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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실존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블레이드러너>(1982)를 오래 전에 보았고, 토론을 이끄는 수업의 보조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감상하였다. 작품성과 연기 등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 목록의 앞부분에 위차하고 있는 작품이다. 2017년에 그 후속작으로 30년 후의 세계를 다룬 <블레이드러너 2049>가 개봉되었다고 하나, 아직 보지는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최근 이 소설을 읽게 되었고, 이 작품이 바로 영화 <블레이드러너>의 원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의 내용이 조금은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실존이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면, 소설 원작은 주인공이 기르는 ‘전기양’을 대신할 진짜 동물을 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이해되었다. 영화 제목인 ‘블레이드러너’는 복제인간인 ‘레플리칸트’를 추적하여 없애는 직업을 가리키며, 그 대가로 현상금을 받아 살아가는 데커드(해리슨 포드 분)와 외계 식민지를 탈출한 레플리컨트인 로이(룻거 하우어 분)와의 대결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자신이 인간이라고 알고 있지만 데커드에 의해 복제인간임이 밝혀지는 레이첼(숀 영 분) 등이 등장하여,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복제인간과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인간답지 못한 인간’의 면모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에게는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영화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
반면에 원작 소설은 영화와는 주제나 내용면에서 결이 많이 다르다고 여겨졌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취하고 있다는 점만이 원작소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으며, 데커드 역시 소설에서는 ‘현상금 사냥꾼’이며 안드로이드를 제거하는 그의 활약상이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영화의 원작이지만 전혀 다른 내용이라고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영화와 달리 소설에 등장하는 데커드는 현상금 사냥꾼으로써, 핵전쟁으로 생명이 살 수 없는 지구에서 진짜 동물을 키우고 싶어 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그는 출퇴근을 하면서 옥상에서 키우고 있는 전기양을 돌보고, 지구로 잠입한 안드로이드를 사냥해서 번 현상금으로 언젠가는 진짜 동물을 사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진짜 동물의 가격을 매긴 카탈로그를 지니고 있다.
작품에서는 인간의 심리조차도 ‘기분 전환기’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작될 수 있고, 방사능 낙진으로 외출을 생각할 수 없는 조건에서 살아야만 하는 존재들의 서글픈 삶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현상금 사냥꾼인 데커드는 오로지 테스트를 통해서 안드로이드임을 판별할 수 있고, 복제인간을 제조하는 회사에서는 그것으로 걸러지지 않을 안드로이드를 개발하고자 하는 설정이 전제되어 있다.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상대의 생체 반응을 지켜보고, 적합한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면 안드로이드로 판정하는 것이 테스트의 골자이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레이철이라는 인물은 안드로이드를 제작하는 회사 회장의 조카로 설정되어 있지만, 데커드의 테스트 결과 안드로이드임이 밝혀진다. 테스트의 적합성을 확인한 데커드의 안드로이드 사냥이 시작되고, 그는 현상금으로 진짜 동물을 살 수 있기를 갈망한다. 영화와는 주제나 인물 설정 등이 전혀 다르게 제시되어 있기에, 비교해서 읽는다면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라고 여겨진다.(차니) * 개인 독서 카페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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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졌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수치심’과 ‘두려움’이었다. 자기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걸 인식한 후 그 사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두려움과 불안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은 매우 이채롭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자각한 후 가장 처음으로 느낀 것이 수치심이라는 것은 그것이 인간을 다른 동물이나 생명과 구분해주는 가장 인간다운 감정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에서처럼 인간과 지능이 비슷하거나 인간보다 훨씬 지능이 높은, 혹은 육안으로는 절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를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인간은 인간이고 안드로이드는 안드로이드이다. 왜? 인간은 수치심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쉽게 간과할 수 있지만, 이와 관련하여 꼭 생각해보고 가야 할 것 중 하나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뭉크의 그림들이다. 필립 K. 딕은『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에서 뭉크의 <사춘기>와 <절규>, 두 작품을 삽입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두 그림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뭉크의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변이 아닐까 싶다. 이 두 그림과 관련된 이야기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안드로이드(루바 루프트)와 안드로이드 같은 인간, 이렇듯 상반되는 두 인물과 만날 때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필립 K. 딕의 전작의 기저에 흐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I. 뭉크의 <사춘기>와 인간보다 인간다운 안드로이드 루바 루프트
“나의 요람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병과 광기와 죽음의 천사들이었으며, 그들은 그 후에도 줄곧 나의 생활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사춘기는 비로소 인간이 되어가는 시기이다. 몸과 정신이 성숙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도 성립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최초의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사춘기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자신에 눈뜨는 순간. 그리고 그 순간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수치심과 두려움, 불안과 공포이다. 뭉크의 <사춘기>에는 그러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가 변화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어른이 되고 있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드러난다. 이러한 감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이다. 그런데 필립 K. 딕은 안드로이드 루바 루프트와의 대면과 그 이후 릭이 갈등하는 장면에서 이 그림을 삽입함으로써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루바 루프트가 죽기 직전 릭에게 사달라고 부탁한 것이 뭉크의 화집이었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고 있던 작품이 바로 뭉크의 <사춘기>였다. 그녀는 그 어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안드로이드였다.[i]
근본적으로 거주가 불가능한 식민세계에서 사는 것 대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지구로 도망을 쳤다면, 주인을 죽이고 더 나은 삶을 선택할 만큼 의식 있고 자각 있는 존재라면, 안드로이드도 꿈을 꾼다면,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왜 안드로이드는 죽여야 하는 걸까? 단지 주인을 죽이고 인간에게 위협을 가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매우 궁색한 변명이다.
