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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비평가가 바라보는 세상과 역사의 구성형식
"문예비평가가 바라보는 세상과 역사의 구성형식" 내용보기
이전에 읽은 가라타니의 책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을 상당히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났고, 그 전에도 이 작자의 글들이 괜찮다고 생각해서 또 하나를 골라봤는데... 이 책은 좀 별로였다. 내용이 별로인게 아니라, 내가 거의 알지 못하는 일본 작가/학자들에 대한 평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너무나도 생경했고, 따라가기가 다소 곤욕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드는 생각, 한국에서는 부재
"문예비평가가 바라보는 세상과 역사의 구성형식" 내용보기
이전에 읽은 가라타니의 책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을 상당히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났고, 그 전에도 이 작자의 글들이 괜찮다고 생각해서 또 하나를 골라봤는데... 이 책은 좀 별로였다. 내용이 별로인게 아니라, 내가 거의 알지 못하는 일본 작가/학자들에 대한 평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너무나도 생경했고, 따라가기가 다소 곤욕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드는 생각, 한국에서는 부재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매우 빈약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20세기 전반의 지식인들의 활동, 그들의 성과에 비해 비교적 정상적이었던 일본지식인계에서는 꽤나 많은 성과들이 있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되었다. 그냥 일본의 전통에서부터 유학 등의 전통을 연구했던 학자들이 자연스럽게 서구에서 유입되었던 신학문들과의 관계를 고민하면서 많은 연구를 했었다는 사실, 그것이 현재 일본 지식계의 근간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확인되었다. 부러움과 약간의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수준이야 어떻든, 양주동의 이두해석과 같은 부류의 연구에서부터 김용옥이나 이정우의 기철학 운운하는 식의 자기 사회의 전통학문의 재해석과 같은 일이 최소한 한국에 비해서는 반세기 전부터 일본에서는 진행되었다는 것. 그러다 보니, 가라타니 고진과 같이 유학과 맑스주의를 같이 논하는 문예비평가가 근근히라도 유지되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수유/너머 라는 집단이 (몇년 되긴 했지만) 갓 기지개를 펴는 정도로 자리잡는 것에 비해서 말이다. 책 제목에 대해서 약간 불만이 있다. 아무리 뭐라해도, 제목을 보고나서는 약간 가벼운 에세이적인 글들이 좀 많이 있을꺼라고 생각하는게 당연한 거 아닐까? 하지만, '유머로서의 유물론'이란 글은 매우 짧고, 전체 편집된 글들의 문제의식을 관통한다고 말하기도 억지스럽다. 역시 일본인이 쓴 약간분량의 해설을 참고하면, 이런 편집과 제목뽑기는 아마도 일본에서의 출판상술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나도 어느정도는 거기에 혹한 것이고.. 그럼에도 꽤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원작을 보기도 하고, 다른 글들에서 여러번 언급이 된것을 확인하더라도, 그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단어들의 뜻이 예상치 않은 시공/지면에서 명쾌해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철학을 셋을 꼽으라면, 주자학, 맑시즘 그리고 라이프니찌의 모나드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중 마지막에 대해서 개념을 잡는데 도움이 되었다. "... 여기서 나는 특수성과 단독성의 개념적 차이, 혹은 일반성과 보편성의 개념적 차이를 확실히 해 두려 한다. 즉 '특수성-일반성'이라는 짝과, 그것과는 이질적인 '단독성-보편성'이라는 짝이다. 이를테면 질 들뢰즈와 키에를케고르는 '반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반복은 단독적인 것의 보편성이며, 특수한것의 일반성과 대립한다". 다시 말해 키에르케고르가 말한느 '반복'은 자연법칙과 같은 반복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는 결고 반복되지 않는 단독성의 반복이다. .... 거기에는 어떤 점(모나드)에도 전체(일반)가 표출되어 있으며, 각각의 모나드는 "서로 창(窓)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세계를 표출하고 있으므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수학에서의 특이점이란 실상 미분 불가능한 접을 말한다다. 달리 말해 단독성(=특이성)은 '특수성-일반성'의 축과는 다른 축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의와 그에 연장된 서술을 보면서, 난 나름대로 '본질주의'라는 것이 왜 여러부분에서 부정되고 있는지, 그 배경에 왜 모나드론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며,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부류의 이론들이 거대서사를 무너뜨리려고 했는지 약간의 감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근대/현대 서구철학이 자연과학/공학의 발달과 개념적으로 밀접할 수 밖에 없는지도 짐작이 되었고. ... 