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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연합군에 대항하여 헥토로와 더불어 최후까지 대항했던 신의 아들(아프로디테의 아들) 아이네이아스는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과 함께 고국 트로이를 떠나 크레타,카르타고등의 유랑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이탈리아반도의 라티움에 정착하고 그 곳 왕의 딸과 결혼하여 로마라는 도시국가를 탄생시킨다. 이후 로물루스라는 왕의 시대에 들어 본격적인 틀을 갖춘 로마는 이후 왕정에서 공화정을 거쳐 제정의 시대로 접어들게 마침내 세계유일의 제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로마제국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서 서서히 동서로 분활되면서 마침내 서기 476년 이민족인 게르만족의 왕 오도아케르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살아질때 까지 무려 1200이라는 세월을 영위해왔다. 물론 나머지 반쪽인 동로마제국(비잔티움제국)은 앞으로 1천년이라는 세월을 더 영위하게 되겠지만 본토인 로마의 함락이라는 상징성을 보게 되면 사실상 로마제국의 사형선고는 게르만족의 왕인 오도아케르에 의해서 집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지만 로마제국 건국의 아버지와 서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의 이름이 로물루스로써 똑같다는 점이 뿌린자가 거둔다라는 말로 회자될 수 있을뿐 오랜 세월 제국위치에서 주변 이민족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던 제국의 수명은 바로 이 이민족중의 하나로 인해 역사의 무대에서 떠나게 된다.
테오도시우스황제 이후 로마 제국의 황권은 동서로마를 막론하고 정말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무게의 중심이 이미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이후 서로마 제국의 황위는 그야말로 이전투구의 장으로 그네들이 그토록 열광했던 야외경기장의 검투사게임을 보는듯한 혼탁하면서도 암투에 의한 제위 교체이외에는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기 힘들 정도로 혼란 스러운 시기였다. 수많은 황제(이름조차 파악하기 힘들만큼 잦은 교체는 제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자체 그것만으로 위안을 받게 한다)들의 난립으로 후대 역사학도들의 머리만 아프게 할 뿐이다. 그나마 동로마제국은 새로운 로마제국의 적자로 부상하면서 서로마제국에 비해선 황위의 대외적인 안정감이 서로마제국에 비할수 없을 정도로 높은것 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점은 콘스탄티누스의 뛰어난 혜안으로 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 서방은 동방에 비해서 다양한 이민족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동방은 페르시아가 가장 크고 정형화된 적으로 간주되었지만 서방은 게르만족을 필두로 한 다양한 이민족들이 보이지 않고 그리고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가상의 적으로서 언제든지 목을 조를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이 서로마제국을 더 빨리 쇠망으로 몰아갔던 것 역시 사실중의 하나이다.
그럼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서고트족의 알라리크, 훈족의 아틸라, 반달족의 가이세리크, 게르만족의 오도아케르 라는 이민족만의 요인으로 돌려야 하는가에 대해서 기번은 당연히 부정하고 있다. 기번은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이가 이런 이민족이었지만 비단 서로마제국이라는 환자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하지 않더라도 사실상 사망한거나 마찬가지라고 보고 있다. 이미 로마제국은 내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제국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다. 초기 제국의 핵심이었던 다양성이 그리스도교라는 유일성으로 대체되면서 로마제국의 근간을 뒤흔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제국은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 본국와 그외 속주와 이민족간의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으로 대제국을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국의 경영에는 모든 문화와 종교를 포함한 각종 제도의 수용과 인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공인과 국교화이전까지는 약간의 마찰음이 발생하더라도 유지되었던 보편적인 진리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하나를 향한 열정은 이러한 모든 다양성을 거부하게 되었도 이러한 현상은 제국 전체적으로 불협화음을 낳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서로마제국의 멸망에는 외부의 요인과 버금가는 내부적인 요인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마나 기번은 그리스도교의 착실하고 획기적인 열정으로 그네들이 야만족이라 지칭한 이민족에까지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는 것이 로마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켰지만 승리한 새 종교는 멸망의 폭력성을 경감시키고 정복자들의 사나운 기질을 완화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위안을 찾고 있다.
