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라얀의 베토벤 전집은 하나 정돈 마련할 수 밖에 없다. 밋밋하다느니 조작이 심하다느니 제멋대로라는 혹평도 많이 받지만, 카라얀의 음반은 바로크 시대를 제외하면 어느 것이든 '안전빵'이어서이다. 물론 카라얀의 해석을 절대적이라거나 교범이라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의 풍성한 저력을 최고의 음질로 즐기고 싶다면, 카라얀의 음반은 "한가지 해석"으로서 무방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은가 ? 확실히 푸르트뱅글러와 비교하면 그의 연주는 "영혼"을 느끼기 힘들다. 그러나 그 '울리는 소리'만큼은 음악을 세공하고 연마하고자 하였던 집념이 강하다. 해석의 문제야 그렇다 쳐도,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어지는 그의 레코딩 수준은 곧 그라모폰 시대의 서양고전음악 발전사와 궤를 같이 하지 않을까 ? 15년동안 자신을 얼음에 묻어두고싶었다고까지 했다는데 부활해서 모든 레퍼토리를 레이저 디스크로 담고 싶어서라고 한다. (* 정말 실현되었다면 그는 디브이디의 황제로서 군림했을지도 모른다) 음질이 좋지만 해석이 민둥산이고 박력이 떨어지는 노년기 시절 80년대 전집보다는 '장년기'의 기백과 정력이 살아 숨쉬면서 베를린필을 미처 장악하지 못했던 60년대 전집이 추천된다. 하지만 카라얀 마니아들은 70년대 전집을 귀가 닳아라 받들었다. 특히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의 연주만큼은 카라얀의 70년대 녹음이 푸르트뱅글러의 바이로이트 실황에 필적한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으니 말이다. 그 말을 믿고 거금을 투자해서 구입한 70년대 전집‥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스피커로 울리는 소리'만큼은 소장품으로서는 으뜸이다. 특히 그간 카라얀의 단점으로 여겨졌던 기름기가 거의 없는, '역동적이면서 탐미적인' - 한마디로 원숙한 중년부인과 데이트하는 기분이다. 카라얀이 베를린필을 거의 장악했단 것은 확실하며, 기존의 두껍고 거칠었던 오케스트라의 음색은 상당히 세련되게 변하였으며 어떤 부분에선 요염해지기까지했다. 카라얀이 도달하고자하였던 그 진공 속의 소리, 즉 카라얀 사운드까지의 중간단계인데 확실히 연주가 '무르익었다'라는 느낌이 강하다. 단 미모의 중년부인이라도 젊은 처녀의 새침함이 아쉬운 것마냥 중간중간에 강조되어야할 주제가 평평하게 연주되었다는 것, 그리고 음질로 보면 잔향이 잘 잡혀있어 공간감이 느껴지나 리마스터링이 되어있지 않아 교향곡 감상의 최고 백미인 절정 속의 짜릿함이 희귀하다는 것‥ 그렇다면 전집 평가는 이 정도로 하고, 각 교향곡 별로 해석을 들어보면 ? - 베토벤의 특징, 즉 절정이 극대화된 홀수 교향곡 시리즈는 전체가 최상급은 아니어도 명연의 반열에 든다. 특히 교향곡 9번 '합창'의 강인하고 탄력적인 연주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어찌보면 푸르트뱅글러의 동곡 바이로이트 연주보다도 뛰어나지 않을지‥ 하지만 교향곡 3번, 5번, 7번의 해석은 폄훼하긴 어려어도 최고라 치기는 어렵다. 다소 선동적이며 드라마틱한 작품들에 비하면, 그 연주는 섬세히 대상을 묘사하고 소리를 명징하게 울리는 데에서 머무르기 때문이다. (* 그래서 텁텁한 음색에 극단까지 치닫는 푸르트뱅글러의 전시녹음 앞에 대적할 스타일은 역시 정격연주 밖에는‥) 하지만 그런 유채화적인 특성은 교향곡 6번 '전원', 묘사적 특징이 강한 작품에서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아울러 교향곡 2중대라 말할 수 있는 코리올란 서곡이나 피델리오 서곡 등의 연주도 참신한 매력으로서 들려온다. 이렇게 보자면 베토벤 교향곡의 웅장한 실현 면에서는 여러가지 아쉬움이 남을지라도, 그 오케스트라적 구현은 풍광 좋은 곳의 생생한 영상처럼 계속 들을 수록 즐거워진다. 약음은 더욱 여리게 포옹하고 강음은 더욱 강하게 폭발하는 연주‥ 그만큼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잘 조련했단 증거가 아니겠는가. (* 참고로 푸르트뱅글러러 시기의 베를린 필과 너무나 소리가 다르다) 이런 바탕 하에서 말러와 브루크너,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 등의 레퍼토리에서 길이 남을 명반을 남기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런 단계에서 그가 걸어갔던 길이 나르시시즘적인 퇴보였단 것은 아이러니다.(* 마이더스 같은 카라얀 골드 상표를 보시라.) 말년이 가까워질수록 곡 해석은 진공 속의 절대음 실현이라는 집착, 그리고 영상물에서도 자신만을 끊임없이 비추는 도취로서 접어들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우니까 말이다. 결론적으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이 70년대가 마지막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