한마디로 현상의 이면에 메타적으로 존재하는 단일하고 본질적인 하나의 흐름이나 정신이 있다는 것이 부정되는 것이다. 아주 비약하면 음모도 그렇고. 매 순간 독립적으로 반복되는 개체와 사건들로부터 세상이 구성되는 것이고, 그러한 실체들 외부를 가정하는 방법이 과거의 본질주의적 흐름에서부터 실체와 실체, 그리고 실체와 외부사이의 관계에 대한 독립적인 모색으로 변형되는 것이라고 스스로 정리할 수 있겠다. 가라타니는 이와 연결된 여러 논의를 소개하는데... 가장 인상깊은게 상품-화폐-상품의 교환과정이 왜 목숨을 건 도약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공학적으로 간단화해서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일반법칙이라는건, 거의 외부와 실체의 통계적인 일반화일 뿐이고, 모나드적 개별 사건에 있어서는 매 순간이 거의 독립적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면 역사란... 역시 매우 간단히 말해서 우연의 결과였다고 말해야 할까? ... "... 맑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 예술이 '다른 것이 될 수 없는 이것'으로 존재했다는 점, 우리가 가진 관심은 그것이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사뿐 아니라 자연사에 관해서도 이와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사실 역사의 가정이라는건, 겉보기엔 우연의 작용에 대한 관심인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말한바와 같이 메타적으로 시공을 관통하는 그 무엇을 가정했을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역사의 가정이 얄팍한 것은, 각종 통속소설의 상상력이 보여주는 음모론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저자가 제시하는 언어론 중 다름과 같이 흥미로운 얘기가 있다. "나는 앞서 구어역이라고 말했지만, 루터의 번역 또는 그에 이어지는 각국의 번역은 구어가 아니다. 이는 일본의 언문일치 운도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또 하나의 문어 창출인 것이다. 이러한 성서의 번역이, 성서의 규범성으로 인해, 프랑스어나 독일어 등의 민족적인 언어를 규범화하는 모체가 되었다. 즉 파롤이 문자로 쓰여지게 된 것이 아니라, 이른바 규범적인 에크리튀르(데리다는 음성과 기의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문자를 가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에크리튀르(Ecriture)라고 부른다. 에크리튀르란 문자 일반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가 말로 이야기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에크리튀르는, 그것이 에크리튀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적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도착만큼 귀찮은 것은 없다. ..."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 대한 일반론과도 연결이 되지 싶다. 심하게 말하면, 신 혹은 성인의 말씀이 문자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문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신 혹은 성인의 말씀이 된 것이라고 해야 할까? 문자 이전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미 우리는, 우연적이라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문자 없는 세상에서 살 가능성을 거의 상실했다고 봐도 좋지 않겠는가?) 이런 맥락의 이야기들은 이 책을 보면서 재정립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일본의 개념들이 한국인에게 이해되기 더 쉬운 것인지, 아니면 가라타니의 탁월함인지... 이런 얘기륻 서구작자의 원전이나 해설을 봤을땐 참 이해가 어려웠었는데 말이다. 그 밖에 일본 지식인들의 이론들에 대한 저자의 평은, 워낙에 일본 문예사에 대해 아는게 없는 지라... 쩝~
e****s 2004.10.23.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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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철학으로 그려내는 일본의 '얼굴'
"서구의 철학으로 그려내는 일본의 '얼굴'" 내용보기
누구나 유머적인 정신 상태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드물게 밖에 발견되지 않는 천분이며, 수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주는 유머적 쾌감을 맛볼 능력조차 결핍되어 있다. (프로이트, <유머>, 132쪽) ⓒ2003 문화과학사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세계 문학계가 알아주는 일본의 문예비평가이다. 스스로 '비평가'라고 불리길 자청했지만 가라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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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유머적인 정신 상태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드물게 밖에 발견되지 않는 천분이며, 수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주는 유머적 쾌감을 맛볼 능력조차 결핍되어 있다. (프로이트, <유머>, 132쪽)

