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의 추천이나 서평도 보지 않고 신간소식 속에서 간단한 소개만을 본 뒤에 450페이지에 달하는 이책을 따끈한 초판으로 구입했다. 설 휴일인 1일에 발간된 책이 없다면 1월 2일에 출간된 이 책은 정말 따끈한 2003년의 신간이다. 본국에서야 80년대에 발간되었다지만.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받지 못한 자들을 사랑받은 이들이라 부르리라. - 로마서 9장 25절 저자의 서문이나 후기는 없었다. 위의 성경 구절이 그것을 대신하는 것 같다. 1856년 마가렛 가아너라는 흑인 여자 노예의 충격적인 영아 살해 사건이 소설의 서사적 배경이 된다. 당시 ‘노예제도의 비인간성’을 널리 알린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노예제도의 잔인한 면모가 자세히 그리고 표면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다만 봄이 오면서 꽃이 피어나는 들판에서 자연이 일러주는 방향을 따라 몇 년간을 북으로 북으로 도망치며 자기가 가진 돈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사먹고, 길을 배회해도 되는 놀라운(?) 자유를 갖게 된 등장 인물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노동력의 가치환산으로 값이 매겨져 팔려갈 미래와 그렇게 예정된 이별을 감당하기 위해 절대로 자식에게 모든 사랑을 쏟지 않거나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음을 주는 것이 낫다고 결심해버리는 네 아이의 어머니의 처절함 속에 남아있다. 현실과 망자에 대한 그리움 때로는 한(限)이 가져다주는 비현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서로 섞여 든다. 확실한 서사적 경계를 확인하며 이야기를 읽으려고 든 처음엔 판타지 소설인가하는 생각이 들 뻔했지만, 커다란 은유의 덩어리 같은 시처럼 낮게 읊조리는 장송가처럼 다가오는 문장들을 그냥 보이는 그대로만 따라가기로 했다. 영어에 익숙했다면 원어로 된 작품의 본래의 매력과 작가의 표현력을 흠씬 느껴보고 싶었다. 네 자녀의 어머니였던 시이드를 두고 옛친구는 너무 짙은 사랑이라서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얘기한다. 그러한 그녀의 짙은 사랑은 사랑스런 딸을 백인 주인의 손으로부터 차라리 죽음으로 보호하고, 잔인했던 만큼 자기 사랑이 얼마나 컸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을 목격한 나머지 자식들과 이웃은 모두 겁에 질려 떠나갔지만, 그녀는 석공에게 몸을 팔아 사랑스런 딸의 묘석에 ‘Beloved’ 7자를 새겨준다. 그 석공에게 조금 더 주었더라면 몇 글자를 더 넣어 자신의 간절한 마음과 사랑을 더욱 절절히 표현했을 거라며 아쉬워한다. 쉽고 짧게 간추린다면 잔인한 노예제도로부터 탈출하고, 자식들을 다시는 그러한 굴레에 던져지게 하고 싶지 않아 자기 손으로 죽임으로서 그 잔인성과 비인도적인 면을 역설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이드와 가족(인간이 아닌 노예에게 가족은 노동력 증식의 수단인 짝짓기 일뿐 본래의 의미는 적용되지 않았지만)들은 그나마 온유하고 인도적인 주인들과 살았다. 남자 노예들을 ‘사내’나 ‘청년’이라는 젊은 생명체로 인식하게 그리고 행동하게 해주고, 매질이나 욕지거리로 훈련시키지 않았다. 노동력을 늘리기 위한 출산을 위해서임을 강조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인간다운 호감과 애정으로 짝을 맺게 했으며 ‘결혼’이라는 의식을 흉내내고자 했던 시이드의 소박한 의지를 짓밟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집근처만 벗어나도 어디가 어디인지 방향도 지명도 모르는 체로 떠나기를 작정한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하고 누려야하는 이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자유)이 정말로 본능적으로 샘솟는 것을 보며 난 새삼스러운 진리의 확인이라 느끼면서도 신기했다. 마치 나는 지금 그러한 당연한 나의 누림을 찾으려 하지 않아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
|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의 주제는 미국의 남북 전쟁 당시의 노예제도로 인해 짓뭉개진 흑인의 삶에 대한 아픔을 조명한 소설이다. 주인공 시이드는 백인 농장 스위트홈에서 생활했던 노예다. 그녀는 스위트홈에 팔려 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다른 농장에 비해 그래도 자유가 있었던 농장이 몰락해 가면서 시이드를 비롯한 스위트홈의 노예들은 탈출을 감행한다. 시이드는 만삭의 몸으로 탈출을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남편을 잃고, 많은 고초를 겪으며 시어머니 베이비 석스에게 의지한다. 그후 고령의 베이비 석스가 사망하고, 아들 둘이 집을 떠나며, 홀로 남겨진 딸 덴버와 시이드만이 124번지의 외딴 집에 남겨져 있다. 둘만 남은 124번지의 외로운 집이 소설의 시작이다.
