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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964년 겨울>
1964년의 서울의 겨울이 2015년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온갖 고층건물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웠지만, 한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은 맞아주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맞아 아프게 춥게 하는.. 서울의 겨울.. 내가 매년 참으로 두려워하는.. 그 겨울.
p.24 "뭘 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내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 후에 다시 고개를 들고 마치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외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돈 4,000원을 주더군요. 난 두 분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도 세브란스 병원 울타리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아내가 누워 있을 시체실을 있는 건물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만 어딘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울타리 곁에 앉아서 병원의 큰 굴뚝에서 나오는 희끄무레한 연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이 해부 실습하느라고 톱으로 머리를 가르고 칼로 배를 째고 한다는데, 정말 그러겠지요?"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환이 다쿠앙과 양파가 담긴 접시를 갖다 놓고 나갔다. "기분 나쁜 얘길 해서 미안합니다. 다만 누구에게라도 얘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만 의논해 보고 싶은데,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오늘 저녁에 다 써 버리고 싶은데요."
<무진기행>
무진의 명산물은 '안개'다. 그리고 그 안개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평소에는 하지 않던 엉뚱한 생각들을 하게 만든다. 무진은 주인공에게 도망치는 곳이면서 새로이 시작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 무진은 짙은 안개로 뿌옇게 싸여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이는 곳이다. "세상엔 착한 사람이 있을까?"라는 주인공의 말에 인숙은, "절 나무라시는 거죠? 착하게 보아 주려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도 찾지 않을 거예요." 라고 했다. 인숙의 그 말이 무진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뿌옇게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보아야 하는 진실보다는 내가 보고자하는 사실만 보려고 하는, 그런 느낌..
p.58 여선생은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조금만 달싹거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세무서 직원들이 손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선생은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있었다. <어떤 개인 날>과 <목포의 눈물> 사이에는 얼만큼의 유사성이 있을까? 무엇이 저 아리아들로써 길들여진 성대에서 유행가를 나오게 하고 있을까? 그 여자가 부르는 <목포의 눈물>에는 작부들이 부르는 그것에서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꺾임이 없었고, 대체로 유행가를 살려 주는 목소리의 갈라짐이 없었고, 흔히 유행가가 내용으로 하는 청승맞음이 없었다. 그 여자의 <목포의 눈물>은 이미 유행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비부인> 중의 아리아는 더욱 아니었다. 그 양식은 유행가가 내용으로 하는 청승맞음과는 다른 좀 더 무자비한 청승맞음을 포함하고 있었고, <어떤 개인 날>의 그 절규보다도 훨씬 높은 옥타브의 절규를 포함하고 있었고, 그 양식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의 냉소가 스며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체가 썩어 가는 듯한 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 있었다.
<역사力士>
"어느 쪽이 틀려 있었을까요?" "내가 틀려 있었을까요?" … 틀린 것은 없다. 다만 다를 뿐이다. 그냥 그 다름을 인정하면 그뿐인데, 그게 어려운 것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옹고집. 그 할아버지나 그 젊은이나.. 그 옹고집 덩어리일 뿐이다.
p.104 그 집-그날 많은 얼굴들이 살던 그 집에서 나는 나 자신 속에서 꿈틀거리는 안주에의 동경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헤어날 길 없는 생활 속에 내가 휩쓸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곳을 뚝 떠나서 이 한결같은 곡이 한결같은 악기로 연주되는 집에 오자 그것은 견디어낼 수 없는 권태와 이 집에 대한 혐오증으로 형체를 바꾸는 것이었다. 나란 놈은 아마 알 수 없는 놈인가 보다.
<환상수첩>
'이 수기 속에서는 나에 대한 얘기도 잠깐 나오지만, 그리고 나를 퍽 증오하고 있는 태도로 쓰고 있지만 …'을 읽을 때부터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때까지도 나는 화자가 오영빈일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윤수가 죽기 전까지는.. 영빈이거나 윤수겠지.. 그리 생각했었는데, 둘다 아니었다. 선애가 자살을 하고, 윤수가 맞아 죽고, 서커스단의 이씨가 떨어져 죽고, 형기도 어쩌면.. 바다에 빠져 죽었을 지도 모르는.. 또 주인공마저 자살을 해버린,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의 뒷 이야기가 궁금했다. 수영과 진영, 미아.. 어차피 그도 언젠가 한 줌의 재가 되겠지만서도 그 사이의 이야기가 궁금해져버렸다. 그들의 남은 삶은 어떠했을까? 선애의 말처럼, '어쩐지 뻥 뚫린 구멍을 보아 버린 것 같아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별수없이 눈에 보이는 구멍이지요. 찬바람이 술술 새어 들어오고…' 그런 찬바람이 불어오는 뻥 뚫린 구멍 같지 않았을까??