여기서 피조물이었던 인간이 창조자가 되었을 때의 고뇌와 회의가 시작된다. 여기에 인간의 이중성이 있다. 피조물이자 창조자라는 점.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가지 위치가 인간을 갈등하게 한다. II. 뭉크의 <절규>와 인간인지 안드로인지 모호한 필 레시
뭉크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절규>는 핏빛의 하늘을 배경으로 괴로워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는 작품으로, 깊은 좌절에 빠진 절망적인 심리상태를 형태의 왜곡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뭉크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걸어 가고 있었다. 해질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자리에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와 피오르드에 걸린 칼을 보았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필 레시는 한 유화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머리카락이 없고, 뭔가에 짓눌린 피조물이 묘사된 작품이었다. 머리는 뒤집어놓은 서양 배 같고, 공포로 인해 양손으로 양쪽 귀를 덮었으며, 입은 크게 벌려서 소리도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피조물의 고통이 만들어낸 뒤틀린 잔물결, 그 울부짖음의 메아리가, 피조물 주위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피조물은 자기 자신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차기에 이르렀고, 스스로의 소리를 막으려고 양손으로 귀를 덮었다. 그 피조물은 어느 다리 위에 서 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그 피조물은 고립 상태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절규에 의해서(또는 절규에도 불구하고)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에서 필 레시는 이것이 안드로이드가 느끼는 바라고 말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에서 필 레시는 안드로이드인지 인간인지 매우 모호한 상태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필 레시의 주장과는 달리 단절이나 고립 상태에서의 비명은 인간의 근원적 불안감과 두려움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뭉크의 <절규>는 가장 인간적인 작품이다. 그렇다면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구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가능한가? 안드로이드로로부터 구분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필립K. 딕은 이 설정을 통해 다시 한 번 질문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릭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쩌면 감정이입 능력은 오로지 초식동물에게만, 또는 (고기라는 식단에서 멀어질 수 있는) 잡식동물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언젠가 이런 결론을 내린 적이 있었다. 감정이입 능력은 궁극적으로 사냥꾼과 사냥감 사이의, 그리고 성공한 자와 패배한 자 사이의 경계를 흐려버리기 때문이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해야만 한다. 감정이입 능력은 오로지 초식동물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사냥꾼에게 감정이입이란 치명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감정이입 능력이야말로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그렇다면 릭이 안드로이드가 아닌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릭이 하는 현상금 사냥꾼은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릭은 자신의 고통을 아내에게 토로하지만 아내는 냉정하게 말한다. “그건 당신의 일일 뿐이야.” 현상금 사냥꾼으로서 릭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안드로이드들이 주인을 죽였다는 것, 거기서 유추할 수 있듯 그들이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릭이 현상금 사냥꾼으로 자신의 일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할 것이 바로 ‘감정이입의 능력’을 축소시키거나 감정이입의 대상을 한정시키는 것이다. 이 딜레마와 모순은 과연 설명 가능한 것이고 해결 가능한 것일까?