기번은 이번에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많은 양을 배분해서 그 실상을 파헤치고 있다. 암브로시우스, 그레고리우스, 아타나시우스 는 그리스도교 정통파를 대변하는 성인으로 추앙 받고 있는 인물들이지만 막상 그들의 실생활과 권력지향적인 삶은 후세에 과대 포장되었다는 점과 수도회와 수도사의 근원과 그들의 삶 그리고 발전등을 다루면서 오히려 세상과 등지고 살아갔던 이들 수도사들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가 아니였을까라는 개인적인 의견도 피력하고 있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집필하면서 유독 그리스도교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기번의 역사관점에서 로마 제국의 쇠망사에 결정적인 카운터 펀치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교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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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3>에서는 제국의 변방에 살던 고트족, 반달족 등이 세력을 얻어가는 과정, 아시아에서 이동해온 훈족의 영향, 그리고 서로마제국의 멸망 등을 다루었습니다. 이 무렵에 제국을 다스리던 황제들은 통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향락을 탐닉했다고 합니다. 궁정은 물론 속주에 이르기까지 매관매직과 부정이 자행되었지만, 이들의 죄를 물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국정장악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국이 융성할 때는 페르시아 등과 국경을 다투는 전쟁도 자주 있었고, 변병의 이민족들의 반란에도 곧바로 출병하여 제압하곤 했지만, 이민족들의 국경 침입도 눈감아주는 사태가 벌어졌고, 심지어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기 전에 이미 고트족이 쳐들어와 로마를 함락하고 약탈을 했고, 카르타고에 자리잡고 있던 반달족 역시 함대를 몰고 이탈리아반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저지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제국의 심장 로마로 진격해온 훈족과 협상을 통하여 국경 밖으로 물러나는 조건으로 엄청난 보상금을 지급하는 등 제국의 위엄이 땅에 떨어진 상태였던 것입니다. 저자는 진정한 의미의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와 콘스탄티누스의 마지막 후계자인 테오도시우스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선두에서 군대를 이끄는 등 전 제국에 걸쳐 널리 권위를 인정받았던 마지막 황제였기 때문입니다. 테오도시우스의 사후 로마제국은 분할되어 그의 두 아들이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의 황제, 그리고 호노리우스가 서로마의 황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훈족의 이동에 따라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로마제국을 압박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과 훈족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테오도시우스황제의 사후에 로마군의 보조역할을 하던 고트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그 이유는 새 황제가 보상금을 중단한 것에 대한 항의가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그들이 살던 도나우강 북쪽의 척박한 땅보다는 윤택한 남쪽 땅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영민한 지도자 알리리크의 영도에 빠르게 세력을 키워나갔던 것입니다. 서기 408년 고트족은 로마를 포위하였고, 1년 뒤에 보상금을 받고 물러났지만, 410년에 다시 로마를 함락하고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고트족은 9일 만에 약탈을 끝내고 물러났던 것에 반하여 로마제국의 황제를 자처한 카를 5세가 로마를 점령하였을 때는 9개월 동안 끔찍한 약탈극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5세기 중반 반달족이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한 로마의 속주를 점령하였습니다.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은 서기 455년 로마를 점령하고 14일간에 걸쳐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고의 또는 무지에 의한) 예술 문화의 파괴’행위를 반달리즘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반달족의 약탈에서 기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또한 유럽 사람들의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달족이 로마에서 저지른 짓은 로마군이 카르타고를 점령하였을 때, 아예 도시를 폐허로 만든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입니다. 아마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을 때 저지른 약탈 정도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를 점령한 에스파냐제국은 금은보화의 약탈을 넘어 문명 자체를 파괴하는 짓을 자행하였으니 반달리즘이라는 용어보다는 로마이즘 혹은 에스파냐이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는 로마제국의 멸망에 단초가 되었다고 하는 훈족의 활동은 전반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훈족의 기원을 소략하게 적고 훈족의 융성기를 이끌었던 아틸라를 중심으로 2개의 장을 할애하였을 뿐입니다. 