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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 리뷰 금오신화는 처음부터 너무나 익숙한 책 제목 이였습니다. 대학 입시를 치르고 난지 얼마 안 된 터라 더 더욱이 익숙했지요. 이생규장전이나 제목만 보고도 읽었던 거라 금방 읽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근데 입시 때와 다르게 빠져들어 읽게 되었다고 할까요. 역시 저도 다른 분들처럼 시부분에서의 공감이 많이 힘들었지만, 인물의 생각이 곁들어있는 시를 몇 번이고 읽으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니 더욱더 금오신화에 빠져들었던 것 같습니다. 고전소설은 그 당시 사회적 배경이라던 지 작가의 당시 상황을 빼놓고 읽을 수가 없죠. 다행히 입시 때 외운 것도 기억이 났고, 김시습에 관한 글이 올라와 책을 읽는데 어려움은 크게 없었습니다. 뜻풀이가 된 여러 인물들 하나하나 읽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 보는 이름들도 많았고 역사에 대한 지식도 크게 없는지라.. 이 기회를 통해 조금 더 우리나라 고전소설부터 시작하여 중국의 역사소설도 맛볼 계획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배경에 대한 지식과 조금의 노력만 있다면 우리나라의 고전소설을 더욱더 사랑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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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만 멋스럽고 고풍스럽고 환상적이고 엘레강스하며 패러독스한 고전만 있는게 아니다. 우리 고전에도 이런 작품이 있었으니 학창시절 김시습하면 금오신화, 금오신화하면 김시습만 외웠지 사실 정작 '금오신화'를 읽어보지는 못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자 한문소설인 금오신화 그의 생애와 이력도 정리했지만 생애 중반이후 1470년 즈음에 금와산에 들어가 도 닦으며 세상을 향해 외친 그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 어떤 내용이고 어떻게 전해졌을까? 우선은 <금오신화>의 이본(異本)은 현재 8종(조선 목판본 1종, 일본 목판본 4종, 필사본 3종)이 남아 있다. 그종 조선 목판본이 1종이 중국 대련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조선 명종때 문인이었던 윤춘년(尹春年, 1514~1567)이 편집한 것으로 김시습이 죽은지 오십 년쯤 지나 출간된 것이다. 특히 8종의 이본들 가운데서 윤춘년이 편집한 이 조선 목판본은 가장 먼저 출간되었고, 가장 좋은 이본으로 인정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펭클'에서 나온판은 바로 이 조선 목판본을 완역한 작품으로 그 소개를 하면 이렇다. 먼저, 금오신화는 하나의 이야기로 되어 있지 않고 총 5개의 옴니버스식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의 세가지는 남녀간의 운우지정을 다루었고, 뒤의 두편은 염라왕, 용왕님과 세상사 돌아가는 토킹 어바웃 이야기다. ㅎ 주인공들도 다 생(生)자 돌림으로 순서대로 양생, 이생, 홍생, 박생, 한생이다. 간단히 줄거리는 이렇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소제는 '저포놀이가 맺어준 사랑'이다. 저포가 무엇이냐면 주사위 같은 것으로 나무로 만들어 던져서 그 끗수로 승부를 겨루는 놀이로, 지금의 윷놀이와 비슷하다. 여기 주인공 고독한 남성 문사 '양생'이 부처님 앞에서 저포놀이로 해서 얻은 여인네와 운우지정을 다룬 이야기로 양생의 절대 고독과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이계를 넘나드는 모습이 마치 불후의 러브 영화 '사랑과 영혼'같은 스타일로 비극적 결말의 사랑의 아픔을 잘 이야기하고 있다.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소제는 '이생이 엿본 사랑'이다. 제목처럼 또다른 고독한 남성 문사인 '이생'이 아름다운 최씨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행복한 결혼생활은 고려말 전쟁으로 무참히 깨지며 아내와 가족을 잃고 혼자 남게된 이생이 귀신으로 다시 나타난 최씨와 못다 이룬 운우지정을 나누며 사라진다는 이야기다. 대신 여기서 이생은 앞에 양생과는 다르게 소극적인 반면에 여주인공 최씨는 사랑에 적극적이지만 홍건적의 위협앞에서 저항하는 정절 의식도 보인다.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소제는 '부벽정에서의 짧은 만남'이다. 여기서도 고독한 남성 주인공 '홍생'이 부벽루에서 기씨녀를 만나 함께 엄청난 시문을 주고받으며 정서적 공감을 얻는 이야기다. 그 공감은 바로 기씨녀는 위만에게 나라를 잃은 기자(箕子)의 딸로 나라가 망한뒤 자살하려다 선계로 인도되어 항아의 시녀가 된 인물이고 홍생도 고려말 개성 상인으로 둘다 망국의 비애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쉽게 정서적으로 교우하며 고국의 흥망에 대한 회고의 정을 진하게 담은 이야기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소제는 '염마왕과의 대화'다. 유학을 공부하는 '박생'이라는 문사가 꿈에 남염부주를 다녀오는 이야기다. 즉, 꿈속에서 이계를 다녀오는 몽유록적 양식을 띄며 문답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염라왕과 귀신, 천당과 지옥, 윤회, 정치까지 철학적인 문제부터 현실 정치까지 서로 토킹 어바웃한 이야기다. 그래서 여기서는 시문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김시습의 현실 인식 태도를 보이며 그의 사상이 집약적으로 잘 표현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소제는 '물거품처럼 사라진 용궁 잔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역시 남성 문사 '한생'이 꿈속에서 용왕님 초대로 용궁에 가서 용왕님과 한바탕 즐겁게 노닐다 왔다는 이야기다. 즉, 문사답게 시문도 써주고 또 주고받고 유쾌하게 노래와 춤추고 잔치도 하며 즐겼다는 이야기로 앞에 <남염부주지>와 비슷하지만 대신 여기서는 유일하게 웃음이 배어있다. 하지만, 한생이 꿈에서 깬 뒤에는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않고 자취를 감추는 것으로 되어 있어 웃음 뒤의 비애를 남겼다. 