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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안데르센 교수의 밤'을 쓴 다그 솔스타는 1941년 노르웨이 사네피오르에서 태어나 1965년 단편집 '나선형'을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소설가, 극작가로 활동하며 30여 권의 책을 냈다. 그의 작품은 20여 개국 언어로 번역되는 등 북유럽 주요 문학상을 다수 수상했다. 노르웨이 문학비평가 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작가이기도 하다. # 책을 읽은 이유 인터넷 서점을 통해 읽을 만한 책을 고르는 도중 노르웨이 소설이 눈에 띄었다. 평소 독일, 노르웨이 등 북유럽에 관심이 많았던 찰나 노르웨이 작가인 다그 솔스타의 책이 눈에 띄었다. '안드르센 교수의 밤'의 심플한 책 디자인과 함께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사랑하는 이 시대의 소설가'라는 글자가 책을 고르는 데 한 몫을 했다. # 줄거리 '안드르센 교수의 밤'에서는 주인공인 안데르센 교수가 크리스마스 이브날 자신의 집에서 나홀로 자축을 하며 창밖을 바라보다 맞은 편에 사는 한 남성이 여성을 목을 졸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다. 살인 장면을 목격한 안데르센 교수는 경찰에 신고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신고를 하지 않고 침묵을 선택한다. 그는 자신이 신고하지 않아도 정의가 실현되기를 기대하는 한편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동창을 만나기 위해 모임에 간다. 모임에 가서도 상념에 빠질 뿐 고민을 해결하지 못한 안데르센 교수는 여행을 간 이후에도 아무런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온 후 며칠이 지나 밖을 나돌던 안데르센 교수는 한 일본 스시 가게에서 한 남성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는 바로 여성을 살해한 살인범인 헨리크 노르스트룀이었다. 헨리크 노르스트룀과 함께 식사하고 자신의 집에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얼떨결에 약속까지 잡은 안데르센 교수는 이후 자신이 왜 신고하지 않았는지 후회를 하게 된다. 그러는 한편 자신은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신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소 믿지도 않는 신을 불러내면서까지 스스로를 해명한다. '안데르센 교수의 밤' 줄거리를 이렇게 끝나는데 중간마다 작가가 안데르센 교수를 통해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많다. 특히 이 책을 통해 노르웨이의 도시와 음식, 문화가 소개되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나라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전위 예술이라고 불리는 아방가르드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책 내용 자체는 간략하게 소개된 줄거리에 비해 살짝 난이도가 있는 편이다. 하지만 다그 솔스타가 '안데르센 교수의 밤'을 통해 노르웨이의 여러 문화를 소개하는 것처럼, 나 역시 내가 현재 사는 도시의 문화를 소개하며 한 편의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됐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거룩한 밤' 오늘 밤 열두시가 되면 찾아올 그 시간, 많은 노르웨이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열두시 이전은 아직 '거룩한 밤'이 아니다. 지금은 '거룩한 밤' 직전의 저녁일 뿐, 혹은 '고요한 밤'이거나 - 8 저 두꺼운 커튼 뒤에 젊은 남자가 죽은 여자와 함께 있어. 그가 방금 살해한 여자야. 그리고 나는 그걸 알고 있지. 하지만 난 아무 대응도 안 하고 있어. 전화를 했어야 해. 다른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참 희한하군. 그렇게 했어야 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할 수가 없어. 바로 그거야. 그냥 할 수가 없는 거야 - 22 그는 살인 사건을 목격했으나 신고하지 않았다. 그렇다. 정말로 신고하지 않았다. 그는 신고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으며 왜 그런지 이유도 알고 있었다. 살인은 이미 일어나버렸다. 쟁점은 그것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이미 일어났고, 그는 목격자라는 것.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그들에게 경고해줄 수는 없었다 - 30 그 젊은 여자가 다시 창가에 서는 일은 없을 거야. 지난 이틀간 나는 여자가 다시 창가에 나타나기를 바랐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 여자는 죽었어. 살해당했다고, 커튼은 닫혀 있어. 다시 커튼이 열릴 때 창가에 서 있는 건 바깥에 내다보는 살인자일 거야. 그를 잡는 데 나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어. 