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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과 관련하여 현실원칙의 수행 때문에 왜곡되고 일그러진 문명의 주름을 말끔하게 펴기 위해 저항이론의 물을 뿌려가며 다리미질을 하려고 한다. 다리미질을 잘하면 기존의 주름을 펴면서 전체적으로 매끈할 것이지만, 서툴면 기존의 주름을 펴는 동시에 다른 곳에 보기 싫은 주름을 그 만큼 더 만들게 된다. 전반적으로 저자의 다리미질 솜씨는 그다지 빼어나지 않지만 봐줄만하다. 이 책《무감각은 범죄다》는 섹스, 질투와 분노, 감각기제, 오르가즘과 저항 등을 논의하고 있다. 성과 오르가즘을 한 축으로 하고, 다른 한 축으로 감각구조와 저항감각을 논한다. 먼저 예술과 성의 구조적 유비관점에서 감각과 무감각 같은 미학적 논점을 전개하고 더 나아가 이를 급진적인 정치적 기획으로까지 전환한다. 예술이 대상적 활동이고 유용성을 벗어난 미학적 저항이라 할 때, 인간의 성행위도 대상적 활동이고 미적 저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미학적 관점에서 성행위를 성찰해 보는 것은 그리 낯선 시도는 아니다. 장정일, 마광수, 서갑숙 같은 저자 덕분에 성미학 자체는 국내독자들에게도 익숙한 주제다. 이들도 성행위와 예술행위간의 근친성과 유사성을 논했다. 예술행위가 창조적 활동이라면 성행위도 그러하다. 예술적 인간이 「개성의 전면적인 발전을 꾀하는 인간」이라면, 성적 인간도 그러한 측면이 있다. 문제는 저자 이희원씨가 성미학을 정치적인 저항미학의 대표적인 사례로 상정한다는 점이고, 아울러 성에 관계된 오늘날의 과학지식을 대부분 방기한다는 점이다. 성행위 말고도 섹스를 뜻하는 다른 후보언어들이 많이 있다. 가령 성, 성애, 성관계, 성교, 정사, 교접, 교미, 빠구리, 씹, 사랑 등. 그런데 저자는 일반적인 섹스란 단어 말고 보다 더 학술지향적인 「성행위」라는 단어를 골랐다. 앞서의 많은 후보단어 중에서 왜 유독 성행위를 꼽았는지 저자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예술「행위」와의 유비성을 강조하려면 성「행위」라는 말이 어감상 좀 더 편한 말이어서 채택한 것 같다. 그러나 저자가 논의하는 주제 「대상적 활동으로서의 성행위」는 오히려 「사랑」이란 말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사실 그 표현이 너무 길어 나는 한동안 「에로스」란 말로 치환해 읽곤 했다. 저자의 전반적 논의를 이해하려면 다음의 기본 명제를 먼저 알고 넘어가야 한다. 바로 「총체적 경험의 장으로서 성행위는 대상적 활동이다」와 「전면적인 소통과 융합으로서 오르가즘 능력은 정신건강의 척도이다」란 명제인데, 앞으로 이 두 명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총체적 경험의 장으로서 성행위는 대상적 활동이다. 대상적 활동이란 간단히 말하면 객체를 구조화하면서 주체 또한 재구조화되는 활동이다. 서로 주고받는 관계맺기의 상호작용과 자기실현이 관건인데, 저자는 이런 대상적 활동의 성행위의 전제조건으로 관계의 지속성, 상호긍정과 배려, 오르가즘 능력, 「상호 던짐」 등을 논의한다. 성행위는 성행위를 통해 자신을 표현할 뿐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고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노동이나 예술 활동과 마찬가지로 대상적이다. 그러나 모든 성행위가 대상적 활동은 아니다. 대상적 활동으로서의 성행위와 그렇지 않은 성행위가 있다. 「단순히 생식적인 목적이나 생체감각이나 근육의 긴장이완을 위한 목적에 봉사하는 성행위는 대상적 활동으로서의 성행위와 전혀 다른 것이다.」(p.105) 저자가 볼 때 자위행위, 「접붙이기」(껍데기 섹스), 강간, 수간과 시체간음, 프리섹스, 원나잇스탠드, 난교 같은 사례들은 대상화가 결여된 성행위이다. 성적 소외의 현상이라고 말한다. 돈 쥬앙식의 자유분방한 성행위가 실은 「금욕의 성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원앙새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저자는 진지한 카사노바의 복수적 성관계(양다리 걸치기)나 바람피우기는 오히려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분류는 매우 자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대상적 활동이란 가치판단과 상관없는, 즉, 좋음/나쁨이나 고급/저급 같은 윤리와는 상관없는 개념으로 간주하는데 실제 저자의 용법은 그렇지 못하다. 글에서 대상적 활동으로서의 성행위는 현실적인 성행위를 지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바람직한 성행위 그리고 이상적인 성윤리로 제시된다. 저자는 마르크스의 대상적 활동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너무 많은 분량을 잡는다. 중요한 개념이긴하지만 어려운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공간이 필요한가란 의문이 든다. 