이렇게 김시습의 한문 습작인 <금오신화>는 총 다섯편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모두 다 그의 세상에 대한 부조리와 비타협적인 성정답게 현식 인식이 짙게 배어 있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고독한 남성 문사들을 중심으로 그리며 그들이 처한 결핍과 부재의 상황이 부각됐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모두 고독하고 부정적인 현실의 도피를 꿈꾸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 김시습의 정치적 좌절에서 비롯된 또 현실 인식의 발호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앞의 세편은 애정 전기소설(傳奇小說)의 형식을 띄며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남녀간의 사랑을 환상적으로 초현실적으로 그리며 때로는 판타지스럽고 형이상학적인 몽환적 분위기를 전달해 주었다. 그런 분위기는 바로 각 편마다 넘쳐나는 시문과 산문의 조화속에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미학적 기반을 둔 메세지적 작품이라는 점이다. 물론 남성 문사의 의리를 중시하고,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도 모두 김시습의 현실 인식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이다. 그리고, 뒤의 두편인 <남염부주지>와 <용궁부연록>은 두 주인공 박생과 한생을 통해서 소외와 고독의 감정은 더욱더 문학적으로 형상화되며 염라왕과 용왕님과의 대화속에서 세상에 대한 외침이 바로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바로 그의 비극적 현실 의식의 발호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막연히 비극적이라 할 수 없는게 시문과 산문이 적절히 조합된 미학적 분위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때로는 고리타분함을 안겨줄 수 있지만 멋스럽고 고풍스런 맛은 분명히 주고 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오백여 년전 그가 쓴 작품을 이렇게라도 대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지 않은가.. 수험식으로 무슨 작품이 있다 외우지 말고.. 그의 작품을 진중하게 함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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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움의 이상 -김시습 ‘금오신화’- 귀신과 산다 '금오신화'의 이야기들은 낯익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분위기가 풍긴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듣고 전래동화로 읽은 이야기지만 우리와는 분명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귀신과 인간이 서로 혼례를 올릴 수 있다거나 염마왕이나 용왕의 초대를 받아 이세계로 구경을 간다는 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자칫하면 터무니없는 판타지로 읽힐 수도 있다. 과학과 논리가 모든 사실의 판단 기준이 되는 현대에는 더욱 그렇다. 또한 이 설화에서 나오는 그 누구도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신화'들에서는 사실 삶과 죽음의 세계를 긋는 선이 불분명하다. 분명 이승과 저승을 갈라 놓고 있으나 인간이 마음을 먹거나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그 사이를 넘나들 수 있게 되어 있다. 가령 이생규장전에서 이생의 아내 최씨가 죽은 후에도 이생을 위해 그의 곁에 머물다가 '저승'으로 넘어간다거나 남염부주지에서 박생이 염마왕을 만나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가지 않는가. 이는 이승과 저승의 선이 불분명하다는 것을 단순한 혼란으로 파악하는 대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서술자의 태도를 보여준다. 우리가 생각하는 귀신의 이미지는 피 한줄기를 입술에 물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귀신이다. 두려움, 그 자체다. 허나 이 소설 속 인물들은 귀신을 '귀신이 아닌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밝혀진다 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처한다. 그 이유인즉슨 이 '귀신'과 우리가 아는 귀신은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사나운 기운과 요망한 도깨비가 사람을 해치고 사물을 미혹되게 하는데 이것도 귀신이라 할 수 있습니까?" 왕이 말했다. "귀라는 것은 구부러짐이요, 신이란 것은 폄이오. 굽혔다 펴는 것은 조화의 신이요, 굽혔다가 펴지 못하는 것은 답답하게 맺힌 요귀라오. 신은 조화에 합치하기 때문에 시종일관 음양과 함께 하나 자취가 없고, 요귀는 답답하게 맺혀 있기 때문에 원망을 품고 사람과 동물에 뒤섞여 형체를 가지고 되는 것이오. 산의 요귀를 '소'라 하고, 물의 요귀를 '역'이라 하고, 수석의 요귀를 '용망상'이라 하고, 목석의 요귀를 '기망량'이라 하고, 만물을 해치는 것을 '려'라 하고, 만물을 괴롭히는 것을 '마'라 하고, 만물에 붙어 있는 것을 '요'라 하고, 만물을 현혹하는 것을 '매'라 하니 이 모두가 요귀들이오. '음양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신이라 하니' 이것이 바로 신이오. 신이란 묘한 쓰임을 말하고 귀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오. 하늘과 사람이 하나의 이이고 드러난 것과 은미한 것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으니,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정'이라 하고 천명을 회복하는 것을 상이라 하오. 시종일관 조화를 이루나 그 조화의 자취를 알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도라는 것이오. 그런 까닭에 '귀신의 덕은 성대하도다!'라고 한 것이오. -남염부주지 78p 귀신과 요귀는 분명 다르다. 오히려 우리가 아는 귀신은 요귀에 가까운 편이다. 