비록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지만 내가 그런 피해를 줄 순 없어 - 32 시대의 정신이란 이렇게 작동하는 것이어서, 한 시대에 갇힌 사람들은 보지 못하지만 다른 시대에, 밖에서, 해방된 상태로 사진 속 우리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역력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 60 그는 실망했던가? 창문을 지나친 형체가 여자이기를, 지금 그 금발의 젊은 여자가 창가에 서 있기를 바랐던가? 안데르센 교수는 알 수 없었다. 그가 그런 일을 바랐던 거라면, 바로 그 때문에 현실에서는 생각 속에서든 이 창가와 건너편 창문 풍경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거라면, 그것은 비현식절인 희망이자 사실상 기적을 바라는 기도였다. 혹은, 결정적인 순간에 안데르센 교수의 감각이, 그의 눈이 신뢰할 수 없는 것이기를, 그래서 그가 보았다고 생각한 것이 환상이나 환각이었기를 바라는 기도였던 걸까? 그가 정말로 그런 희망은 품었던가? 모든 것을 감안할 때, 그것은 자신의 이성에 문제가 있다는 의지가 된다 해도? 그게 아니라면 그가 보기를 바랐던 것이 바로 이것, 살인자의 얼굴이었던가? 안데르센 교수는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울음이 나왔다 - 82 우리가 과거와 맺는 관계는 깊은 무관심이 특징이야. 말로는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리고 과거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면서 그게 진심이라고 느낀다 해도 달라질 건 없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건 분명해.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과거와 결속되어 있다고 느끼는 건 의무감 때문이야. 우리의 신체는 정신적 불명을 이루고자 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그것을 성취할 능력이 부족한 것 같네. 문학 교수로서 확실히 말할 수 있어.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자네엑, 나의 동료에게, 내게 이제 역사의식이 없다고 생각하면 온 신경이 공포에 차 소리를 지르는 것 같네. 그건 우리가 가면 우리의 시대 또한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야 - 99 박싱 데이 저녁에 그곳에 서 있던 젊은 남자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남자가 창문에 나타날 때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가에 나타난 남자는 확실히 그때 그 사람이었다. 그는 아직 거기 있었고, 안데르센 교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반사적인 의식이 갑자기 표면으로 떠올라 불안이 그의 몸을 따라 흘렀다.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건가. 의문이 들어서였다. 그가 느끼고 있는 안도감이 실상은 무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정반대가 되어야 했다. 그는 그 남자가, 살인자가 거기에 있다는 이유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아침 트론하임에서 떠오른 의혹이 사실이었다면 어땠을까? 그 남자가 어디론가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가 크리스마스 동안 아파트를 빌렸다가 지금은 떠난 거라면, 그리고 그렇게 간단한 안데르센 교수의 삶에서 사라진 거라면, 그야말로 진정으로 안심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실상은 그와 정반대라는 점이 안드르센 교수에게 극도의 안심을 안겨주었다 - 112 이렇게 걱정스러운 건 신고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아니다. 결국 그것 때문인가? 설령 이걸 설명할 수 있다 쳐. 그런데 베른트와는 왜 상의할 수 없었던 거지? 베른트나 다른 사람을 왜 끌어들일 수 없었을까? 그것이 이유야. 그게 바로 숨은 이유라고. 이렇게도 이상하고 비참한 상황이라니, 내가 기꺼이 인정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불길해. 나는 누구지? 이곳에서 앉거나 서거나 걸어다니며 뭘 어떡해야 할지 모른 채로, 사람 자체와도, 그의 악행과도 절대로 엮이고 싶지 않은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나는 도대체 누굴까? 그가 사라지면 나는 닷 ㅣ자유다. 하지만 나는 다시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것 같지도 않아. 이건 확실히 뭔가를 의미해, 그런데 그 의미가 뭐지? - 115 설령 이럴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 든다 해도, 감히 생각할 엄두가 안 나는 그 악행, 저 아파트에서 커튼이 쳐진 후 일어난 그 일에 나는 스스로 얽매인 거야. 시체는 어디 있는 걸까? 여자의 피와 다른 모든 끔찍한 흔적은? 젊어 보였던 금발 여자. 저 못된 악마는 지금껏 저 안에서 뭘 했을까? 자신이 할 일을 감당하기 위해. 시체 옆에서 홀로, 피, 시체는 어디 있는 걸까? 이제는 어디론가 치워졌겠지. 커튼도 다시 젖혀졌고 그 젊은 남자는 저녁에 밖에 나가 볼일도 보고 있으니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간에 - 116 문제의 핵심은 그거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게 아냐. 전혀 아니지. 하지만 다른 식으로 행동할 수는 없었어. 그 사람이 살인자라고 해도, 그를 밀고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역겨워. 