이 소설은 1856년에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쓰여졌다. 마가렛 가아너라는 흑인 여자 노예가 탈출한 지 하루만에 노예 사냥꾼들에게 쫓겨 붙들릴 위기에 처하자, 가장 사랑하던 막내딸의 목을 단칼에 베 죽이고 나머지 아이들까지 살해하고 자살하려다 붙들린 사건이다. 이는 당신 노예제도의 비인간성을 가장 널리 알린 사건이었는데, 『빌러비드』에서 주인공 시이드 역시 두 살배기 딸의 목을 베어 살해하고 만다. 토니 모리슨은 124번지를 중심으로 노예제도에 희생된 흑인들을 반추해 나간다. 그의 서사적 필치는 플라타너스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젊은 청년들, 물 속에서 건져 올린 머리카락과 살점이 아직 붙어 있는 흑인 소녀의 빨간 리본, 등짝에 벚나무처럼 가지를 뻗은 피 묻은 채찍의 흔적, 헛간에 갇혀 백인 부자에게 날마다 강간을 당하던 악몽(시이드), 불에 바삭바삭 타오르면서도 탈출한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미친 듯이 승리의 웃음을 웃어대던 친구(식소)의 새카맣다 못해 푸르른 얼굴, 아내가 강간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끝내 미쳐 제 얼굴에 엉긴 버터를 처바르던 남편 등등을 거침없이 토해 낸다. 그러나 그 잔인한 기억들은 보복이나 복수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빌러비드(사랑 받은 사람)는 사랑 받지 못한 자들의 통칭이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 받지 못한 자들을 사랑 받은 이들이라 부르리라"라는 성서의 로마서 9장 25절이 책을 열면 눈앞에 펼쳐지듯, ‘사랑 받지 못한 자’들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감으로써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여기엔 여러 사람들과의 사랑이 나온다. 남편 할리와 시이드의 사랑, 그것을 바라보며 지켜 주던 스위트홈의 다른 남자 노예들, 빌러비드와 시이드, 식소와 30마일 여인, 어머니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 과외노동을 해 왔던 할리 등이 노예제도로 인해 엮어지는 여러 잔인한 아픔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런 이유로 스위트홈은 인도적인 노예 농장으로 그려지고 있다. [인상깊은구절] "이 집도 백인들이 준 집이잖아요." "아무도 나한테 공짜로 뭘 준 적은 없다." "저는 백인들한테서 일자리도 얻었어요." "대신 그치는 요리사를 얻었잖니, 얘야." "오, 어떤 사람들은 우리한테도 괜찮게 대해줘요." "그럴 때마다 놀랍지 않던?"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잖아요." "나한테 시비 걸지 말아라. 태초부터 지금까지 살았던 흑인 숫자보다 백인들한테 죽은 숫자가 더 많을 게다. 너도 칼을 내려 놔. 이건 전투가 아니야. 참패지." |
|
미국의 노예제하에서 일어났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인간이 같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않을 때 벌어질 수있는 다양한 사건을 기괴하고 토속적인 심령현상과 결부하여 독특하게 전개해나간다.
엄마가 죽인 아이가 집의 지박령이 되고, 그 아이가 다시 인간의 형상으로 엄마를 찾아온다는 내용은 부두교스럽고 주술적인 무언가를 연상시킨다. 기독교와 결부된 주술적 종교를 더 파고들어도 재밌는 게 나올듯한데 사실 부두교나 그쪽 샤면들에 대한 지식이 딱히 없는터라 그럴수가 없었다는.