릭은 안드로이드를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편을 즐겼다. 그러면 그의 일도 바람직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앤디를 퇴역시키는(즉 죽이는) 일은 머서가 내놓은 생명의 법칙을 위배하는 일이 아니었다. 너희는 오로지 살해자만을 살해할지니라. 머서는 감정이입 장치들이 지구상에 처음으로 나타난 바로 그해 그들에게 말했다. 머서교가 점차 완전한 신학으로 발전함에 따라 ‘살해자들’에 대한 개념 역시 은근히 자라나게 되었다. 머서교에서 절대 악이란 저 비틀거리며 위로 올라가는 노인의 누더기 망토를 뒤로 잡아당기는 존재였지만, 그 사악한 현존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는 결코 분명하지가 않았다. 달리 표현하자면 머서교 추종자는 자기가 들어맞는다고 생각한 곳 어디에서나 ‘살해자’의 모호한 현존을 마음껏 찾아낼 수가 있었다. 릭 데카드의 입장에서는 도주한 인간형 로봇이 딱 그러했다. 그런 로봇은 주인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장착하고, 동물에 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으며, 다른 생명체의 성공에 대한 감정이입의 기쁨이라든지 또는 패배에서 비롯된 감정이입의 슬픔을 느끼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는 이것이야말로 ‘살해자’의 전형이었다.
더 이상 가치에 무감각해진 릭은 윌버 머서 (최후 종말 대전 이후 세계의 신 같은 존재)에게 이에 대해 질문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구원이라곤 없어.”라고 말한다.
노인이 말했다. “어디로 가든지 자네는 잘못을 행할 수밖에 없을 걸세. 그것이야말로 삶의 기본적인 조건이니까. 즉 자네는 자신의 정체성에 위배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은 언젠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거야. 그것은 궁극의 어둠이고, 창조의 패배지. 이것이야말로 저주의 작용이라네. 모든 생명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저주지. 우주 어디에서나 마찬가지고.”
하루 동안 여섯 대의 안드로이드를 퇴역시킨 기록을 세운 릭은 일을 끝내고 집으로 향한다. 안드로이드들을 죽이고 받은 현상금으로 전기양이 아닌 ‘진짜’ 염소도 구입한다. 그는 현상금 사냥꾼으로서 충분한 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릭의 마지막 독백은 다음과 같이 쓸쓸하다. “반드시 필요한 것 치고는 참으로 지독한 직업이야.” 릭은 생각했다. 나는 천벌이야. 가뭄이나 흑사병처럼. 여기까지 읽고 나면 이 작품이 미래의 어느 시점을 소재로 한 SF가 아니라 바로 현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재의 이야기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대개의 좋은 SF 작품들이 그러하듯 필립 K. 딕의『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가 독자들에게 던지든 질문은 매우 구체적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현실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잠정적으로 그가 내린 결론은 뭉크의 그림들이다. 죽음은 확실해도 인생은 불확실한 것이고, 산다는 것은 매우 지독한 것이라는 점. 인간은 그 왜곡된 세계에서 끊임없이 불안과 두려움, 공포를 느끼며 회의하는 존재라는 점 말이다. certa, viata incerta. [i] 이러한 소설적 장치를 더욱 공고히 해주는 것인 특수인 이지도어의 존재이다. 지능이 낮아 화성 이민도 갈 수 없는 특수인이지만 이지도어는 현상금 사냥꾼으로 안드로이드를 죽이는 릭에 비해 훨씬 ‘휴머니즘’적 인간에 가까운 건 존재이다. 이지도어는 비록 지능은 낮지만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은 릭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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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뎌 만났다.
이 '딕'의 소설은 이 책 뿐만 아니라 많은 소설이 영화화됐다.
군데 저 영화의 공통점을 생각해보자. 나 필릭 K 딕을 좋아라하긴 하지만.. 한번도 그의 소설이 무겁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산만하고 날카롭고 예리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또한 그렇다.
그리고 인간의 지능에 따라서 계급이 나뉘고.. 안드로이드는 화성을 피해 달아났다. 인간이 하지 못하는 일을 죽어라 해대는, 안드로이드의 요구는 단순하다. 그들이 인간처럼 살 수 있는 자유...를 달라는 것이다. 누구는 경찰이 되고 싶어하고, 누구는 예술가로 살길 원한다. (오호.. 안드로이드가 예술가?)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인간들의 삶은 참.. 가관이다. -_-+ 마치 진짜 고양이를 소유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지만 그 고양이를 보살피지 않았고, 아마 안드로이드로 대체되도 모를 '필슨'의 삶이 바로 우리네 인간들의 삶이라고 꼬집는다.
이 책은 블랙코메디 그 자체다.