아마도 훈족에 관하여 유럽에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마제국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훈족은 아틸라 사후에 여러 세력으로 쪼개져 갈등을 벌이는 바람에 금세 쇠퇴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아틸라와 같은 뛰어난 지도자의 존재가 부각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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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의 중간점에 이르렀지만 경제사적인 접근에 대한 몰락의 장면이 나옵니다 역사중에서 경제사적으로 접근하기엔 어려움도 있지만 우리나라엔 거의 소개가 되어 있지 않아서 기번의 이런 대목들에 대해선 많은 문헌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추측할 뿐 1.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귀족들은 군인의 영광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민정관료직도 맡지 않을려고 했기 때문에 자연히 은거하여 개인적인 업무와 오락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2.로마인들은 항상 상업을 천시해 왔지만 공화국 초기부터 원로원 의원들은 고리대금업으로 세습재산을 불리고 예속 평민들을 늘렸다 이런 대목에서 로마말기의 군대의 모습들은 로마인은 사라져 버리고 근위대의 각종 기엔 올림픽 입장식의 각국 대표들을 나타내는 기로 뒤덮힐 정도였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었다 이런 결정적인 원인들은 중산층인 자영농의 몰락(고리대금업의 피해와 농업의 상대적인 열쇠로 몰락하게 됨)으로 군인에 있어서도 일정액 재산에 의한 입대 의 기준이 군인수의 감소는 즉 싼 게르만 만족들로 채워지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또한 로마의 인구는 황금기땐 거의 100만정도라고 했는데 몰락을 거듭하는중에 최소한 3만정도로 줄어들고 각종 세금과 어려움을 피해 제국의 변방인 스페인. 에집트,오리엔트지방 과 속주로 도망아닌 도망을 쳤다고 하니 말기의 로마의 삶 자체는 가진자는 더욱 가지게 되고 없는, 빈자는 인구수의 감소에도 기여하고 더더욱 자기의 삶을 위해서 로마를 등지고, 떠나는 이로 인한 인구의 감소는 현재 21세기의 선진국들이 격고 있는 인구감소가 부의 편중화내지 집중화가 원인이었음을 먼 역사는 알으켜 주고 있으니 좋은 본보기가 된다. 몇가지 예를 들면 로마의 묘지의 묘비엔 말기엔 그리스 사람들의 성내지 이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점은 로마는 말기엔 로마인이 아닌 타인들로 가득차게 되었다고 애기할수도 있겠고 또한 인구의 감소를 초래한 것은 로마를 등진것도 사실이지만 남자애를 낳으면 도로변에 버리고(세금을 낼 두려움에) 여자애를 낳으면 세금을 낼 후손을 생산할 것을 두려워 죽임에 이르게 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이고 역사의 참다운 가름침이다 세금의 공평에서 귀족은 뒤짐지고 평민들한테만 가중하게 되니 당연히 이런 표현의 정당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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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기번의 책 로마 제국 쇠망사 완역본은 여섯 권으로 출간되었는데, 이번에 그 중 3권을 읽었습니다. 훈족의 왕 아틸라 등 역사에 별 관심이 없어도 한 번쯤은 듣게 되는 이름이 등장할 때에는 특히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며, 그 외에는 낯선 이름과 사건이 줄줄이 등장하는데도 재미있게 느껴지게 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로마와 서로마로 본격적으로 역사가 나뉘게 되고, 서로마는 멸망을 앞두고 이 책의 제목 그대로 쇠망하고 쇠락하며 멸망까지 나아가는 듯한 시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시대를 살아간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특히 제국의 멸망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감동적이면서도 인상적으로 그려지고, 그 외에도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치밀하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연말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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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 was not built in a day.
익히 아는 격언처럼 로마 제국이 형성된 과정은 긴 투쟁의 역사였으며 제국의 역사와 본질을 구성하는 가장 탄탄한 뼈대는 로마인들의 피땀이었다. 공화정 시기 로마는 북방의 야만족에게 로마가 위협받기도 하고 그 유명한 한니발에 의해 이탈리아 본토가 유린당하기도 했지만 국가가 위기에 처해 도움을 청할 때 자부심이 충만한 로마인인들은 기꺼이 목숨으로 국가의 부름에 답했으며 결과적으로 그 용기에 합당한 보상을 거머쥐었다.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시작된 제정의 처음 2세기 가량 로마 시민이라는 자부심이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었으나(적어도 작동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점차적으로 시민권이 갖는 가치는 저하되었고 풍요로운 환경에 길들여진 로마인들은 과거의 영광을 누릴 뿐 수호하고자 하는 능력과 용기는 사라져갔다. 3세기 초반 카라칼라 황제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통해 로마 제국의 만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로마 시민권이 갖던 위상과 가치는 더욱 가파르게 추락했다.
