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능하면 단편 소설을 연이어 읽기를 거부한다. 단편 소설은 나에게 다양한 매력을 발산하지만 그 매력에 취하면 자칫 내 머리가 몽롱해 지기 일쑤다. 단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찾아가는 것. 단편이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떤 단편들은 재미있을 만 하면 끝나기도 하고, 어떤 단편은 ‘엥? 이게 뭐야?’하는 난해함을 선사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단편을 읽을 때엔 집중 또 집중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딴 생각을 하면 단편이 주는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니까. 이번에는 어쩌다 보니 성석제의 단편 소설을 연달아 읽었다. 의미를 파악하느라 날이 선 상태로 책을 읽었다. 다 읽고 나선 몸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모두 8편의 단편은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다. ‘블랙박스’ 소설이 써지지 않는 소설가의 이야기다. 어쩌다 자신과 동명이인인 동네 아우를 알게 되고 그와 위험한 거래를 하게 된다. 처음엔 순수하고 착하던 동생은 소설을 미끼로 점점 강하고 악질적인 사람으로 변해 가는데... ‘먼지의 시간’은 누가 봐도 너무나 세속적이고 속물 냄새가 나는 대자연을 벗 삼아 사는 멘토를 찾아간 선배 부부의 이야기다. ‘매달리다’는 간첩으로 몰려 자신의 삶 자체가 풍비박산 났지만 그 억울함이나 안타까움을 어디에도 증명할 수 없어 스스로를 나무에 매다는 남자의 이야기다. ‘골짜기의 백합’은 너무도 아름답다 생각하는 동생 선녀를 위해 자신의 인생 모두를 바친 여인의 이야기며, ‘믜리도 괴리도 업시’는 평범하게 살아가던 중년의 ‘나’ 앞에 옛 친구가 나타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부자였지만 어떤 존재감도 발휘하지 못했던 ‘너’. 그런 친구의 집안에 폭삭 망하고 나는 그 아이를 잊은 줄 알았다. 하지만 너는 나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놓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너’는 금발의 동성 애인을 둔 성공한 재불 화가가 되어 돌아오는데... ‘사랑꾼의 지도’는 여행지에서 길을 잘못 들어, 알게 된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험을 그리고 ‘몰두’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규명하게 해 줄 단하나의 책 ‘이피터미’를 찾아 떠나는 소녀의 여정을 그린다. ‘나는 너다’는 스마트폰 중독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했던가?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질투가 적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가보다. 나보다 잘난 것 없다고 믿었던 친구. 그 친구가 성공을 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높은 자리의 사람으로.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관심이 자못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이 친구에게 동성 애인이 있다니... 사람의 감정이란 이런 것일까? 당연하게 받았던 시선과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에 대한 분노. 그 묘한 감정에 배시시 웃음이 난다. 이 단편 말고도 매달리다는 읽는 동안 마음이 아팠다. ‘납북 어부 간첩 사건’으로 불리는 실제 사건을 소설로 만든 이 단편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우리네 삶을 생각하게 한다. 간첩으로 몰려 당치도 않는 고문을 당하고,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지만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다. 결국 나무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그의 삶. 하지만 현대인들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집중에서 삶에 매달리고, 승진에 매달리고, 생각에 매달리고, 우리 네 삶에 매달리는... ‘누군가의 이익과 출세를 위해 그의 인생이 밑거름으로 쓰였던 것이었다. 고문이 그를 감옥에 처박았다. 누명을 씌우고 고문을 한 사람들은 국가를 수호했다는 명목으로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고 사나이의 표상,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존경받고 표창까지 받았다.’ (98)
이 소설 외에도 몰두를 읽으며 내 인생의 단 한권의 궁극의 책 ‘이피터미(Epitome)’는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집중해서, 그리고 몰입해서 2권의 단편 소설을 읽었다. 책에 수록되어 있는 16개의 단편들. 초 집중을 해서 읽었기에 머리가 띵하다. 다음 책은 단편 소설은 아닌 걸로. 그럼에도 단편 소설을 또 읽게 되는 이유는 단편이 가진 매력 때문이겠지. 글발 좋은 성석제 작가의 책을 만나 기분 좋았다. 약간은 어려운 주제가 있었지만 내 나름대로 해석해 나가는 것. 이 즐거움 때문에 단편을 읽는 거겠지. ^^
|
|
주변엔 성석제 작가의 글을 재미 없다고 평가절하하는 이들이 있지만 글쎄다 작가의 글을 제대로 파고들면 쏠쏠한 재미가 있다. 역시 이야기꾼이라고 할 만하다. 다양한 에피소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과거에 잘나갔거나 이름은 별볼일 없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흘러온 과정이 자연스레 드러나고 또 삶의 바닥에서 어떻게 몸부림치는지도 적절히 보여진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흐름이 참 자연스럽고 중간중간에 실소를 자아내는 대목도 많다. 자극적인 양념을 치지 않았지만 충분히 맛을 낸 음식 같은...여전히 성석제는 유효함. |
|
목차 <믜리도 괴리도 업시> |
|
저의 책을 읽는 주요한 이유는 의식의 성장과 전환에 있습니다.