만약 블레이드 러너가 좋았다면.. 하지만 너무 무겁고 음울해서 좀 버거웠다면
(군데 난 왜 이 안드로이드들이 사이코패스로 보이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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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영화사에서 뛰어난 명작으로 칭송받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소설이다. 필립 K.딕의 소설은 꽤나 많이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마이너리트 리프토, 페이책등) 정작 필립.K딕은 평생을 가난으로 힘겹게 살다가, 죽고나서야 블레이드 러너가 영화화 되서 큰 명성을 얻었다. 필립.K딕의 다른 소설이 굉장히 암울한데, 다른 소설에 비해선 조금 덜(?)암울한것같다. 저자의 말 처럼 그나마 생활이 조금 안정되있을때 쓴거라 그런지 걸작이 나왔다. 그렇다고 그의 철학적 물음이 줄은것은 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당신을 여기에서 저기로,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믿기 힘든 솜씨로 대려간다.
책의 배경은 핵전쟁이후 낙진이 떨어진 지구다. 그 때문에 정부에서는 정상적인 유전자를 가진 인간을 보존하기위해 안드로이드 무료 제공을 내세우며 화성 이주를 권한다. SF세계에서도 역시 공짜는 잘통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성으로 이주를 택한다. 낙진으로 대부분의 동물이 멸종해버려서 살아있는 동물은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그 만한 돈이 없는 사람은 실제와 똑같은 안드로이드 동물을 키우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주인공인 릭은 경찰소속 안드로이드 사냥꾼이다. 평소에 진짜 양을 기르고 싶으나 돈때문에 전기양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살던중, 선배인 데이브가 안드로이드에 부상을 당하자, 그 안드로이드를 사냥해 진짜 양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한다.
책의 주인공은 두명이다. 릭과 이지도어. 릭은 전기양을 애지중지하지만 진짜 양을 사고 싶어 하면서 가차없이 안드로이드를 은퇴(살해)시킨다. 이지도어는 낙진으로 유전자 손상을 입어 지능이 모자른 특수자다. 인가들에게 닭대가리라 불리는 그는 안드로이드에 좋은 감정을 느끼고 쌀쌀맞은 안드로이드에게 먹을거리와 잘곳까지 재공해준다. 릭은 안드로이드를 은퇴시키는중, 안드로이드자신이 안드로인지 깨닫지 못하고있고, 기억까지 조작된 안드로이드를 만나며 혼란을 느낀다. 이런 와중에 독자는 닉 또한 기억이 조작된 안드로이드가 아닌가 의심을 하게 된다. 스릴 넘치는 장면이다. 어찌보면 장애인이라 할 수 있는 이지도어는 인간보다 더 자신을 인간답게 대해주는 안드로이드에게 정을 느끼지만 결국 은퇴당하고, 떠나야 되는 그들에 운명에 혼란을 느낀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이 책의 제목이다. 주인공 릭은 전기양을 실제 양처럼 애지중지하지만, 사람과 흡사한 안드로이드에게는 가차없이 총구를 겨눈다. 어찌보면 안드로이드로 태어난 것보다 전기양으로 태어나는 운명이 더 행복할지 모른다. 감정을 느끼고, 인간과 똑같이 생활 할 수 있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나 작가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책에서 나오는 넥서스 6 안드로이드는 실패후 개량을 거듭해 7이나오고 계속 개량을 거듭할수록 넥서스 시리즈는 인간에 한없이 가까워 진다. 안드로이드 레이첼과 성관계를 가진 릭은 "당신이 안드로이드만 아니면 결혼 했을꺼야" 라고 말한다. 인간과 똑같은 안드로이드와의 사랑 어떻게 받아드릴것인가? 하긴 요즘 모 유명사이트에서 애니메이션 케릭터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생일 파티를 하는 동영상을 본적이 있다.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글쌔.. 난 잘 모르겠다.