생각보다 몰입하지않고 극을 보는 관객의 시선으로 볼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배경이 외국이고 흑인노예제를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끔찍하고 패륜적인 사건이 기사로 다루어졌을 때 사람들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외국임을 확인하고 좀 안심하는 이유와 맥락을 같이 한다. 나랑은 좀 거리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옛날에 영화 악마를 보았다가 개봉했을 때 너무 끔찍하다는 평가가 주류여서 기대를 하고 보았었다가 의외로 점잖은 장면들에 이걸 왜 잔인하다고 하는지 갸웃했었던 기억이 있다. 데드캠프같이 썰고 저미는 장면만 나오는 영화도 많은데, 악마를 보았다는 토막치는 것도 직접 나오지는 않고 토막친 결과물도 멀리서 보여주는 것뿐이라 읭? 했었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벌어진 일인가,가 큰 이유라고 본다. 기이한 외모를 가진 외국인이 금발의 외국인을 써는 장면은 그것이 현실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지만 검은 머리 한국인이 한국어로 우리에게 익숙한 욕을 하며 같은 한국인을 토막내는 건 너무나 현실로 와닿기 때문에 더 무섭게 느껴진다는거다.
그것이 내가 책 속의 사건을 좀 더 객관적인 눈으로 극을 보듯 볼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보통선거가 보편화된 지가 불과 백년밖에 되지 않았고, 5천년 인간의 역사 중 대부분이 불평등으로 얼룩진 계급사회였으며,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벗어난 지 백년도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피해자들의 비명이며 기록이고 그 누구보다 가해자들이 읽어야할 역사이다.
최근 미국 고등학생 필독서 어쩌고에 흑인작가들의 작품을 올리기위한 시도가 좌절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기사만 읽었을 때는 음 그렇군 그랬는데, 이 책을 보니 왜 흑인작가들의 작품을 교육필독서로 선정하기 싫어했는지가 뚜렷하게 읽혀서 웃음이 나더라.
가해자들이 그건 옛날일이야 라고 치부하는건 만국 공통인가. 누구나 자기가 잘못한 일을 직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단체와 국가의 규모가 된다면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더이상 감성에 호소하는 수준의 일일수가 없다. 직면하거나 또 외면하는 일이 또다른 역사를 만들어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흑인작가들의 노력을 응원한다. 그들이 귀를 닫는다면, 듣게 만들어야지.
|
|
22살..23살..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 나지 않지만,
20대 초반의 나에겐 너무 무겁고, 진하고, 충격적이여서
책이 내 뺨을 때리고, 어깨를 잡고 흔드는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책의 내용, 의미를 다 파악하지도 못했지만,'
그 강력한 느낌때문에 몇년을 두고 몇번이나 다시 읽었었다.
후에 토니모리슨이란 작가의 스타일을 싫어하는 사람이 꽤 있다는걸
알게됐지만, 그런건 상관없이
20대 들어서면서 시작된 10년간의 독서에서
토니모리슨은 나에겐 최고의 작가로 아직도 건제하다.
내용은 각설하고...(다른분들의 리뷰에 자세히 잘 적혀있어서..)
과거..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현재까지도.. 노예라는것은 존재한다.
어느 문명에나, 어느 지역에나 있었던 노예라는것을...
너무 막연하게만 알고있었다.
노예.. 사람임에도 소유의 객체가 되는 존재..
자유가 없는존재. 소유물이기에 어떤것도 소유할수 없는존재.
하지만, 들어 알고있을뿐, 실감할수는 없었다.
빌러비드는 그것을.. 노예.. 흑인노예.. 노예의 박탈된 권리라는것이 어떤것인지
너무나 생생하게, 직설적으로,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그저 읽기를 하고있을뿐인데... 가슴이 찢기고, 몸이 떨리고, 눈물을 멈출수 없을정도로...
|
|
세상엔 내가 모르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국의 흑인 노예제도라는 것에 대해 그동안 정말 단순하게도 단어 뜻 그대로만 이해하고 있던 나에게, 이 책의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 책 한권으로 흑인 노예제도의 모든 걸 알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암튼 인간은 이래서 책을 읽어야 해..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달까? ㅋ ㅋ
아 물론 당근 재미도 있다!!
어떤 책이든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는 법이라고-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을 만큼~
마지막으로.. 동네 공공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보고, 아 이걸 읽는게 내가 처음이구나..라고 새 책을 처음 읽는다는 생각에 좋아했었지만.. 다 읽고 나서는 아 이런 책을 지금까지 이 동네 사람 중에 아무도 읽지 않았다니..라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독서에도 편식이라는 게 있다는 것, 머릿속도 지방질 과잉이 되지 않도록 다이어트가 필요한 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폴 디가 시이드의 발이 몇 개인지 세어보았다는 대목 ㅋ ㅋ |
|
빌러비드는 미국에서 노예로써의 삶을 살았고 또 자유를 얻었을 때의 삶을 산 ‘시이드’라는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을 읽으면서 초반에는 흑인인 주인공의 아픔이나 노예로써 당한 일들에 대해서 잘 알 수 없었다. 단지 이게 무슨 말인가… 집이 공격을 하다니… 귀신이 공격을 하다니… 아들 둘은 집을 나가버리다니… 무슨 이유로? 라는 끊임없는 궁금증을 안고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나갔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노예로써의 삶과 그들이 당한 고통들에 말을 잃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빌러비드가 마가렛 가아너라는 실제 인물의 사건에 착안해 쓰여진 글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이드가 했던 그 행동을 실제로 한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작가가 묘사한 시이드와 폴 디, 식소 등의 인물들이 당했던 처참한 고통과 괴로운 기억들이 실제로 자행되고 있었다는 반증일 테니까 말이다.
