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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뱅크시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2005년 무렵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난 미술관 테러 사건의 인터넷 보도를 통해서였다. 테러라는 단어에서 끔찍한 사건을 떠올리겠지만 여기서 테러는 권위 있는 박물관에 자신의 익살스러운 작품을 몰래 전시한 해프닝을 말한다. 이런 황당한 사건의 주인공인 뱅크시는 영국출신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철저히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는 게릴라 아티스트이다. 아마도 그의 익명성은 영국에서 그래피티가 불법이기도 하고 또 작품에 드러내는 파격적인 풍자와 선동성 때문인 것 같다. 그는 반전과 평화를 지향하며 거대화, 권력화되는 사회를 비판적인 눈으로 그린다. 대부분 그의 작품은 엄숙주의와 제국주의에 반하는 계몽주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처럼 짜릿한 범법행위를 통해 예술을 구현하는 그를 21세기 예술계의 로빈 후드로 빗댈 수도 있겠다. 특히나 반항과 자유를 이상으로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으니 말이다. 2. 그의 정치적 성향과 기발한 표현방식 외에 공감되었던 점은 권력과 자본을 지닌 소수들에 의해 선택된 미술만을 접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이다. 음악, 영화, 도서 등 다른 예술은 대중이 직접 영향을 미치고 그 질을 좌우하는 당사자지만 미술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미술을 접하고자 대중이 유일한 방법으로 할 수 있는 갤러리에 가는 행위는 겨우 백만장자들의 장식장을 구경하러 가는 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현대미술에서도 자본가와 권위자의 검열(?)을 거쳐야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으며 그 공간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미술에서 성공은 관중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미술은 다른 예술과는 다르다. 대중들은 매일같이 콘서트 홀과 극장을 가득 메운다. 수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음반을 사들인다. 이처럼 예술에 영향을 미치고 예술의 질을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미술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보는 미술 작품은 선택되어진 소수의 화가들의 작품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소수 그룹의 사람들이 전시를 기획하고 홍보하고 구입하며 미술작품의 성공을 결정한다. 이 세상에 과연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진실을 얘기할 수 있을까. 갤러리에 간 당신은 단지 백만장자들의 장식장을 구경하는 관람객에 불과할 것이다. -본문 중에서- 3. 최근 경매에서 할리우드 스타들이 뱅크시 작품을 고액에 사들였다. 또 (공식 홈페이지에 명시된 당부에도 불구하고) 체 게바라의 초상화처럼 그의 작품도 티셔츠에 찍혀서 판매되고 있으며, 뱅크시 투어라는 관광상품과 책자도 거래되고 있다. 젊은 예술가들은 그를 우상화하고 전문가들은 그 영향력을 가늠하면서 작품에 경제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예술은 점점 권력화의 길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열정까지도 돈으로 매겨지는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게릴라 아티스트의 행보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아나키스트적 작품관과 함께 시작된 그의 예술이 과연 수단과 목적 중에서 어느 쪽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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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마도 읽어야 할 운명이었나 보다. 뱅크시란 인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거리로 뛰쳐나간 예술가'란 말에 밑줄을 그었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전 뱅크시란 낙서화가에 대한 그림을 보았다. 이미 내가 읽어야 할 리스트에 담아 두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한때,우리나라는 얼굴없는 가수가 유행한적이 있었다.다분히 마케팅효과를 노린 것이였지만.. 뱅키시란 인물 역시 얼굴없는 화가란 사실을 알았다. 이유는? 그의 얼굴이 알려지면 그는 바로 구속 될 수 밖에 없으니까,담벼락에 그림을 그린 다는 것은 불법이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한다. 심지어 뱅크시가 그린 그림 위에 다른 누군가 또 다른 그림을 그리기도 한단다. 그의 그림에 나 또한 열광하게 된 것은 그의 그림이 그저 단순한 반항에서 나온 그림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가 한 번씩 내뱉는 말들에서 통쾌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마지막 나무가 잘려 나가고 마지막 남은 강물마저도 말라서 졸졸 흐르게 되어서야 사람들은 겨우 돈은 멋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우리를 얼간이 취급하던 충고를 새겨들을 것인가..."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뱅크시란 사람이 낙서가이기전에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운동가같은 느낌도 함께 받는다. 몽매한 사람들에게 그림으로 때로는 글로써말이다. 당연히 그를 싫어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서민이 아니다.기득권 혹은 정치인,공무원등이다.자신들의 비리 혹은 범죄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 있기가 힘들테니까 최근,우리나라 지방신문에 한 시사만화가가 그린 그림이 난리났다는 보도가 더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세상을 향해 여전히 조롱하고 비판하는 뱅크시란 낙서가가 있다는 사실 때문은 아닐지...