어제와 다른 말과 생각을 하며 조금씩이라도 성장하며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만 바라보면 세상을 사는 방식은 한가지지만,
눈을 돌려 사람을 바라보면 경험하지 못했던 수많은 세상이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책은 미처 알고, 깨닫지 못했던 넓은 세상을 배울 수 있게 합니다.
책을 통해 이제껏 몰랐던 세상을 경험하고 체험하다보면
편협했던 의식이 조금씩 확장되어 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도저히 제가 할 수 없던 말을 하고, 급한 성격을 그나마 조금씩 다스릴 수 있게 된 건
책을 통해 얻은 의식의 성장과 전환 때문일 것입니다.
책이 사람의 삶과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그래서 생겼을 겁니다.
이렇게 책이 주는 힘을 믿는 제게도 한가지 믿기 어려운 말이 있는데요.
"책 한 권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꾸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책을 가까이하는 독서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아니면 우연히 읽은 책을 통해 지독한 책벌레가 되었을 수도 있고요.
많은 책들을 읽다가 우연히 읽게 된 책이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꿔주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석제의 단편 소설 8편을 모아 엮은 《믜리도 괴리도 업시》(문학동네)에서
이와 비슷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발견했습니다.
"세상을 단 한 권의 책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너는 이 책 중에서 어떤 책을 읽겠느냐."
(221쪽)
새롭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은 책을 접하는 것과 비슷했다.
책을 꺼내들었을 때의 무게와 냄새, 첫 장을 펼 때의 설렘,
페이지가 넘어갈 때의 조바심과 흥분을 사람들에게서 느꼈다.
사람을 만나고 알게 되고 부딪치고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결국
책을 꺼내서 읽고 생각하고 느끼고 책장에 다시 꽂고 기억하는 것과 비슷했다.
책과 사람, 음악, 모험, 자연 또다른 무수한 그 무엇들이 인간적 총체성의
네트워크에 닿아 있다는 것 그걸 깨닫기까지 나 또한 나이가 들었다. (251~252쪽)
단 한 권의 책을 찾는 과정이 단 한권의 책이었군요. (254쪽)
많은 사람을 만나 알아가며 관계를 맺는 중에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친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많은 책을 읽고 또 읽다가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아마도 단 한권의 책을 찾는 과정은 죽는 그날까지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없는 시간을 쪼개 책을 펴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생소한 제목의 《믜리도 괴리도 업시》에는 다양한 종류의 미친사람이 등장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미친 사람뿐이었다. (240쪽)
소설이 써지지 않아 미쳐가는 소설가, 기적의 소금에 미친 사기꾼이거나 사이비 종교 교주,
배 타는 것에 미쳤다가 간첩으로 몰리고 고문으로 모든 것을 잃은 무당의 아들,
남자에 미쳐 세상을 떠도는 창녀, 자전거 여행에 미쳐 프랑스에서 길을 잃은 희곡 작가,
스마트폰에 미친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이 각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결국 소설 속 미친 사람에는 책을 읽는 모든 독자도 포함되고 맙니다.
무엇엔가에 미쳐야 살 수 있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라도 하듯 말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간혹 허황된(?)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허황된이란 표현을 쓴 건 세상은 허황된 생각에 의해 바뀌어 왔기 때문인데요.