흥미로운 점은 요귀는 분명 '기망량'이나 '려' 등, 구체적인 뜻과 이름이 있는 반면 귀신에게는 구체적인 뜻과 이름 없이 그저 '조화를 이루나 그 조화의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는 앞에서 말한 '이승과 저승 사이의 모호한 선'과 같다. 결국 귀신은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존재다. 만약 이 '존재'가 두려워진다면, 그건 어떤 순간일까? 서양의 일화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귀신' 중 가장 유명하다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는 아버지의 귀신이 나온다. 아버지 귀신은 그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다. 허나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은 위협을 느끼며 두려워한다. 유령이 말을 거는 건 오로지 '햄릿', 그의 아들 뿐이다. 아버지 귀신은 햄릿을 응원해주거나 힘을 북돋워주기 위해 나온 게 아니다. 오히려 햄릿이 '두려워하는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끔 한다. 사실 햄릿이 언제든 눈을 감고 평생 '의심하기만 하는' 상태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 허나 귀신의 존재로 인해 햄릿은 그가 외면하고자 했던 '진실'에 대해, 외면하려 했던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햄릿이 제대로 '복수해야 한다'는 책임감-죄책감을 극복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다. 이처럼 귀신은 사실 '죄'를 짓지 않는 이상, 그 자신이 어떤 '죄책감'을 가지는 순간 두려운 존재가 된다. '금오신화'의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의 경우 귀신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두 인물 다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의 일화에서 나오는 귀신처럼 우리 나라의 귀신들 또한 '역설적으로'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진실'을 보여준다. 허나 그 '진실'은 두렵거나 끔찍하지 않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 '진실'은 더 강력하다. 그래서 '금오신화'의 이야기들은 '착한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끝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우물 안에서만 사는 한 개구리가 있다고 치자. 그 개구리는 우물 밖으로는 나가본 적이 없다. 그리고 우물 안에 사는 다른 개구리보다 훨씬 더 크기가 크고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게다가 우물 벽과 구석에 대해 다 알고 있다. 그러면 그 개구리는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실수로 인해 우물 '밖'으로 나가게 되거나 '밖'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깨닫는 순간 그 개구리는 최고로 불행한 개구리가 되고 만다. 자신이 최고인 줄로만 알았고 자신이 아는 세상만이 제대로 '알만한 것'이라고 여겼건만, 여태껏 그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외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취유부벽정기'의 홍생은 부자이며 시를 잘 읊고 여자들도 그를 졸졸 따라다닌다. 가진 게 많은 만큼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가 월궁항아의 시녀이자 과거 은나라의 후예를 만나게 되자 그는 '현실'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그가 제일 나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홍생은 그 만남 이후 행복해지기는 커녕, 그전과 다르게 불행해진다. 그는 모든 것에 권태를 느끼며 방 안에서 뒹굴거릴 뿐이다. '남염부주지'의 박생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연구하는 '승려'와 교우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든 '선'을 세우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가 '저승'에 내려가서 염마왕에게 모든 '답'을 들은 이후, 그는 더 이상 어떤 '탐구'를 하지 않게 된다. '용궁부연록'의 한생 또한 마찬가지로 용왕의 부탁을 받아 용궁에 온다. 그는 수많은 문장가들이 있다는 것을 보고, 또 용궁에 놀라운 것이 많다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야명주' 같은 용궁의 보물을 선사받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름다운 것'을 만나 행복했으나, 그 뒤에는 여지없이 불행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많은 것을 보고 접한 만큼 그들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물리적'으로는 닿지 않을 '이상', '아름다움'은 그들을 좌절시킨다. '아름다움'과 극반대라고 볼 수 있는 극적인 '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극단적인 것'의 끝을 보게 되는 순간, 인간은 그 '이미지'에 사로잡히게 된다. 일종의 '죽음 충동'인 것이다. 홍생의 경우 그는 '그가 잡을 수 없는' 여인을,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문장가를 만났다는 것을, 박생의 경우 그가 그렇게 원했던 '악인에게 공정한 처벌'과 '질서'가 어느 한 곳에서는 규칙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한생의 경우 평생 둘러봐도 다 둘러볼 수 없을만큼 많고 진귀한 보물들의 일부를 보았다는 것을 그 '충동'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는 그들이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라 갑자기 그들 앞에 딱 등장한 '완성품'이다. 김시습은 이 '금오신화'의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이 '완성품'에 대해 쓰면서도 그는 그런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세계를 꿈꾸는 순간 현실에 얼마나 염증을 느끼는지를 토로했다. 