품대로, 역사적 기록은 기록대로 따로 받아들이면서 실러의 사극을 감상하면, 절대 잊지 못할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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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카를로스 : 스페인의 왕자 > 실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에서 우리들은 16세기 무적함대를 조직하여 세계를 제패했던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에 대한 실러의 평가가 호의적이지 않음을 읽을 수 있다. 물론, 후대의 사람들이 잔 다르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녀를 신적인 존재로 묘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바이지만 한 인간에 너무 의존하여 극을 전개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지금 시점에서 더 많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