나는 사실 노예라는 제도에 대해서, 그리고 노예였던 사람들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미국의 흑인, 물론 이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불러야겠지만 그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이미지도, 긍정적인 이미지도 아닌 그저 여러 인종 중 하나라고만 생각해왔다. 흑인이 더 폭력적이라던가 무섭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실 알고 보면 미국의 범죄자 중 상당 부분이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라는 사실을 책에서 본 기억도 있고 영국에 여행 갔을 때 친절하게 말을 건네던 사람 중에 흑인도 있었으니까 흑인을 무섭게 생각할 이유도,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믿을 이유도 없었던 셈이다. 게다가 얼마 전 버락 오바마라는 흑인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지 않았던가… 어쩌면 아무런 정보 없이 읽었던 빌러비드가 참으로 시의적절했다는 느낌이 든다.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이 된 2009년 올해 노예로써의 흑인의 참혹한 삶을 그린 빌러비드를 읽었다는 게 정말 신기하다. 빌러비드는 작년 신문기사에서 하버드생들이 많이 읽는 책 리스트 베스트 10위 안에 있던 책이었다.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2위였다. 1위는 1984년) 제목도, 저자도 생소했지만 그네들은 어떤 책을 읽는 걸까? 하는 마음에 구입한 책이었는데 정말 베스트 10위 안에 들 만한 책인 것 같다. 하지만 좋은 책일수록 그 여운이 오래가고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는 점에서, 게다가 이런 상상하지 못했던 이런 참혹하고 잔인한 그들의 만행을 읽으면서 좋은 책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자꾸만 시이드, 폴 디, 식소가 당했던 일들이 생각이 나니 말이다. 하지만 폴 디 조차도 시이드를 짐승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그 행동을 나는 너무나 이해할 것 같았다. 자신이 겪은 끔찍한 일들을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아이들이 당하지 못하게 하려는 마음…… 다시 나타난 자신의 사랑하는 아기 빌러비드에게 시이드는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알리고 싶어했나보다. 자신도 함께 죽고 싶었는데 사랑하는 아기만을 보내 찢어지는 마음, 그럼에도 남은 아이들을 위해 다시 살아야만 하는 현실, 사랑하는 아기의 묘비를 위해서 몸을 팔아야 하는 현실, 어찌 보면 시이드라는 인물은 온갖 고난과 역경을 모두 이겨내는 흑인들을 대표하는 그네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험한 일을 모두 견뎌냈지만 빌러비드가 자신의 그 소중한 아기임을 깨닫는 순간 무너져버리는 모습에서 시이드가 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또한 이 빌러비드라는 책을 작가는 실제 주인공인 마가렛 가아너를 위한 추모의 소설로써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주인공은 아이 넷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고 했다고 했다. 그런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상상하며 작가는 그녀가 죽인 아이가 다시 돌아와 잠시라도 행복한 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소설에서나마 그려준 것은 아닐까? 소설 ‘어톤먼트’에서 브라이오니가 자신의 실수로 불행하게 삶을 마감한 시실리아와 로비를 소설에서나마 행복하게 해줬던 것처럼 말이다.
|
| 제목이 참 예뻤다. 빌러비드라니... 그래서.. 그 내용도 마냥 예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 책은 인간이 만들어낸 역사 속에서도 가장 아픈 기억 중 하나인 노예와 그들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책의 여주인공 시이드의 삶을 지켜보며, 그녀의 주변에서 그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읽어내려 가며, 그것이 소설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감상적이 되고 미화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야만 했다. 인간은 참으로 잔인할 수 있으며, 그것은 세월이 흐른다 하여서, 이제는 다 지나간 옛일에 불과하다고 하여서,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는 없음을 "등짝에 벚나무처럼 가지를 뻗은 피 묻은 채찍의 흔적"을 바라보며 느껴야만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