로마제국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을 아우르는 거대 제국으로 부상하고 막대한 부와 자원을 바탕으로 풍요를 누릴 때 시민들은 그들의 축복받은 삶에 지나치게 안주한 나머지 변방에 불과했던 로마를 세계의 중심으로 이끈 미덕(근면, 용기, 정의, 관용 등)을 잃어가고 있었다. 특히 제국의 핵심은 군단은 자신들의 권력에 취해 이기적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해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황제를 폐위시키거나 임명하는 월권을 행사하곤 했다. 최강의 위용을 자랑하던 정예군단은 몇 세대를 거치며 군기가 풀린 나태한 병력 집단으로 추락했고 로마 시민들에 의해 구성됐던 군단은 점차 그들이 야만족이라 멸시하던 자들로 대체되었다. 간혹 용기와 지혜와 관용을 갖춘 지도자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이미 세속적 쾌락에 길들여진 군단을 과거의 명성과 미덕을 지닌 것으로 탈바꿈시키지는 못했다.
로마제국은 3세기 후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로부터 분할통치에 익숙해져 있었다. 4세기 초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1인 황제의 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이내 그의 자손들에 의한 분할통치로 이어졌고 결국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서기 476년 게르만족에게 서로마제국이 무너지며 찬란했던 로마제국의 영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로마제국 쇠망사 3권>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많은 황제와 협잡꾼 그리고 기독교가 어우러져 국력이 약화되는 과정과 국력 회복의 불씨가 미쳐 타오르기 전에 다시금 사그라드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 후 동서 로마제국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통치하게 되면서 로마제국은 동서로 완전히 분열되었으며 이후 다시는 온전한 로마제국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395년에서 475년까지 동로마 제국은 아르카디우스의 뒤를 이어 테오도시우스 2세, 마르키아누스, 그리고 제논으로 이어지고 같은 시기 서로마 제국은 호노리우스, 발렌티니아누스 3세, 안테미우스 등으로 이어지다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끝으로 멸망한다.
<로마제국 쇠망사 3권>의 혼란스러운 역사적 사실들은 당시 로마제국이 겪고 있던 극심한 내외적 곤란을 드러내고 있는데 국정의 혼란, 위정자의 폭정 혹은 실정, 군단의 타락, 시민의식의 부패 등과 함께 속주의 반란, 이민족의 침입과 약탈 등 끊임없는 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에드워드 기번의 말을 빌리자면 로마제국의 쇠퇴와 멸망은 다음과 같은 원인으로 초래됐다. "이탈리아는 잇따른 재난으로 자유와 영광에 대한 자긍심을 조금씩 상실해 갔다. 로마인의 미덕이 살아 있던 시절에 속주들은 공화국의 군사력에, 시민들은 공화국의 법률에 복종했다. 그러나 내분으로 공화국의 법률은 무너졌고, 로마와 속주들은 비굴한 폭군의 소유물로 변질되었다. 그들의 비참한 노예 상태를 어느 정도 경감시키거나 위장해 주었던 입헌 공화정의 형식도 시간과 폭력에 의해 폐지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마음속으로는 혐오하고 경멸하던 황제에 대해 때로는 그 존재를 때로는 그 부재를 아쉬워했으며, 5세기에 걸쳐 군대의 방종, 변덕스러운 전체 정치, 교묘한 억압 등의 각종 재난을 겪었다. 같은 기간 동안 야만족들은 미천한 신분과 경멸 대상에서 벗어났으며, 게르마니아와 스키타이의 전사들은 처음에는 용병이나 동맹군으로 속주 군대에 편입되었다가 마침내는 로마인들의 주인이 되어 로마인들을 모욕하거나 보호해 주기도 했다." (431페이지)
로마제국은 잦은 야만족의 침입으로 결국 몰락하게 되는데 서로마 제국을 구성하던 지역들은 여러 부족의 전리품으로 전락한다. 아프리카는 반달족에게, 에스파냐는 수에비족에게, 갈리아는 부르군트족에게, 판노니아는 동고트족에게, 그리고 이탈리아 본토는 게르마니아 출신의 오도아케르가 이끄는 다양한 연합군에게 돌아간다. 그 전에도 마찬가지지만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5세기에 로마제국과 로마인이 겪었을 수난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수시로 사방에서 덤벼드는 도적떼를 연상케 했다.