오히려 이를 반으로 줄이고 「비대상적 활동으로서의 성행위」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좀 더 명확하게 정리하는 편이 글의 논지를 보다 더 확실하게 했을 거라고 본다. 저자는 대상적 활동으로서의 성행위와 비대상적 활동으로서의 성행위간에 뚜렷한 기준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을 자주 내보인다. ●전면적인 소통과 융합으로서 오르가즘 능력은 정신건강의 척도이다. 대상적 활동이란 개념뿐만 아니라, 「오르가즘 능력」이란 또 다른 키워드도 생물학적 의미를 벗어나 윤리적이고 심리적인 의미로 확장되어 사용된다. 오르가즘 능력은 「자신의 몸을 던져서 상대와 총체적으로 융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갑옷』, 즉 자기 스스로 껍데기를 벗어던질 줄 아는 능력이자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능력이 바로 오르가즘 능력이다.」(pp.141-2) 참고로, 저자는 던짐, 몰입과 융합 등을 대상적 활동으로서의 성행위 일반의 대표적인 은유로 사용한다. 오르가즘 이론을 두고 저자는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라이히의 이론을 그대로 답습하고 그의 문제점도 고스란히 물려받는다. 저자는 오르가즘 능력이 인간의 정신적 건강과 심리적 건강을 결정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섹스로 오르가즘을 즐길 수 없는 여성들은 남성과 친근한 관계를 맺는 데 심각한 문제를 노출시킬 수 밖에 없다면 지나칠까? 호감이 가는 상대와 섹스하면서도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는 여성들은 크든 작든 대체로 심리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고 하면 지나칠까?」(p.245) 「성관계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대의 고통을 정면으로 뚫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오르가즘 불능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성적 장애는 일종의 감각능력 훼손이라는 내용을 지닌다. 인간의 감각능력 훼손은 궁극적으로 인성장애를 초래한다.」(p.386) 이런 단정은 당연히 지나치다. 한마디로 성적 건강이 심리적 건강과 도덕적 건강까지 담보하는 징후가 된다는 말이다. 저자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눈다, 오르가즘을 맛 본 건자建者와 맛보지 못한 병자病者. 이런 원시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이분법 논리가 등장하는 게 무척 유감이다. 저자는 병자의 인성구조가 「답답한 피로감, 혐오감, 반감 혹은 무관심, 그리고 때로는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 같은 유해성격을 생산하고 재생산한다고 주장한다. 그 대표적 사회적 괴물이 바로 「모듀MODJU」로, 모듀는 유해한 성격의 소유자를 지칭하는 라이히의 개념어이다. 이런 식으로, 「확장된 의미에서의 오르가즘 능력」은 성격구조와 사회구조의 통일성이란 일원적 논리하에서 일상적 삶의 왜곡구조와 소외구조를 분석하는 이론틀로 변모된다. 이러한 성과 오르가즘 체험이 저항미학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저자는 그 근거로 감각적 활동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활동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즉, 「감각은 정치적이다.」 만약 삶의 조건이 인간적 감각의 본질을 억압한다면 삶의 감각적 본질을 추구하는 성행위는 그 자체로 자아실현 과정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저항의 실천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르가즘 체험은 우리의 감각구조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감성적 인식을 심화시킨다는 측면에서 성미학과 저항미학의 주요한 근거가 된다. 거시적 차원에서 말한다면, 무감각은 언제나 허위의식을 동반하고 지배 이데올로기의 착취와 억압의 토대가 된다고 한다. 그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고 그것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가를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성찰하지 못하는 범죄다.」 저자가 말한 이런 무감각의 범죄는 「무통문명」이나 「평범한 악」이란 논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오르가즘 불능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사회적/정치적 차원의 병폐의 온상이라면, 오르가즘 능력의 회복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인 「소유감각으로의 일면화」와 권위주의 사회에 만연한 「쾌락불안」을 치유하는 전제요소가 된다. 