ⓒ2003 문화과학사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세계 문학계가 알아주는 일본의 문예비평가이다. 스스로 '비평가'라고 불리길 자청했지만 가라타니 고진은 단순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비평가, 평론가와는 좀 차원이 다르다. 아즈마 히로키(東 浩紀)가 이 책의 '해설'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스스로 비평가이기를 자청하는 것은 기존의 문예비평의 전통, 곧 비평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내고 동시대의 문학(의 경향)을 읽어낼 수 있었던 전통을 잃어버리고 '동업자비평' 수준으로 전락한 현실에 맞서고 저항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일본의 문화, 문학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마련인 우리나라에서조차 최근에 소개되고 있는 그의 저서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번역서는 '덧붙이는 글' 참조).

이를 문학평론가 홍정선 교수는 문화일보를 통해 "가라타니의 저술활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적인 학문풍토와 상당히 다른 세계다. 그는 작은 주제에 철저하게 매달리는 일본적인 아카데미즘과는 반대로 넓고 큰 문제들을 거침없이 다루는 서구적인 아카데미즘의 세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는 문학이라는 영역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철학, 역사, 건축, 마르크시즘 등 폭넓은 세계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개방시켜왔다"고 하면서 이런 가라타니의 세계성과 열린 정신이 우리나라에서도 주목받게 된 이유일 것이라 말하고 있다. 실제로 가라타니는 일본에서는 드물게도 천황제에 반대하는 비판적 지식인 그룹에 속한다.

<유머로서의 유물론>은 이런 가라타니 고진이 1969년부터 작업해온 것들을 모아서 엮은 '평론'집이다. 그 대부분이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잡지에 실린 원고들이라고 한다. 평론이라고는 하지만 '하나의 공간, 두 개의 19세기', '비데카르트적 코기토', '푸코와 일본', '라이프니쯔 증후군' 등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철학과 문학, 건축을 오가는 '메타담론'에 가까운 비평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 순서대로 읽어도 좋고 각 글마다 따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후자의 방법을 택했는데, 그건 전적으로 필자의 일본 문학에 대한 무지 탓이다.

일본 문학이나 문화에 생경한 필자에게는 그들의 작품이나 작가들이 나열되는 문학사가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푸코와 일본', '라이프니쯔 증후군'과 같이 어느 정도 익숙하게 다가오는 글부터 읽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아마도 문학보다는 철학에 익숙한 필자의 취향 탓일 것이다. 그러나 다 읽고 난 후에 생각해보니 이건 쓸데없는 선입견에 따른 선택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글이나 단순히 철학이나 문학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학문영역을 횡단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기에.

이러한 가라타니의 방법론은 어찌 보면 푸코의 '고고학'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다만 푸코가 광기나 성, 권력 등 서구 근대사회의 메타담론에 입각해서 고고학적 계보학을 형성하고 있다면, 고진은 근대국가의 성립,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근대의 형성에 가장 가까이 있는 문학담론의 형성으로써 일본 근대의 기원을 파헤치는 수순을 밟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1980)에서 도입한 이러한 방법론을 이용해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에서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원용, '에크리튀르'(Ecruture:문자/글말)에 대한 통찰을 얻어내고 이를 메이지(明治)시대의 언문일치 연구를 통해서 다시 데리다를 뒤집어 버린다.

언어에서 문자를 배제한 소쉬르 이래의 언어학의 음성중심주의를 데리다는 플라톤 이래의 서양 형이상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지만 가라타니는 근대 민족의 형성과 분리할 수 없는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근대의 민족은 각각 '세계 제국' 안에서 분절화되어 출현한다. 그것을 정치적인 국가의 측면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별도의 계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문학'에 의해, 아니면 '미학'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 64쪽)

이를 설명하기 위해 소쉬르, 야콥슨, 데리다는 물론 우리에게 생소한 토키에다와 같은 일본 언어학자들의 이름들이 나열되지만 결론은 (일본)언어(≒문학)를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분리해서 사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곧 일본만의 고유한 '표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라타니의 인식은 "푸코와 일본"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푸코가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일본에 관해 책을 썼던 (…) 하이데거로부터 코제브, 바르트,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 그들에겐 일본이란 서양 외부의,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nowhere)이며, 그곳에 그들의 '서구' 비판이 투사되고 있다. 그 '일본'이 그들의 표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일본인으로서도 '일본'은 중국이나 서양이라는 거울에 비친 표상이며, 그 경우의 '중국'과 '서양'은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다. 그리고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통해 스스로의 문화를 비판하는 일은, 자기동일성을 확립하기 위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수단이다." ("푸코와 일본", 107~108쪽)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들 다른 나라의 문화나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우리의 기존의 사고틀에 맞추어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가하지만 원래 '인식'이란 것의 속성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문화의 비교를 통해 보고 싶은 것은 다른 나라의 문화나 현실이 아니라 거꾸로 그 안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과도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서구 철학이나 사상을 구부러뜨리고 일본의 문학을 종횡무진 오가며 일본의 근대, 동양의 근대에 대해 파헤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일본의 것, 일본의 사상을 옹호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오늘의 일본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드러내는 작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히로키는 이 작업을 바로 오늘의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을 치유하고자 하는 흔적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일본만의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바다 건너 우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리라. 이것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희망'으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것이 이 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도 못하는 짤막한 글 "유머로서의 유물론"을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유머'란 '희망'의 또다른 이름이기에.
m******7 2007.09.1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