그 사실을 반드시 고려해야 돼. 난 그런 감정을 이해하고, 지지해. 하지만 베른트나 다른 사람들에겐 왜 말하지 못했을까? 그와 관련해 내가 두려워한 건 뭐지? 그게 이해가 안 돼. 베른트가 내 태도에 반대하고 날 비난할까봐 두려웠던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아. 뭐라고 반대할지 나도 알고 모두 동의하니까. 누군가가 살인을 목격하고도 사회에 알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 어떤 문명사회도 받아들이고 변호할 수 없을 거야. 그것은 분명 원초적인 범죄지. 살인을 저지른 자가 자기 아들이라도 신고할 의무가 있고 보통은 그렇게 해. 그리고 신고하지 않는다면 지금 나보다 훨씬 더 심한 고뇌를 겪겠지. 그 모든 것을 알고 반대할 근거도 없지만, 그래도 난 그 사람을 신고할 수 없어.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야. 내가 무한한 동정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나? 다시 말해, 모든 한계를 초월한 연민일까? 내가 그 살인자와 함께 고통받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기를 원하는 걸까? 하지만 피해자는 어떡하고? 그녀는 죽었어! 원초적 범죄의 피해자지만, 그래도 이미 죽은 사람이야. 살인자는 살아 있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야 해. 나와 함께, 모든 통제에서 벗어나 은밀하게, 살인자와 침묵하는 목격자, 침묵하는 목격자의 존재를 모르지만 그에게 감시와 관찰을 당하는 살인자. 우리는 언제 만날 것이가? 이건 도대체 뭔가? 난 왜 그 사람이 내 인생에서 사라져버리길 원치 않을까? 그가 내 인생에서 사라져버리는 걸 왜 두려워할까? - 118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헨리크 노르스트룀이 자기 아내를 죽였다고 믿었기 때문에, 혹은 착각했기 때문에, 법망이 곧 그를 덮칠 거라고, 그가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었다. 그러자 마음이 아주 편안해져서, 창가에서 살인을 목격한 뒤로 두 달이 흐르는 동안 거의 평소와 같은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종의 관찰자가 되었다. 어쩌면 그가 건너편 아파트를, 그리고 최근에는 거기 사는 사람을 주시한 것은 원초적인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곧 운명의 심판을 받을 남자를 보기 위해 가끔씩 흘낏거린 정도, 하지만 이제 그는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살인자와 살인을 목격한 자신, 그리고 다음주 수요일에 그 살인자는 그의 집 초인종을 누를 것이고, 두 사람은 비에르케 경마장에 함께 가서 살인자의 말이 최초로 경주에 나가는 모습을 볼 것이다 - 169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신고를 했을 거야. 단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기 위해서라도, 크리스마스 전날 밤 창가에 있던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지금은 죽은 여자, 왜 그 여자를 죽였을까? 시체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그리고 왜 아무도 실종 신고를 하지 않을까? 정말로, 다시 옷을 입고 곧장 마요르스투아 경찰서로 가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라도 말야 - 170 살인을 목격하고도 헨리크 노르스트룀을 신고하기를 꺼리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 사건 발생 당시 신고하지 못했던 건, 그래,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로 인한 곤란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사실을 몸과 마음으로 경험한 지금도 그를 신고하지 못하는 건 왜일까? 그런 부작위 죄는 결코 변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행동은 옹호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모든 문명의 전제다.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떤 경우에라도, 신고를 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살인자와 함께 이방인이 되었다. 그의 눈에도 자신은 이방인이었다. 살인자와 함께, 그것은 자업자득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뒤에는 신이 있었다. 그런 당연한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설명하거나 손을 대거나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금기가 된 궁금적인 이유로서의 신, 종교가 없는 안데르센 교수로서는 그걸 맥락의 사고가 대단히 생경했지만, 어쩌다 얽혀들어 아무리 절실히 원해도 헤어날 수 없는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보니 그런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누구도 자기 멋대로 신을 지어낼 수는 없어.