<로마제국 쇠망사 3권>은 2권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욱 혼란스러운 정국을 보인다. 1세기 네로 황제가 살해당하고 네르바가 황제가 되기 까지의 혼란한 정국에 더해 외세가 끊임없이 달겨드는 형국이다. 정성들여 읽었지만 내용이 많이 남지 않는 것 또한 이런 역사적 사실이 혼란스럽게 나열되기 떄문일 것이다. 다만 에드워드 기번의 달필로 인해 읽는 재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로마제국 쇠망사>의 반환점을 돌고 있다. 4권에 이어질 내용은 아마도 서유럽 왕조의 역사와 동로마제국의 희노애락을 담고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 또한 혼란하고 어지러울 것이라 생각되기에 기대와 걱정이 같이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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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의 3권에서는 드디어 로마가 야만족인 서고트족에게 함락당하면서, 사실상 로마의 전성기가 끝나고 기나긴 쇠퇴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거의 천년 동안 다른 민족들을 침략하고 정복해왔던 로마가 이번에는 자국의 중심부가 야만족에게 털리는 치욕을 당한 것이다. 아무리 강국이라고 해도 영원히 강국일수만은 없다는 역사의 법칙을 냉혹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할까. 그리고 로마의 함락과 함께 시작된 훈족의 침입이 더욱 격렬해지면서, 로마는 훈족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게르만족들과 힘을 합쳐 훈족과 맞서 싸운다. 천신만고 끝에 지금의 프랑스 샬롱에서 훈족왕 아틸라의 군대를 격퇴시키기는 했으나, 그리고 곧바로 다음 아틸라는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입한다. 그 후에 아틸라는 철수하고, 결혼식장에서 코피를 쏟아 죽었다. 아틸라의 죽음으로 훈족은 왕위 계승을 놓고 분열되어 게르만족들의 반란이라는 치명타를 맞아 몰락한다. 그러나 이미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로마는 게르만족의 계속되는 침입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걸으며, 서로마를 송두리째 게르만족들에게 빼앗기고 영토의 절반인 동로마로 만족하는 정도에서 머무른다. 책의 끝부분에서는 지금의 독일 북부에 살던 게르만 부족인 앵글족과 색슨족이 현재 영국인 브리튼을 침입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책의 저자인 에드워드 기번의 나라인 영국, 로마를 대신해서 세계를 지배했던 대영제국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대목이다. 장강의 앞물결은 뒷물결에서 밀리는 법이라고, 하나의 제국이 끝나면 새로운 제국이 탄생하여 기존의 패권을 잇는다는 역사의 법칙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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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설 상의 로마의 창건자인 로물루스는 로마를 세울 즈음에 독수리 열 두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 독수리들은 열 두 세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호사가들은 열 두 세기가 끝나는 때를 서기 447년으로 잡았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이 예언(?)이 얼추 맞았다. 오도아케르에 의한 서로마제국 멸망이 476년이었던 것이다. ‘독수리 신탁’을 받아들인다면 로마는 하늘의 뜻에 따라 ‘천수를 누리고’ 멸망한 셈이다(19년이나 더 갔다!!!). 그렇다면 독수리가 한 스무 마리만 더 날았다면 지금 우리는 세계 지도에서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가 아닌 ‘로마 제국’을 찾아볼 수 있었을까? 기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기번은 로마 쇠망의 원인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 다해서가 아니라 보다 현실적이고, 예방가능한 것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날아가는 독수리 떼보다 더 확실한 징조가 로마의 멸망을 예고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로마 정부는 적들에게는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존재가 되는 반면 국민들에게는 더 혐오스럽고 압제적이 되어 갔다. 나라가 어려워질수록 세금은 불어났고 절약의 필요성은 요구될수록 오히려 반비례하여 무시되었다. 부자들은 부당한 행위로 가난한 자들에게 불공평한 짐을 떠넘겼고, 빈민들의 고통을 경감해 줄 수 있는 면제 방법마저 속임수를 통해 빼앗아 버렸다. 재산을 몰수하고 육체를 고문하는 가혹한 심문에 몰린 발렌티니아누스의 국민들은 차라리 더 단순한 야만인들의 폭정 쪽을 택했다. 그들은 숲과 산으로 도주하거나 야만족들 밑에서 돈을 받고 하인으로 일하는 비천한 생활을 받아들였다. 과거에는 전 세계인이 열망했던 로마 시민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버린 정도가 아니라 혐오했다. (p.368)