p.118 나는 오랫동안 나의 표정 없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하향한다는 기쁨도, 그렇다고 불안도 없었다. 늙어 버린 원숭이 한 마리가 어둠 속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일 뿐이었다. 새벽이 오면 습관에 따라 열매를 따러 나가겠다는 듯이 지극이 무관심한 표정. 그러자 괴롭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내부를 저런 무관심한 표정으로 가려 버리는 법을 지난 몇 년 동안 서울에서 나는 마스터한 것이었다. 되도록 무관심한 척 하라. 할 수 있으면 쌀쌀하게 웃기까지 하여라. 그제야 적은 당황한다. 제군, 표정을 거두어라. 그리고 오직 하나 무관심한 표정만을 남겨라. 그게 됐으면 자, 이번에는 거부하는 몸짓으로 쌀쌀하게 웃을 차례다. 하나, 둘, 셋.
p.136 오십. 남의 아버지들 같으면 국장님도 되고 영감님도 될 나이지만 생활력은 조금치도 없었다. 그렇다고 신경질도 피우는 법 없이 마치 남의 인생을 공짜로 얻어서 살아 주는 것처럼 유유했다. 그러나 때때로 술이 들어가는 날이면 나와 지금은 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내 동생을 꿇어앉혀 놓고, "이놈들아, 내가 왜 너희들을 만든 줄 아느냐? 하, 이놈들, 외로워서 그랬다. 내가 외로워서 그랬어. 뭐, 너희들 이 알뜰한 세상 구경시키려고 만든 것이 아니고 그저 심심하고 외로워서…… 암. 날 좀 이해해 줄 놈들을 만들고 싶어서 그랬지. 그나저나 하여튼 미안하다. 고생시켜서 미안해. 미안하니까, 에 또, 가서 공부해." 이런 식으로 한마디씩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p.173 집을 나설 때 대문 밖에까지 배웅을 나온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두 분은 분명히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 어쩌면 지난날의 자신들을 향하여 응원의 주먹을 휘두르는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아버지 편이 말이다. 이제 와서 나는 꼼짝달싹할 수 없음을 느꼈다. 애쓰다가 애쓰다가 안 되면 그만이다라던 얼마 전까지의 내 생각은 수정받아야 했다. 이제는 애쓰다가 애쓰다가 안 되면 아니 그렇지만 기어코 해내어야만 되었다. 저 덜컥거리던 야행 열차의 유리창에 비추인 나의 무표정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세상이 내미는 모든 것을 고분고분히 받아들이자던 나의 약속을-뒤집어 보면 그러한 나의 생각엔 일종의 비웃음이 섞여 있었지만-이제는 어쩔 수 없이 실천해야만 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너의 이른바 고뇌라는 것에서는 젖비린내가 난다'고 하며 웃어 버릴지라도 아버지와 어머니만은 나만큼, 아니 나보다도 더 절실하게 나의 번민을 앓아 주고 있는 것이니 그런 분들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분들이 나더러 저 범속凡俗한 사람들 틈에 끼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이야기를 읽은 순서 탓일까? 나는 어쩐지 이 이야기의 오누이가 바로 앞에 읽었던 <환상수첩>에서의 수영과 진영 같았다. 그냥, 그랬다. 분명 다른 인물 임을 알려주는 이야기들을 나열하는데도 내 눈 앞에 폐병쟁이 수영과 '오빠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던 진영이 아른거렸다. 가엾은 두 오누이가 그렇게 자꾸 아른거렸다.
p.202 하나에서 열까지 동정할 데라고는 한 군데도 찾을 수가 없어서 좀 가엾다고나 할까. 어지간히 살고는 싶은 것인지 급작스러운 죽음을 당할 경우에 대비해서 품속에 늘 유서를 품고 다닌다. 딴은 그 유서가 한번 보고 싶기도 하다. 거기에만은 다소 진실에 가까운 얘기가 쓰여 있을는지.