책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암울하다. 우리가 자율적이고, 통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감정은 감정이입기로 803번 감정으로 스스로 바꿔가며 통제한다. 마치 1984의 빅 브라더를 휴대용으로 맞춰서 들고다닌다고 할까? 감정을 바꾸는 그 감정은 이미 감정이입기로 통제된 감정이 아닌가? 또 티비에서 나와서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명확히 구분 시켜준다는 머서주의는 일개 티비쇼로 판명난다. 무엇이 진실이고, 우리는 뭐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서 많은 질문을 받는다. 우리는 안드로이드의 꿈을 보기전에, 사람은 무엇을 꿈꾸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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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에 만들어진 영화 [블레이드 러너] 내 나이 3살때다... 그 영화의 원작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아니. 대체 얼마나 많은 상상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기에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지금 내가 읽기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그런 글을 필립 딕은 쓴걸까? 책을 읽는 내내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생각했던 미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 그리고 내가 상상하는 미래. 영화로 만들어진 블레이드 러너는 21세기 초를 말하고 있는데..나는 지금 그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참 뒤쳐진 것만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 책.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고 자라서 나름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생각됐던 나는 그런 생각이 부끄럽다고 여겨질 정도로 나의 머릿속을 몇 세기정도 뛰어넘고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읽기위해서 영화를 먼저 보았다. 현재까지 나오고 있는 수많은 SF영화의 엄마라고 할 정도의 [블레이드 러너]. 사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나름 많은 짐작을 하고 봤기 때문에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이게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었지만..곧 정리가 되었던 내용들... 그리고 나서 읽기 시작한 이 책은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또 다른 나의 뇌를 자극하고 있었다. 영화에서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존재... 과연 릭 데커드가 생각한 것처럼 안드로이드는 인간에게 해가되는 존재일까? 인간보다 더 인간같은 안드로이드를 인간이 더 우월하다는 존재감 하나로 마음대로 끝을 내도 되는 걸까? 저자는 읽고 있는 내내 나에게 묻고 있었다. 아니 책을 읽는 후반부에 다가와서는 과연 나는 인간인가? 아니면 내가 안드로이드가 아닐까? 만약에 내가 현상금 사냥꾼이라면 과연 나는 데커드처럼 안드로이드를 처치할 수 있었을까? 등등... 읽는 동안 내내 내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하게 만들었다. 현재를 살고 있는 내가 작가보다 더 훗날 미래를 살고있는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그가 떠올리면서 글을 쓴 시대인데... 정작 나는 작가보다 더 과거에 살고있었다. 아니 그렇게 느꼈다. 앞선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과거의 작가를 동경하는 느낌? 이 책을 읽고난 후에 내가 느낀 느낌은 그렇다. 그렇게 멋진 작가의 책을 읽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내 감성은 만족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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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원제에 충실한 책 제목인데, 정말 독특한 제목이다.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전혀 예상할 수 없다. 홍보하는 내용을 보니 "세계 20여 개 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전설적인 SF 걸작"이란다. 다시 보니, 전설적인 SF 걸작다운 제목이다. 나는 책을 소화하기 위해 먼저 저자부터 살펴보았다. '필립 K. 딕', 처음 듣는 이름인데, 내가 재밌게 보았던 영화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원작자이다. 현대 그의 이름을 딴 필립 K. 딕 상이 세계 3대 과학소설 상으로 높은 권위를 자랑한다고 한다. SF 소설의 대가를 만나니 기분이 좋아진다. 저자는 무궁한 상상력으로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다. 나에게 미래 사회가 이럴 것이라는 상상을 처음으로 하게 해준 것은 '은하철도 999'였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행성들을 생각해보면, 그 모든 설정들이 대단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토대 위에 설계된 것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새삼 얻는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도 그렇다. 판타지 소설인 [해리포터] 처럼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설이 아니라,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 위에 예측된 미래 사회라고 생각한다. 세계 전쟁이 일어난 지구는 오염된 낙진으로 인해 생명체가 살기 힘든 행성이 된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방사능 오염으로 멸종되고, 생존자들도 대부분 이민 행성으로 떠나, 지구는 끝까지 지구에 남기를 고집한 몇몇 사람들뿐인 텅빈 행성이 된다. 