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것이 자명한 진리이며, 그것을 명심하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 1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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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우리는 말했다. 대학에 가기도 전에 지구가 멸망하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를. 세기 말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몇몇은 새로운 시대를 축하하는 목소리를 드높이는데, 다른 이들은 멸망을 고려했다는 듯 가산을 다 팔고 특정 종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아마 대다수는 별일 없다는 듯 일상을 영위했을 것이다. 아내와는 몇 해 전 헤어졌고, 둘 사이에 아이는 없다. 혼자 보내는 크리스마스. 기분이 다소 쓸쓸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안데르센 교수의 집엔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였다. 조카들이 보낸 선물도 있었다. 모든 것은 완벽에 가까웠다. 적어도 건너편 베란다에서 벌어진 광경을 목도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다수가 불의를 목격했을 땐 침묵이 대세라고 들었다. 서로가 책임을 연대해(?) 회피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말이다. 그렇게 1963년 키티 제노비스는 38명의 이웃들의 방관 속에서 무참히 살해당했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심리학자인 로빈과 라테인은 이를 ‘방관자 효과’로 보았다. 여러 명이 절박한 상황에 연관될 때 책임감이 각각의 개인에게 분산이 되어 개인이 가지는 책임감의 크기가 줄어든다는 게 방관자 효과의 내용이다. 차라리 목격자가 한 명이었더라면 키티 제노비스는 살아남았을 것이다? 이론에 충실하다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러하다. 하지만 안데르센 교수의 선택은 달랐다. 그가 본 장면은 단순했다. 창문 앞에 먼저 여자가 한 명 나타났고, 이어 나타난 남자가 그 여자의 목에 손을 올려 조르기 시작했다. 축 늘어진 몸을 바라보며 그는 여자의 죽음을 직감했다. 이야기의 전면에 이토록 끔찍한 이야기를 배치했으니 앞으로 펼쳐진 이야기는 스케일이 어마어마하리라. 아마도 독자들은 기대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독자들의 기대에 반하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주인공 안데르센 교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자꾸만 흘러 두 달이 넘어갔을 무렵, 목욕을 하겠다며 욕실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게 안데르센 교수가 행한 전부였다. 아니, 뭐 이리 허무한 이야기가 다 있단 말인가. 경악을 일으키고도 남을 선택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짧은 분량의 이야기 속에 저자는 담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농축해 담아냈다. 어찌 본다면 모든 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안데르센 교수가 인지하기에 그날 밤 일어난 건 분명 살인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아닐 수도 있다. 일단 사람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를 알지 못한다. 경찰은 수사를 시작조차 않았으며, 죽임을 당한 여성의 소재 파악을 둘러싼 논란 또한 존재치 않는다. 심지어 살인자인 헨리크 노르스트룀은 자유롭게 도시를 활보한다. 살인을 저지른 인물에게 주어진 이와 같은 호사는 안데르센 교수가 입을 열어야만 끝이 날 것이다. 사건 해결의 열쇠를 지닌 안데르센 교수는 분명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택한 길은 달랐다. 교수 특유의 분석력을 활용해 그는 사건의 재구성에 나섰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범인은 젊은 남성이어야만 했고, 살해당한 여성은 그의 아내일 확률이 높았다. “왜?”라고 이유를 묻는다면 답변은 궁색할 수밖에 없겠지만 일단 그는 그리 믿기로 한다. 그의 믿음이 확고해지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아직도 그는 말을 하지 못했다.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도 큰 사건이기에, 경찰에 신고하기에 앞서 지인에게 털어놓기로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가 않다.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느냐는 추궁이 혹 이어진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게 좋을까. 왠지 비난 받을 것 같아 두렵다. 아니, 괜찮다고 상대가 위로를 해 주더라도 속이 시원하진 않을 거 같다. 이 무렵부터 안데르센 교수는 나름의 가치판단을 하고 있는 듯했다. 살인사건을 목격했다면 당연히 신고를 하는 게 옳다. 하지만 자신은 당연한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 자꾸만 회피하고픈 자신을 향해 부디 지인들이 채찍질을 가해주기를. 헌데 만에 하나 전혀 달리 반응한다면 어찌 해야 좋을지, 갑자기 혼란에 빠져든다. 상대가 나를 코너로 몰아세우면 어찌 반응해야 좋을지 난감하다. 