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학에 관심이 있는 분이시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김용옥 교수의 초기작으로 근래에 나오는 책들과는 분위기와 구성이 많이 다름을 느끼실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재수시절 친구들이 이책을 가지고 다니던 것을 보면서 동양학이라는 것에 관심있는 우리 세대도 있구나 하고 그냥 스쳐지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금 그책을 직접 읽고나서 그때를 생각하며 시간의 무상함이 불현듯 느겨집니다. 상당히 꼼꼼한 내용으로 요사이 출간되는 도올의 저서와는 다르게 겸손하고 학구적인 태도가 많은 신선함을 주는 그런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용옥교수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부분은 그는 분명 한국사회에 거대한 동양학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 누가 그런 동양학에 관한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한 노력을 기울였던적이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에 대한 여러 비판도 조금은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알수있다는 조심스런 의견을 피력해봅니다. 강의가 엔터테이먼트여야 한다는 김교수의 주장이 이시대를 사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수 없으며 그 동양학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족하게 해줄수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김교수의 역할에 대한 순기능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용옥교수의 저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정도의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
| 일단 도올 김용옥 선생의 학식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필자보다 1세대 또는 1.5세대 앞선 "노인(?)"으로서 그정도의 학식이나 지적 역량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마 한국이라는 곳에서의 노인을 공경함은 이미 몇 세기전에 사라졌으리라. 하지만, 필자의 경우에는 김용옥선생을 보면 그의 세대 혹은 그 이전세대에서 안현필선생이 생각난다. 정확히 존함을 기억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어렵게 자라서 영어선생이 되어 한때 유명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물론 그 역시 미국땅 밟지 않고 일본에서 영어를 배운 세대이고, 필자의 학창시절까지 그는 영어를 가르쳐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민족색이나 어떠한 정체성에 대해서 말하고 싶진않다. 하지만, 김용옥선생과 그의 세대에 있어서 꼬질꼬질한 교만과 거만, 자만과 퀘퀘한 강박관념 및 집착증은 결코 읽는 이로 하여금 기분이 유쾌하진 않다. 장똘뱅이 약장수처럼 사람들을 모아놓고 속된말과 욕설에 가까운 말들로 이른바 몽매한 우중을 가르친다는 듯이 썰을 풀고,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하거나 모이지 않으면 "아아...세상은 아직도 멀었군"하고 중얼거리며 꼭 안빠지고 잘난척을 해야하고... 쉽게 말해서 정말 싫다. 필자의 경우에는 전공때문에도 이런 개똥 철학자들을 너무나 많이 봐 왔다. 중광이나 도올처럼 괴이쩍은 행동을 하며, 자신의 광대한 지식을 부풀려 자랑하려고만하고, 자신의 언행에 대해 언제나 가르치고 설명하려고만 들고... 이제 이런 세대들은 좀 역사의 무대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영화 "취화선"을 보고서 느낀 역겨움을! 동양학에 대한 김용옥이란 제야의 학자가 생각하는 바대로 뭔가 느끼고 싶다면 볼만한 책이다. 그러나, 이제는 무용지물이된 그 책의 중국어발음표 만큼이나 그 책은 낡고 퀘퀘하며 짜증나는 국수주의를 가장한 대국선호사상에 꽉 차있는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가 예언자나 무속인은 아니지만, 어찌 그렇게 선견지명이 있는 대학자가 시대의 흐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아직도 19세기적 사고를 한단말인가? 버스와 지하철에서 수치를 모르는 아줌마들을 교화하기엔 적당한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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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서문을 지나 다섯 개의 글이 실려 있다. 3번과 5번의 글을 제외하고 1,2,4의 글이 책 제목과 관련된 논문이었다. 긴 글이 이어지는데다 글씨가 너무 작아서 읽기에 고통스러웠다. 꼭 그렇게 인쇄해야만 했는지 모르겠다.
선생님의 강력한 주장은 한문으로 되어있는 글을 현대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한 부분에 대한 질타였다. 내용을 요약하면..
