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치콕 감독은 워낙 이런 쪽으로 이름 나신 거장이라 이 영화도 꼭 기획, 각본까지 다 맡아서 했을 것만 같지만 알고보면 이미 짱짱하게 히트친 원작이 존재했던 것이다. 스타일도 좋지만 캐릭터들의 개성이 워낙 고전적으로 뚜렷한지라 영화의 성패는 연출력보다는 캐스팅에서 판가름될 것 같은데. 좀 황송하긴 해도 무슨 역이든 시키면 다 알아서 해주시는 로렌스 올리비에 경과, 본명만큼이나 레베카라는 극중이름(물론 '레베카'는 출현하지도 않은 고스트지만 사람들은 그렇게만 알고 있을 것 같다)으로 더 유명할 것만 같은 조언 폰테인이 역의 멋진 소화를 보여 주고 있고,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댄버스 부인 역을 특유의 음산하고 우울한 표정 지어가며 잘 표현한 주디스 앤더슨('십계'에서 이집트 공주의 시녀[!]로 나온)역시 돋보였다.
![]() 순박한 놀라움을 만면에 띄우는 내공을 선보이시는 20대 초반의 풋풋했던 폰테인 여사
원작에 충실한 듯하면서도(원작의 프레임이 워낙 뚜렷하니 안 그럴 방도도 없겠다) 살짝 다른 구석이 여럿 보이는데, 일단 가장의 실패를 깨닫고 울며 돌아서는 '드 윈터 부인'을 악마적으로 조소하는 그 장면은 없고, 대신 뭔가 일말의 인간적 감정을 부담하며 애써 외면한 뒤 나름 진지한 충고를 하는(따라서 그 악의의 농도가 옅은) 씬으로의 설정이 그렇다. 히치콕은 댄버스 부인의 역을, 그저 상전의 매력에 홀린 수동적 존재로만 해석했다는 건데, 그런 상식적 시선은 이 멋진 소재를 매우 심심하게 만든다. 가령 나 혼자 시도했던 분석을 예로 들자면, 구시대적 신분사회의 환상에 잔뜩 사로잡힌 일단의 귀족들과 그 부속계급이 순진한 처녀 하나를 잡아 두고 사이코드라마 한 편 단단히 벌이는 식의 플롯을 기대했던 거고, 이 경우 댄버스 부인은 나오지도 않는 레베카를 불가피하게 대행하는 추악한 현실태로 볼 수도 있는 것이겠고 말이다.
![]() 거부 맥심(로렌스 올리비에 분)을 영문도 모르고 막 챙겨주려 하는 진짜배기 '귀여운 여인'
영화는 그 뿌옇게 흐린 맨덜레이의 몽환적 모습을 음침하면서도 아름답게 잘 잡아내는 촬영과(물론 흑백이며 그래서 더 성공이다), 명우들의 성실한 연기로 빛을 발하는 고전이지만, 진지한 고전 연극을 은막에다만 옮겨 놓은 듯한 1940년대 할리웃 클래식의 범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박제된 걸작일 뿐이다. ![]()
|
|
1.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1940년에 만든 <레베카 Rebecca>는 장르를 가리기 어렵다. 로맨스 같기도 하고, 추리물 같기도 하고, 드래머 같기도 하면서 심지어 코미디 같은 영화다. 잘 만든 까닭에 1941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과 촬영상을 받았다.
아내가 죽은 뒤 외롭게 떠돌던 사내가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만나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 영화 이름으로 나오는 사람(레베카)은 얼굴조차 나오지 않는다.
2. 영국 런던 가까운 곳 콘웰에서 궁전같이 큰 집(맨틀리)에 살던 맥심 드 윈트(로렌스 올리비에)는 아내가 지난 해에 죽고 프랑스 남부 몬테카를로 호텔에 머물고 있다.
어느날 바닷가 벼랑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데, 한 발만 더 내딛으면 아래로 떨어질 판이다. 그 때 어떤 아가씨(조안 폰테인)가 소리친다. "그만두세요. 위험해요" 스케치북을 들고 나타난 아가씨의 그 소리에 놀라 다시 제 정신을 찾는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쉽지 않다. 하늘이 그만 하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목숨을 건지도록 해 준 사람이 밝고 아리따운 아가씨라니...복도 많다.
조금 나이가 든 맥심의 사랑 찾기가 이어진다. 조안은 테니스를 치러 간다고 나간다. 테니스를 치러간 사람이 땀은 하나도 흘리지 않으면서 싱글벙글 하면서 돌아오고... 둘이 드라이브를 즐긴 탓이다.
돈 많은 아저씨와 젊고 밝은 아가씨와의 사랑놀음은 곧 끝이 난다. 조안이 돈 받고 말동무를 해주던 반 하퍼 부인이 딸의 약혼식 때문에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어쩌나...떠나기 싫은 조안은 맥심한테 찾아가서 이제 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맥심도 헤어지기 싫은 건 마찬가지... 곧 조안한테 "하퍼 부인과 뉴욕으로 갈래요? 아니면 나와 맨틀리로 가겠소?" 한다. 조안은 "맨틀리에서 저를 가정부로 쓰시려고요?" 엉뚱하게도 시침을 떼면서 묻는다. ??? 맥심은 어이가 없다. "나와 혼인합시다" 할 수 밖에.
3. 아버지가 지난 해 돌아가시어 외롭던 아가씨는 이제 영국의 큰 집 맨들리의 임자인 맥심의 아내가 되어 드 윈트 부인이 되었다. 신데렐라가 따로 없다.