2. 율리아누스 황제 이후 로마 제국은 국내 각 세력들의 대립과 반란, 이민족들의 잦은 침입, 교회 내 교파들의 이단논쟁으로 혼란을 겪었다. 이 와중에 즉위한 테오도시우스는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여 국내 반란세력을 진압하는 한편, 로마의 위세로써 이민족들의 복종을 이끌어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대에 국교로 격상된 그리스도교는 제국 시민들의 신앙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은 물론, 이민족들의 교화에도 이바지함으로써 로마의 위상을 높였다. 과거의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겉으로 보기에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대는 평화롭고 안온했으며 로마 제국의 명예가 지켜졌던 시대였다. 이런 점에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로 불려도 무방할 것이다.
군대의 선두에 서서 전장에 모습을 나타냈고 전 제국에 걸쳐 널리 권위를 인정받았던 아우구스투스와 콘스탄티누스의 마지막 후계자인 테오도시우스의 죽음과 함께 진정한 의미의 로마의 진수는 막을 내렸다. (p.89)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중병 환자였던 로마 제국이 피워낸 ‘마지막 불꽃’일 뿐이었다. 그의 무능한 후계자들과 권력욕에 불타는 총신들의 대립으로 인해 동서로 분할된 로마 제국은 훈족, 반달족, 고트족, 게르만족 등 주변 민족의 침입을 끊임없이 받는다. (이민족의 침입은 서로마 제국에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천혜의 요새가 있었고, 동방의 페르시아를 제외하면 큰 위협을 줄 민족이 없었던 동로마 제국은 그나마 행운을 잡은 셈이다.)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세계사 시간에 서양의 중세 부분은 ‘훈족의 압박과 게르만족의 이동’이라는 장(chapter)으로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민족들의 침입은 로마 제국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그렇지만 사실 이민족들의 침입은 로마 역사 전체에서 비일비재했던 일 아니었던가? 문제는 과거 같았으면 ‘전투에서는 져도 전쟁에서는 승리했을’ 로마의 힘이 더 이상 발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치지 않는 투혼으로 카르타고인들과 갈리아인들을 경악시켰던 로마의 힘은 이제 소진되었다. 이민족들의 침입 앞에 속수무책으로 약탈을 당하다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겨우 위기를 넘기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3. 나는 개인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폴리스들과 로마의 가장 큰 힘은 ‘내 조국은 내 손으로 직접 방어하는 정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재산과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치는 진취적이고 헌신적인 시민 정신이야말로 테베레 강변의 일개 도시 국가에 불과했던 로마를 전 지중해를 호령하는 대제국으로 팽창시킨 원동력이라고 믿는다. 공화정 시대에는 귀족들이라 할 수 있는 집정관이나 원로원 의원들이, 제정 시대에는 황제들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전선의 맨 앞에 섰다. 국민의 대부분을 이루었던 시민 계급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장을 위하여 자비를 들였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가족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자발적으로 무장하여 나선 로마 군대를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로마인들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로마인들에게는 결코 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의 침입으로 로마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들어보라.
