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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각종 행사를 하게 되면 그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고 한다. 궁중에서 연회를 한다거나 사대부들의 공식적인
모임과 같은 것을 계회라 했고, 계회를 할 때에는 전문화가를 초청하여 그날의 행사를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를 계회도라고 한다. 반면에 일반 사대부들은 취미생활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다양한 모임을 가졌는데 이를 아회(雅會)라 했으며, 이를 그린 그림을 아회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계회도가 공식 석상을
그린 그림이라면 아회도는 자유롭고 사적인 모임이었기에 즉석에서 참석자가 모임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
아회는
이처럼 우아하고 고상한 문인사대부들의 모임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벗이 보고 싶어서, 지방으로 발령 난 동료를 위로하기 위하여, 혹은 작년에 담근 술이
맛있어서와 같은 이유로 사전계획 없이 모여 자유롭고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즉흥적인 모임인 셈이다. 조선의
사대부는 이처럼 벗과 함께 즐기는 풍류를 최고의 멋으로 여겼다. 그러기에 아회에서의 풍류란 속되지 않고
멋스럽게 노는 일을 뜻했으며, 대부분이 금기서화(琴棋書畵), 즉 거문고타기, 바둑 두기, 글씨쓰기, 그림 그리기 등이 대표적인 표상이었다고 한다.
아회도는 17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한양을
중심으로 확산된 문인문화와 연관성이 있으며, 이후에는 중인계층의 상인이나 기술관리로 구성된 여항문인에게
까지 퍼졌다. 저자는 그 중에서도 사대부와 관련된 아회와 아회도를 살펴보고 있다. 그럼으로써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누린 집단적 문예활동과 예술적 취미 그리고 풍류를 확인하여 그들이 향유했던 품위
있는 일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
문인사대부들은 중국고사 속에 나오는 모임을 자신들의 아회와 연관시키기도 했다. 황희지의 별장이 있는
난정에 모인 문사들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돌리며 시를 지었다는 난정수계를 야외 아회의 본보기로 삼았고, 북송의
수도인 개봉에 위치한 왕선의 정원에서 있었던 문인들의 모임인 서원아집을 대표적인 문인 아회라 여기고 이를 모방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상상과 기억 속에 있는 아회 현장을 그린 것도 있다. 18세기
이인문이 그린 십우도는 문사관료인 서직수의 부탁으로 현존인물과 옛 성현이 동행하는 상상 속의 아회도를 그렸으며,
김홍도는 스승인 강희언이 세상을 떠난 뒤, 자신의 기량을 인정해 준 노스승과의 조촐했던
만남을 기억하기 위해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며, 기억 속의 아회도인 단원도를 그리기도 했다. 이를 통해 상산사호나 죽림칠현과 같은 은둔자들의 행동이나 고사 속의 옛 성현들의 행적은 문인 사대부들의 교양과
규범이 되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아회에서도 그것들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또한 현역에서 물러난 사대부들도 자신들의 늙음을 한탄하면서 과거의 부귀영화를 회상하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자리로 아회를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아회는 조선후기로 가면서 참된 벗과의 사귐의 도리라는 우도(友道)를
중요시하는 문인들에 의해 더욱 확산되었다. 그리고 기술 잡직이나 미관말직에 종사했지만 가치관과 취항만큼은
양반가의 의식세계를 추종했던 여항문인들의 가세로, 대규모화 되기도 했다. 이들은 신분적 한계를 예술적 향유로 극복하기 위하여 사대부 모임인 아회를 본받았고, 이를 더욱 확대하여 시 짓는 모임인 별도의 시사(詩社)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서재와 정원 꾸미기가 붐이 되었으며, 또 서재나 정원에 마련한 진귀한
물건들은 사귐을 위한 구실이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아회를 알아가면서 문득 현대에 사는 우리가 행하는 모임들을 생각해 본다. 우리들 역시 크고 작은 여러 모임들을 가지고 있다.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이웃들과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기도 한다. 아회도를 그리는 대신 만남을 기억하기 위하여 사진을 찍지만 '만남'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면 조선시대의 아회와 비교해 큰 차이는 없다. 그렇지만 그런 모임에서 우리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하고자 했던 풍류를 하고 있는 것인지는 한번쯤 생각해 보게 만든다. 혹 나는 금기서화는 고사하고 음주가무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