뱅크시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나에게 또 다른 탈출구가 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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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고 충격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말하고 싶은 이야를 구구절절 늘어놓기 보다, 한 줄로 혹은 그림 하나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도 능력이다. 뱅크시(Banksy)는 이런 능력에 탁월하다. 간단한 그림으로 간단하게 말하지만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말은 확실하다. 그것이 그의 매력이다. '그래피티'(Graffiti_낙서)는 무엇보다 하위 형식의 예술이 아니다. 비록 엄마한테 거짓말을 하고 한방중에 숨죽인 채로 작업을 해내야 한다 할지라도 이는 실존하는 가장 정직한 형식의 예술이다. 그래피티를 하는 것은 엘리트 의식으로 인함도 아니며 누군가를 현혹하기 위함도 아니다. 게다가 이것을 전시하기 위해서는 동네의 가장 좋은 벽만 있으면 된다. 당연히 누구도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불필요한 입장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벽(Wall)'이야말로 당신의 작품을 발표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이제까지 벽은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왔다. 도시를 경영하며 관리하는 사람들은 그래피티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윤을 내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존재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가치 기준이 당신의 생각이나 의견보다 '돈'에 우선해 있다면 물론 이 또한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버리겠지만 말이다. 그들은 그래피티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사회를 부정하는 상징이라고 말하지만, 그래피티는 단지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에게만 위험하다. 정치인들, 광고쟁이들 그리고 그래피티 작가들 말이다. 진정으로 우리 이웃들의 외관을 더럽히고 손상시키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거대한 슬로건들을 버스와 건물들 사이에 되는 대로 마구 휘갈겨 쓰고는 마치 우리가 자기 회사의 물건을 사지 않으면 뭔가 부족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회사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얼굴에 대고 그들의 메시지를 소리쳐 대지만 정작 우리의 어떤 질문도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이 이 싸움을 시작했고 그 싸움에 맞서기 위해 선택한 나의 무기는 바로 벽이엇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경찰이 되고 어떤 이들은 세상을 더 좋아 보이게 만들기 위해 문화파괴자(Vandals)가 된다. 그는 어릴 때 부모 조차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음을 경험했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었는데도 그의 잘못이 되었다. 그떄부터 그는 입을 닫고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속도가 느려서 트럭 밑에 숨어 있기도 했다. 그는 곧, 자신만의 방식을 개발했다. 스텐실 기법은 그의 그림에 속도를 붙여주었다. ![]() 이런 풍자는, 그의 비판을 더욱 겸허하게 받아드리도록 한다.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싸우는 것도 폭력으로 행해져야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는 말처럼 우스운 것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떠들어 봐야 무슨 소용인가. 하나의 그림으로 단호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뱅크시의 그러한 능력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아닐까? ![]() ![]() 그가 그림으로 말하는 화두 중 가장 많은 것이 전쟁이다. 필요없는 싸움, 그것이 바로 전쟁이 아닐까? 평화를 지킨다는 말은 거짓이다. 평화가 아니라 이익을 지키고자 싸운다. 그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사람 이외의 모든 것들, 아이, 동물, 자연 등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외면할 뿐이다. 직접적이고 충격적이게, 우리가 저지르는 일 우리가 동조하고 동의하는 일은 바로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경고다. 수많은 경고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의 책 'Wall and Piece'는 'War and peace'가 연상된다. 그가 정확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전쟁과 평화. 이 끝나지 않는 화두는 서로를 먹고 먹으며, 다른 형태로 진화해온다. 결국, 평화라는 것은 없다. 무기와 죽음, 이익, 고통만 있을 뿐이다. 왜 우리는 그것들을 깨닫지 못하는가? 사실 깨닫고 있으면서도 외면할 뿐이다. ![]() ![]() 물질주의, 소비주의, 신자유주의.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 뱅크시는 언제나 소수자의 입장에서 대변한다. 다수가 가졌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가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문화와 생활 방법을 존중해야 한다. 소비주의, 신자유주의는 물질에 노예가 되어 가고 있으며,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한다. 허세와 과시, 그리고 욕망 그것이 고유한 문화들을 망가뜨리며 획일화 시키기도 한다. 인간의 경주는 공평하지 않으며 어리석은 경쟁이다. 아직도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운동화와 깨끗한 먹을 물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 116p 이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슬프게 생각하지 않는 문명들은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물질에 물들지 않는 이들의 문화를 파괴시켰다. 뱅크시의 간단한 그림만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 우리의 욕망과 경쟁이 어떤 것들을 파괴시키고, 앗아갔는지 말이다. ![]() 그는 '예술'에 대한 강렬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유명한 미술관에 자기의 그림을 걸어 놓는 기상천외한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유명 화가의 그림에 그래피티적 요소를 첨가했으며, 유명 화가의 그림을 패러디 하기도 했다. 루브르 박물관, 대영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뉴욕 자연사 박물관 등 그는 혼자만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큐레이터들을 바보로 만들었고, 어떤 것이 가치 있는 예술이고 아닌지에 대한 혼란을 가져왔다. 유명하고 저명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 그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관람객들, 심지어 박물관 관련자들을 비웃었다. 그의 행동은 예술의 진정성을 묻는 새로운 시도였다고 본다. 그는 아직도 그리고 있다. 눈치 챌 수 없는 장치들을 곳곳에 뿌리고 있기도 하다. 이제 그의 작품은 숨은 그림 찾기가 되었다. 이제 그의 그림은 지워지지 않고, 심지어 그림이 그려진 벽이 고가에 팔리기도 한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만큼 중요한 것들이 되었다. 그를 만나며, 그래피티를 더 깊게 더 잘 알 수 있었다. 단순하게 벽에 낙서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도 철저하게 깨주었다. 그의 작품을 보며, 한가지 바람이 생겼다면 우리의 그래피티도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의 그래피티를 보며,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를 알고, 좋아하게 된만큼 그의 행보가 지금처럼 굳건하고 확실하게 지속되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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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시를 처음 알 게 되고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건 그의 홈페이지를 비롯한 몇 군데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였다. 군인의 얼굴을 대신한 스마일 마크, 우스꽝스러운 영국 경찰의 몸짓, 폭탄을 품에 안은 소녀 등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동시에 뛰어난 수준의 감각이 전해지는 현대 작가의 아트워크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후 런던에서 잠시 머물고 있을 때 북쪽 동네 초크 팜(Chalk Farm) 거리의 한 허름한 벽에서 우연찮게 뱅크시의 그래피티 ‘Maid in London’을 직접 만나볼 수 있었다.