이는 그의 행동에 대한 변명이자 대대적인 입장 발표나 다름없다. 그는 그런 '이상적인 세계'가 그에게 주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홍생과 박생과 한생들은 결국 '죽거나' '속세에서 떠난다'. 김시습 또한 속세에서 벗어난 산 중턱에서 이 글을 썼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이상'이 실현되었기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니다. 그는 홍생이나 박생, 한생들처럼 떠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에 한탄을 하기도 한다. 김시습은 마치 '햄릿'처럼 '이상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이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 그 이상을 죽여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과연 어떤 것이 타당한 것인가? 하지만그는 결국 그 '염증'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그 이상적인 세계를 실현해 나가고자 한다. '금오신화'를 통해, 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그는 그 자신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기담 '금오신화'에는 두세편 정도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허나 그 사랑하는 연인들을 다룬 이야기에서 여성의 이름-성씨라도 나온 건-고작 한 편에 불과하다. 다른 이야기들의 경우 남성의 성씨만 나오고 여자는 '여자'라고만 불리곤 했다. 다른 여자들이 나올 때면 헷갈리지 않도록 다른 여성의 성씨를 알려주곤 한다. 하지만 그래도 남성의 상대역인, 조연 여성들보다는 비중이 높은 여자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이를 두고 유교적 사상에 입각한 김시습의 편협한 여성관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유교적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허나 '이상'이란, 본래 현실과는 다르고 당장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어떻게든 다가가고자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진정한 이상주의자에게 '이상'이란, 평생토록 올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 '이상'이란 추상적인 것으로, 오아시스의 신기루와 같다. '금오신화'의 '여자' 또한 추상적인 존재다. '여자'는 여자로서의 덕목을 갖춘, 김시습에게는 이상적인 여자다. 반면 남성의 경우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이생규장전'에서 이생은 아무리 사랑하는 현재가 아름답더라도 후에 어떤 액운이 따라 붙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물론 늘 좋은 일만이 있을 수는 없다. 좋은 일이 있다면 나쁜 일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현재 그들의 상황에서 '미래의 액운'을 걱정하는 순간, 현재의 행복은 색이 바래 버리고 만다. 여자는 이를 알고 그를 꾸짖는다. 여자는 철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분간'을 하는 대신, 현재의 행복이 날아가기 쉬운 만큼 지금은 그걸 즐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그녀의 세상에서는 모든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경계란 없고, 그녀는 오로지 현재, 현재에만 집중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태도'야말로 사실 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축'이다. 이생이 이어서 읊조리기를, 뒷날 우리 사랑이 새 나가면 비바람 무정하게 불어닥치리니 또한 가련치 않은가 하니 여자가 얼굴빛이 변하며 말했다. “저는 그대와 더불어 부부가 되어 영원토록 기쁨을 누리려고 하는데 낭군은 어쩌면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제가 비록 여자라도 마음이 태연한데 장부의 의기로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신단 말입니까? 뒷날 규중의 일이 새 나가서 부모님께서 저를 꾸짖고 책망하시면 제가 감당하지요. 항아는 방에 술과 과일을 차리도록 해라.” -이생규장전. 32-33p 그로 인해 이 '금오신화'에서 초현실적인 존재로 나오는 이들의 대부분은 여자거나 염마왕, 용왕 등의 전설 속 인물들이다. 염마왕이나 용왕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읽어오던 전래 이야기나 설화 등에서 어느 정도 캐릭터가 잡혔지만 여자의 경우 캐릭터보다는 그냥 '초현실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온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들은 '초현실적인' 귀신에 속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혼 결혼식이나 다름없는 '만복사저포기' 또한 그렇다. 과거에는 이 이야기가 사랑 이야기였다. 허나 현대의 '만복사저포기'는 어떠한가. 한국 영화 '기담'은 사실 로맨스 영화다. 다른 로맨스 영화와 다른 점은 바로 '영혼', 귀신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이 '만복사저포기'와 비슷하다고 할 만한 인물들을 볼 수 있다. 한 의사 견습생이 죽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영혼 결혼식'을 하며, 여자와 '환상' 속에서 관계를 갖고 아이를 가지며 산다. 그 순간은 길 것 같았으나 실은 우라시마 타로의 이야기처럼 짧은 '순간'일 뿐이었다. 의사 견습생은 그 꿈이 끝나는 순간, 자신이 혼자 있다는 차가운 현실을 깨닫게 되며 머리카락 일부분이 하얗게 세어버린 것을 본다. '꿈'이지만, '꿈'이 아니라는 증거가 나타난 것이다. '만복사저포기'에서도 양생은 여자와 함께 '며칠'을 보낸다. 그는 한없이 행복해하지만 결국에는 그 곳을 떠나야만 한다. 그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는 대신 주발을 받게 된다. 