소설을 읽을 때는 소설가가, 시를 읽을 때는 시인이, 자기계발서를 읽을 때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허황된 생각이 그것입니다.
《믜리도 괴리도 업시》를 읽으며 허황된 생각을 하는 제게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저는 그 부분을 '성석제의 소설쓰기 강의'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아름다운 글을 쓰기로 유명한 성석제의 강의는 단편 <블랙박스>에 실려 있습니다.
- 넌 문장의 기본이 되어 있어. 그건 타고난 재능이다.
남이 쓰면 흩어지고 마는 말도 네가 문장으로 쓰면 남는다.
그렇지만 소설을 쓰면서 입에 붙었다고 욕 쉽게 하지마.
씨팔 개새끼 씹새끼 씹할 놈, 다 꼭 필요한 데 아니면 쓰지마.
소설의 힘이 새버려. 뽀록 쭉쭉빵빵 탱탱 졸라 이런 유행어도 쓰지 마.
격이 떨어지고 김이 새니까.
꼭 쓰고 싶으면 단편소설 한 편에 서너 개 정도만, 대사에서 안 쓸 수 없을 때 써.
의성어, 의태어도 남발하지 마. 문장의 밀도가 낮아지니까.
그렇게 해보면 단어 하나하나가 얼마나 전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 거다.
말은 문학의 자원이니까 순도를 높이고 아껴 쓰는 걸 익히란 거다.
그리고 그래서 그리하여 그러므로 같은 접속사도 남발하지 마라.
구닥다리에 말 못하는 인간이, 할말 없어진 놈이 시간 벌려고 하는 것 같다.
네가 가진 매력은 살아 있는 말이야.
어법에 맞는 듯 맞지 않는 듯 늘어놓는 말과 문장의 중간쯤에 있는 거.
시도 산문도 아니고 드라마 있는 노래가사, 힙합 같은 거지.
좋은 무기이기는 하지만 계속 그것만 쓰지는 마.
인간의 뇌 속에 지구상의 생물 누구에게도 없는 거울신경세포를 가지고 있어서
금방 모방하고 또 금방 지겨워하거든. 근거 없는 과장도 위험해.
일인칭을 쓰면 평면적으로 흐르기 쉽다.
요새 같은 복잡한 세상에 네 주장만 해서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해?
최소한 한 명의 독자, 심사위원이 있다고 생각하라고.
너 톨스토이가 무조건 싫다고 했지? 왜? 그 사람은 지난 세기 사람이야.
지금 톨스토이가 무덤에서 걸어나와서 <안나 카레니나>를
아무리 기가 막히게 잘 써낸다 해도 복잡한 현대인들의 여러 가지 심리를
다양한 각도에서 정교하게 묘사하는 건 불가능해.
말발이 안 먹힐 것 같으니까 도덕이나 인간의 도리 같은 걸로 독자를 찍어누르는 거지.
그런 소설보다는 차라리 요새 나오는 신자본주의나 신경과학 소비심리학 책을 참고하는 게 나아.
그쪽 저자들의 시각이 톨스토이보다 훨씬 다각적으로 예리하게
세상을 사람들의 속셈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35~37쪽)
(독사讀思의 글쓰기 by 보보멘) |
|
투명인간 이후 새로 나온 성석제 작가 장편소설 인 줄 알았다. 또다른 소설집 첫사랑과 함께 발간했을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요즘 출판사의 홍보전략이 고객 기만전술이다. 외서의 경우 기존 번역본을 양장본 식으로 재엮어 발매하며 신간처럼 소개하고 국내도서의 경우 베스트셀러 작가의 소설집을 중편이나 장편 신간처럼 알린다. '믜리도 괴리도 없이'는 작가의 기존 단편소설을 엮은 것으로 신작이 아니다.
제목은 청산별곡의 문구를 인용한 것으로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란 뜻이다. 소설집 단편소설의 제목이다. 초등학생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동네 유지의 아들로 친구들의 우두머리 격이다. 한 명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그저 그런 학생이다. 귀족처럼 자란 아이는 집안의 도움으로 반장을 도맡아 하지만 정작 제대로 해내는 일은 없다. 어느날 그 아이 집안의 공장이 폭발한다. 가세는 기울고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재가했다. 1남 4녀 속 아이는 과거와 달리 누이들을 챙기는 살뜰함을 보인다. 또래에서는 우두머리 역할에서 밑바닥으로 추락했지만.