<서울의 달빛 0章>
때로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냥 곁에 있게만 해주어도 그저 고마운 사람이 있다. 주인공에게 영숙이 그랬다. 그런 영숙이었기에 주인공은 영숙의 매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랑하지만 안을 수 없고, 헤어지자니 그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그리워지는 사람.. 그랬던 주인공과 영숙은 결국 헤어졌다. 400만원이 든 통장은 그 둘의 한 가닥 희망마저 툭, 끊어버리고 말았다.
p.254 또한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음부란 물론 그 자체로서 소중한 것이긴 하지만 아내와는 아무런 관련이 있을 수 없는 독립된 생명체라는 것을. 음부는 아내가 아니었다. 다만 아내가 내 곁에 있을 때 항상 데리고 있면 충분한 그 무엇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항상 내 곁에 있었던가? 그렇다. 아내는 나를 속이면서까지 항상 내 곁에 있으려고 했었다. 이제 나는 물체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중요한 것은 '있다'는 것이다. 의혹과 질투의 고통은 '있지 않다'는 것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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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바가 너무 컸던 탓일까.. 생각보다는 별로였다.. 국어 참고서 마냥 과도한 낱말 해석 역시 몰입을 방해 하는데 한몫 하고 있었다.. 교과서에 싣리고 청소년 권장 소설이라 그런건가 이해 해 보려 했지만.. 물론 그 중에 요즘 애들은 모르겠구나 싶은 단어들도 '더러' 는 있었지만, 해설 달린 단어들의 태반이 우리나라 청소년이 이런 낱말들의 뜻 조차 모른다고 생각하니 암담하고 다리에 힘이 척 풀리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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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964년 겨울 무진기행 외 김승옥 지음 하서
오사카 출신의 김승옥(1941~ )의 『무진기행』에서의 무진은 작가가 성장한 고향으로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몇 년 전에 순천만을 가보기 위해 KTX를 타고 순천에 다녀왔다. 다만 며칠 머물렀던 것으로 순천을 어떻게 파악했을까? 사실 기상학적으로 순천은 안개가 많이 끼는 도시는 아니라고 한다. 소설 속에서 무진은 특산물도 없고 수심이 얕아서 항구가 될 조건도 갖추지 못한 척박한 어촌으로 그려지지만, 여행을 통해서 만났던 순천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쌀쌀한 계절의 맛을 제대로 살린 아름다운 곳이었다. 몇 년 전,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를 영화하 한 영화 <도가니>를 보고 나와서는 그 배경이 되는 무진이 어디쯤일까? 싶어서 인터넷에서 검색을 했던 기억이 스믈스믈 떠 올랐다. 도가니에서의 무진은 실제사건이 벌어졌던 광주광역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는 광주광역시의 옛 명칭 중에 하나가 무진으로 공지영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나온 무진을 오마주한것이라고 밝혔다. 소설 안에서도 무진시가 민주화의 메카였다며 광주임을 암시하기도 했다. 무진기행의 무진은 현실과는 다른 몽환적인 공간으로 그려진 것에 비해서 도가니의 무진은 더욱 잔혹한 현실을 목격한 공간으로 표현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무진은 자욱한 안개로 덮여있는 포구 도시로 그려졌다. 다만, 실제 촬영은 여수와 진주 그리고 서울 등지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새삼스레 무진을 떠올린 이유는 며칠 전에 읽은 이상문학상 2011년 수상작인 공지영의 『맨발로 글목을 돌다』에서 이 책을 언급하고 있기에 읽을 생각을 했다. 이 책을 대출한 것을 보고 큰 딸은 엄마의 취향이 아닌 것 같은데, 새삼스럽다고 한다. 돈많은 과부와 결혼해서 신분 상승한 '나', 윤희중과 '나'의 후배이자 국어 선생인 '박', 고등고시에 패스해서 세무서장에 된 중학 동창 '조', 음악 선생인 하인숙 등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각각 개성있는 성격을 갖고 있다. 주변에서 만날 수도 있는 성격을 가진 이 들 중에서 나는 누구와 흡사한 인성을 갖고 있을까? 누군가를 그저 성으로만 지칭하는 방법이 왠지 어색하고 고루한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시대 배경이 1960년대 초반으로 보여지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서울 1964년 겨울 』을 표제로 하고 있는 단편집이기에 ,「서울 1964년 겨울 」, 「무진기행 」, 「역사 」,「환상수첩 」,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서울의 달빛 0장 」의 작품을 함께 수록하고 있지만, 표제작은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는데다가 오늘은 그저 「무진기행」에 집중해서 흠뻑 젖어볼란다. 그래도 물론 비교적 짧은 「서울의 달빛 0장 」은 읽었다는 것~ 2015.9.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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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소설 <서울, 1964년 겨울 外> 김승옥, 하서, 2009
김승옥은 <무진기행>으로 지금도 사랑받는 작가다. <서울, 1964년 겨울>로 등단한 지 5년 만에 10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그의 나이 겨우 25살 때였다. 물론 지금도 김애란과 같은 전도유망한 젊은 작가들이 있지만, 우연히 읽게 된 이 작품을 통해서 젊은 작가 김승옥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당시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황순원, 여석기, 안수길, 선우휘, 김성한)은 이 연소 작가를 극찬했다.
끝 2011.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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