학문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 문화로 정립되려면 번역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누구나 인정하는 원본을 대상으로 번역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해석자의 주견이 배제된 것, 그 글이 나타내는 순수한 의미가 드러나야 한다. 우리 나라 학계는 번역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데 소수의 엘리트 의식도 여기에 한 몫 거들고 있다. 이미 오래 전에 동아시아의 고전이 서구 문화권에 매끄럽게 번역되어 있으며, 가까운 일본을 봐도 평생 번역에만 몰두해 온 학자들의 업적을 크게 인정하고 있다. 또 사전류가 충분히 출판되어야 한다. 일본의 <대한화사전>같은 책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학문이 대중화되고 누구나 접근가능할 수 있어야 문화의 꽃을 피운다. 만약 성경을 라틴어로 읽었다면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그렇게 대단한 기세로 전파될 수 있었을까? 퇴계의 저작을 평범한 사람들이 읽어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작업을 하자. 이러한 이야기가 이글에서 주장하는 대략의 내용이다.
이 책이 1980년대 중반 쯤인가 나왔던데, 학계의 풍토는 2007년이 되도록 크게 달라진 점이 없는 것 같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입장에서 당연히 번역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등의 책들도 막상 찾아보면 아직도 완역본이 많지 않다. <난중일기>같은 작품도 이제서야 완역본이 나왔다. 하도 들어 친숙한 책들 중에서도 원본조차 확정되지 않은 책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완역본은 학문연구의 출발이며 도착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차피 논문은 소수 연구자들끼리 읽기 마련이라, 독자가 읽고 뭐라 할말을 생각하려면 최소한 학자가 연구했던 '대상 저서'를 읽었어야 하는데 그걸 원문으로 어떻게 읽나. 이건 자기 지식에 대한 과시에 불과하다.' 이건 나도 늘 함께 느꼈던 점이다.
학자 몇 명만 관심있는 그들만의 잔치가 아니라 누구나 함께 하는 잔치라야 잔치도 커지고 참여한 보람도 있는 법이다. 그래야 문화로 정착이 된단다. 20년 전에 도올 선생님이 주장했던 '원저의 완전한 번역작업'이 학계 전반에 크게 공감대를 형성했으면 좋겠다. 필독도서라면 완역본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건 학자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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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책에선 빛이 난다. 개화, 계몽의 위에서 아래의 억양이 들어간 빛이 아닌, 솔직하게 묻고 거침없이 내뱉는 문답의 능력, 그러나 그마저도 천박하지 않고 아주 succinct한 깨달음의 빛이 난다. 땅과 하늘을 대면하여 천지인의 시각으로 철학을 논하고 인간을 논하는 수준에 이른 사람이 마땅히 大를 논하는 것이 아집이나 오만한 시덥잖은 젠체로 보였다면 책을 10번 이상이 읽고 그 함의를 대저 이해하는 노력이라도 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좋은 책은 사골과도 같다. 처음엔 국물이 투명하고 기름이 둥둥 떠 있어 시원치 않은 맛을 보겠으나 우려내면 우려 낼 수록 뽀얗고 맛있는 법이다. 많은 도올의 명저가 책가위가 반들반들 할 정도로 읽어야 이성의 차가움을 넘어 감동으로 다가온다. 물론, 글의 서문부터, 글꼴의 작은크기에서 육중함이 몸으로 다가와 거부감이 들지 모른다. 이 것 들은 많은 것을 담고 싶은 저자의 마음으로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이제, 초록색 색안경을 잠깐 벗고 대가의 헤아림을 느껴보자! please don't turn to green! [감명 깊은 구절] 나는 걷지도 못하고 침대위에서만 모든 것을 해결했다. 그러던 어느날 화창하게 비개인 하늘에서 땡볕이 내리뙤는 어느날 남자가 큰 행길을 걸어나오는데 두 살 정도나 되어보이는 통통한 계집아기가 흰 드레스에 흰 모자를 쓰고 뛰퉁뛰퉁 아장아장 뒤따라 나오고 있었다. 뛰퉁뛰퉁 아장아장 걷는 그 모습, 그 모습,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도 발랄하고 고귀한 생명의 움직임을 느꼈다. 전 우주적 생명의 모습이 뛰퉁뛰퉁 아장아장거리는 모습속에 거대한 입체화면처럼 통찰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저거다! 저거다! 저거다! 바로 저거다! 어떻게 저 아기가 저렇게도 순수하고 아름답게 걸을 수가 있다 말인가? 도대체 인간이 걸을 수 있다는 사실, 인간이 걸을 수가 있도록 우주적 생명이 움직이고 있다는 그 사실, 그토록 흔해빠진 그 사실이 나에게는 감격이었고 전율이었다...(중략)... 그 어린아기의 모습과 연결되는 나의 생명의 氣의 움틀거림에서 살아움직이는 우주의 힘을 통찰했다. 이거다! 이거다! 이거다! 바로 이거다! 나는 너무도 기뻤다. 나는 거미줄만 달려있는 공허한 빈방에서 나의 환희를 전달할 그 아무 것도 갖지를 못했다. 나는 미친듯이 혼자 깔깔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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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씨가 처음으로 이 세상에 발표한 논문인 '우리는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외에 5편의 글과 86년 당시 김용옥 씨가 양심선언을 하고 고대 교수를 사퇴했을 때, 자신의 양심선언에 관한 입장을 밝히는 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동양학에 관계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읽어야 할 필요성은 못 느낀다. 그러나 인문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글인 '번역에 있어서의 공간과 시간'은 번역에 대한 김용옥 씨의 개념을 상술한 글로써, 고전 한문의 번역 외에도 영어에서 한국어로, 또 기타 외국어에서 한국어로 번역이 일상화된 요즘, 번역에 대한 생각의 틀을 넓혀 줄 것이다.