유일하게 가득 차 있는 것은 방사능 오염과 남겨진 쓰레기 더미이다. (쓰레기 더미에 대한 묘사와 설정은 영화 '월 E'의 설정과 닮아 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의 주요 주인공인 '릭'은 이민 행성을 위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인간로봇) 중에 지구에 잠입해 들어온 '안드로이드'를 찾아내어 '은퇴'시키고 보상금을 받는 경찰서 소속 안드로이드 사냥꾼이다. (안드로이드라는 설정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그의 꿈은 지구에 남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가짜로 만들어진 '전기 양'이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양'을 사서 키우는 것이다. 릭은 살아있는 진짜 양을 사고 싶어 '안드로이드'를 찾는 일에 혈안이 된다. 또다른 주인공은 낙진 오염의 영향으로 '특수자'로 분류된 '존 이지도어'이다. 릭이 '안드로이드'를 해치기 위해 추적하는 자라면, 이지도어는 '안드로이드'를 돕는 자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그리는 미래 사회는 '펜필드 기분 전환기'로 원하는 기분을 설정하고, '감정이입기'가 필수품인 사회이다. 나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읽히는 특징은 진짜와 거짓의 흐릿한 경계이다. 생명과 죽음, 진짜 감정과 프로그래밍 된 감정, 인간과 로붓 사이의 정체성, 모든 것이 모호하다. 동물 병원을 운영하는 '슬로엇'의 말처럼 "죽음은 확실하나 생명은 불확실하다." 어디까지가 살아 있는 생명, 살아 있는 감정, 살아 있는 나라고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태초에 하나님은 동물을 지으시고 그것을 최초의 인류인 '아담'에게 이끌어 오셔서 '이름을 짓게 하시고'(정체성 부여), 그것을 돌보고 다스리도록 하셨다. 그러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인류가 그 신성한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감정을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을 갖게 되지만, 생명을 창조할 능력은 없는 인간. 그 인간들이 지금 파괴하고 있는 것은 생명이며, 바로 자신의 생명이다. 인간의 끝을 모르는 탐욕은 전쟁을 불러올 것이고, 우리의 치열했던 삶과 소유의 잔해는 쓰레기로 남겨져 지구를 채울 것이다. 내가 맞닥드리게 될 나의 정체의 진실은 무엇일까? 저자는 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라는 질문을 던졌을까? 어렵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그냥 읽고 즐기기에도 흥미로운 소설이며, 미래 사회에 영향을 미칠 현재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를 갖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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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K. 딕(Philip Kindred Dick) 출생 : 1928년 12월 16일 (미국) - 사망 : 1982년 3월 2일
1968년에 쓰여진 SF소설이라는데 영화화되서 상영되던 1980년대, 그 당시 난 어리기도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과학상상화그리기나 과학도서에 대한 글짓기대회를 하면 생각나는 것은 - 물론 이것 또한 어디선가 한번쯤 보거나 읽었던 기억이겠지만 - 로보트, 하늘을 나는 자동차, 검은 우주에 별이 많고 거길 둥둥 떠다니는 투명한 반구 모양의 도시 들을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상상한다고 하면서도 그런 것들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지 않았을까.
필립K. 딕의 이러한 상상력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앞선 이야기였기에 따라가기가 버거웠는지 그의 작품에대한 흥행은 실패했었다고한다.
세상에, 1968년에 쓰여진 글을 2009년에 읽으면서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드니
그당시에는 어땠을까? 그것도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디스토피아적인 발상으로 쓰여진 작품은 상상가능성의 여부를 떠나서 외면받을 가능성이 충분했을 것이다.
그의 디스토피아적 발상은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통해 매우 공감하며 느껴보았던터라 이 작품 속에서 만나는 먼지가 가득 낀 분위기는 적응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그저 신기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뇌를 가졌기에 그 당시에 이정도까지의 구체적인 상상으로 작품을 쓸 수 있는지, 요즘 나오는 허접한 SF 소설작가나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의 묘 앞에 가서 무릎꿇고 기다리면서 약간의 영감이라도 받아오라고 시키고 싶다.
전쟁, 인간, 파괴, 탈출, 안드로이드, 동물, 전자동물, 살인, 그리고 자아를 찾기 위한 몸부림.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과 그 행복을 위해서 파괴를 아무렇지도 않게 일삼아왔던 지구의 인간들.
최후세계대전 후 -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전쟁을 겪은 뒤일까. 최후 세계대전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귀에 맴돈다 - 지구의, 모든 것이 죽어가는 지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들
그리고 안드로이드.
단백질 인형이라고 하던가? 일본에서 나온 고가의 인형이라던데, 정말 예쁘고 사람의 모습과 흡사해보인다. 아무리 인형이라고하지만 그런 안드로이드가 우리와 함께 살아있다면
그걸 과연 로봇이라고만 인지하고 살 수 있을까?
필립K.딕이 이 작품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그저 미래사회의 암울한 모습만이 아닐 것같다.
선과 악을 구분짓는 기준의 모호함에 대한 이야기. 그 모호한 기준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판단을 하게되었을 때 느낄 수 밖에 없는 갈등들, 감정들.
기계로 감정까지 조절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어쩔 수 없이 고민에 빠지게되는 사람들 그리고 안드로이드.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구분짓는 기준은 결국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기 눈앞에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고 해결되지 않는 갈등은 어쩔 수 없는 우울함 속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물론, 작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상상력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일개 독자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그런 생각이든다.