그 뒤로도 두 남자들은 귀신, 여자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영화 속 의사 견습생은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지만 다들 죽고, 결국 홀로 남게 된다. 여기서 왠지 소름이 끼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그건 '귀신' 탓이 아닐수도 있다. 그는 귀신에게 그렇게 말한다. 왜 이때껏 자신을 혼자 두었느냐고. 원망하듯이 말하는 어조에서, 사실 그 또한 양생처럼 여자를 '귀신'이 아니라 여자로,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복사저포기'에서 여자는 결국 남자로 환생해 '윤회의 아이러니'로, 양생과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기담'의 의사 견습생은 결국 그 '귀신'과 마주함으로써, 끝내 만나게 된다. 어떻게 본다면 '기담'의 엔딩이야말로 해피 엔딩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담'은 '사랑과 영혼'이 되지 못했다. 현대에서는 '귀신과의 사랑'이 로맨틱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과 영혼'도 사실은 육체적인 사랑이 영혼의 사랑으로 이어진 것이니 온전한 '귀신과의 사랑'이라고는 볼 수 없다. 현대에서는 '분명하고 또렷한 것',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안전한 것'이다. 하지만 '추상적이거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 앞에서는 두려워하며 입을 다문다. 오답이 인정되지 않고 객관성을 중시하는 만큼, 자칫하면 정신병자로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영혼과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는 '기담'은 과거의 '금오신화'와 달리, 기이한 이야기로서 '괴담'이 되어 버린다. '금오신화'를 현대화하여 영화로 제작한다면 아마 이 '기담'이 나올 것이다. 총 세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 이 영화에서는 '금오신화'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인물들이 일하는 병원이 정전이 된다. 그로 인해 병원 안 사람들은 촛불을 켠다.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만, 왠지 어두운 가운데 조금 음산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평온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촛불을 나눠 받으면서 미소를 짓는다. 그 순간 그들은 일제 강점도 괴로움도 모두 잊어버린 것 같다. 그들을 억누르던 모든 경계는 사라지고 삶과 죽음, 선과 악이 뒤섞이고 현실과 비현실이 함께 어둠 속에서 녹아내린다. 빛나는 건 오로지 사람들의 '얼굴' 뿐이다. 그 어둠 속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그 사람이 죽었든 살았든 간에-서로가 '곁'에 있다는 것만을,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가슴 속에 조그만 '꿈', '이상'이나 '좌절'을 품고 있다는 것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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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려면 약간의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김시습, <금오신화> 이 소설을 읽을 독자들은 500년의 시간을 건너뛸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일종의 다리가 필요한데, 그것을 위해 책 뒤에 있는 작품해설을 먼저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물론 자신만의 방법으로 읽어보고 싶다면 책의 첫 장부터 읽어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금오신화>가 우리나라의 첫 소설이라는 소개 때문에 기대를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무엇이나 그렇듯 처음 것은 언제나 나중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한 이야기꾼이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금오신화>에는 총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다섯 편의 특징을 하나로 규정하라면 ‘환상’이다. 그 환상을 통해 주인공은 귀신이 된 여자를 만나기도 하며(만복사저포기) 용궁으로 초대받기도 하며(용궁부연록) 염라대왕을 만나기도 한다(남염부주지). 이러한 환상은 당시 귀신이나 용궁, 염라대왕이 그들에게 익숙한 개념이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귀신에 대한 김시습의 정의는 이러하다. “귀(鬼)란 것은 음의 정기요, 신(神)이란 것은 양의 정기니 대게 조화의 자취요, 음양 이기의 타고난 능력이오. 살아 잇을 때는 인물이라 하고 죽었을 때는 귀신이라 하나 그 이치는 다르지 않소.”(77) 즉 귀신은 인간이 죽은 다음에 되는 다른 형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매월당은 왜 이렇게 귀신과 환상에 집착했을까. 여러나라의 문학사를 보면 대개 환상은 현실의 도피처로 이용된다. 현실에서 거절되고 거부당한 욕망이 환상 속의 무언가로 변모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욕망이 꿈을 통해 드러난다고 했는데, 꿈속의 어떤 사건은 모두 자기욕망의 전위인 셈이다. 프로이트의 설명을 빌려보면 왜 옛 작품에서 꿈속의 환상이 자주 들어나는지 추측가능하다. 꿈은 유일한 환상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환상의 이유를 김시습의 삶과 연관지어 생각해보자. 그는 생육신의 한사람 이었다. 옛임금에 대한 충성 때문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재야를 떠돌아야 했던 외인이다. 그의 현실은 불행했을 것이고, 탈출구는 글을 짓거나 꿈을 꾸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이런 해석이 지루하다면 단지 김시습이 환상과 귀신을 좋아했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할 것이다.