저자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저항감각을 갖춘 바람직한 인간상은 누굴까란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저자가 비록 이 문제를 직접 논하지는 않지만, 추측은 해볼 수가 있다. 바로 영화《감각의 제국》에 나오는 남녀주인공 「키치조」와 「사다」이다. 바타이유의 표현을 빌자면, 이들은 「불연속적 존재에서 연속적 존재로의 이행」을 실천적으로 재현했고, 저자의 말을 빌자면 파쇼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에 저항하여 「자율적인 단자적 대안 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자주 자문했다, 이 책을 과연 어떻게 평가하면 좋을까라고. 전체적으로 저자의 논지는 십분 이해하지만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저항미학의 완성품이 아닌 이론적 토대구축을 위한 사유의 흔적이다. 이론적 틀을 닦기 위한 준비과정을 책으로 내놓았다는 말이다. 바닥 여기저기 듬성듬성 늘어놓은 여러 골재와 건축자재들이 눈에 띈다. 저항으로서의 성미학을 세우려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성미학에 관한 저자의 사유는 숙성되지 않았고 유치한 부분마저 있었다. 수많은 라이히의 인용문은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게 아닐까. 내가 저자의 책을 읽는 이유는 저자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지 라이히의 사상을 소개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자의 차기 작품을 진실로 기대하고 있다. 좀 더 오래 숙성된 사유의 향기가 배어있는 그런 책을. 나는 그런 가능태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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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희원님은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나시고, 서울 대학교 독문학과에 입학,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으셨다. 독일 유학 초기 브레히트 문학을 중심으로 <저항의 미학>을 접하게 된다. 요즘은 섹스가 범람하고, 성에 관해 많은 이야기들이 난무 하고 있다. <성미학>은 "전반적 무능력"에 대한 진단을 내리기 이전에 성적 무능력에 대해 성찰하고, 나아가 성이라는 문제에서 저항의 모멘트를 찾고자 한 작업의 결과라 한다. 사람에게 감각작용은 하나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인가.
예쁜 여자를 보면 성적 흥분을 일으키리라 생각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걸 본성이니, 본능이라고 이야기 한다. 책의 내용이 독일의 마르크스의 사상이 담겨져 있어 학창시절 배우던 유물론이나 공산주의의 이념을 간직한 사상서 이야기가 나오는 게 어쩌면 철학의 입문서 같기도 하다. 사랑의 표현 방식에서 서로 교감이란게 생길때 오르가즘이라는 것도 생기고, 사람이 결혼 해서 사는 것, 부부 간의 성 행위는 가정 생활이란것에서 그게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 하는 것인지 말 안해도 알수 있는 것이다. 요즘 화제가 된 부부간의 간통이라는 것은 전에 법정에서 있었지만, 이번에 부부간의 강간이라는 것이 법정에서 재판 되어져 화제가 되고 있다. 사랑이 없는 부부간의 성행위나, 연인간의 성행위에서의 오르가즘이 결정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서 무자가 들어가 좋은 것도 많겠지만 , 그래도 부정저인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 지는 거 같다.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게 무관심이고, 무감각한거라 생각 한다. 이혼 하는 가정의 부부를 보면 서로 무관심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서로가 무엇을 하고 , 무엇을 원하는지 관심이 없다보니 점점 부부 사이가 멀어져 결국엔 파경에 이르는 거 같다. 그렇다 무감각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무리 한편에서 노력해도 상대가 감각이 없어 무감각하면 어찌 애정이 식지 아니 하겟는 가. 사랑에 무감각하고 , 무관심 하지 말고 뭔가 열정적으로 관심과 감각을 가져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감각적인 인간은 본능적으로 저항한다, 그래서 성미학이 거론되고, 저항의 미학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