영화를 봐야겠다. 책을 읽은 후 영화를 보면 내 머리 속에 상상했던 장면들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비교해볼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을 하게된다.
영화를 보고나면 인간으로서의 내 모습과 미래의 삶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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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참, 묘한 분위기를 지닌 소설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내용이나 문장이나 묘사나 그런 것과는 하등 관계없이 소설 전반에 음산한 기운을 지닌 그런 소설이다. 아니, 그런 것들 때문에 그런 분위기를 지니게 되는 건가? 아무튼. 굳이 예를 들자면 [폭풍의 언덕]처럼 일단, 분위기로 먹고 들어간다고나 할까? 디스토피아적인 소재면에서 그렇지 않겠냐고 반문한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음산한 배경을 지녔다고 해서 소설 자체의 분위기가 그렇게 이끌려 가는 것은 아니라는 걸, 비슷한 주제의 [인간종말 리포트]라는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뭘까? 그런 분위기를 연출해낼 수 있는 요소가. 생각 좀 해봐야겠다.
이 소설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소설이다. 영화의 제목이 매우 귀에 익었다. 내가 이 영화를 봤나 안 봤나 가물가물해서 잠시 검색을 해봤더니 해리슨 포드가 나오는 영화이고 1993년에 개봉한 영화였다. 당근 안봤다. 1993년이면 음음, 내가 영화를 보고 다니지 않을 시기였다. 쩝. 그러니까 어찌보자면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어쩌면 봐놓고 까먹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기억력을 믿는 자체가 미친 짓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으니까.) 소설의 배경은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미래의 지구다. 인간은 화성에 식민지를 개척해놓고 대부분 이주를 한 상태이다. 지구에 남겨진 인간은 특수한 상황에 처해서 남겨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다. 물론 다른 생명체도 매우 희박하다. 여전히 지구엔 낙진이 내리는 중이고. 사람들은 기계로 만든 동물을 키운다. 실제 생명체를 키우는 경우가 그들이 가진 소박한 꿈 중에 하나인데 그것은 아마도 소설의 설정상, 인간들 사이에서의 어떤 신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되어진다. 그러니까 전기 동물을 키우는 사람보다 실제 동물의 키우는 사람이 더 대접받는 뭐 그런 거? 이야기는 화성에서 탈출한 인공지능 안드로이드를 사냥하는 것으로 이뤄져있다. 당연히 현상금 추적자가 나온다. 주인공은 현상금 추적자다. 카우보이 비밥이야?
작가는 1928년생이고 1982년에 가셨다. 연도를 써놓고 보니 묘하네. 이 작품의 정확한 발표 연도는 모르겠지만 1982년 이전에 쓰여진 것만은 틀림없다. 가신 다음에 쓸 수는 없잖은가? 그렇게 보자면 참, 대단한 소설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최근 등장하는 모든 sf창작물의 기반이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장치들이 등장한다. 물론 지금에서야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여겨질만한 장치구성이지만 1982년 이전에 그런 장치를 상상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얘기는 2021년 1월 3일 하루 동안 벌어진 내용을 다뤘는데 사실 지금 시점에서 2021이란 그다지 미래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내년이면 2010년이지 않는가. 그러나 책이 집필됐을 당시를 기준으로 보자면 상당한 미래였을 것이다.
책의 음산한 분위기는 우리가 그간 접했던 미래 영화의 폐허 도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분위기다. 그런 매체를 통해 이미 내 머릿속에 선입견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당근 소설에서 표현하는 배경들이 눈에 그려지듯 선하게 떠오른다. 그러다보니 당근 가독성이 좋고, 또 당근 몰입도 잘 되며, 당근당근 재미있다. 그러나 액션 블록버스터스러운 소설은 아니다. 뭔가 묵직한 메시지들이 숨어있다. 곱씹어보면 여러 형태의 숨은 의미가 다양한 기분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 기분 역시 묘하다. 제목부터 묘하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꼭 집어 단정적으로 이 소설이 애기하고자 하는 건 이것이야, 라고 말할 수가 없다.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고 이것저것일수도 있는 상황이다. 즉, 독자가 느끼는 대로 생각하면 될 거라는 생각이다. 분명한 건 숨은 메시지가 명랑쾌활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키에누리브스가 미친듯이 등장하는 어줍잖은 정치적인 환경주의자같은 내용을 품고 있지는 않다. 뭐랄까, 상당히 은유적이라면 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는, 뭐랄까, 뭐랄까.
