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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눈에는 야만족 그리고 로마를 제외한 다른 시각에서는 개척자라 칭할 수 있는 게르만족의 대왕 오도아케르에 의해 정확히 로마의 반쪽이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사실상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한 동로마제국은 비잔티움제국이라는 새로운 호칭을 부여받게 되지만 로마의 생명력은 자신들의 지배통치 방식 만큼이나 새롭고 끈질기게 연명하게 된다. 로마제국으로서는 최대의 위난시대였지만 달리 생각하면 새로운 출발을 위한 시의적절한 판단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를 국시로 새롭게 신장개업을 한 동로마제국의 입장에서 같은 형제이지만 이단과 이교도로 득실거리면서 그 옛날 로마 번성기의 향수에 빠져서 올바른 가치판단을 하지 못하는 형제는 이제 더 이상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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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4>에서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반도를 무대로 다양한 민족들의 각축전과 유스티니아누스황제의 동로마제국의 서방정복운동 등을 다루었습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이탈리아반도에 진입한 민족들로는 동고트, 프랑크, 롬바르드족, 반달족 등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테오도리크왕이 다스리던 시절 동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하는 등 빠르게 기세를 올리던 것처럼 그의 사후 빠르게 무너져 금세 흔적조차 없이 사윈 것을 보면 과거 한 나라의 운명은 지도자의 영명함에 달려있던 것 같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4>을 읽고 앎을 수정한 부분은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반도로 이동하게 된 전후사정입니다. 훈족이 도나우강 유역을 점령함에 따라 이동한 것이 아니라, 소멸한 훈족의 자리에 역시 동쪽으로부터 이동해온 아바르족이 도나우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벌어진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아바르족은 6세기 무렵 카프카스지역에 처음 등장하여 빠르게 서진하여 판노니아(지금의 헝가리)를 차지하고 프랑크왕국과 국경을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바르족의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초기에 서진한 훈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초기 아리안계 스키타이민족으로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뉜 지 얼마되지 않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였는데, 그 당시 동로마제국이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지 않은 이유를 풀지 못하였습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로마사람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고트족이 로마의 고대 유적을 파괴했다고 비난하지만 사실은 그들은 정복한 나라의 기념물을 보존하고, 주민들의 삶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감사할 줄 몰랐던 백성들은 이 고트족 정복자의 출신이나 종교, 그의 덕성까지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과거의 재난은 잊혀졌고, 로마인들은 평온한 현실 곳에서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피해의식만 더욱 예민하게 느꼈던 것(27쪽)”이라고 저자는 잘라 말합니다. <로마제국 쇠망사4>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재위기간(527년부터 565년) 동안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차지하고 있던 반달족의 왕위계승전쟁에 개입하거나, 고트족이 차지하고 있던 로마를 정복하였으며, 사산조 페르시아와도 전쟁을 벌이는 등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고, 법전을 편찬하고, 하기아 소피아성당을 재건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쌓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정복전쟁에 나서 혁혁한 전과를 세운 벨리사리우스장군을 끊임없이 견제하였다는 점입니다. 요즈음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도깨비>에서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장군을 죽음으로 내모는 왕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서는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역사를 보면 군에서 인정받은 장수가 황제에 오른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공이 큰 장군에 대한 황제의 불안이 컸을 것 같습니다. 