뒤늦게야 국내에 번역 출간된 뱅크시의 작품집 <Wall and Piece>는, 영국의 거리 곳곳에서 그의 그림을 실제로 직면하는 경험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온라인에서의 사진들을 단편적으로 훑는 것보다는 인쇄된 형태로의 감상이 한결 높은 수용성을 보장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나름의 충분한 미덕을 가진 책이다. 사실 런던이나 브리스톨에서 뱅크시의 흔적을 추적하기란 예삿일이 아니다. 이미 지워져버린 그림이 상당수인데다 도시 전역에 산재해 있는 그림 조각들을 보러 돌아다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테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비교적 다양하고 핵심적인 그의 작업물들을 소개하는 이 책은 그러한 일차적 가치만으로도 높게 평가할 만하다.
더불어 이 책이 그의 작품을 순수하게 감상하는 것과는 별개로 독자에게 주는 장점은, 바로 뱅크시가 직접 쓴 글들이 그림이나 사진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나란히 수록돼있다는 점이다. 영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존 버거가 이미 지적했듯이, 이미지(그림) 곁에 어떤 말(글)이 놓이는가에 따라 이미지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이 작품집에선 그러한 문구의 내용과 배치가 뱅크시의 작품에 더 명확한 태도를 깃들게 함과 동시에, 한편으론 뱅크시가 가진 예술(정확히 말하면 미술)에 대한 사회학적 입장까지 말해주고 있다.
먼저 대다수의 관중(?)이 뱅크시를 좋아하는 이유에는 무엇보다 그가 가진 미적 스타일과 명료한 암시성이 크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서울 홍대 주변에서도 간혹 발견되는 스텐실(stencil) 그래피티가 대표적인 예일 터, 스텐실 기법이 가지는 특유의 성격이 어떻게 뱅크시의 예술관과 결합하는지 독자는 이 책을 통해 보다 가까이에서 목격하게 된다. 또한 그가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론인 패러디(parody)와 관련해서도, 베트남 소녀의 사진이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등을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시켜 얼마나 강한 역설의 어법으로 기능하도록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그림이나 사진과 함께 실려 있는 뱅크시의 위트 있는 문구들이야말로 그에 대한 감상의 차원을 보다 높은 이해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명확한 예술에는 그만큼 명확한 이론이 녹아있는 법이던가. 무엇보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미술계에 대한 비판은 가장 단호하게 들린다. 그에 따르면 “그래피티는 미술의 가장 수준 낮은 형식이 아니(graffiti is not the lowest form of art)”며 “그 누구도 입장료 때문에 관람을 포기하게 되는 일이 없는(nobody is put off by the price of admission)” 대중의 예술이다. 그리고 “우리가 접하는 미술은 몇몇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이 의해 만들어질 뿐(The Art we look at is made by only a select few)”이기에 작품의 성공 여부까지도 결정하는 소수의 지배층을 제외하고는 미술 전시회에서 우리는 “그저 몇몇 백만장자의 트로피 진열대를 구경하는 관광객(simply a tourist looking at the trophy cabinet of a few millionaires)”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 <Wall and Piece>는 독자에게 거리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설파하며 회화나 설치 미술 등이 가질 수 있는 보다 넓은 범주의 의의를 상세히 보여준다. 비록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아나키즘적으로 흘러 다소 개별주의적이고 무기력한 대안을 도출할 때도 있지만(가령, 광고 이미지 폭탄을 퍼붓는 회사들에 대해 벽화를 그리는 것으로 저항할 수 있다는 식의 무력한 낭만주의적 태도), 그럼에도 팔레스타인의 비극과 이라크 전쟁의 주범을 가리키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그 자체로서 정당한 사회적 안목과 급진적인 예술적 관점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뱅크시야 말로 현대예술이 정작 필요로 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요소, 예컨대 작품의 유일무이성과 소유 논리에 반대해 대중이나 노동과의 간극을 좁히고 복제 개념을 인정하는 태도 등을 현실 논리에 바탕해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진정한 ‘동시대의’ 예술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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