두 사람은 대학교에서 재회한다. 서로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말을 트지 않는 사이였다. 자신의 누이들을 챙기듯 자신을 챙기는 그 친구가 반갑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러던 중 두 사람 사이에 사건이 발생한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의 감정을 표현했다. 애틋한 감정이 든다.
맨 앞에 실린 '블랙박스'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차에 블랙박스를 설치하려 들른 카센터에서 만난 두 사람. 차주인은 소설가로 최근 좀처럼 글이 써지지 않는다. 설치기사는 소설가를 동경하고 글쓰기에 천부적 재능을 지녔다. 엇갈린 인생을 거칠게 그려냈다.
'먼지의 시간'은 TV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사이비 건강전문가를 소재로 한 소설로 한편의 탐사보도를 보는 듯 하다. 사이비 전문가의 행위는 코믹해서 극의 몰입도를 높인다. '골짜기의 백합'은 역마살이 낀 한 여인의 이야기다. 1인칭 시점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는 낯익으면서도 낯설다. '매달리다'는 군사독재정권 시절 이뤄졌던 간첩조작사건에 대한 내용이다.
위 5개의 단편 소설은 문학지에 실렸던 것이라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췄다. 그러나 나머지 3개의 소설은 솔직히 지루했다. 발표한 곳이 '도시와 나', '에스콰이어', '경향신문'이다. 해당 회사에 맞춰 글을 써서 그런지 기승전결도 없고 따라서 재미도 없다. 소설집의 모든 소설이 독자를 만족시킬 수 없지만 도시와 나나 에스콰이어 같은 곳에 보낸 원고까지 소설집에 엮은 것은 솔직히 실망이다.
|
|
일전에 《투명인간》 이라는 작품을 워낙 감명 깊게 읽었던 터라,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에 냉큼 도서관에 신청한 이후로 한달을 넘게 기다려 드디어 기대감을 잔뜩 안고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일부러 스포를 피하기 위해 책 소개나 리뷰는 철저히 배제한 터라 책을 손에 쥐고 나서야 단편소설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조그만게 엄청 복잡하고 좀 가지고 놀려고 하면 금방 부서지는 장난감 같애. _38쪽"
총 8편의 작품 중, 「블랙박스」, 「먼지의 시간」, 「매달리다」, 「골짜기의 백합」, 「믜리도 괴리도 업시」, 「몰두」, 이 여섯편은 흥미있게 읽어가다 결말에 이르러서는 잘 모르겠다. 그냥 후다닥 끝내버린 느낌이었다. 결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그러한 결말로 끝낸 것인지....
며칠전에 TV 채널을 돌려보다가 〈서가식당〉 이라는 프로그램에 성석제 작가가 출연한 것을 잠깐 보았다. '작가는 자신이 살아온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하는 말이 가장 기억이 남았는데, 지난번에 읽었던 - 그 프로그램의 선정 책이였기도 한 - 《투명인간》 에 비해 이번 소설집은 작가가 살아온 그 시대에 그냥 묻혀 버린 느낌이 든다. 투명인간, 성석제 - 현대 사회의 투명인간.. 그 아픈 존재에 대하여 "어찌보면 압축성장으로 물질만능으로 변해가는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가족만을 위하여 묵묵하고 우직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가며 살아온 김만수라는 인물은 우리네 아버지들과 같고, 성실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그의 가족들은 우리의 모습과 같아서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읽어 갔는데, 사실 행복해진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_ 《투명인간》을 읽은 후 작성한 리뷰 중에서.. |
|
「블랙박스」
|
|
오랜만에 성석제의 단편소설을 읽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유쾌하고 재치발랄하던 이전 작품과 달리 다소 진지한 문체라 약간 실망스런 느낌도 들었고 예전엔 신선하게 느껴졌던 비유법들이 이제는 다소 식상하거나 올드하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일단 목차순서대로 정주행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재밌어지긴 했지만 타이틀과 동일제목인 <믜리도 괴리도 업시>이후로 재미가 한풀 꺾이는 느낌이었다. 또, 성석제의 예전 작품들에선 이야기꾼의 해학적 재미를 잘 보여준거 같은데 이번 소설은 대체로 스토리텔링성이 약해보였달까? 그래서 제일 처음 나온 <블랙박스>속 창작의 한계를 느끼는 소설가는 혹시 본인얘긴가 싶을 정도였달까. 