한니발의 원정 시기에 (중략) 당시의 원로원 의원들은 빠짐없이 미관 말직에서든 고위직에서든 군복무 임기를 다했다. 한니발이 로마에서 3마일 떨어진 아나오 강변에 진을 쳤을 때, 곧 그가 막사를 친 땅이 공개 경매에서 제값을 받고 팔렸다. (p.167)
한니발이 점령한 땅인데도 땅값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땅을 구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현재 적장이 점령한 땅인데도 반드시 자신에게 소유권이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이건 보통 자신감이 아니라 높은 긍지와 믿음의 표출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몇몇 전투에서 패하더라도 병력은 금방 보충되었고, 마지막 승리는 언제나 로마의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 말기가 되자 이런 정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이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신상의 안락 또는 현실에서의 쾌락일 뿐이었고, 이제 국가의 방위는 스스로의 손이 아닌 이민족 용병들에게 맡겨진다. 간단히 말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셈인데, 더 한심한 것은 몇 차례나 이민족 대장들에게 로마의 국토가 유린되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군율이 느슨해지고 훈련을 하지 않게 되면서 병사들은 군무의 피로를 버텨 낼 힘도 의지도 약해졌다. (중략) 무기력해진 병사들은 그들 자신과 국가의 방어를 포기했다. 그들의 나약함과 태만은 제국의 몰락을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p.60)
병역(兵役)에 얼마나 치명적인 악습이 만연하게 되었는가. (중략) 시민들과 국민들은 돈을 주고 자신의 나라를 지킬 중대한 의무를 면제받았다. 그리하여 이 의무는 야만족 용병들에게 넘어갔다. (p.122)
4. 진취적인 시민 정신과 함께 로마의 성장을 가져온 원동력은 세계제국으로서의 관용과 포용성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사실 전쟁에서 패한 피정복민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생존과 현실의 유지에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요구를 정복자가 수용할 경우 지배에 대한 순응도과 통합의식은 급격히 높아지게 된다. 아직까지 민족국가의 개념이나 제국주의-식민지라는 인식이 없었고 인적 자원에 사회의 발전을 의존하던 고대 사회에서 ‘승자의 포용과 아량’은 국가의 성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다신교 전통을 이어받은 로마가 광신적인 신앙과 배타적인 포교 논리를 가진 일신교 전통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까지 받아들였다는 점은 보통 중요한 결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가 황제를 비롯한 지배층과 시민들의 다수가 믿는 종교가 되어 버리자 어느 순간부터 신앙의 순수성을 과도하게 주장하고, 진리와 믿음의 독점성으로 인해 내부에서조차 ‘너죽고 나살자’ 식의 이단논쟁이 발생한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그 중에서도 삼위일체설을 주장한 아타나시우스파의 교리를 정통으로 하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인정한 후 로마 제국에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박해’가 일어났다.
테오도시우스의 법의 박해 정신은 (중략) 이교의식 자체를 벌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위배되는 이러한 행동들을 보고 묵인한 자에게도 우상 숭배죄를 폭로하거나 처벌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적지 않은 벌금이 부과되었다. (중략) 테오도시우스의 법의 박해 정신은 그의 자손 대대로 그리스도교 세계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거듭 강화되었다. (p.77)
간단히 말해 정통파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보아 우상숭배이거나 이단 교파인 경우에는 가차없이 생명과 재산상의 손해를 입혀도 무방하다는 주장인데, 그 논리의 이면에는 정통파라면, 모든 이단자는 천상과 지상의 지고한 권력에 거역하는 역적이므로 천상과 지상의 권력은 각각 죄인의 정신과 육체에 재판권과 처벌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독선과 광신의 논리가 숨어 있다. 이러한 독선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인류가 경험한 가장 큰 광란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종교재판, 마녀재판, 이단재판.... 이런 것들이었다.
종교 재판관(이단 심문관)이라는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이름의 관직이 처음 설치된 것도 테오도시우스 치세하에서였다. (p.22)
뿐만 아니라 이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 그리스도교는 합법적인 재산증식, 병역회피, 사치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순수한 신앙에서 시작한 수도원 운동은 로마의 야심가들에게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통로로 받아들여졌다. 성직에서 성공한 수도사들은 수도원을 세워 그들의 동료를 늘려나갔으며, 돈 많은 귀족 집안 또는 황실과 연계하여 자신의 수도원을 지원해 줄 개종자들을 확보해 나갔다. 결국 비대해진 수도원은 초심을 잃게 되었고, 귀족 청년들이 병역의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까지 타락한다.