분위기와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주제 사라마구가 표현하는 식의 은유가 이 소설의 전반에 흐른다고 보면 대충 옳을 것 같다. 카프카식이라고 해도 좋다. 우리나라 문단 사람들 카프카, 이런 거 무지 좋아하니까.
[로맨틱한 초상]이라고 고인이 된 이갑재 작가가 쓴 소설에서 암사마귀가 숫사마귀를 잡아먹는 장면이 등장하는 데 그 묘사가 가히 소름이 끼쳤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도 안드로이드가 가위로 거미의 다리를 자르는 장면이 등장하는 데, 아우. 환상문학이라는 장르에 제대로 적합한 소설이다. 어제는 소설을 읽다가 잤는데 사이보그랑 싸우는 꿈까지 꿨으니까 지대로 몽환적인 소설이다. 참고로 이 작가가 쓴 작품이 영화화 된 것이 꽤 많은가 본데 그중에 [토탈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들이 있단다. 오오,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그랬을 거 같아, 라는 생각도 든다. 묘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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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꿈꾸는가? 전기양을 꿈꾸든, 혹은 무언가 다른 어떠한 것을 원하든. 그러한 '희망'이 있는가?.
기계에 감정이 있는지에 대한, 그 감정이 생길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었다.
사냥꾼은 안드로이드를 잡는다. 누가 안드로이든이고 사람인지 알수 없을 만큼 정교한 '기계', 안드로이드.
사냥꾼은 전기양을 원한다. 그리고...
문제에 부딪힌다.
'안드로이드도 전기양을 원하는가?' '기계인간'이 '기계 애완동물'을 원하는지에 대한 질문.
...
기계에 감정이 있는가에 대한 여부에 나는 알수 없는 혼락에 휩싸였다.
사실 이러한 질문은 그전에도 있엇다. 나에게는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영화 'A.I'의 그것과도 같았다.
기계의 감정,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의 한 파트에서도 다뤘던 기억이 난다.
인간만의 소유물이었던 감정적 사고. '그것이 기계에게 간다면?', 많은 S.F스토리에서 갈등의 계기가 되었던 명제이다.
정말 물어보고 싶어졌다. '기계는 정말 감정과 희망을 가질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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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영화로 보았다. 오래된 영화였다.
제목은 '블레이드 러너'.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추천을 받아서 보았는데 꽤나 맘에 들어버린 영화이다. 영화를 만든 리들리 스콧 감독도 좀 관심이 갈 지경이었으니까.
필립 K. 딕의 소설은 이전에도 많이 읽었었지만 나는 별다른 생각이 없이
읽었었고 그래서 작가의 이름도 별로 내 뇌리에 박혀있지 않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원작들 쓴 작가라고 하니 그의 다른 소설들도 새롭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 작가는 내가 보기에 꽤 불우해 보이는 것이 그가 죽고 난 뒤에서야 그의 작품들이 영화화되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그건 차치하고, 여튼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이라 해서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는데 역시 원작 자체가 참 괜찮았다.
묵시록적 분위기가 좀 나기도 하고, 영화로 이미 봤기 때문에 그 새로운 분위기를 즐기면서 읽을 수 있었다.
미래의 미국, 그 곳은 진짜 살아있는 동물이 매우 귀한 대접을 받는 시대이다. 영화에서는 사실 '전기양'이니 뭐니 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는데 책에서는 '동물'이 매우 중요하게 등장한다.
살아있는 동물은 상상을 초월하는 비싼 가격이고 사람들은 진짜 동물을 소유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다.
주인공 데커드 또한, 도망간 안드로이드를 죽여 돈을 버는 현상꾼인데 자신이 키우던 진짜 양이 죽자 가짜 전기양을 사서 진짜로 속이면서 키운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진짜 양을 사고 싶어라하는 사람이다.
아! 그런데 내가 영화로 봤을 때는 해리슨 포드가 데커드 역을 맡아서 꽤 날렵한(?)이미지.. 그러니까 뚱뚱한 이미지로는 전혀 보지 않았는데 책에서는 그게 아닌거 같아서 좀 당황했다.
여튼 안드로이드가 진짜 인간처럼 될 수있다는 것, 인간에게 반항할 수 있고 오히려 인간보다 진짜 인간다울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소설에서도 많이 봐온 주제이거늘
대가의 작품이라 그런지 그런게 더 깊게 다가왔고 재미있었다.
머서주의 같은 것도 그렇고, 생각해볼 거리가 많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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