로마제국의 쇠망을 이야기하면서 멸망한 서로마제국을 차지한 동고트족의 치세와 롬바르드족의 치세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고 쳐도(서로마제국의 영토가 결국 동로마제국에 편입되기 때문에) 호스로우왕 재위시기의 페르시아의 국내정세를 한 장에 걸쳐 설명한 것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4>에서 주목할 부분은 마지막 장입니다.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예수의 성격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은 세력들끼리 끔찍할 정도로 갈등을 빚은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네스토리우스파, 야고보파, 마론파, 아르메니아파, 콥트파 등으로 갈려진 정황을 설명합니다. 종교적 논리를 해석함에 있어 차이를 해소하려는 공식회의가 몇 차례 있었지만, 내막을 보면 논의를 통하여 의견을 조율하기 보다는 권력에 기대어 상대편 세력을 무너트리려는 시도였던 것 같습니다. 세력을 잃은 파벌은 몰살당하거나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달아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생각해보니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만난 동굴교회 등 숨어서 교의를 지킨 그리스도교 사람들이 이슬람교 등 이민족이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교의 탄압을 피해 숨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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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말 훈족으로부터 독립한 동고트 족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간혹 동로마 제국을 위해 전쟁을 하는 처지였다. 말이좋아 지원이지 실상은 동고트 족의 무력을 두려워 한 동로마 제국이 동고트 족의 침입을 억제하고 그들의 힘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금전과 식략을 공급하는 형태였다. 동고트 족을 다스리던 자는 테오도리크로 척박한 거주 환경과 동로마 제국의 부족한 지원으로는 자신들이 생존하기 어려움을 절실히 깨닫고 이탈리아로 눈을 돌린다.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세력은 게르마니아 출신의 오도아케르가 이끄는 연합세력이었다. 490년 테오도리크는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오도아케르를 물리치고 이탈리아를 손에 넣는다. 이탈리아의 온화한 기후와 풍족한 자원은 동고트 족에게 만족스러운 전리품이 되었으며 테오도리크는 동고트 족을 이탈리아 곳곳에 정주시킨다. 테오도리크는 비록 문맹이었지만 어린 시절을 동로마 제국의 왕궁에서 고급 교육을 거치며 자랐기 때문에 동고트 족이 이탈리아에 무사히 정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과 규율이 바로서고 로마인과의 공존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다. 테오도리크의 치세는 동고트 족의 폭력성을 감화하고 로마의 문화에 젖어들게 이끄는 것이었으며 그의 긴 치세(37년)동안 나름의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테오도리크가 말년에 보여준 폭정은 그가 청년기와 장년기에 이룬 성과를 퇴색하게 만들었다. 서기 526년 테오도리크가 병사하며 그의 재산과 지위는 두 명의 손자에게 계승된다.
비슷한 시기 동로마제국(비잔티움)은 레오, 제논, 아나스타시우스 황제를 거쳐 서기 518년 유스티누스 1세로 제위가 이어진다. 유스티누스는 다키아 출신의 농부였는데 군대에 들어가 승진을 거듭함으로써 근위대장의 자리에 올랐고 아나스타시우스가 사망하자 제위를 꿰찬 인물이다. 농부로서나 군인으로서의 경험만으로 국정을 운영하기란 불가능했기에 유스티누스는 재무관 프로클루스에게 국정의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받았고 자신의 조카인 유스티니아누스를 입양해 자신의 뒤를 잇도록 한다.
서기 527년부터 동로마제국을 통치한 유스티니아누스는 무려 38년이 넘는 세월을 제위에 머물렀다. 그의 긴 통치 기간은 자신의 명예를 후대에 남기는 데 사용되지 않고 탐욕과 실정으로 얼룩졌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배우 출신의 창녀인 테오도라에게 반해 법을 개정하면서까지 그녀와 결혼했고 동로마제국의 통치권이라는 중대한 권력을 그녀와 나누었다. 당시 시민들은 경주 시합에 사용되는 색깔에 따라 청색파와 녹색파로 분열되어 서로를 비난했는데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테오도라의 입김이 작용해) 은근히 청색파를 옹호하면서 녹색파가 박해를 받고 시민 폭동을 야기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탐욕과 사치를 위해 세금은 가혹하게 거둬졌으며 이에 따라 시민들의 삶은 고난해졌는데 상거래의 독점과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일반 시민들은 형편은 더욱 피폐해졌다.