인근 지방과 도시로까지 세력을 확장한 유명한 수도원의 재산은 시간이 지날수록 꾸준히 증가했고, 사고로 줄어들거나 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중략) 수도원이 번성하면서 규율은 무너졌고, 점차 부자라는 자만심에 젖어 마침내는 사치와 소비에 탐닉하게 되었다. (중략) 수도사들은 이제 수도원을 창설할 당시의 목표를 잊고 자신들이 저버린 세상의 헛된 감각적 쾌락을 좇았는가 하면, 창시자들이 엄격하게 덕행을 쌓아 획득한 부를 철면피하게 낭비하였다. (p.447)
5. 유럽의 역사에서 로마 제국이 가지는 함의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해서 로마는 현재 유럽이라는 공동체가 존재하도록 만든 ‘멍석을 깔아준’ 역할을 했다고 본다. 비록 후세 역사가들의 시대 구분이겠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서양 고대의 종언임과 동시에 중세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헬레니즘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자양분과 헤브라이즘으로 대표되는 종교적/정신적 자양분은 로마라는 한 용광로에서 녹아들었고, 로마의 강역 확대와 함께 도나우 강에서 브리타니아 지방까지 지금의 전 유럽 땅으로 확대되었다. 도저히 같은 문화권으로 편성될 것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세련된 이탈리아 반도의 사람들과 야만적이고 거친 갈리아 지역의 사람들이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고, 비록 국가는 달라도 공통적인 경제체제와 공통적인 정치체제를 영위하게 된 것이다. 서로마 제국 이후 이 역할을 담당한 것이 게르만인들이었다. 로마라는 명칭의 현실속의 국가는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 왕 즉위와 동시에 종결되었지만 문화적 상징물로서 로마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에드워드 기번이 서로마 멸망과 더불어 지금의 프랑스 및 독일 지역에서 번영하기 시작한 프랑크 족의 클로비스 대왕에게 눈을 돌린 것과 중세 사회의 중요한 모습 중 하나인 수도원의 발흥에 관심을 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메로빙거 왕조를 열었던 클로비스 대왕은 공적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고 이를 농민들에게 경작하게 함으로써 향후 중세 시대의 지배적 생산관계인 분봉제도와 농노제도의 기틀을 잡았으며, 이제 서구인들의 정신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그리스도교는 수도원이란 공간을 통해 세속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침과 아울러 문화의 전수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부하들은 말이나 갑옷 등으로 보상받는 대신, 공적이나 총애의 정도에 따라 봉토(benefice)를 받았다. 이것이 봉건 영지의 최초 명칭이자 단순한 형태라 할 수 있다. (p.511)
6. 동로마 제국이 남긴 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서구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종말을 맞았지만 로마는 단순히 1500여년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진 역사적 국가로만 남아 있지 않다. 로마가 성장할 때, 그리고 위기에서 일어날 때에는 예외없이 헌신적인 지도자와 시민계급이 발견됨을 기억해야 한다. 에드워드 기번을 비롯한 서양의 역사학자들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로 격찬하는 오현제 시대는 최고 권력자인 황제가 직접 가장 미천한 자와 같이 군대의 선두에 서고, 권력의 자리는 독점이 아니라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과 함께 분점하다가 죽으면서 양위하던 시기였다. 주위의 많은 민족들과 전쟁을 벌이고 정복하고, 약탈 당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로마는 다른 민족의 문화를 인정하면서 그들을 로마 시민으로 적극적으로 포용하였다. 이제 유럽 지역에서 다시는 로마처럼 성장한 나라는 등장하지 않았다. 샤를마뉴 대제도,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지리적인 영토나 영향권은 로마에 버금갈 정도로 넓게 확보하였으나 로마와 같은 권력관계 및 문화적 성숙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유럽은 하나의 문화적/정신적 유산을 배경으로 한 서로 다른 민족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의 직접적인 권위보다 더 효과적이었던 것은 모든 그리스도교도 형제들을 영적으로 결합시키는 종교적 친교였다. (중략) 그 결과 서서히 유사한 풍속과 공통된 법제가 생겨났는데, 이것이 근대 유럽의 독립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인 여러 나라들을 유럽 이외의 다른 나라들과 구별해 주는 특징이 되었다. (p.4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