이 말은 바꿔말하면 아마도 난 앞으로 성석제의 소설을 굳이 찾아 읽게 될지 않을거 같다는 말이기도 하다. <블랙박스> 주인공인 소설가는 마감에 쫓기고 소재에 대한 고갈로 급기야 대필작가를 내세워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든다. 소설가의 창작의 고통 내지 한계에 대한 고민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먼지의 시간> 한 사이비교주같은 인물을 만나러 산속으로 들어간 주인공과 지인일행의 하룻밤 산속체험(?)을 다룬 작품인데 한 사기꾼의 그럴싸한 이빨까기(은근 설득력있는 말빨과 책임을 회피하는 자기합리화)가 이 작품의 관전포인트이면서 약자들에 대한 노동착취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메시지담긴 단편이었다. <매달리다> 어부의 아들로 자란 한 남자가 본의아니게 간첩으로 몰리면서 인생이 망가져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영화 <남영동>과 <그물>이 떠올랐는데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과 징역살이를 해야했던 이들의 삶과 애환을 그렸달까? 주제가 주제인만큼 성석제답지않게 어둡고 무겁게 느껴졌지만 그만큼 읽고 난뒤에도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골짜기의 백합> 역마살, 망신살, 도화살로 자유분방하게 살던 주인공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긴사마에게 순정을 주지만 그들의 사랑은 녹록치않고 평생을 다해 엄마처럼 챙겨줬던 선녀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종국에는 그녀의 삶의 의미가 된다는 이야기. 인터뷰이가 인터뷰에 응해 자신의 얘길 풀어나가는 듯한 문체도 신선했고 밑바닥 인생을 사는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뤄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단편이다. <믜리도 괴리도 업시> '믜리도 괴리도 업시'는 고려가요 <청산별곡>에서 인용했다는데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라는 뜻이란다. 이 책의 대표작이라 할수있는 이 단편은 이성애자인 주인공이 학창시절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동성애자인 친구 이명수와 있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다.
일단 다 읽고 난뒤의 느낌은 개운치 않았는데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잘 와닿지가 않았기때문이다. 초반엔 주인공의 시점에서 학창시절의 명수에 대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가며 묘사해서 이성애자이지만 동성애자인 명수에게 감정적으로 호감을 가지게되어 뭔가 사건이 터지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고 후반으로 갈수록 주인공은 호모포비아적이기까지했다. 해설부분을 읽고서야 주인공이 명수에 의해 '정체성'이 흔들리고 질투를 느낀다는 걸 알게되었지만 적어도 내겐 주인공의 그런 감정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또, 명수역시 주인공에게 호감을 가졌고 표현했었던거 같은데 커밍아웃이후 그런 이성적 감정을 부인해 그의 감정선 또한 따라가기 어려웠다.
암튼,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한 소재이긴 했으나 제목처럼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에 납득이 가고 공감이 된다고는 할수없을듯. <사냥꾼의 지도> 한 희곡작가의 프랑스 자전거여행기라고나 할까? 소설이라기보다는 말그대로 프랑스를 여행했던 성석제작가가 그곳에서의 경험을 소설형식을 빌려 써내려간듯 그냥 산문집같았다. <몰두> 주인공의 외삼촌은 죽기전 주인공에게 세상의 모든 이치를 규명하게 해주는 책의 결정판인 '이피터미'를 찾아보라는 미션(?)을 던져준다. 이후 주인공은 살아가면서 음악, 자동차, 산 등 한가지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통해 외삼촌이 얘기한 이피터미를 찾게 된다는 내용이다. 다양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며 취재 많이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뿐 크게 흥미를 끌진 못했다. 이 책에서 가장 짧은 분량인데 현세태에 대한 비판의식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소설이라기보다는 보너스트랙처럼 넣은 것같은 느낌? 상위 10%의 10%의 10%들의 더럽고 치사한 세상일지라도 끝까지 살아남으라, 살아남는 것이 이긴다는 메시지를 작가는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