으리으리한 집에 이르자 집에서 일하는 아랫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다. 스무명씩이나 줄지어 서있자 안주인이지만 "반가워요...잘 부탁해요" 바짝 쫄아서 목소리가 떨린다.
게다가 차가운 얼굴로 싸늘하게 맞아주는 댄버스 부인(주디스 앤더슨)을 보니 기가 죽는다. 댄버스 부인은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이로 죽은 윈트 부인(레베카)을 따라 이 집에 온 터줏대감이다. 그러니 레베카를 좋아해서 새로운 안주인을 괴롭힌다.
너무 넓은 집이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새로온 드 윈트 부인은 한동안 헤맨다. 옆지기와 같이 밥 먹는 상도 마주 앉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길다. 방이 너무 많아 아침 밥 먹고는 어느 곳에서 쉬어야 할지도 모르니 아랫사람들이 가르쳐준다.
저렇게 큰 집에 살면 좋을까? 내가 집에 사는지, 집이 사람들을 데리고 사는지 알기가 어렵다. 아내가 옆지기를 만나러 가는데도 한참 걸리고, 어디서 누가 숨어 있는지도 모르고... 밥은 여기서 먹고, 차는 저기서 마시고, 책이나 신문은 다른 곳에서 보고, 잠은 또 ... 사람은 가까이에서 부대껴야 정이 든다.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 있던 정도 달아날 판이다.
게다가 집은 옛날 안주인인 레베카에 맞춰져 있다. 레베카의 첫 글자 알(R)을 수 놓은 방석이나 옷가지... 안주인이 바뀌었지만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의 흔적을 지우지 않으니, 윈트 부인은 괴롭다.
레베카가 왜 죽었는지 궁금하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냥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다 뒤집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할 뿐...
게다가 옆지기 맥심도 레베카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 싫어한다. 레베카 이야기만 나오면 성이 나고 눈에 힘이 들어가서 윈트 부인은 묻기가 두렵다. 레베카의 사촌인 파벨(조지 샌더스)은 느끼하게 윈트 부인을 쳐다보면서 실실 웃기도 하고...
아니 새로온 나를 반기지 않고, 모두 레베카만 생각하고... 제가 하는 모든 말과 움직임을 레베카와 견주는 듯 해서 윈트 부인의 마음은 편치가 못하다.
4. 도대체 레베카가 어떤 사람이었길래... 댄버스 부인은 드러내놓고 "당신은 레베카의 발뒤꿈치만도 못하니 빨리 이집을 떠나라"고 겁을 준다. 집의 재산을 맡아 챙기는 프랭크(레지날드 데니)는 이제껏 본 사람 가운데 가장 예뻤다고 한다.
이것 참, 나보다 더 예쁘고 더 나은 사람이었다니...내가 설 자리는 그러면 어디야? 죽은 레베카가 산 윈트 부인을 꼼짝도 못하게 하다니... 윈트 부인은 마음이 괴롭다. 이럴 땐 맥심이 달래줘야 하는데, 맥심은 제 생각뿐이다.
누가 어떻게 말하든 이 집의 안주인은 레베카가 아니라 이젠 나야. 내가 실세란 말이야... 윈트 부인은 곧 댄버스 부인을 부른다. "이제부터 레베카가 쓴 물건들은 모두 없애요!" 얼굴에 핏기 없는 댄버스 부인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속으로는 '아니 이 사람이 미쳤나' 하지만 안주인이 시키니 따를 수밖에. "예~"
맨들리에서 오랜만에 가장 무도회를 벌이는데, 바닷가에서 배가 부딪쳐 사고가 난다. 그런데 바다속에서 레베카가 탄 배가 드러난다. 게다가 배에 구멍이 나 있다.
이미 죽었다고 장례를 치른 계집은 그럼 누굴까? 또 배에 구멍이 난 건 무엇 때문일까? 누가 구멍을 내서 레베카를 죽였을까? 아니면 레베카 스스로 구멍을 내고는 배를 탔을까?
이제껏 맥심과 윈트의 사랑 이야기와 시골뜨기 같은 윈트 부인의 맨들리 안주인 되찾기를 보여주다가, 누가 레베카를 죽였나로 눈길이 옮겨간다.
5. 드디어 밝혀지는 일들...레베카의 본디 모습과 그를 둘러싼 이들의 움직임, 날카롭게 반응하는 맥심, 이 모두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윈트 부인...
히치콕 감독이 숨겨둔 뒷모습이 궁금해진다. 맥심과 윈트 부인은 레베카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삶을 살 수 있을는지...
윈트 부인을 사랑하면서도 마음을 다 주지 못한채 어정쩡하게 대하는 맥심을 맡은 로렌스 올리비에나, 시골뜨기 같지만 끝내 당당하게 나서는 윈트 부인 노릇을 한 조안 폰테인의 연기도 나무랄 데가 없다. 아무도 조안 폰테인을 윈트 부인으로 밀지 않았지만, 히치콕 감독의 부인이 혼자 세게 밀어서 맡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제 보면 잘 맡았다.
또 핏기 없는 얼굴로 차갑게 윈트 부인을 대하는 댄버스 부인을 맡은 주디스 앤더슨의 연기는 가장 빛나는 연기을 보여주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오래된 영화이니 흑백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싼 이 디브이디에 뜻밖에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보너스로 넣어 두어 놀랍다.
간만에 히치콕 감독의 영화를 구경해서 좋았다. 언제 보아도 시대를 앞서간 작품은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