첫 째글과 둘 째글은 거의 번역에 대한 내용이다. 김용옥 씨가 말하는 올바른 번역이란 번역의 대상이 되고 있는 책의 작자의 의식세계와 나의 의식세계와의 사이에 동질감이 성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세 째 글은 중국에서 불교와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때 일어났던 격의(格義) 현상에 대한 내용이다. 네 째 글은 김용옥 씨가 고대 철학과 4학년 시절에 쓴 글로서, 동양적이라는 의미를 서양과의 대비를 통해 밝히고 있다. 다섯 번째 글과 여섯 번째 글은 중국어와 일본어의 한국어 표기법에 관한 내용이다.
'여자란 무엇인가'에서 김용옥 씨의 거칠은 말투에 불만을 품으신 독자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처음 세상에 글을 내는 김용옥 씨의 예의 바르고 격식 있는 말투에 어쩌면 놀라실 지도 모르겠다. [인상깊은구절] 누가 나에게 우리 고전 국역의 제일의 원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동시성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동시성의 원칙만 지켜진다면 우리 고전은 재활의 길을 얻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영원히 죽음의 길을 걸을 것이다. 번역 속의 동시성이란, 번역이란 행위가 번역의 대상이 되고 있는 책자의 작자의 의식세계와 나의 의식세계와의 사이에 동질감이 성립할 수 있도록 다리놓아 준다는 뜻이다. |
| 그의 글 쓰기와 사색의 방향은 분명 독특하다. 그에 대한 많은 평가가 있지만,분명 한 것은 독특하다는 것이다. 김용옥 교수의 초기작으로서,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번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은 꼭 동양학에 관심이 없더라도,외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읽어 보아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뒤 김용옥 교수의 여러 책들을 읽어 보았지만,어떤 책들은 몹시 현학적이기도 하고,너무 대중적 글쓰기에서 조금 벗어 난 듯도 해 보이지만.이 책은 초기작이여서 그런지 대중적인 접근도 오히려 쉽다. 조금은 사색적인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강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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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하면 IMF를 맞아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했던 우리 국민들에게 학문의 길이 따분한 길만이 아니라 진정한 보람의 길로도 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주위로부터의 시기(?)도 많이 받았지만 묵묵히 그것들을 마다하지 않고 시기(?)의 장본인들을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여 학문의 시야를 더 넓히고자 하는 진지함이 돋보이는 사람이랄까? 21세기 최첨단을 자랑하는 현 시점에서 학문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고전분야에 대한 번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질 않은 상태에서학문적 발전을 기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정책적으로 전혀 지원이 없는 동양학의 황무지 상태에서 아버지의 부단한 반대를 무릎쓰고 동양학 연구와 함께 번역의 시발을 열게 되어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는 무척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의 퇴계 이황이나 남명 조식 같은 대학자들의 끝간데 모를 대화를 통해 학문의 발전을 이끌어 오던 우리나라가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도올이 밝힌 바 그대로 "완전한 자기 배반의 역사" 그 속에서 학문적 토양의 씨앗이 밖으로 나오질 못하고 땅 속에서 그대로 썩어버린 꼴이 된 형국이랄까! 그런 형국에서 동양철학 연구를 위해 미국으로 중국으로 일본으로 학문적 주유천하를 한 도올의 학문적 방법론에 누가 뭐래도 적극적인 동감의 표시를 하고 싶다.