유스니티아누스의 가장 큰 업적이면 벨리사리우스의 중용이다. 6세기 초반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연달아 왕위를 찬탈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정의 구현이라는 명분 아래 벨리사리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입명하고 군단을 파견한다. 벨리사리우스는 먼저 아프리카로 진격해 가이세리크의 후손을 징벌하고 로마 제국으로부터 벗어났던 속주를 되찾는다. 이어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로 넘어간 군대는 벨리사리우스의 지휘 아래 60여 년 전 동고트족에 넘어갔던 이탈리아를 다시 로마의 치세 아래로 이끈다. 벨리사리우스의 위대한 전과는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 그리고 다른 장군들의 시샘을 불러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지 못하게 했고 그의 아내인 안토니나의 탐욕과 부정은 충성스럽고 현명한 총사령관의 명예를 퇴색시켰다.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잠시나마 이끌었던 명장 벨리사리우스의 말년은 유스티니아누스, 테오도라, 안토니나와 같은 소인들의 농감으로 초라하게 장식되었다. 벨리사리우스가 수복한 아프리카와 이탈리아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파견된 관리의 탐욕과 폭정으로 인해 반란이 발생했고 아프리카의 반란은 로마군에 의해 저지되었으나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토틸라의 반란은 조기에 수습되지 않아 이탈리아가 다시 고트족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놓였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다시 벨리사리우스를 호출해 이탈리아를 수복하라 명한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가 아무리 명장이라 해도 지원이 없는 상태로 반란군을 제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된다. 벨리사리우스의 뒤를 이어 총사령관이 된 인물은 환관 나르세스이다. 나르세스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총애를 받는 자였기 때문에 총사령관이라는 지위와 그에 걸맞은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고 토틸라와 그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탈리아를 수복했다.
서기 559년 불가리아족이 트라키아를 침공해 도시를 약탈했고 콘스탄티노플 근처에까지 이르자 위기를 느낀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불렀고 수차례 부당한 대우를 받았음에도 충성스런 신하였던 벨리사리우스는 왕명에 따라 출정해 불가리아족을 물리친다. 왕의 편협함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변치 않았기에 벨리사리우스는 마땅한 치하와 보상을 받지 못한 채 다시 물러나야 했고 말년에는 반역에 가담했다는 누명까지 뒤짚어 쓰고 재산을 몰수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565년 벨리사리우스는 그의 업적과 위명에 맞지 않는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고 같은 해 벨리사리우스가 죽은 지 8개월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38년이 넘는 긴 치세를 마치고 사망한다.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는 수백 년의 오랜 시간을 숙적으로 지냈는데, 비잔티움에서 유스티니아누스가 장기집권하던 시기 페르시아는 호스로우(누시르반)의 장기통치가 이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와 누시르반은 호시탐탐 서로를 정복할 계획을 세웠으나 어느 한 쪽도 일방적 승리를 거머쥐지 못했기 때문에 국경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와 누시르반의 전쟁은 대규모 군대의 정면승부라기 보다는 한 쪽이 공격하면 상대측이 대응하는 형태의 국지전 양상으로 펼쳐졌기 때문에 제국의 흥망이 결정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565년)와 누시르반(579년)이 죽자 이들의 뒤를 이은 자들은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반까지 계속해서 전쟁을 감행한다. 처음에는 페르시아가 승기를 잡고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등 로마의 속주들을 공략해 정복하는 성과를 거뒀으나 비잔티움의 헤라클리우스가 3차례의 원정을 통해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써 과거의 빚을 갚았다. 오랜 전쟁을 통해 한 쪽이 다른 쪽을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상태로 국토와 시민들의 피해만 쌓이는 상황이 지속되자 결국 628년 비잔티움과 페르시아는 평화 협정(항상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협정일지라도)에 조인한다.
<로마제국 쇠망사 4권>은 5세기 후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부터 7세기 초반까지의 정세를 다룬다. 서로마가 멸망한 후 서로마 영토(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차지했던 반달족과 고트족이 수십 년의 지배를 끝으로 쫓겨나게 됐고 동로마 제국은 벨리사리우스라는 영웅의 존재로 잠시나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도 했다. 그러나 6세기 후반이 되자 동로마 제국은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상당한 영토를 빼앗겼고 헤라클리우스가 수차례 원정길에 나서 빼앗겼던 땅을 되찾기까지 수십 년 간의 전쟁이 이어졌다.