환상에 대해 이야기 했으니 이제 매월당이 그려내는 여성에 대해 애기해보고 싶다. 그는 전체 작품 5편 중 3편에서 여자와의 사랑을 다룬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자는 모두 1. 이미 귀신이거나 2. 곧 귀신이 되버린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빠지면 귀신이 되어서 까지도 열렬히 그를 사랑한다. 이러한 여성상은 당시 유교적 여성상을 드러내는 것 같다.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그런 여성상 말이다. 그리고 ‘귀신’이라는 형태를 통해 있지만 없는 것의 존재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사실 우리가 <금오신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는 ‘사랑’이라는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지금 아는 사랑, 즉 서양의 러브LOVE는 근대화 이후 수입된 단어다. 이전까지 있던 사랑과 관련하여 연(戀), 정(情), 애(愛) 같은 단어가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서양의 LOVE에 해당하는 개념이었다. 그래서 초기 신소설에서는 ‘~를 사랑한다.’ 대신 ‘~를 러브한다.’라는 표현이 등장하곤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금오신화>의 사랑을 읽을 때 지금의 연애관을 기대하는 것은 다소 무리일 수도 있겠다.
<금오신화>의 다른 특징은 작품 속에 시구가 많다는 점이다. 시구는 주로 인물들의 마음상태를 표현한다. 시가 일종의 소통수단으로써 작동하는 셈이다. 작품집에 실린 시를 읽으면서 다양한 상황에 맞게 여러 편의 시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작가의 착상에 놀라웠다. 그리고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두목! 당신에게 할 말이 아주 많소. 사람을 당신만큼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쌓이고 쌓였지만 내 혀로는 안 돼요. 춤으로 보여 드리지. 자, 갑시다!”(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강조는 인용자) 조르바가 춤으로 표현했던 것처럼 김시습에게 시도 이런 역할이 아니었을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소설을 읽을 독자는 시간과 공간을 건너갈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지금의 소설들과 조금은 다른 형식으로 이야기가 구성되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약간의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이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됐다면, 500년 전 이야기꾼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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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고전중에서도 고전이라고 불릴 수 있는 단테의 신곡이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지금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유치하여 요즈음의 말로 손발이 오글거리는 것만 같은 설정이나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이 작품을 내가 왜 읽고 있어야 하는지, 단지 유명하다는 이유에서 읽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종종 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작품들이 그토록 유명한 이유는 다루고 있는 주제의 영원함과 동시에 그 시대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작품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들 잘 알다시피 단테의 신곡은 후에 이탈리아어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아직까지도 이탈리아 문학의 정수라는 표현을 듣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역시 지금도 공연되고 있으며 서양의 유명한 작품들 가운데 셰익스피어 희극의 대사를 차용하는 작품들이 부지기수인 것을 보면 충분히 고전이라는 이름아래 우리가 볼 가치가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고 셰익스피어를 읽을 때 우리는 꼭 한가지를 빠뜨린다. 다들 예상하고 있으리라. 한국의 고전들. 우리는 한국의 고전들에 대하여 중,고등학교 시절에 잠깐 본 것이 전부이면서도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혹은 그 이상은 읽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혹은 어렵다는 이유로, 서양의 고전들만 탐닉하며 지적 허영심을 채우고 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흔히 인간관계에서 더욱 친한 사람에게 더욱 못되게 구는 것과 같은 인지상정의 마음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익히 들어왔고 보아왔던 것이니깐, 꼭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는 않았더라도, 교과서를 통해, 언어영역 문제집을 통해, 방송을 통해 너무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들이니깐.
결국 이런저런 이유들로 우리는 한국의 예전, 고전작품들에 대해 너무도 인색하다. 물론 나 또한 그렇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은연중에 홍길동전과 데카메론이 앞에 놓여있는다면 데카메론에 손이 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한들 이거 하나만 알아두고 넘어가자. 우리의 홍길동전이 결코 데카메론에 뒤지지는 않는다는 것. 우리가 데카메론을 집는 것은 매일 먹는 쌀보다는 가끔 나가서 외식하는 것에 더 끌리기 때문이라는 것. 꼭! 이것만은 생각하면서 데카메론을 집더라도 집어야 한다는 것.