책의 활자가 너무 작아서 다소 읽는데 조금 불편한 감이 있었으나 그건 아마 도올의 의도가 깔려있지 않았나싶다. 활자가 크고 화려하다면 아마 건성으로 읽는 경향이 있을 것을 예상해 꼼꼼히 숙독할 수 있게끔 아량(?)을 보인 것 같아 불편하면서도 흐뭇해지는 것을 느꼈다. 책의 제목처럼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 동양학의 발전이 느리지만 이제라도 튼튼한 토양을 위해 참여하는 젊은 세대들이 많이 생겨나서 씨앗하나가 수십개의 열매를 맺듯 일취월장하는 한국적 동양학의 진미를 맛보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면에서 도올의 동양학 안내판 서적은 그 역할을 했다고 본다. 시작이 반이라 하지 않았나!!!... [인상깊은구절] 필자는 우리나라 동양학계의 발전을 위하여 불가불 하나의 구체적 제안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각 대학의 동양학 부문에서 나오는 석사.박사 학위논문을 가급적인 한 번역 위주로 회전시켜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기엔 학위논문이 어떻게 번역이 될 수 있느냐고 지금까지의 통념으로 저항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일본을 실례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교육체제가 모델로 생각해 온 구미 제국의 대학에서는 지극히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특히 논문의 대상이 번역이 부재하는 고전일 경우에는 거의 백퍼센트에 가까운 기정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지금 동양학도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 그리고 각 대학에서 동양학 관계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많은 인재들이 창조적인 청춘의 중요한 시기를 논문 쓰는데 바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의 귀중한 노력이 연결점을 가지고 계속 축적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논문이 자기 혼자 읽고 마는 논문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낭비를 좀더 창조적으로 조직화해야 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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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책은 처음 읽는다. 그 몰아치는 도올강의 열풍속에서도 관심두지 않았던 나였다. 어쩐지 약장수같고, 넓은건 알겠는데 깊이가 없어뵈고, 아줌마대상의 교양강의 정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 나의 아집이고 교만이겠지만 사실 지금도 별로 다른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책은 도올의 세편 논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번째 두번째 글은 번역에 대해 많이 강조하고 있다. 번역에 있어서 살아있는 언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거라고 나는 받아들였는데, 그러는 사람 치고는 참 어려운 말을 많이 사용하는구나 싶었다. 지금 사용하지도 않는 말, 한번 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는 현학적인 단어를 본인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면서 유독 역자들에게만 새로운 언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듯이 보여서 못마땅하기도 하다.
요즘도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추세가 맞긴 한지 모르겠다. 아마도 철학과가 없는 학교가 더 많을 것이고, 있던 학교도 없어지는 추세일것이다. 그만큼 경제 위주로 세상은 돌아가고 있고, 과학이 철학의 시녀인지 철학이 과학의 시녀인지조차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우리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고, 결국엔 우리 것을 역수입해야 하는 상황이 점점 늘고 있다.
다 잃고 무릎 칠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살아 숨쉬는 동양학, 나아가서는 한국철학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도올이 하고 있는 일이, 강의가 철학의 대중화에 신바람을 불어넣어주는 셈이다. 그러나 80년대 말에 쓰여진 이 책을 21세기의 시각으로 보자니 그의 역사의식과 세상을 보는 눈에 참... 씁쓸한 부분도 많다. [인상깊은구절] 근세 서구라파철학의 역사란 기본적으로 근세 물리학이 제시한 합리적 우주의 정당화라는 테제를 한발자욱도 벗어나지 않는다. 칸트가 말하는 "순수이성"도 결국은 "물리과학의 이성"일 뿐이며, 순수이성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세계도 뉴톤고전물리학의 세계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철학적 세계관의 전환은 철학자체의 힘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외적 요소에 의하여 도전을 받음으로서 일어난 것이며, 그러므로 철학적 우주관은 철저하게 그 시대정신의 지배를 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