그보다 더 큰 두려움은 괜찮지 않음에도 “괜찮다”며 혹여나 상대가 날 위로할 경우다. 본의 아니게 나는 공범(!)을 만들고야 마는 꼴이 된다. 이미 내 자신이 옳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데, 괜찮다는 위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단 말인가. 분명 나는 상대방에게 실망하고야 말 터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와 같은 자리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도달했을 때 주인공의 생활은 어그러진다. 내면의 깊어가는 고민은 살인자와 함께 자리를 했을 때 가장 극대화된다. 몇 차례 연습을 해본 젓가락질도 잘 안 된다. 당장 경찰에 신고를 해도 모자를 판에 저자는 떨리는 손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초밥을 먹는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인자는 경마 경기장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하고, 약속 당일 안데르센 교수의 집을 찾아오기까지 한다. 이 살 떨리는 상황을 털어내기 위해 필요한 건 목욕이다.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 앉으면 복잡한 생각이 조금은 녹아내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주인공이 아무것도 떨쳐내지 못했으리라고 확신한다. 대개의 이야기에선 발생한 사건이 핵심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의 핵심은 겉으로 드러난 사건이 아닌 주인공의 심리다.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생각, 결코 그치지 아니 할 생각들에 있어 뿌리는 필요치 아니하다. 생각은 생각을 낳는다. 암세포처럼 분열, 번식에 능한 이야기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자기 합리화. 이는 안데르센 교수의 선택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다. 안데르센 교수가 비굴해서? 아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남기 위해 안데르센 교수와 같은 선택을 매일 하고 있다.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하필이면 살인사건이지 싶은 무언가와 맞닿뜨린 교수가 운이 나빴을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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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까지 달려가서 가장 화려한 생활을 한다고 해도 마음 속에 허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하루를 채우는 것은 세끼 식사, 만나는 사람들, 그가 집중하는 일거리, 그리고 잠자리로 구성되니까. 뉴욕을 가건 파리를 가건, 결국 사는 일은 비슷비슷하니까. 그래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궁금하다. 노르웨이라는 소박하고 솔직하고 여유롭고 성숙할 것만 같은 북유럽 생활은 더 그렇다.
이 책은 노르웨이 문학 교수가 겪는 에피소드, 그리고 내면의 방황을 짧게 그린 작품이다. 돌싱인 55세의 교수가 크리스마스 이브를 풍유롭고 깔끔하고 전통적으로 보내는 앞부분 묘사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야말로 가장 부티나는 혼밥이 아닌가! 그 이후에 일어나는 에피소드는 그럴법 해서 꽤 재미있었다.
다만 이후로 이어지는 그의 고민들, 머뭇거리는 행동들, 상류층의 파티들... 글쎄... 생각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이해가 어렵다. 같은 역사를 공유하지 않은 이상 이해가 쉽지는 않다.
'절대적으로 현대적일 것'을 추구했던 젊은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은 모두 부자에 성공한 친구들. 그들이 누리는 부에 대하여 '전혀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기에 약간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철저히 누리는 그들의 생활이 어쩐지 이해되었다. 또한 시간과 역사에 대한 성찰. 문학의 존재이유가 허물어지는 데 대한 불안은 밀란 쿤데라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신에 대한 한 문장, "누구도 자기 멋대로 신을 지어낼 수는 없어. 설령 신을 믿지 않는다 해도.."라는 말은 묘하게 공감이 되는 문장이었다.
다른 어떤 것도 따라갈 수 없는 기승전결의 소설 형식을 파괴한 들쭉날쭉한 심리 소설. 에피소드는 너무나 잔잔하고 고요하고 멀며 머리 속의 생각들도 단편적이다.
분명 깊이 고민할 철학적 단초들이 가득 들어있는데도 이처럼 그 소설이 가벼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번역의 잘못일까? 그 극단적 가벼움이 작가가 생각하는 '현대성'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노르웨이가 너무 멀어서 일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 무라카미 하루키, 산도르 마라이가 떠오르는 멋진 소설임에도 한 줄기 바람에 곁을 스쳐가는 깃털처럼 가볍고 오만하여 쉽게 털어버리게 된다. 영어로 읽고 싶은 책 중의 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