금오신화역시 그와 궤를 같이한다. 1400년대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이라는 의미를 갖는 작품. 우리가 이 금오신화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면 우리는 이미 그 내용들을 거의 다 알고 있다. 우리는 대입을 준비하면서 금오신화 5가지 이야기중에 최소 한, 두 가지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전부이든 일부이든 모두 접해보았다. 이것만으로 어디인가. 그래서 교육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물론 그 교육이 요새는 국사를 선택으로 가르치고, 근현대사따위는 신경도 안쓰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만. 세상 어느나라가 자신의 역사를 선택으로 가르치고 시험치르게 한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가 이걸 다 알고 있다고 해도, 단순히 시험을 위한 읽기와 작품으로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과 해석은 또 얼마나 다를것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이 작품을 한번 진지하게 읽어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 나름의 한시의 생소한 느낌과 그 이야기의 익숙한 느낌이 교차하는 가운데 묘한 매력이 솟아난다.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전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의 다섯가지 이야기는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와 현실에 대한 비판을 우회적으로 담은 이야기의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앞의 두 이야기는 이승과 저승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뒤의 두 작품은 김시습이 현세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설 속으로 가지고 와서 시원하게 퍼붓고 있다. 또한 그 와중에 생육신의 한사람이었던 작가 김시습의 모습이 이곳 저곳에서 곳곳이 드러난다. 특히 현실세계에 대한 비판을 담은 [남염부주지]와 [용궁부연록]뿐 아니라 이승과 저승의 사랑을 담은 [만복사 저포기]와 [이생규장전]역시 이미 숨을 거둔 단종에 대한 김시습의 충정어린 모습과 교묘하게 겹쳐나간다. 마치 단테의 신곡을 읽다보면 드러나는 단테의 정치적 탄압에 대한 호소와 그 느낌이 비슷하다. 다만 자신과 단종의 이야기를 남여의 사랑에 비유한, 아니면 그저 남여간의 사랑이야기로 볼 수 있게 표현해놓은 김시습의 작품이 너무 직접적으로 그 자신의 상황을 드러낸 신곡에 비해서 그 문학적 성취와 재미면에서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네 작품에서 이러한 부분들을 야금야금 찾아낼수록 이런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크게 상관이 있어보이지 않는 [취유부벽정기]가 더욱 재미있고 신선하게게 느껴진다. [취유부벽정기]는 홍생이라는 부자가 부벽정이라는 정자에 오른 후에 겪는 기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홍생은 부벽정에 올라 그 정취와 한탄에 취해 시를 읊다가 기씨여인을 만나고 함께 밤새 시를 읊으며 정을 나눈다. 밤이 지나자 여인은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그를 못잊은 홍생과 여인이 서로 만나기 위해 홍생의 목숨이 다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오로지 이야기로써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데에서 더욱 주목할만하다. 우리가 흔히 옛 작품들을 공부하면서 늘상 나타나는 안빈낙도, 무위자연, 충정과 절의 등의 주제가 아닌, 오로지 재미를 위한 이야기를 전한다는 측면에서(물론 김시습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만 다른 작품에 비해 그렇다는 거다) 다섯가지 작품 중 가장 소설로써의, 이야기로써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나 싶다.
물론 취유부벽정기를 비롯한 다섯가지 작품이 이야기로써의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발단과 전개에서 절정으로 넘어가기보다는 바로 결말로 넘어가는 듯한 느낌의 이야기들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마치 허무개그와 같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 또한 이야기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한시도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는 극의 진행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한시가 이 금오신화에게 또다른 엄청난 매력을 선사한다. 운문문학에서 산문문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금오신화는 그 이야기의 절반 이상이 한시로 나타난다. 특히 이생규장전이나 만복사저포기에서 서로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거의 대부분 한시에 의해 등장인물들의 생각이 표현된다. 이것은 소설이라는 측면에서는 많은 부분 점수를 깎아내릴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작품이라는 부분에서는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로 나타난다. 노래와 이야기의 결합. 마치 뮤지컬영화를 보는듯한, 셰익스피어의 잘 쓴 희곡을 보는듯한 느낌을 우리는 한시와 이야기의 조화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내고 흥취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우리가 금오신화를 언어영역 문제집에서 끌어내어 하나의 작품으로 찬찬히 볼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금오신화는 분명 지금 읽기에 엄청난 재미를 선사하고 흥미진진해지는 작품은 아니다. 단순히 문학을 재미있기 위해 읽는 사람이라면 굳이 금오신화를 읽을 필요는 없다. 아니 동서양의 고전 자체를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고전이라는 것에 관심이 가는 사람들. 단테의 신곡에서 재미를 느끼고 셰익스피어의 이야기에서 현재를 보는 사람들, '읽고있다' 뿐 아니라 '읽었다'에도 재미와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이라면 단테의 신곡과, 로빈슨 크루소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리어왕 가운데에 금오신화와 홍길동전, 구운몽도 그 사이사이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기를 바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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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김시습저) : 금오산(경북경주)에서 지은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최초의 한문 단편소설집. 생육신의 한 사람이며 수양대군이 자행한 단종의 왕위찬탈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했으며 승려가 되었고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라고 위키피디아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런 환경과 상황에서 현실을 마주보고 제대로 설 수 있었을까? 현실을 부정하고 유토피아에서 본인의 뜻을 펴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리라.........반향으로 금오신화라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이생규장전 : 아름받고도 슬픈 이생의 사랑 이야기 *만복사저포기 : 이승과 저승을 넘나는 영생의 기구한 이야기 *취유부젹정기 : 홍생이 사랑한 선녀와의 하룻밤 이야기 *남영부주기 : 염라대왕이 된 박생의 지옥 이야기 *용궁부연록 : 용궁을 다녀온 한생의 신기한 이야기 읽으면서 내내 염세적인 느낌을 계속 받았고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달콤한 설탕물이기에 몸에 해롭지만 먹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세속적욕망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천상세계의 새로운 정보(그것이 사실이듯 아니듯)도 참 흥미로웠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옛날 김시습선생의 삶과 요즘세상의 삶을 비교해보기도 한다. 요즘 사람들이 똑똑하다고 하나 생각하는 힘과 깊이는 옛날 김시습 어른에 비하면 부족함은 사실일것 같다. 여하튼 금오신화~~~재미있게 읽었고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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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아마도 초중고 교과서 중 어딘가에서 들어보았던 기억만이 남는 그렇고 그런 책이었다. 알고는 있지만 읽으려 하지 않는... 전혀 관심도 없이 단지 암기를 위해서 알고만 있을 뿐이고 기억에 여전히 남겨져 있을 뿐인... 그런 책이었다.