기번의 글에는 냉소와 해학이 담겨 있어 역사적 사실을 읽어나가는 순간에도 가끔식 미소를 짓게 한다. 딱딱한 문체로 사실의 나열과 검증에 치중했다면 <로마제국 쇠망사>가 로마사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기번의 재치가 담긴 문장은 책 곳곳에 드러나는데 간단한 예를 들자면 6세기 초중반 이탈리아에서 로마군에 쫓겨 북쪽으로 달아난 동고트족이 프랑크족에게 도움을 청하자, 프랑크족의 왕은 자신의 연방으로 귀속되길 권유하며 자신의 50만이 넘는 병력이 동고트족을 위기에서 돕고 동로마제국을 폐허로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한다. 이 프랑크 왕에 대한 기번의 표현은 이렇다.
솔직히 <로마제국 쇠망사>를 완독한다는 것은 내게는 버거운 일이고 인내를 요하는 일이다. 로마사를 좋아하지만 끊임없이 지명을 찾아보고 인물을 검색해봐야 하는 지리한 작업이 수반되는 독서이기에 다른 책을 읽을 때보다 페이지도 늦게 넘어가고 며칠 지나고 나면 많은 것들을 잊어버린 자신을 보며 현타가 오는 현상이 반복된다. 그럼에도 완독을 해보고 싶단 욕심과, 완독 후 다시 읽었을 때는 분명 지금보다 더 많은 역사를 알게 되리란 희망을 품고 꾸준히 읽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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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기번의 책 로마제국 쇠망사 4권은 18세기에 쓰인 역사책이 어째서 오늘날 책에서의 역사적인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꾸준히 읽히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4권에서는 서로마와 동로마로 로마 제국이 나뉜 뒤,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 동로마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아직은 동로마가 부침은 좀 있지만 본격적으로 중흥하는 시기에서 쇠망이라는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을 내용이 많을 것 같지만, 그런 내용을 다루면서도 훗날 동로마 제국에서 큰 사회적 문제가 되는 요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등 역사적 사건 이외의 내용에 대해서도 충실하고 흥미진진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을 뒤흔들다시피 했던 교리 논쟁 등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합니다. #연말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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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에선 별로 인상에 지울수 있는 내용이 없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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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의 훌륭함을 살려내지 못하는 번역 아쉽습니다. 대명사만 봐서는 누구를 가리기는지 잘 알수 없습니다. 군데군데. 그리고 문장의 짜임도 읽기만 해서는 명료하지 않습니다. 부분적이긴합니다. 번역하시는 분이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시고 작업하셨는지가 살짝 의심이 갑니다. > "The supreme command was unanimously offered to the brave Uraias; and it was in his eyes alone that the disgrace of his uncle Vitiges could appear as a reason of exclusion. His voice inclined the election in favor of Hildibald, whose personal merit was recommended by the vain hope that his kinsman Theudes, the Spanish monarch, would support the common interest of the Gothic nation. The success of his arms in Liguria and Venetia seemed to justify their choice; but he soon declared to the world that he was incapable of forgiving or commanding his benefactor." 4권 279페이지 아래에서 세번째 줄의 he는 '힐디발트'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우아리아스가 아닌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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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판으로 된 이 책의 첫권은 1776년 2월 17일 간행되었으며 그리스도교의 흥기(興起)를 심하게 비꼬면서 다룬 마지막 두 장(章) 때문에 약간의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곧바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기번의 논법은 여러 면에서 반박을 받았는데 그가 살아 있을 때와 또 죽은 뒤에도 그의 회의론(懷疑論)이 기존의 제도를 위협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사람들은 그를 공격하고 인격적으로 비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