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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시에 출근하고 오후 다섯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 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시까지 책을 읽는 것’이 꿈이었던 남자.
이 책은 그러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전업 작가가 된 장정일이 읽은 책들에 대한 기록이다.
1994년부터 <장정일의 독서일기>라는 형식으로 엮어내고 있는데 현재 6권까지 출간했다.
장정일은 ‘내가 한 권의 낯선 책을 읽는 행위는 곧 한 권의 새로운 책을 쓰는 일’이며, '다른 책들로 길을 인도해주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말한다. 책 읽는 사람들이 한 번씩은 되새겨볼 만한 말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자유분방하고 솔직해서 좋다.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이 흘러가는대로 써내려간 느낌이다. 어떤 책은 몇 페이지에 걸쳐 소개되는 반면, 어떤 책은 단 몇 줄로 설명된다. 또 어떤 책은 책 전체에 대한 감상인 반면, 어떤 책은 그 책 일부분에 대한 감상을 적어놓았다.
때때로 장정일은 공지영, 신경숙, 구효서, 윤대녕 등 동료 기성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비판한다. 특히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작가 중 한 명인 공지영에 대한 비판이 눈에 띈다.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오문과 악문으로 가득한 책.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형식적인 전략이 전혀 배려되지 않는 엉터리 페미니즘 소설. 노회한 김수현이 도리어 ’언니‘라고 불러야 할 만큼 닳고 닳은 상투’ (p. 19)
반면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대해서는 '소설로 씌어질 수 있는 온갖 형태의 주제와 기법이 모두 담겨 있는 소설’ (p. 58)이라고 극찬한다.
<장정일의 독서일기1>에는 음란 시비로 법정에 섰던 마광수와 그의 작품에 대한 견해도 들어있다. 그는 당시 이 사건에서 피고측 법정 감정증인으로 위촉됐었다. 이후 1997년 장정일 자신도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는 소설로 인해 마찬가지 혐의로 법정에 서야 했기 때문에 마광수에 대한 견해는 그 자신에 대한 견해로도 읽혀 흥미롭다.
장정일은 마광수가 우리를 ‘즐거운 혼란’에 빠뜨린다 (p. 59)고 말한다. '문학은 대도무문이 있더라도 그것을 거부하며, 다수결은 더더욱 증오' (p. 59)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념과 철학이 붕괴된 시대에 솔직성은 새로운 세계를 준비하는 빛과 소금’ (p. 175)이라며 섹스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가진 마광수의 시도를 옹호한다.
장정일에게 책읽기는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그에게 독후감은 일기와 같다. 그래서 '독서일기'라는 용어가 이 책에 무척이나 어울린다.
장정일은 우리 문학계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다. 그에게서는 비주류의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 문학을 거의 독학하다시피 공부했다. 시로 시작해 희곡, 소설 등 다양한 쟝르를 넘나들었으며 한때 재즈에 심취하기도 했다. '민중문학', '리얼리즘'이 대세이던 80년대, 90년대를 거친 그에게서는 비주류임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장정일은 한마디로 표현될 수 없는 작가다. 나는 그의 그런 '이도 저도 아닌' 취향이 좋다. 그게 사람이 누구 눈치보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쓰고 행동할때 나오는 자연스런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1989년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통해 장정일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가 바라보는 세상과 그가 사용하는 언어에 깊이 공감했었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고 노래로도 만들어졌던 '샴푸의 요정' 같은 시도 이 시집에 들어있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한 시는 '시집'이다.
90년대 중반에 읽었던 그의 작품 선집에서 그가 '한국이여 나를 놓아다오’라고 외쳤던 구절은 내 가슴 속에 깊이 들어와 아직도 박혀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이란 지역적인 경계선이라기 보다 심리적인 경계선일 것이다. 지식인이면 으례 민족과 통일을 논해야만 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장정일과 같은 상상력을 가진 작가가 받았을 고통은 짐작이 가고 남음이 있다. 요즘 김영하 같은 작가를 보면 한국을 탈출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장정일이 시인으로 남았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는 다양한 시도를 계속해왔고 '급기야' <삼국지>를 쓰기도 하고, 얼마전까지 KBS 'TV, 책을 말하다' 를 진행하기도 했다. 부디 이것이 필화사건으로 인해 그의 상상력이 침해되었기 때문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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