이런 저런 책들을 뒤지던 중 우연히 눈에 들어온 ‘금오신화’는 생각보다 얇은 부피의 책이었고, 그렇기 때문인지 제목을 알고 있는 책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읽어보게 되었는데, 고전소설(이런 식의 표현이 적합한지는 의문스럽지만)에 대한 관심은 항상 컸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궁금함이 있어서 읽게 되었고, 생각보다는 읽는 재미를 느끼게 될 수 있었다.
5편의 단편이 모아진 ‘금오신화’는 엇비슷한 내용들도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현실세계에서 사후세계 혹은 현실과는 다른 영역으로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이야기 구성으로 이뤄져 있고, 그 과정과 상황 속에서 주인공이 겪게 되는 이야기 속에서 여러 흥미로운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쩐지 그런 의미에서는 나카자와 신이치가 언급한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이 떠올려지기도 했는데, 현실세계에서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오간다는 것이 무척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한 것 같다는 점에서 작품해설에서의 김시습-‘금오신화’에 대한 분석과 많이 겹쳐지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다.
이야기와 함께 (마치 희곡에서의 합창이나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시가 함께 꾸며져 있어서 글자 그대로 고전의 느낌이 많이 풍기고 있는데, 남녀 간의 애달픈 사랑도 있고, 전란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비극적으로 이별을 해야만 하는 상황도 있는 등 현실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사실들을 함께 관련지으며 좀 더 현실성을 혹은 역사성과 지역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있다.
고전 문학에 대한 이해나 지식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저 읽고 읽어내기만 할 뿐이지만, 때때로 정치적이거나 그 시대의 사고구조를 엿보게 되는 순간들도 있어서 조금 더 흥미를 끌게 되기도 했다.
함께 수록된 작품해설을 통해서 그와 관련된 내용들을 많이 알아낼 수 있기도 해서, 단순히 교과서에서 언급된 소설을 실제로 읽어본다는 호기심도 채울 수 있었지만, 고전을 읽으며 과거의 삶의 모습들과 고민들 그리고 웃음기 가득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좀 더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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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선생님 말씀에 열심히 고개숙이고 밑줄을 그으며 봤던 금오신화는 온데간데 없고 다소 억지(?)가 섞여있긴하지만 찬찬히 읽었던 금오신화는 여러모로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지금봐도 후끈한 원나잇 스탠드(!?) 내용에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제가 인생의 과업을 앞두고 신혼집을 얻고 조금씩 차려가면서 눈에 유난히 띄었던 것은 <용궁부연록>이었답니다.
용왕에게 외동딸이 있는데 시집을 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집이 누추해서 사위를 맞이하고 화촉을 밝힐 방이 없네요. 그래서 '가회각'이라는 누각을 짓고 샹량문을 지어줄 고려의 한생이라는 사람을 모셔옵니다. 부탁받은 한생은 이런 글을 씁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이 집을 지어 화촉을 밝히는 새벽에 만복이 모두 이르고 하늘의 상서로움이 모두 모여들어 구슬 궁궐, 옥궁전에 상서로운 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오르고 봉황 금침에선 즐거운 소리 솟구쳐 나와 그 덕을 드러내고 그 신령을 빛나게 하소서."-p.93
참으로 부럽더군요. 이런 글을 받는 용왕의 딸은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요. 수십, 수백만원의 돈보다 이렇게 정성어린 마음이 담긴 글을 받는 부부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누군가에게 나의 행복을 빌어주는 글을 받는 꿈, 또한 제가 누군가의 행복을 기원하는 글을 써주는 꿈을 꿔봅니다. 용왕의 유쾌한 잔치만큼이나 노래와 춤으로 흥겨운 잔치를 열어드릴수 있는데.. 혹시 멋진 글 써주실 분 계신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